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준”

 

장교가 명령하자 일렬로 늘어선 군인들이 총구를 표적으로 향했다.

 

“발사”

 

. 군인들의 총이 일제히 불을 뿜자 벽에 세워진 사람들이 쓰러졌다. 장교는 쓰러진 사람들에게 다가가 사망한 것을 확인했다.

 

“이 놈은 뭐야? 생채기도 없구만.”

 

그의 앞에는 안대를 쓰고 몸을 심하게 떨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장교가 그의 머리에 권총을 쏘자 그는 움찔하는 것을 끝으로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장교는 자신의 부하들을 바라보더니 두 명의 군인을 불렀다.

 

“두 사람, 노리쇠를 당겨봐라.”

 

찰칵. 한 명이 노리쇠를 젖혀 당기자 탄피 하나가 튀어나왔다. 그것을 본 다른 한 명도 노리쇠를 젖혀 당겼다. 찰칵.

 

격발되지 않은 실탄이 튀어나와 장교의 발치에 떨어졌다. 장교는 그것을 집어서 부하들에게 들어보이며 말했다.

 

“제군, 이것이 보이나? 앞으로 명령에 불응해 사격하지 않는 자는 자신의 총에 장전된 총알에 죽게 해주겠다.”

 

군인들은 두려운 표정으로 그것을 받아들였다. 장교가 말을 이어갔다.

 

“오늘 우리가 사살한 자들은 우리가 지켜야 할 국민이 아니다. 반군을 지원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마땅히 맞서 싸워야 할 적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들을 죽임으로서 적과의 전투에서 또 다시 승리를 거둔 것이다. 제군은 오늘의 승리를 자랑스럽게 여기라.”

 

군인들은 자신들이 타고 온 트럭에 올라 타 마을을 떠났다.

 

한편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본 소년이 있었다. 눈 앞에서 부모가 죽는 것을 본 소년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려 어린 마음을 적셨다.

 

조금 뒤 해질녘이 되자 또 다른 무리의 무장한 사람들이 마을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통일되지 않은 복장을 하고 있었고 무기마저도 어떤 이는 정부군 제식 소총을, 어떤 이는 사냥용 엽총을 들고 있는 등 모두 달랐다. 그들은 저항군이라고 불리는 들이었다. 낮에 있었던 학살의 흔적을 목격하자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곧 그들은 죽은 사람들의 신원을 파악하기 위해 움직였다. 이들의 대장인 알바로 소위는 그가 아는 소년이 있는 것을 보고 다가갔다.

 

“라파엘, 왜 울고 있느냐?”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소위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했다. 소위는 무릎을 굽혀 그와 눈높이를 맞췄다.

 

“나는 네 아버지를 알고 있다. 그분은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를 도왔지.”

 

이번에도 소년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라파엘, 울지 마라. 우리와 함께 가자.”

 

소위는 허리춤에서 권총을 꺼내 소년에게 건네주었다. 그제야 소년은 고개를 들었다. 소년의 두 눈에서 타오르기 시작한 불꽃이 맺혀있던 눈물을 금방 마르게 했다. 소위는 그런 소년을 안아주었다.

 

“잘 생각했다. 너는 혼자가 아니란다. 인민들이 힘을 합쳐 침략자들을 물리치는 날이 반드시 올 거다.”

 

 

 

 

 

 

 

 

 

 

 

 

 

 

 

 

 

2.

 

지평선 너머로 해가 뜨고 있었다. 햇빛은 넓은 대지를 닿지 않는 곳 없이 공평하게 비추었다. 산 마르코스의 평원이 옅은 녹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평화로운 시절이었다면 이맘때쯤 곡식이 무르익어 밝은 금빛이 되었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 평원은 잡초가 무성한 황무지였다.

 

소년은 마른 풀밭에 앉은 채로 해를 등지고 수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그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멀어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눈을 옅게 뜨니 평원 너머에 해안가와 마을을 볼 수 있었다그는 진흙이 묻어서 이제는 카키색에 가까워진 황록색 군용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어깨 부분에 착용한 붉은 견장은 그가 반군 유격대 소속임을 나타냈다.

 

라파엘은 올해 15살이었다. 자신의 투쟁이 시작된 때로부터 3년이 지나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십대로 접어든 것이었다. 외모도 그 사이에 많이 바뀌었다. 우선 그는 키가 어른과 비슷한 정도로 자랐다. 빛을 받으면 갈색으로 보이던 그의 머리카락은 이제는 짙은 검은색을 띄었고 방황하는 그의 마음을 대변하듯 곱슬거렸다. 아이 같던 모습이 사라지고 이제는 제법 늠름한 티가 나기 시작했다.

