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살에 닿는 흐린 날의 습기는 등골을 타고 눌어붙는 것만 같다. 갑옷의 연결부가 녹슬어서 나는 소리를 귀에 한껏 담으면서 소녀는 마차에 올라탔다. 이리저리 덧댄 짐칸의 판자는 썩어 문드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삐걱대는 요란한 소리는 불안하기 그지없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당장 이동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만족해야만 했다. 
  하지만 소녀는 겨우 그런 곳에 몸을 내려놓아야 할 정도로 천한 몸이 아니었다. 용사, 그것은 곧 마왕을 참살하기 위한 인류의 검이었으며, 이 세상에서 가장 선하고 강력한 전사를 뜻하는 말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소녀를 칭하는 말이기도 했다. 일찍이 그런 이름으로 불리었던 소녀가 지금은 어찌하여 이런 낡아빠진 마차를 타고서 이동하고 있는가. 그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용사인 소녀조차도 알지 못하고, 마차를 이끄는 마부조차 알 길이 없다. 
  잿빛으로 물든 하늘을 올려다보았던 소녀의 눈에는 더 이상 예전과도 같은 용맹함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검을 쥐게 된 소녀에게 남은 것은 빛바랜 의무감이었으며, 허무함이었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공포심뿐이었다. 그런 소녀에게 남은 용력(勇力)은 이미 끝까지 불타 사그라진 티끌에 불과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녀는 강력했다. 더 이상 용력이 남아있지 않을지라도 소녀는 이미 수십의 마왕을 죽인 영웅이었으며, 괴물이었다.

 그렇다.
 소녀가 올라탄 마차는 벌써 예순다섯 번째의 마왕성으로 향하고 있던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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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따금 마차의 바퀴가 돌부리에 걸려 진동할 때마다 좁디좁은 두 어깨가 약하게 흔들리곤 했다. 그런 와중에도 소녀의 두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 눈빛은 흡사 맹수의 것이었다. 먹잇감을 바라보는 사자의 눈빛으로 소녀는 마차의 전방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차에 올라탄 순간부터 소녀의 눈에는 오직 드넓은 지평선만이 펼쳐져 있었다. 다만 지금부터는 달랐다. 회색빛의 눈동자에 그려진 풍경은 여전히 드넓은 지평선이었지만, 그 가운데. 들판에 바로선 거대한 흑철의 성이 붉은 깃발을 과시하며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것은 마왕이 기하는 성역의 상징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악의 상징이었으며, 수렵과 고결의 정령의 요새였다. 그 요새의 주인은 밤하늘을 수놓은 여덟 번째의 별이었으니, 그 이름은 바르바토스.

 소녀의 검에 갈라질 예순다섯 번째 희생양이었다.

" 씨발. "

 부슬부슬 내리는 빗방울을 맞으며 마부는 숱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묵묵히 마차를 끌던 그가 욕을 내뱉은 것은 분명 마왕성이 눈 앞에 드리웠기 때문이었다. 그가 이끄는 마차의 짐칸에 쪼그려 앉은 소녀는 용사라 하기에는 적이 피폐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소녀에게는 더 이상 거침밖에 남지 않았다. 
  숱한 전투 속에서 깎일 대로 깎여버린 마음은 이미 소녀의 것이 아니었다. 예순네 명의 마왕을 베어 넘기고 마흔다섯 번의 전투에 참전한 소녀는 더 이상 소녀라고 부를 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소녀는 곧 용사였다. 인류의 강역을 침범하는 악을 치기 위해 존재하는 괴물이었다. 그러므로 소녀는 움직여야만 했다. 더 이상 저들이 인간의 강역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 이크. "

 흑철의 성으로부터 불과 도시 하나의 거리만이 남았을 즈음. 마부는 더 이상 마차를 몰지 않았다. 다만 물끄러미 고개를 돌려서 소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마부는 소녀와 같은 전사가 아니었다. 지극한 인류애를 가진 성직자도 아니었다. 마부는 그저 민초였다. 하루하루 벌어 먹고살 뿐인 나약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소녀에게 돈을 받고 고용된 사용인이었다. 어디까지나 계약에 지나지 않는 관계일 뿐이었다. 그러므로 마부는 소녀와 달리 목숨을 바칠 생각이 없었다. 애당초 그의 일은 소녀를 마왕성 인근까지 데려다주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 이상 가면 되었다고. 충분하다고. 마부는 그렇게 생각한 참이었다. 
  소녀는 그런 마부의 심정을 십분 이해했다. 자신이 마부였더라도 분명 그랬을 것이겠지. 그런 이유에서 소녀는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자신의 짐과 약간의 식량을 가지고서 마차에서 내렸다. 마부는 그런 소녀를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고향에서 아내와 함께 농사일을 거들고 있을 자기 딸보다도 어린 소녀를 혼자 남겨두고 가기에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죄악감이 치밀어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은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었다. 용사를 태운 채로 이 이상 마차를 이끈다면 자신의 목숨 또한 위태로워지기 때문이었다.

