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을 머금고 오늘도 (上)

빨간머리 앤 다시쓰기

 

온다던 버스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버스도착 안내기기에 적힌 ‘남은 시간 5분’은 5분이 지나도 여전히 5분이었다. 남자는 아까부터 담배가 고팠지만 곧 버스를 타겠거니 싶어 꾹 참고 있었다. 버스가 올 방향에 있는 저 너머 사거리에 신호가 다시 한번 더 바뀌고, 우회전으로 꺾어 들어왔어야 하는 그 버스가 또 나타나지 않자, 결국 그는 참지 못하고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담배와 라이터를 꺼냈다.

 

꺼내는 품에 담뱃갑이 가벼워 불안했는데 아니나다를까 돛대였다. 대구 시내 한복판에서 담배 살 곳 하나 없겠나 싶어도 마지막 한 개비인데 싶어 잠시 망설이다 남자는 불을 댕겼다. 한 모금 크게 들이켰다 하늘을 비스듬히 올려보며 시원하게 연기를 내뿜는데, 익숙한 대형 차량의 엔진 소리가 가까워졌다. 언뜻 고개를 돌리니 기다리던 버스가 코 앞이었다. 억울한 마음에 버스 안내기기를 다시 쳐다봐도 남은 시간은 5분이었다.

 

이미 들이닥친 버스에 쓰레기통 찾을 정신머리도 없어 서둘러 한 모금 깊게 빨고는 아까운 장초를 보도블록에 대충 발로 비벼 껐다. 속주머니를 더듬어 지갑을 집으며 남자는 버스를 타려는 짧은 대열에 다가섰다. 연기를 내쉬려고 보니, 뒤에서 자기가 다가오는 기척에 고개를 돌린 앞사람과 눈이 마주쳐서, 남자는 앞사람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옆으로 돌려 조심스럽게 연기를 내쉬었다.

 

한참 늦게 온 버스답게 버스 안은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빈자리가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서 있는 승객도 몹시 많아 앞사람이 사람의 숲을 가르고 지나가면 그 숲이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오기 전에 서둘러 앞사람에게 따라붙어 버스 뒤편으로 들어가는 식이었다. 그렇게 비집고 들어가 버스 뒷바퀴 근처 창가 자리에 서고 나니, 과연 햇살이 과연 봄날이었다. 온기가 몸에 스며들어 장례식장에 있다 나온 탓에 굳어 있던 몸이 스르르 풀리는 것을 실감했다.

 

긴장이 풀려 남자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후우 내쉬는데, 아까 남자가 줄 설 때 앞사람으로 서 있던 그 여자가 갑자기,

 

“날씨 좋네요.”

 

“날씨 좋군요.”

 

외국에서 지낼 때, 이런 좋은 날씨에는 딱히 아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햇살이 좋다며 인사 삼아 말하고 짧은 대화를 나누곤 도로 갈 길 가는 아주머니나 할머니를 여러 번 봤기에, 남자 역시 여자의 뜬금없는 인사에 억지로 웃음기를 가볍게 머금고 능숙하게 화답했다. 이런 종류의 짧은 대화로 나올 주제가 적당히 정해져 있는지라 별 생각 않고 응했는데, 여자가 다음에 꺼낸 화제는 대단치는 않아도 남자의 예상은 벗어나 있었다.

 

“가끔 그럴 때 있어요.”

 

“예?”

 

“담배요.”

 

“담배요?”

 

“이제 막 불 붙이셨는데 끄셔야 했잖아요? 살다 보면 그럴 때가 있다고요.” “아, 그거요. 뭐 별 겁니까?”

 

그냥 지나칠 짧은 대화 치고는 조금 길게 이어지겠구나 하는 예감이 문득 남자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래도 퍽 듣기 좋은 맑은 목소리라, 조금 노곤했지만 남자는 여자의 말에 대충이라도 응대하려 노력했다. 버스 옆에 다른 버스가 지나쳐, 차창에 그늘이 지자, 남자는 차창에 비친 모습을 통해 시선을 돌리지 않고도 여자의 얼굴과 마주할 수 있었다.

 

“별 거죠. 돛대였잖아요?”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담뱃갑 쳐다보고 망설이다가 꺼내 물면 보나 마나 돛대죠.”

 

“하하하, 처음부터 보셨군요.”