 

해가 완전히 그 모습을 드러내자 라파엘은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를 턴 후 몸을 풀었다그리고는 옆에 내려놓았던 소총을 집어 들고 언덕을 내려갔다.

 

언덕 아래에는 그의 가장 친한 친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이름은 파비오였다.

 

갑자기 왜 궁상을 피우고 그래?” 파비오가 물었다.

 

너도 가서 보고 오던지.”

 

소년과 친구는 나무가 빽빽하게 자라 있는 숲 쪽으로 걸었다그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나무가 없는 곳으로 잠시 산책을 나온 것이었다.

 

저기가 산 마르코스야?” 라파엘이 물었다.

 

너가 뭘 봤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마을이 보였어?”

 

보였어아주 작게알바로 말로는 꽤 큰 마을이라던데 가까이서 보면 어떨지 몰라.”

 

눈에 보이긴 해도 여기서 꽤 먼 곳이야지금부터 가도 저녁 쯤에나 도착할걸.”

 

두 사람은 지난 2년간 전장에서 동고동락해온 가까운 사이였다그들이 다른 대원들보다도 서로 더 강한 유대감을 느끼는 것은 부대 내에 같은 나이대의 병사가 그 둘 밖에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되었다다른 누구보다도 서로를 가장 잘 이해했기 때문이다하지만 그들이 전쟁에서 싸우는 이유는 각자 달랐다.

 

들었어알바로가 그러는데 평화 협상이 진행되고 있대.” 파비오가 말했다.

 

그럼 이 짓거리는 왜 하는건데?”

 

라파엘이 되묻자 파비오는 자신도 잘 모른다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말을 이었다.

 

글쎄협상은 사실 몇달 전부터 하고 있었대그러니까 당장 전쟁이 끝날지는 모르는 거지.”

 

아쉽네나쁜 놈들을 더 죽일 수 없게 된다는 건.”

 

라파엘… 우리가 바라는 건 그 놈들을 전부 잡아 족치는 게 아니야모든 건 민족의 자유를 위해서라고만약 이번 협상으로 우리가 독립한다면 좋은 일이잖아?”

 

두 사람은 잠시 말 없이 걸었다파비오는 라파엘을 이해할 수 있었다다만 그가 생각하기에 이 전쟁은 시간을 너무 오래 끌고 있었다.

 

솔직히 난 이제 힘들어전투에서 여러번 이겼는데 전쟁은 끝이 나질 않잖아제발 좀 끝나라.”

 

라파엘은 혼란스러웠다그가 처음 반군에 가담한 이유는 복수하기 위해서였다그리고 확실히 그는 지금까지 복수를 하고 있었다여러 명의 장교를 사살했고정부군에 협력한 인물들을 처단하는 일에 가담했다하지만 그가 싸우기 시작한 때부터 그의 마음 한 켠에 자리한 공허함은 시간이 갈 수록 커져만 갔다그는 마음 속이 텅 비어버린 듯한 이 느낌이 견디기 어려웠다.

 

나는 전쟁이 끝나기를 바라고 있는 걸까?’ 라파엘은 스스로 질문했다.

 

그러자 그런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이 파비오가 말했다.

 

언젠가는 멈춰야 할 때가 올 거야우리 둘 다.”

 

숲에 들어서자 숲 속은 그늘이 져서 서늘했다두 사람이 조금 더 깊숙이 들어가자 야영지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대원들이 보였다점호 시간이 되자 알바로 중위의 앞으로 모든 대원들이 모여들었다그가 이끄는 부대는 20명으로 이루어진 작은 규모의 유격-정찰대였다.

 

모두 모인 건가?” 중위가 대원들의 얼굴을 하나씩 확인하며 말했다.


중위는 해진 황록색 군복 상의 위에 샘 브라운 벨트(어깨부터 가슴을 가로지르는 가죽 벨트)를 매고 다른 대원들과는 구분되는 갈색 작업복 하의를 입고 있었다원래의 군복 하의가 입을 수 없을 정도로 닳고 해져서 그가 따로 구한 바지였다그만큼 그는 언제나 자신이 험한 일을 도맡아서 하고 부하들을 앞장세우지 않는 지휘관이었다그런 이유로 그는 부하들에게 믿음받는 사람이었다그의 결정은 언제나 존중되었고 충실하게 이행되었다대원들이 모이자 그는 헛기침을 한 번 해서 주의를 모으고는 입을 열었다.

 

동지들아아침이 밝았다또 다시 영웅적인 임무를 수행할 때가 온 것이다잘 들어라우리는 오늘 밤부터 반나절에 걸친 습격을 벌일 것이다목표는 정부군에 점령당한 산 마르코스마을인데 규모로만 보면 소도시 쯤은 된다.”

