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는 멸망했다.

그게 우리가 아는 확실한 정보였다.

시작은 사실 어이없기 짝이 없는 것으로부터였다.


'허졉♡ 아무고토 못하고 뒤져버릴 ㅈ밥♡'


대층 이런 정신나간 문자였었나.

이런 게 전 세계인의 문자로 보내졌던 일이었다.

당연히 다들 이 일을 누가 장난한거라고 생각하고 넘겼고, 곧 이 일은 기억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우리는 그때 알았어야 했다.

이 문자가 사실은 그 무엇보다도 끔찍한 재앙을 몰고 올 것이라는 걸.


그 다음에는 조금 평범하지만, 이상한 일들이 시작되었다.

어느 도시에서는 사람들이 다같이 감기로 드러누웠고, 어느 나라는 갑자기 시중의 화폐가 몽땅 사라져버렸댔다.

그리고 내가 사는 도시의 테마는 '사고' 였다.


무슨 사고든지 상관없었다.

교통사고? 안 될 리가 없다.

살인? 방화? 강간? 절도? 당연히 됐다.

그야말로 온갖 '사고'의 탈을 쓴 '범죄'들이 난무했다.


사람들은 하나하나씩 죽어나갔고, 그 과정에서 살아남은 건 운이 좋았던 나와 몇몇 사람뿐이었다.

그러자 사건은 어느정도 일단락되어가기 시작했다.


동시다발적으로 미친듯이 일어나던 사고의 수가 갑자기 없어져버렸고,

들리는 바에 의하면 다른 곳들도 점점 이 괴현상들로부터 멀쩡해졌다는 소식이 알음알음 돌아다녔다.

하지만 역시 우리는 너무나도 어리석었다.


그렇게 근 1달이 지난 때였다.

나와 일부 생존자들은 다른 도시로 가 삶을 이어나갔고, 일상이 다시 돌아오는 것 같았다.

그런 뉴스가 들려오기 전까지.


[속보입니다. 현재 서울시에 좀비가 갑작스레 나타난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이 좀비들은...]

[러시아 모스크바에 상당한 크기의 운석이 충돌했다는 속보입니다. 현재 충돌의 여파로 폭풍이 주면 지대를 부수고 있...]

[다시 속보입니다. 영국 런던에 거대한 식인 거인 7명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현재 추정 사망자는...]


일상은 개뿔.

마치 우리를 농락하는 것처럼 재앙은 다시 한번 우리를 찾아왔다.

심지어는 그 강도가 전과는 차원이 달랐다.

지난번에는 위험하긴 했어도 어느 정도는 버텨볼만 했다고나 할까.

하지만 이번엔 아니었다.


좀비, 식인 거인, 운석충돌.

이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재앙은 계속되었다.

화산폭발, 지형 붕괴, 쓰나미같은 자연재해부터 유령, 흡혈귀, 반쯤 미친 살인기계 등등.

이미 한번의 재앙을 겪었던 인류가 맞붙기에는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


덕분에 다시 한번 세상은 개박살이 났다.

전 인류의 70% 정도가 살아남았던 전과 다르게, 이번에는 무려 기존 생존자의 5%만이 살아남았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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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우리도 한때는 생각했었다.

빌어먹을. 다시는 이 일기를 쓰고싶지 않았는데.


어쨌든, ㅈ같게도 또 한번 재앙...아니, 멸망이 시작되었다.

이건 시발 각설이도 아니고 잊을만하면 튀어오는지 모르겠다.


이번 멸망의 주제는 '판타지'였다.

말 그대로 판타지. 그런 류의 것들이 현실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시작은 상큼하게 고블린이나 오크부터였다.

사람들은 이미 이런 류에 익숙했고, 우리는 힘을 합쳐 그놈들을 막아냈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아니었다.

용, 거인, 신화 속에나 등장하는 정신나간 괴수들.

솔로몬이 봉인했다던 72명의 악마들과 신마저 먹는다는 늑대 펜리르 같은 것들.

성경에 등장하는 묵시록의 붉은 용이나 4기사도 나왔고, 게임이나 영화에서 나오던 괴수들도 당연히 튀어나왔었다.