 

웃기는 사람이다 싶어 절로 여자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얼굴을 제대로 쳐다봤다. 여자의 머리는 붉은색이었다. 이렇게 눈에 띄는 붉은색인데도 동양인 얼굴에 퍽 잘 어울리는 경우가 있구나 싶어 남자는 여자의 머리카락에 내심 감탄하며, 아무렇게나 말아 올린 붉은 머리와 그 목덜미 주위를 조금 실례가 될 정도로 유심히 쳐다봤다. 그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자는 남자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수채화를 그리다 보면 어디에 붓을 더 덧댈지 생각이 안 날 때가 있어요. 보통 그러면 커피를 내리면서 잠시 그림으로부터 거리를 둬요. 이젤에서 멀찍이 떨어져 앉아 커피를 마시며 그림을 보고 있으면, 퍼뜩 ‘이렇게 하면 되겠다’하는 생각이 떠오르죠. 얼른 커피를 물통 주위에 아무 데나 놓고, 붓을 적셔 팔레트에 생각한 대로 색을 섞는데, 색이 좀 진하다 싶어서 물에 살짝 붓을 적셨다가 그림에 바로 덧대면, 섞지도 않은 고동색이 번지는 거예요.”

 

“설마…….”

 

“그래요, 커피잔에 붓을 넣은 거죠.”

 

“저런.”

 

남자는 그게 내가 돛대를 피우다 말고 비벼 끈 것과 무슨 상관이지 싶었지만, 그냥 묻지 않고 웃어넘겼다. 피로해서 이야기를 길게 하고 싶지 않았다.

 

“재미있는 건 붓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데도 몸이 자꾸 붓을 물통이 아니라 커피 컵에 집어넣으려고 한단 말이에요. 웃기죠? 어떨 때는 색은 멀쩡히 잘 칠하고, 신이 나서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니 커피잔이 아니라 붓 씻던 물통이었던 적도 있었어요.”

 

듣던 남자는 머리 속에서 물감 섞인 물을 마시는 모습을 상상하다 역한 나머지 가볍게 신음을 냈고, 여자는 그것을 보며 쿡쿡 웃었다.

 

“어디 쪽으로 가세요?”

 

“황천, 아니 황금동 쪽으로 갑니다.”

 

“아, 그러세요? 저도 그 동네로 가는 길이에요, 마침.”

 

싫지 않은 사람이었지만, 내릴 때까지 계속 이 낯선 사람과 어정쩡하게 대화를 주고받아야 할 생각에 남자는 잠시 아연했다. 언제 이 자리를 파할지 눈치를 보면서 낯선 사람과 마음에도 없는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은 요 이틀 같잖은 상주 자리에 앉은 바람에 지긋지긋해졌다. 더는 못해먹겠다 싶어서 담배 좀 피우겠다 핑계를 대고 나와서는, 삼베 완장을 벗어 속 주머니에 접어 넣고 도망 나온 게 아닌가. 웃음기를 지우지 않으면서도 저도 모르게 어금니를 깨무는데, 턱에 힘이 과히 들어갔다.

 

“장례식장 다녀오시나 봐요?”

 

“티가 나나요?”

 

“넥타이가 검은색이네요. 살갑게 이야기하실 기분도 아닐 텐데, 제가 말을 너무 많이 했네요.”

 

“아뇨, 날씨도 좋고, 같이 이야기해서 덕분에 한결 나아졌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라고 답하던 여자는 눈을 가늘게 뜨고, 턱에 힘을 준 채 억지웃음을 짓는 남자를 잠시 응시하다 입을 다물었다. 얄궂게도 두 사람은 같은 정류장에서 내렸다. 초행길이라 남자가 휴대폰으로 지도를 보며 거리를 두리번거리자, 여자는 그냥 지나치지 않고 어딜 가냐고 물었다. 가는 방향을 들으니 여자가 일하는 미술학원 근처의 아파트라 여자는 따라오시라며 앞서 걸어갔다. 남자는 시원시원한 여자의 태도에 이끌려 미술 학원 앞까지 따라갔고, 차근차근 일러주는 이후의 길을 연습 삼아 외워보고는 작별인사를 했다. 건물로 들어가는 여자의 뒷모습이 무척이나 씩씩하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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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이 잘 된 부촌이라고 남자는 익히 이야기를 들었지만 막상 눈으로 보니 또 달랐다. 여기저기 쭉쭉 뻗어 올라간 아파트들을 보고 있자니, 서울 반포동에 늘어선 단지들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아무리 자기 집은 아니더라도 죽기 전까지 그 사람이 이런 깔끔한 아파트에 살았다니, 남자는 어렸을 때, 살던 집이 그 사람이 진 빚으로 넘어가 밤새 어머니와 급하게 이삿짐을 쌌던 그때가 떠올랐다. 삼십 년도 더 된 기억이라 평소에는 있는 지도 모르고 지내지만, 이따금씩 계기가 생겨 떠올리자 치면 그 전후 상황을 모두 선명하게 그릴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기억이었다.