 

산 마르코스는 해안가에 위치한 큰 마을이었다이곳 주민들은 반군을 지지했고 현재 정부로부터 독립하기를 원했다불과 수 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지점이지만 평원을 가로지르면 눈에 잘 띄었기 때문에 낮 동안에는 돌아가야 했다중위의 계획은 이러했다일단 숲이 끝나는 지점까지 행군한 후 해가 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어두워지면 마을 근처의 풀밭에 매복하는 것이었다.

 

매복해 있는 동안 마을 외곽에 순찰을 도는 적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중요해만약 순찰을 도는 적에게 발각이 된다면 적이 미리 경계 태세를 갖추고 저항할 거다.” 

 

중위가 말했다그때 한 대원이 질문했다.

 

마을은 헌병이나 경찰들에 의해 잘 방비가 되어있는 편입니까?”

 

경찰서가 하나 있어적들도 전선의 후방에서 유격전이 벌어지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경찰 병력도 방비가 잘 되어있을 것 같군.”

 

자정이 되면 본격적인 습격의 시작이었다먼저 마을의 동부에 위치한 경찰서를 공격해 경찰들을 무력화시켜야 했다다음은 정부군에 협조한 인물들을 날이 밝을 때까지 체포하는 것이었다그리고 아침이 되면 그들을 처형할 예정이었다산 마르코스 시장도 처단 대상에 포함되었다.

 

목표 달성 후에는 정부군이 도착하기 전에 빠르게 철수할 거다다들 이해했지?”

 

잠시 기다려도 질문이 없자 중위가 말했다.

 

그럼 10분 뒤에 출발할 거니까 다들 행군 준비해라.”

 

 

라파엘은 걷고 또 걸었다밤에 있을 습격에 앞서 마을 근처에서 대기하려면 서둘러야 했다여름이었기 때문에 다른 때보다 더 습하고 더웠다그나마 다행인 것은 햇빛이 가장 강한 시간에는 숲에서 행군한다는 사실이었다길이 좀 험하긴 했지만 나뭇잎이 깔린 흙바닥을 걷는 것이 한낮에 달궈진 뜨거운 아스팔트 도로를 걷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땀줄기가 라파엘의 목을 타고 등으로 흘러내렸다고온다습한 공기 때문에 그의 등에는 곳곳에 작은 발진이 생겼다등이 따가운 것이 불편했던 라파엘은 상의를 벗었다그러자 옷에 가려져 있던 크고 작은 상처가 드러났다그것을 본 파비오가 말했다.

 

보기 흉해.”

 

어쩌라고등이 너무 따가워옷을 벗으니 좀 살 것 같네.”

 

라파엘은 다소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상처들 중에는 전투로 인해 생긴 것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바위나 나뭇가지에 긁히고 찍혀서 난 상처였다군인의 상처는 훈장과 같은 것이라는 말도 있지만 어린 소년의 마른 몸을 가득 덮은 고생의 흔적들은 보는 사람을 안쓰럽게 했다알바로 중위 역시 라파엘의 상처가 신경쓰이긴 마찬가지였다.

 

중위는 라파엘의 아버지를 알고 있었다소년의 아버지는 중위가 젊을 적 어려움에 처했을 때가령 정부군에게 수배되었을 때나 부상을 당했을 때중위를 숨겨주고 치료해준 유일한 사람이었다중위가 기억하기에 소년의 아버지는 자기 이웃더 나아가 자신의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언젠가 중위가 그에게 감사와 존경을 표했을 때 그로부터 아들에 대한 부탁을 받은 적이 있었다자신이 만에 하나 잘못되었을 때아들을 홀로 두지 말고 거두어 달라는 부탁이었다.

 

3년전 중위가 소식을 듣고 그의 마을을 찾아갔을 때중위는 그의 어린 아들이 혼자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그때 그는 소년을 그대로 홀로 두지 않겠다고 생각했다그렇게 라파엘을 부하로서 받아준 후 3년이 지난 지금중위는 자신의 결정을 조금 후회하고 있었다역시 그가 보기에 전쟁은 소년을 조금씩 망가뜨려 가고 있었다중위는 라파엘에게 전투에 참가하라고 강요한 적은 없었지만 라파엘을 받아준 것이 결국 그에게 폭력을 부추긴 셈이 되었다파비오의 경우는 스스로의 의지로 자신을 부하로 받아줄 것을 부탁해오긴 했지만 마찬가지였다.

 

대장얼마나 더 걸으면 중간 지점이죠?” 누군가가 물었다.

 

생각에 잠겨있던 중위는 뒤늦게 반응했다.

 

으응저기 벌써 숲이 끝나는 곳이 보이는군가서 함 보지.”

 

3.