"... 고맙습니다. "

 마차에서 내려온 소녀는 마부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마부는 그 인사를 받을 수가 없었다. 단지 " 미안하다. " 라며 조그맣게 중얼거릴 뿐이었다. 
  이후에 마부는 말을 이끌고서 자신이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이대로 별 문제가 없다면 마부는 사흘 뒤에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소녀가 사흘 뒤에 이곳에서 마왕의 수급을 들고 서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마왕 바르바토스가 소녀의 목을 들고서 마부를 반겨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느덧 마차가 지평선 너머로 보이지 않게 되었을 즈음. 소녀는 자신이 왔던 곳에서 눈을 떼었다. 이제부터는 오로지 혼자 마왕성으로 다가가야 했다.

"  아슬라... 분명 너도 보고 있겠지. "

 소녀는 이제는 만날 수 없는 친구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것에 의미는 없었다. 그저 자신을 위한 주문일 뿐이었다. 소녀는 머지않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부슬부슬 내리던 비는 어느덧 그쳤다. 바라본 하늘은 어제와 같은 희뿌연 색이었다. 
  소녀는 칼자루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약하게 마력을 흘려 넣자 검에 박힌 보석이 밝은 빛을 내었다. 황금색 빛의 보석. 자신의 머리카락과 같은 색의 보석에서는 영광이라 불리는 아름다운 빛이 났다. 그것은 언젠가 흐린 하늘을 가를 빛이었다. 어둠을 물리칠 빛이었으며, 티끌밖에 남지 않았다지만 여전히 인간을 위하는 소녀의 의지이자 마음이었다.

" 만약 정말 보고 있다면 ... 부디 안심해 줬으면 해. "

 소녀는 - 용사 레베카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 발걸음은 어느 때보다도 무거운 인류의 도약이었다. 수많은 기대를 품고서 나아가는 소녀의 도약은 언젠가의 찬송가로써 남을 것이다. 다만 그것은 아직 어린 소녀의 발걸음이기에는 적이 버거웠다. 아직 어린 그녀가 걷기에는 무척이나 어려웠고, 아슬아슬하고, 거친 길이었다. 
  그럼에도 소녀는 걸어야 했다. 과거에 천민이었던 소녀가, 다만 지금은 용사로써 살아가는 소녀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 말곤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의 앞에 놓여진 길을 착실히 걸어가는 수 밖에 없었다. 그것 말고 다른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럴 기회조차 없었다. 그것은 오로지 그녀가 용사였기 때문이었다. 인류의 성창이기 때문이었다. 사람을 위해 살아가는 용기있는 자였기 때문이었다. 
 다만 용사란 무엇인가. 사람을 지키는 자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어찌하여 자신의 자유를 바치고 수많은 죽음이 도사리는 길을 걸어야 하는가. 언제부터인가 소녀는 그런 의문을 품었다. 용사가 가지기에는 실로 부적절한 의문을, 마음 속 깊숙한 곳에 품고 있었다. 
  소녀가 그런 의문을 품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그것은 이젠 스스로조차도 떠올리지 못하는 기억의 너머이다. 빛바래고 오래된 기억의 찌꺼기로서 풍화된 지 오래였다. 그러나 그 의문만큼은 소녀의 가슴 속에 확실하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의문은 소녀가 저 어두운 흑철의 성을 향해서 발걸음을 옮길 수록 더욱이 커져만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검을 쥐는 것은. 계속해서 악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그것이 분명 소녀의 의무이기 때문이겠지.
 그것이 필히 소녀가 할 수 있는 가장 값진 것이기 때문이겠지.
 다만 그것이 이미 사라진 친구에게 보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겠지.

" ... 이번에는 꼭 만날 수 있을 테니까. "

 그리하여 검을 쥔 소녀 레베카는.
 흐리고 황량한 하늘의 아래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