 

단지 들어오는 초입에서 담배 한 갑을 사서 담뱃갑을 손등에 톡톡 두들기는데 갑자기 전화가 왔다. 보나 마나 장례식장에서 누가 걸었겠지 싶어 번호도 확인 않고 남자는 종료 버튼을 눌러 끊은 후 전화기를 무음으로 돌렸다. 아파트의 동과 호수를 다시 확인하고는 병원에서 유품이라며 전달받은 전자키를 바지 주머니 속에서 만지작만지작 거리며 남자는 자기 심사만큼이나 배배 틀린 길을 지근지근 밟아갔다.

 

우체통은 오만가지 고지서와 체납으로 인한 독촉장으로 그득했다. 자기 생활을 꼼꼼히 챙길 위인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눈으로 확인하니 기가 차서 헛웃음이 나왔다. 하자 좀 있는 집을 싸게 사서 인테리어 공사 후 프리미엄 붙여 비싸게 되파는 장사를 하는 그 사람의 친구 중 하나가, 공사 하자가 너무 많아 팔리지 않고 남은 아파트에 그 사람이 지내도록 허락했다는데, 사정이 딱해서 월세 받을 생각은 안 했지만, 지내는 동안의 아파트 관리비나 공과금은 염치껏 알아서 내리라 기대한 결과는 보시다시피였다.

 

집 대문 앞에 서니 희미하게 구린내가 나는 듯했다. 죽어서 썩은 지 좀 되어서야 발견됐단다. 그 사람과 통 연락도 안 되는 게 이상해서 친구가 집에 가보니 죽어 있었더란다. 남자는 그런 이야기를 들었으니 괜히 기분 탓에 없는 냄새도 맡는 것이라 짐작했지만, 문을 따자마자 훅 들어온 악취는 기분 탓이 아니라고 똑똑히 말해줬다. 군대 있을 적, 부대 근처 수재민 구제 나갔다가 다 썩어 나자빠진 감자밭에서 맡은 냄새도 이거보다는 덜 했을 거라고 남자는 생각했다. 욕지기가 치밀었다.

 

염병할 내가 여긴 왜 와서 이걸 왜 열었지 싶다가도, 계속 열어두었다가는 옆집에 민폐겠다 싶어 에라 모르겠다 하고 남자는 얼른 집으로 뛰어들어가서는 서둘러 문을 닫았다. 악취는 한층 더 진하게 남자를 감쌌다. 창문이라도 열어야겠다 싶어 구둣발로 베란다로 뛰어가다가 미끈거리는 액체를 밟은 것 같아 아래를 쳐다보니, 파리떼가 남자를 중심으로 솨아아 퍼져서 도망가고 있었다. 파리 중 몇몇은 남자의 얼굴을 피난처 삼았다가 여기가 아닌가베 하고는 남자의 손이 후려치기 전에 도망가고, 파리들이 싸질러놓은 구더기들은 남자의 구두 옆에서 영문도 모르고 고물고물 기어 다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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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영아, 선생님하고 저 원기둥 한 번 같이 보자. 자, 봐봐. 원기둥 윗면은 양 옆 기둥 모서리로 갈수록 가늘어지지? 끝부분을 자세히 보면, 날카롭게 빠지기보다는 조금 둥글게 빠지지? 보여? 동그라미인 윗면을 이렇게 기울이면 타원 모양이 되는 것처럼 말야.”

 

미술학원은 방과후 시간이라 학생이 꽤 많았다. 여자가 학생이 연필로 정물화 삼아 그리던 원기둥을 눈 앞에 가까이 가져와 설명하자, 학생은 원기둥이 기울어지며 윗면의 모양이 변하는 모습과 자신이 그린 그림이 다른 것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다시 자세히 보면서 이 윗면이 옆면과 만나는 부분을 그려보자. 빛이 오는 방향도 그림자 위치도 좋고, 역광 표현한 것도 아주 잘 했어. 선영이는 한 번만 말해주면 바로바로 이해하네. 그 부분만 다듬어보자.”