 

한 남자가 자신의 집 2층 발코니에 앉아 위스키를 홀짝이고 있었다그는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와 가끔 날아와 쉬는 갈매기를 보며 술만 마셨다남자의 일과라고는 아침에 일어나서 신문에 보도된 전쟁 기사를 읽고가족의 앞에서 걸쭉한 욕지거리를 늘어놓고발코니에 죽치고 앉아 술을 마시는 것 뿐이었다그에게는 아무런 직업도 없었다그가 이런 꿈만 같은 생활(그의 말에 의하면)을 오래 전부터 계속 해올 수 있었던 것은 한 소녀 덕분이었다.

 

에스텔라-.” 남자는 누군가를 불렀다.

 

그 아인 학교에 갔어요.” 그의 아내가 대답했다.

 

오늘은 일요일 아니야?”

 

월요일이에요당신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아내가 탁자에 놓인 위스키 병을 치우려고 하자 남자는 소리를 질렀다.

 

그거 손 대지 마아직 다 안 마셨다고 시발…”

 

그가 소리를 지르자 아내는 움찔했다그가 툭하면 주먹을 휘두르는 것에 익숙해진 탓이었다남자는 마을에서도 틈만 나면 소란을 피우는 망나니로 유명했다술값을 잘 내지 않는 것은 기본이요술만 마시면 싸움을 일으키기 일쑤였기 때문이다하지만 그런 그도 경찰 앞에서는 태도가 매우 공손해졌다뿐만 아니라 그는 경찰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틈틈이 뇌물을 썼기에 감옥에 한 번도 가지 않았다.

 

사실 그가 이웃들의 미움을 받을 더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1년 전 정부군이 마을을 재점령했을 때 그는 반란군과 교류했던 이웃들을 고발해 포상금으로 술을 사 먹었다. ‘이웃을 팔아서 번 더러운 돈을 술을 마시며 탕진하다니 상놈도 이런 개상놈이 없다며 탄식하던 그의 노모는 결국 그 해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병으로 죽고 말았다하여튼 그는 이런 사람이었다.

 

그날 오후소녀는 학교를 마치고 건물 사이로 난 굽은 돌길을 걸어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집과 학교를 오가는 그녀의 모습은 이따금씩 지나가는 행인들의 눈길을 끌었다어깨까지 내려오는 이국적인 붉은 머리는 리본으로 단정하게 묶여 있었고잘 다려진 셔츠와 남색 점퍼 스커트-아마도 그녀가 다니는 학교의 교복-에 가려진 그녀의 몸은 풋풋하면서도 아름다웠다.

 

학교에 갈 때면 날아갈 듯이 가벼운 걸음으로 걸어가면서도 집으로 돌아오는 그녀의 걸음에는 무거운 느낌이 실려 있었다그녀는 집이집에 기다리고 있는 그녀의 일상이 너무나도 싫었다그녀의 일상이 원래부터 이런 것은 아니었다.

 

소녀의 아버지는 마을에서 꽤 부유한 편이었다아버지는 군인 집안 출신의 젊은 장교였고 상속받은 돈과 스스로 착실히 번 돈을 모아 재산이 꽤 되었다하지만 그는 소녀가 어렸을 적에 국외에서 벌어진 전쟁에 나가 전사하고 말았다아내는 출산 후유증으로 사별한 지가 오래였기 때문에 그가 남긴 유언장에는 고향 출신의 친한 전우에게 어린 딸을 맡기고 매달 딸의 양육비를 지급하겠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돌아온 전우에게 매달 양육비로서 지급되는 돈은 소녀의 생활비와 학비를 충당하고도 남을 만큼 충분했다하지만 남는 돈과 생활비로 쓰여야 할 돈의 일부는 전쟁으로 망가져버린 그의 위스키가 되어 사라져 가고 있었다심지어 뇌물과 술값으로 남는 돈을 모두 써버린 결과소녀는 졸업할 때까지 쓰여야 할 학비마저 상당 금액 모자라게 되었다.

 

다녀왔습니다.”

 

어서 오렴나의 에스텔라학교는 어땠니?”

 

집에 돌아온 소녀를 살갑게 맞아주는 것은 그 집의 부인이었다.

 

재미있었어요.”

 

친구들과 헤어져서 아쉽겠구나.”

 

.”

 

거짓말이었다그녀는 학교에서도 친구가 별로 없었다또래의 여학생들은 성적도 좋고 외모도 아름다운 그녀를 시기했기 때문이었다학교에 가면 그녀의 처지를 가엾게 여기는 나이 든 담임선생님만이 가끔씩 말을 걸어줄 뿐이었다.

 

저녁은 어떻게 할 거니?”

 

먹고 싶지 않아요.”

