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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책들은 말이 없었다. 그토록 오래된 제 보금자리를 떠나, 고물상으로 흘러가게 될 생을 맞이하게 되었음에도. 그들은 슬프거나 아쉬운 내색 없이 마지막으로 타오르는 형광등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이해한다는 듯 그들의 몸을 노란 노끈으로 싸맸다. 그리고 가게 한구석으로 그들을 차곡차곡 옮겨놓았다. 헌책방을 운영하는 오늘이 마지막 날. 그 마지막 날까지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다섯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만큼 없었다. 아이를 데리고 온 젊은 부부는 오래된 책들 특유의 퀴퀴한 곰팡이 냄새에 금방 이 곳을 떴고, 교재를 사러 온 수험생은 90년대의 풀다 만 교재를 뒤적이다 새 교재는 없냐는 질문과 함께 금세 사라졌다. 그런 헌책방을 매입한다는 사람 역시 있을 리 없었다. 나나 그들이나 이젠 더 이상 일말의 기대를 포기하기로 했다. 나는 시계를 쳐다보았다. 시곗바늘은 느리게 부유했다. 적막은 감각을 천천히 지워내곤 했다. 시간이 한참 지난 것 같은데, 아직 가게 문을 닫기까지 4시간이나 남은 채였다. 나는 말없이 텔레비전을 켜고, 남은 책을 싸매기 시작한다.

 

 얼마나 지났을까, 출입문에서 차임벨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단발머리를 한 여자가 천천히 가게 안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텔레비전에서 ‘속보 입니다’ 하며 다다다 내뱉는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여자는 손가락으로 헌책들을 슥 훑으며 지나갔다. 먼지가 쓸려간 자리에는 깨끗한 선 한 가닥이 남았다. 마지막 날이라도 청소는 했어야 했던 걸까 하는 생각을 하는 사이, 여자는 아직 정리하지 않은 책장을 천천히 톺아보기 시작했다. 나는 흘끔 여자를 쳐다보았다. 여자의 손에는 책 몇 권이 들려있었다. 그리고 들고 있던 책을 넘기면서 읽기 시작했는데,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느 정도 두께가 있는 책들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여자는 계산을 하려는 듯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그녀를 가로막듯 말한다. 그냥 가져가요. 내 말에 그녀는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에요, 어차피 다 버릴 거여서 필요한 거 있으면 그냥 가져가요. 나는 다시 고개를 돌리고 책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나는 다시 옆을 바라본다. 그녀는 옆에서 우두커니 멍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왜…? 그게 그녀의 첫마디였다.

 

 동네의 모든 이야기가 모이는 책방의 주인임에도, 나는 손님들과 이야기를 잘 나누지 않았다. 그녀가 우리 가게의 단골이었다는 것을 밝혔을 때, 그 몇 안 되는 손님을 받으면서도 나는 얼마나 미지근한 온도로 사람들을 대했던 건지.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 단골손님은 이 헌책방에 들어와서 무작정 책 몇 권을 집어든 다음, 펼쳐보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새 책들만 모여 있는 서점들과 다르게 이곳에는 별 책들이 다 모인다고. 인근 학교 학생들의 서투른 감정을 엮어낸 첫 문집부터, 이름 모를 사람의 일기장과 누군가의 소중한 편지가 적혀 있는 시집, 언제나 초판밖에 찍혀본 적 없는 이웃들의 동네 월간지까지. 누군가에겐 헌 폐지, 누군가에겐 소중한 추억일 이야기 사이를 엿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했다. 이 헌책들은 끊임없이 저에게 무슨 말을 해주고 싶은 것 같아요. 그렇잖아요. 언제나 누군가 손을 뻗어 읽어주기 전까지는 조용히 있다가,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한테 천천히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잖아요. 그래서 전 헌책방이 좋아요. 아직 다 하지 못한 이야기가 남은 듯이 여기서 누군가를 다들 기다리고 있는 거잖아요. 손님은 너무 흥분했다고 생각했는지 갑자기 입을 닫아 버렸다. 우리 둘 사이의 어색한 기류를 텔레비전 소리가 겨우 이어주고 있었다.

 

 시곗바늘이 다시 느리게 부유했다. 손님은 잠시 머뭇거리는 것 같더니,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 이번에 이사 가게 되었어요. 이 동네를 떠날 거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도 고시… 떨어졌거든요. 더 이상 붙잡고 있는 것도 불효인 것 같아, 내려가서 부모님 농사나 도와드리려고요. 이거, 앞으로 수험준비 하는 학생 있으면 나눠주실 수 있으신가요? 책값은 미리 제가 치를게요. 손님은 들고 있던 책들을 내려놓곤, 그대로 가게를 벗어났다. 나는 그 책을 펼쳐보았다. 형광펜 밑줄로 가득한 그 책을, 나는 조심스럽게 다른 책들 위에 올려놓았다.

 

 나는 가게 셔터를 내리면서 골목을 바라봤다. 꺼질 줄 모르는 동네의 빛들이 사방에 가득 펼쳐져 있었다. 다들 저마다 깜빡깜빡, 이야기 하듯 오므라들며. 나는 뒤돌아 헌책방을 바라봤다. 아직 못다한 이야기들이 그곳에 남아 있었다. 오늘 밤은 어쩐지 느리게 흘러갈 것만 같은, 그런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