 

학생이 감을 잡은 것처럼 보이자, 여자는 고개를 돌려 말썽을 곧잘 일으키는 초등부 애들이 앉은 테이블을 확인했다. 눈 잠시 돌린 새에 아니나 다를까,

 

“야, 박정수, 조영진! 크레파스로 색깔 다 채웠어? 너 오늘 스크래치 할 건데, 밑에 나올 색깔들도 아직 덜 칠했으면 너네 오늘 집에 못 간다?”

 

“선생님, 얘가 자꾸 저 방해해요!”

 

“네가 먼저 방해했잖아!”

 

“둘 다 열심히 하면 서로 방해 안 해. 얼른 하자. 자, 보자. 거의 다 했네! 이제 여기 빈 곳에 색깔 채우면 되겠네. 뭐 칠하고 싶어?”

 

“빨간색?”

 

“빨간색이 뭐냐? 여자색깔이잖아.”

 

“색깔에 여자색깔이 어딨어. 영진이는 쓸 데 없는 소리 말고. 정수야, 빨간색은 바로 옆에 색칠했으니까 다른 거 생각해보자. 무슨 색깔이 옆에 있으면 빨간색이 가장 눈에 띌까?”

 

“남색이요?”

 

“음, 좋네. 근데 우리가 이거 다 칠하고 나면 까만색 크레파스로 다 덮을 거니까, 조금 밝은 색 써보자. 무슨 색 해볼래?”

 

“이거요! 코발트색이요.”

 

“그래, 그걸로 얼른 칠하면 되겠네. 금방 끝나겠네. 다 칠하면 까만색 크레파스 준비해서 다 덮는 거야! 영진이도 한 번 보자. 영진이는 뭘 그린 거야? 공룡? 오늘은 스크래치 하는 날이잖아.”

 

“그럼 나중에 공룡모양으로 긁으면 되잖아요?”

 

여자는 한 방 먹었다는 느낌으로 웃으며,

 

“그렇네, 선생님이 잘못 생각했네. 그래도 너무 꼼꼼하게 그리면 시간이 오래 걸리니까, 있다가 수학 학원도 늦고, 그러면 어머니께서 걱정하시겠다, 그렇지? 나머지 바탕 부분은 여러 색깔로 큼직큼직하게 칠해보자.”

 

“화산 폭발 난 것처럼요?”

 

“그래 운석이 떨어졌을 수도 있고.”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며 미소를 짓는 아이가 귀여워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는 것도 잠시. 학원 문이 열리더니 선생님, 안녕하세요 인사하며 또 다른 아이 하나가 들어왔다.

 

“어, 재효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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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를 몇 대나 태워도 목덜미에 돋은 소름이 가라앉질 않았다. 입 안과 콧구멍에 찝찝한 느낌도 사라지질 않아, 여기저기 소독 삼아 뿌릴 겸, 국적국적 가글도 좀 할 겸, 담배 살 때 소주도 한 병 같이 샀어야 했다고 남자는 혀를 찼다. 아무거나 걸레로 쓸 만한 것을 바닥에 던져 구두 바닥을 정신없이 비볐는데도, 양말 속에 뭔가 끈적이는 국물이 들어간 것만 같은 찝찝한 느낌이 가시질 않았다. 열린 창문으로 봄바람이 솔솔 들어오는데도 집에는 담배냄새와 썩은 내뿐이었다.

 

더 있어봤자, 썩은 내만 몸에 배겠다 싶어 나가려는데, 남자의 시선이 우연히 안방의 붙박이 책꽂이에 꽂혔다. 튼튼해 보이는 물건이었다. 크기가 얼마나 되나 보려고 남자는 책꽂이 앞에서 팔을 벌려 책꽂이의 너비와 높이를 가늠했다. 자기 키만 한 높이에 양팔을 벌린 길이에 조금 못 미치는 너비. 칸막이나 옆면을 잡고 힘을 주어도 꿈쩍도 않을 정도로 방박진 물건이었다. 책꽂이 속에는 이야기 로마사나 월간 조선과 같은 흥미 본위의 책들이 즐비했다.