 

에스텔라는 이렇게 대답한 후 2층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발코니에 앉아있는 아저씨의 눈에 띄지 않게 살금살금 들어오는 것도 잊지 않았다그리곤 옷도 갈아입지 않고 침대에 누워 그대로 잠이 들었다.

 

아악-’


해가 저물자 또 시작이었다그녀는 거실에서 벌어지는 소란에 잠에서 깼다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캄캄한 어둠이 앞을 가렸다방에 난 창문으로는 우중충한 날씨에 가려 달빛조차 들어오지 않았다아래 층에서 아저씨가 아주머니를 때리는 소리만이 희미하게 들려오고 있었다그녀는 자신의 인생이 비참하게 느껴졌다보석같은 두 눈에서 눈물이 새어 나와 볼을 타고 흘렀다그녀는 생각했다.

 

누군가 나를 구해줬으면내일은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면.’

 

 

 

 

 

 

 

 

“…떠나고 싶어.”


 

 

4.

 

중위는 평평한 바위를 찾아 전술 지도를 펼쳐 놓고는 유심하게 살펴보았다라파엘을 포함해 몇몇 대원들이 그의 주위로 몰려들었다지도 위의 숲을 흝던 중위의 손가락이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지점에서 멈췄다그곳이 그들이 있는 위치였다그곳과 마을의 사이에는 넓은 개활지가 펼쳐져 있었다.

 

이 쯤에 둑길이 있을 거다.”

 

대위는 다른 손가락으로 마을과 가까운 개활지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여기에 엎드려 있으면 절대 안보여머리만 내놓고 상황을 살피기 좋아.”

 

마을의 해안가를 따라 남쪽으로 가다 보면 구릉이 있었고 더 가면 거인의 척추라고 불리는 전선을 가로지르는 산맥이 있었다중위는 설명했다.

 

철수할 때 우리가 왔던 길로 돌아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만약 정부군이 예상보다 빨리 온다면 개활지로는 다시 지나갈 수 없어이쪽 구릉을 따라 산을 타고 전선을 넘어야 할 거야.”

 

해는 이제 유격대가 지나온 숲 뒤로 넘어가고 있었다그들이 있는 곳은 숲의 그림자에 가려 완전히 어두웠지만 앞으로 보이는 개활지는 노을빛이 비쳐서 붉게 타고 있었다중위는 손목에 찬 시계를 보더니 말했다시계는 정확히 9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앞으로 20분 뒤면 해가 완전히 질 테지자정까지 충분히 매복 지점에 도착할 수 있을 거다.”

 

중위의 판단은 대부분의 상황에서 정확했다수년 간의 실전 경험을 통해 그는 이미 유능한 전술가가 되어있던 것이다그의 말대로 해는 약 20분이 지나자 모습을 감추었고 대지는 어둠에 덮였다.

 

가자.”

 

그래또 걸어야 할 시간이야.”

 

 

그들은 둑길에 도착했다둑길의 반대편에는 가까운 거리에 마을이 있었다중위는 낮은 포복으로 둑을 기어올라 머리만 내놓고 마을을 살폈다밤이 되면 사람들의 일과는 끝이 나기 마련낮에 사람들로 붐볐던 거리는 정적에 잠겨있었다늦은 시각이었기 때문에 불이 켜진 집조차 찾을 수 없었다마을 전체가 잠에 든 듯 했다.


달은 밝은 편이었지만 구름이 많이 낀 날씨 탓에 앞은 잘 보이지 않았다바다에서 불어 온 바람이 대지를 쓸자 풀이 스치는 소리만이 들려왔다대원들은 풀 속에 몸을 숨긴 채 중위의 지시를 기다렸다전투가 다가오면 긴장하는 것은 나름 정예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엄습하는 두려움에 라파엘은 습관적으로 권총을 만지작거렸다.

 

위험하니까 그만 둬.”

 

파비오가 말했다그러자 라파엘은 권총에서 손을 뗐다친구의 존재는 전투 전 뒤숭숭한 마음을 다스리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파비오가 말했다.

 

괜찮아이 정도는 말이야… 한두 번 해본 일도 아니잖아쫄 것 없어.”

 

안쫄았어너야말로 겁쟁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잖아.”

 

그들은 동시에 작게 웃었다웃음이 나왔지만 크게 웃지도 못하는 상황이 아쉽다고 라파엘은 생각했다.

 

후우나 담배 마렵다.”

 

파비오는 누가 보아도 담배를 즐기는 것 같이 보이지는 않았다누군가 그에게 왜 담배를 피우느냐고 물을 때면 파비오는 담배는 숨을 쉬는 데 도움을 준다고 대답할 뿐이었다.

 

우리 모두를 죽일 셈이야그 전에 알바로가 널 죽일 걸.” 라파엘이 말했다.

 

어차피 담배 같은 건 지금 없어껌이라도 있으면 좋겠네.”