유희왕 애니에서나 보던 '궁극의 푸른 눈의 백룡'이 도시를 불태워버렸고,

죠죠에 나오던 '메이드 인 헤븐'은 아예 특정 구역 자체를 시간가속으로 말려 죽였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히드라'와 '미노타우르스'가 사람들을 벌레처럼 짓밟았고,

심지어는 마블의 그 정신나간 보라색 빡빡이도 와서는 인구의 절반을 없애기도 했다.

아, 트랜스포머랑 가오가이거 같은 애들도 있었다. 가면라이더나 파워레인저 쪽도 있었고.


이거 말고도 '고질라'나 '퍼시픽 림', '조커' 같은 유명한 빌런이란 빌런은 전부 왔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일부는 살아남았다.

남을 버리고 아득바득 살아가면서 겨우겨우 말이다.

그렇게 남은 인원들이 약 천 명 남짓.

그나마 안전한 곳에서 잠시 쉬고 있을 때였다.


이쯤 되면 슬슬 뇌절같을 정도였다.

전에는 유명 창작물 속 빌런들이더니, 아예 이번에는 '신'이 강림해버렸다.

제우스, 비슈누, 옥황상제, 라, 등등...


그러고는 우리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지들끼리 싸움을 시작했다.

물론 당연히 그 여파로 우리가 다 뒤져나갔고.

이제 남은 건 나 혼자다.

시간이 더 흘러 이제는 '크툴루'나 '크투가' 같은 놈들이 거리를 태연하게 걷고 있는 게 일상이 되어버렸다.

나조차도 얼마 전부터는 점점 미쳐가는 듯 한 느낌이었다.

그걸 증명하듯 전부터 갑작스레 잠이 미친듯이 밀려오곤 했었다.

한참 전부터 스트레스로 불면증이 온 게 사실이었음에도.

하지만 그럼에도 잘 수 없는 게 현실이기에, 나는 항상 악으로 버텨오곤 했, 는데......












삐-----------------------------------------.


병원 환자실에 달린 모니터에서 특유의 삐 소리가 울려퍼졌다.

핏빛으로 물들어버린 가운을 입은 사람 두명이 한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또 한명 죽었네. 이번엔 뭐래냐?"


"판타지물이던데요. 괴물들 나오고 신도 나오고. 거의 그냥 막장드라마급 인생을 살아가던데."


"또 판타지였어? 시발. 어떻게 된게 여기 생명체들은 대가리에 든게 판타지나 성인물밖에 없냐. 좀 참신한 건 없디?"


"있었음 이러고 있겠습니까."


"에휴, 그래. 그렇겠지. 그냥 이렇게 된거 조금만 조작하면 안되나?'


"형 그러다가 저번에 차원멸망주도위원회였나? 거기서 징계먹었으면서. 원칙상 얘들이 지닌 잠재의식에 맞게 '멸망'을 만드는게 일이잖아요."


"그건 아는데 이새끼들 꿈이 다 진부하잖아. 요즘 애들은 어째 신선한 게 없어. 난 일단 딴 구역 순찰하고 온다. 또 누구 죽으면 말해놓고."


"당연하죠."


차원멸망관리부 말단 직원인 ■ 는  오늘도 언제나처럼 한숨을 쉬었다.

항상 하는 일이지만 참 지루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살아가는 생명체들의 세계가 일정 엔트로피 수치를 넘어가면 와서 이런 식으로 애들을 다시 엔트로피로 환원시키고, 다시 다른 곳으로 가 이짓거릴 반복한다.

그조차도 말단이라지만 거의 수천년간 이 일을 해온 상황.

안그래도 지루한데 이곳 생명체들은 저 선배 말처럼 재미없기 짝이 없었다.


어떻게 된게 꾸는 꿈이 하나같이 '판타지' 아님 성인물이다.

하나 걸러 하나 수준으로 좀비나 괴물이 나오고,

잠잠한가 싶으면 성행위만 뒤지게 해대다가 복상사로 뒈져버리는 새끼들이 수십만이다.


그렇게 생각하던 도중.


삐-------------------


또다시 누군가가 공허로 돌아갔다.

그는 항상 그랬듯, 무기질적인 태도로 시체를 처리하고는 관리부 차트에 정리했다.

오늘도 생명체들은 죽어나가고, 그는 언제나처럼 일을 이어나갈 것이다.


영원히.

영원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