 

그 사람이 빚을 터뜨리고 도망간 후부터는, 남자와 어머니의 생활도 셋방살이 떠돌이 생활이 되어 변변한 가구 하나 제대로 장만하질 못 했다. 책꽂이는 가구 중에서도 가장 바라 마지않던 것이었다. 언젠가 큰 서점 한 구석에 있는 책들을 몽창 다 옮겨 꽂을 수 있을 만큼 큰 책꽂이를 장만하자던 어머니와의 약속은 떠돌이 생활을 한 지 이십 년이 넘어서야 어느 정도 이룰 수 있었다. 집을 압류당했을 때, 시간이 까빡졌던 탓에 맞춤 제작한 좋은 책꽂이와 거기에 꽂힌 양서들을 수습하지 못했었고, 그걸 못내 아쉬워하시던 어머니가 떠오르자 남자는 책꽂이 앞에서 잠시 옛 생각에 잠겼다.

 

한참 우두커니 서있다 고개를 돌리니, 방바닥에는 신문지들이 너저분하게 뒹굴고 있었다. 남자는 돌연 웃옷을 벗고 넥타이를 끌러서는 방문 손잡이에 얌전히 걸어두었다. 그러고는 셔츠 소매를 걷어붙인 후, 신문지를 몇 장 쥐어 뭉친 것을 걸레 삼아서 청소를 시작했다. 거실의 진물을 신문지로 여러 번 훔치고는, 세제로 쓸만한 것이 마땅치 않아 세숫비누 녹인 물을 부어서 닦았고, 그래도 얼룩이 지지 않아 군대서 하던 대로 치약을 짜서 또 닦았다. 그래도 시체가 있던 자리의 얼룩은 좀처럼 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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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다 집에 돌아가고 나서야 여자는 털썩 소파에 쓰러지듯 앉을 수 있었다. 다 마치고 나면 당장 눕고 싶을 정도로 온 몸이 뻐근하지만, 아이들하고 같이 있을 때는 아이들에게서 기운을 전해 받는 탓인지 그 피로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이 여자는 항상 신기했다. 졸업하고 광고 회사를 몇 년간 다녔었는데, 친했던 대학 선배가 미술학원을 연다 하길래 옮겨 간 이후로 벌써 5년 넘게 미술학원 선생님 노릇을 하고 있었다. 애들하고 있느라 참고 있었던 담배나 잠깐 태우러 갈까 싶어 가방을 어디 뒀나 두리번거리는데, 원장 선생님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옆에 앉았다.

 

“무슨 좋은 일 있어요, 원장님?”

 

“에이, 또 그런다. 애들 없을 때는 언니라고 부르랬잖아.”

 

“입에 익어서 그렇죠. 그래도 원장님이라 불러도 언니를 싸랑하는 제 마음은 똑같답니다?”

 

“어머, 징그러라. 얘가 잔소리 좀 했다고 바로 멕이네. 하여튼 못 당해, 못 당해.”

 

“헤헤헤, 그건 그렇고. 무슨 좋은 일이 있어서 이렇게 활짝 웃으세요?”

 

“저번에 애들 데리고 문화예술회관에서 실기대회 나간 것 있잖아?”

 

“발표 벌써 났어요? 아직 남았잖아요.”

 

“아직 바깥에는 안 났어. 알고 지내는 교수님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영지하고 선호 둘 다 은상이래. 초등부 나간 애들은 전부 특선 따오고, 재효는 금상이고!”

 

정말이냐고 되물으면서 여자는 놀란 나머지 숨을 헉 들이켰다. 야외 사생대회 형식으로 열리는 미술대회라, 아이 따라 부모님들도 잔뜩 오는 행사였다.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니, 어디서 무엇을 어떤 구도로 잡고 그리면 좋을지 일러주면 좋겠다는 학부모들의 요청에 원장은 중고등부 원생들을, 그녀는 초등부 원생들을 나눠 맡았었다. 여자는 나중에 선생들이 대신 그렸네 어쨌네 하며 여러 사람들 입도마에 올라 말썽을 일으키지 않도록, 눈에 띄는 붉은 머리도 모자로 가린 채, 조심조심 애들을 봐주고 다니느라 신경이 곤두섰던 게 기억났다.