 

근데 지금 자정 아니야언제 시작하는 거야?”

 

대장은 일부러 조금 더 기다리고 있는 거야.”

 

중위는 순찰을 도는 인원이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했다. 1시간 가량 지켜 보았지만 순찰은 코빼기도 안보였다그는 시계를 다시 확인했다언젠가 그가 정부군 장교의 손목에서 빼 온 시계-그것은 군기 풀린 원래 주인과는 다르게 시간을 매우 정확하게 가리켰다.

 

현재 시각 0001.

 

중위는 하루 중 가장 어두운 시간은 자정을 조금 넘겨서 온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그는 기다렸다그가 생각한 시간이 다가오자 째깍거리는 시계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마침내 시계는 하루 중 가장 어두운 시간을 가리켰다.

 

시간 됐다다들 나를 따라 와라.”

 

그들은 빠르고 조용하게 마을을 향해 달렸다그리고는 마을 외곽에 들어서자 잠시 멈춰 섰다경찰서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그것은 하얀색 외벽으로 둘러싸인 2층 짜리 큰 건물이었다이런 경찰서는 보통 스무 명 이상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정문과 후문이 있군후문은 너무 비좁아서 병력이 지나다니기에는 부적합하다.”

 

중위는 라파엘과 파비오두 명에게 후문을 지키는 임무를 맡겼다자신은 나머지 대원들을 이끌고 무방비 상태의 경찰들을 덮치기로 했다두 소년에게 비교적 안전한 임무를 맡긴 것은 무의식 중에 나온 결정이었다.

 

문 밖으로 뛰쳐나오는 놈이 있으면 그냥 총으로 쏴 버려우리는 나올 때도 정문으로 나올 거니까 걱정은 안해도 돼.”

 

경찰서의 정문 앞은 큰 광장이었고 나머지 삼면이 큰 돌길로 둘러싸여 있었다따라서 후문 앞도 도로였고 그곳에는 총알을 막아줄 아무런 엄폐물도 없었다두 소년은 후문에서 조금 떨어진 길의 가장자리에 엎드렸다.

 

나 탄 클립 하나만.”

 

라파엘은 허리에 맨 탄약 주머니에서 탄 클립을 꺼내 파비오에게 건넸다두 사람은 소총을 장전하고 후문을 향해 겨누었다아주 희미한 달빛이 후문과 그들 사이의 도로를 비추고 있었다.

 

잠시 후 중위가 이끄는 진입조가 경찰서 정문을 박차고 들어갔다총성은 울리지 않았다대원들의 고함 소리와 경찰들의 비명이 건물 밖으로 작게 들렸다그때 총검에 찔려 팔에 부상을 입은 순경이 후문을 뛰쳐나왔다그것을 본 라파엘이 먼저 방아쇠를 당겼다.

 

.

 

어두웠던 탓에 라파엘이 쏜 총알은 순경을 살짝 비껴서 외벽에 맞았다순경은 잠시 놀라서 멈춰서더니 그대로 다시 달렸다달리는 그를 향해 두 소년은 거의 동시에 방아쇠를 당겼다.

 

.    .


순경은 파비오가 쏜 총알에 복부를 맞고 쓰러졌다라파엘이 쏜 차탄은 쓰러지는 그의 뒷머리를 날려버렸다순경의 무언가가 건물 외벽에 흩뿌려졌다순경의 마지막은 그렇게나 참혹했다.

 

이런 십…”.

 

그 광경을 본 파비오의 입에서 욕설이 새어 나왔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다행이었다순경이 죽는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면 평생 잊혀지지 않을 만 했다

 

두 사람이 울린 세 발의 총성은 마을의 모두를 깨웠다얼마 지나지 않아 집집마다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조금 뒤 경찰서 정문에서 알바로 중위가 뛰쳐나왔다두 손을 든 경찰들과 나머지 대원들도 따라 나왔다중위는 소리쳤다.

 

도망가기 전에 놈들을 빨리 잡아야 해.”

 

포로로 잡힌 경찰들은 모두 열다섯 명이었다원래는 인원이 더 있었지만 저항하려는 낌새를 보인 그들은 총검에 찔려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중위는 살아남은 포로들에게 정문 앞 도로에 엎드릴 것을 명령했다곧 그는 포로들을 아침까지 지킬 인원을 선별했다.

 

안드레스파비오엔리코그리고 너.”

 

대장인원이 더 필요합니다.” 체라고 불리는 대원이 말했다.

 

아니이게 있으면 여섯 명으로도 충분해.”

 

중위는 양손에 든 개량형 기관단총을 들어 보였다. 39발 짜리 드럼 탄창이 끼워진 이 신형 기관단총은 정부군에 의해 작년에 개발된 물건이었다중위는 선별한 두 명의 대원에게 기관단총을 건네며 말했다.