 

“초등부 애들 색 칠한 게 애들 같지 않아서 눈에 띄었다고 하더라. 좀 적당히 하지 그랬어.”

 

원장은 씨익 웃으며 여자의 팔을 가볍게 쳤다.

 

“더 열심히 해서 모두 더 좋은 상 받게 하지 그랬어 라고 책망하시는 것 같습니다, 언니?”

 

“얘는 농담도! 그러고 보니 우리 학교 다닐 때는 미대에서 서양화과라고 하면 쓸 데 없이 여러 가지 색깔 물감 일일이 따로 사서 잔뜩 지고 다니는 미련한 애들이라고 놀렸었는데, 우리 서양화과 출신 선생님, 그 색감이 보통이 아니신가 봅니다.”

 

“아우, 언니, 칭찬이든 욕이든 한 가지만 해요!”

 

그야말로 욕인지 칭찬인지 구분하기 힘든 말들을 나누면서도 두 사람은 기뻐서 입이 귀에 걸려있었다.

 

“원장님, 우리 원장님. 이렇게 좋은 실적 낸 우수한 선생님에게 보너스는 없나요?”

 

여자는 장난스레 양손을 비비며 묻자, 원장은 능글맞게 웃으며,

 

“보너스, 그래, 어떤 보너스를 드릴까? 회식? 금일봉? 아니면 남자 소개?”

 

“에이, 잘 나가다 남자 소개가 왜 나와요? 금일봉, 금일봉이 좋네.”

 

“내가 진짜 괜찮은 애 찾았는데.”

 

“전 금일봉이 좋습니다!”

 

“요 앞에 횟집 생겼잖아, 회식 겸 걔도 데려와서…”

 

“금일봉이요~!”

 

“아유, 그래. 관둬라, 관둬.”

 

여자는 원장이 무안해할까 싶어 장난스레 헤실헤실 웃으며 눈을 찡긋했다.

 

“넌 정말로 남자에 관심이 없구나.”

 

“꽃보다 돈이죠.”

 

“그래도 할머니께서 권하시는 자리는 꼬박꼬박 잘 나가더만.”

 

“그거야, 안 나가면 나갈 때까지 잔소리하니 그렇죠. 이제는 서른 넘었다고 애 딸린 재혼할 남자도 권하는 것 있죠?”

 

“그건 심했네. 그래도 사람은 좋던?”

 

“그냥 모나지 않게 평범한 사람 같았어요. 어쩌다 중간에 화장실 간 김에 담배를 피우고 왔는데, 자리에 돌아오니 코를 킁킁대면서 담배 냄새나지 않냐고 묻데요? 그래서 제가 피웠다고 말하니 질색을 하더라고요. 자기는 애 잘 돌볼 사람이 필요하다나?”

 

“얘도 참, 적당히 둘러대지, 그 자리서 내가 피웠다고 말할 건 또 뭐니?”

 

여자는 원장이 빈 말에라도 자신이 얼마나 애들과 잘 지내는 지를 두둔해주길 기대했지만, 외려 담배 피우는 것을 두고 꼬집자 내심 속이 상했다.

 

“어차피 두어 번 더 만나면 알 텐데, 뭐 하려고 숨겨요?”

 

“그래도 첫인상이 중요한데.”

 

“전 담배를 포기할 만큼 좋은 사람을 찾는 게 아니라, 담배 피우는 것도 이해할 줄 아는 좋은 사람을 찾는 겁니다?”

 

“으이구, 그래, 잘 났어, 우리 설 선생. 나중에 더 나이 들어서 친구네 애기랑 잠시 놀아주고는 웃으면서 ‘결혼은 하기 싫은데, 애는 가졌으면 좋겠어.’ 같은 소리 절대 하덜 마세요. 세상 물정 모르는 노처녀 인증 1순위 대사니까.”

 

원장의 익살 섞인 독설에 여자는 순간 목 뒤로 무언가가 확 치밀어 올랐지만 금일봉이 날아갈까 싶어 적당히 웃어넘겼다.

 

“담배 이야기하니까, 담배 피우고 싶어 졌네요. 잠깐 나갔다 올게요.”

 

“나 이제 퇴근하려는데. 오늘도 개인 작업하다가 갈 거야?”

 

“그러려고요.”

 

“그러면 불은 안 끄고 문만 잠그고 나갈 테니까, 열쇠 챙겨서 피우고 와.”

 

-下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