 

경찰서 무기고에 탄알집이랑 총알이랑 잔뜩 있어쓸 놈은 가져다 써.”

 

그리곤 중위는 바닥에 눕혀진 경찰들을 향해 비아냥거리는 어조로 말했다.

 

경찰들이 잘도 이런 물건을 가지고 있구만군에서 지원 받았나 보지안에 보니 수류탄도 있던데 자네들에겐 아쉽게도 못 쓰게 됐군.”

 

중위는 경찰들도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혹시라도 어떤 포로가 바닥에서 일어나는 순간 나머지 포로들까지 벌집으로 만들어 버리라고 지시했다그런 그의 지침에 도망칠 생각을 하던 몇몇 포로들도 결국 체념할 수 밖에 없었다.

 

20명에서 6명을 제외하자 중위 자신을 포함해 열넷의 대원들이 남았다중위는 남은 사람들을 두 개의 조로 다시 나누어서 목표 인원을 체포해 오기로 했다. 1조는 중위 자신이 지휘를 맡았고 2조는 부대에서 가장 경험이 많은 베니토라는 병사가 지휘를 맡도록 했다중위는 라파엘을 1조에 넣었다.

 

베니토이것을 받게목표 인원의 이름과 번지수가 적혀 있는 쪽지야집에 여러 명이 있어서 누굴 잡아와야 하는지 헷갈리면 그냥 자네 재량껏 알아내.”

 

중위는 사전에 정보원으로부터 입수한 쪽지를 반으로 찢어서 2조에게 주었다모두들 자신이 맡은 역할을 확인하자 중위의 유격대는 곧바로 흩어졌다중위의 시계는 1시 반을 가리켰고 그는 서둘러야 원래의 계획에 맞출 수 있음을 알았다무더운 여름 밤어둠이 그들을 가려줄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동이 트는 6 30분까지 모든 체포 작업이 이루어져야 했다.

 

 

1조의 알바로 중위와 라파엘그리고 대원들은 어둠 속의 거리를 이동하고 있었다그들은 세 명의 대상을 이미 체포해서 넘긴 후였다이제 남은 것은 시장을 포함해 또 다른 세 명.

 

거리는 완전히 어두운 것은 아니었다곳곳에 난 창문으로 불빛이 새어 나와 길을 비추었기 때문이다지금은 많은 집에 불이 켜져 있었다모두들 서둘러 가던 그 때한 주민이 창문을 열고 크게 외쳤다.

 

주정뱅이 코넬리오부터 쳐 죽이시오그놈은 이 길이 끝나는 곳에바다가 보이는 2층 집에 살고 있소!”

 

코넬리오라…’

 

중위는 자신이 가진 쪽지를 펼쳐 어딘가에 적혀 있을 그의 이름을 찾았다. C로 시작하는 이름은 하나밖에 없었기에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코넬리오 마르틴 로뻬스 중사

6번 가로수 길, 3번지파란 지붕 집.

이웃 고발 및 기타 민족 배반 혐의.

 

그럼 그 놈부터 잡으러 가죠?” 한 대원이 말했다.


바로 저기다저 집인 게 분명해.”

 

중위는 앞을 보았다돌길이 끝나는 곳에 2층 집의 형채가 보였다그 순간 달을 가리던 구름이 걷히며 달빛이 푸른 지붕과 그 뒤의 파도치는 바다를 비추었다. 1층에는 열린 문 틈으로 희미하게 보였지만 등불이 켜져 있었다.

 

중위는 체급에 맞지 않는 긴 소총을 들고 자신의 옆을 달리는 소년을 보았다.

 

 

 

 

 

 

 

 

그건 이리 주고 권총을 들어라 라파엘이제 들어갈 거다.”

 

 

 

 

 

 


 

 

5.

 

거실이 잠잠해지나 싶었던 소녀는 아주머니가 걱정이 되어 조용히 방에서 나와보았다나무 바닥에서는 가끔씩 밟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에스텔라는 그 소리가 날 때마다 마음이 조마조마했다그녀는 조심조심 계단 쪽으로 걸어와 난간을 붙잡고 1층을 내려다 보았다그 집은 2층의 난간에서 거실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구조였다희미한 불빛이 난장판이 되어버린 거실 바닥을 비추고 있었다.

 

깨진 술병 조각들이 널브러진 가운데 아저씨가 앉아있었다그는 앉은 채로 잠에 든 것처럼 보였다그리고 그의 옆에 쓰러진 아주머니가 보였다바닥에 피가 묻어있었다에스텔라는 그것을 보고 너무 놀란 나머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때 문이 열어 젖혀지는 소리와 함께 무장한 대여섯 명의 남자들이 거실로 달려들어 왔다알바로 중위와 라파엘이 가장 먼저 들어와 모습을 비추었고 다른 대원들도 서둘러 따라 들어왔다.

 

“…이건 뭐야?”

 

라파엘은 눈 앞에 보이는 거실의 광경에 당황했다놀라기는 중위도 마찬가지였다그러나 이내 침착해진 중위는 바닥에 앉아있는 남자를 보고 큰 소리로 외쳤다.

 

어이주정뱅이 코넬리오!”

 

그 소리에 놀라서 깬 남자가 엉겁결에 대답했다.

 

-!?”

 

대답하는 걸 보니 자네인가 보구만.”

 

곧바로 중위는 들고있는 소총을 가볍게 휘둘러 남자의 얼굴을 쳤다그러자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정신을 차린 남자가 말했다.

 

잘못했습니다 경찰 나으리이건 실수로 그런 것입니다…”

 

중위는 그의 반응을 보고는 말했다남자는 그를 경찰 간부로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럼 새끼야빨리 일어나서 걸어넌 여기 이 경찰 나으리를 따라오면 되는거다.”

 

세 명의 대원이 남자를 문 밖으로 끌고 나갔다바닥에 쓰러진 부인의 상태를 확인하던 대원이 말했다.

 

숨을 안 쉽니다이렇게 된 지 한 시간은 지난 것 같아요.”

 

그러자 중위도 다가가서 확인했다.

 

이런뇌진탕인가이미 숨을 거둔 것 같군…”

 

라파엘은 거실에서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발견했다. 2층에는 불이 꺼져 있어서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었다그는 누군가 자신을 내려다 보는 듯한 느낌이 들어 계단을 올라가보려고 했으나 빠르게 다른 집도 가보아야 한다는 중위의 말에 집을 나올 수 밖에 없었다대원들은 남자를 데리고 다른 곳으로 서둘러 이동했다.

 

이 모든 것을 지켜보던 에스텔라는 대원들이 떠나자 그제서야 계단을 내려왔다그녀는 아주머니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그녀를 형식적으로라도 친절하게 대해주던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고 생각하자 슬펐다하지만 동시에 적어도 자신은 살아있다는 생각에 안도했다아주머니에게 일어난 일이 자신에게도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그 사람들은 반군이었나?’

 

그녀는 학교에서 반군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대부분은 밤 중에 마을을 습격해 남자들을 죽이고 여자들은 강간한다는 내용이었다방금 전에 본 것으로 미루어 보아 밤 중에 마을을 습격한다는 건 사실이었다하지만 나머지는 오히려 반대였다그녀가 보기에 죄 없는 아주머니를 죽이고 강간한 것은 코넬리오 아저씨였고 반란군은 오히려 경찰들도 내버려두던 그 망나니를 잡아간 정의로운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아까 그 소년…’

 

그녀는 방금 전 자신과 눈이 마주친 군복을 입은 소년에 대해 생각했다다른 군인들은 계단 위에서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우연히 마주친 소년의 얼굴만은 똑똑히 기억이 났다소년에 대해서는 마치 자신을 끔찍한 운명으로부터 구해주기 위해 온 것처럼 느껴졌다.

 

에스텔라는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았다그녀는 이 끔찍한 집구석에 더는 있고 싶지 않았다지금이 아니라면 도망칠 수 없을 것 같았다마침 열려있는 현관문으로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차가운 바닷 바람은 그녀의 귓가에 이렇게 속삭이는듯 했다.

 

멀리 떠나버려이제 널 잡아두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그녀는 그대로 거리로 뛰쳐나왔다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그녀는 지금 지난 몇년간 자신을 가둬 두었던 집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목적지는 알 수 없었다그저 마을의 입구를 향해 달릴 뿐이었다얼마나 달렸을까그녀는 마을의 입구에 가까워지고 있었다모퉁이를 도는 순간 그녀는 골목에서 튀어나온 한 남자와 부딪혀 넘어졌다잠옷 위에 외투를 급하게 걸치고 나온 듯한 이 남자 또한 자신의 운명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다.

 

자 잠깐 얘야…!”

 

무슨 생각에서인지 시장은 에스텔라의 손목을 잡았다에스텔라는 그의 억센 손을 뿌리치려고 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거 놔요!”

 

또 다시 무언가에 얽매이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그녀를 엄습했다그 때였다인기척을 느끼고 반대편 길에서 달려오던 누군가가 소리쳤다.

 

베니토시장과 그의 딸을 찾았어!”

 

곧이어 따라온 군인들이 길에 넘어진 두 사람을 에워쌌다그 중 한 사람이 말했다.

 

산 마르코스 시장너를 민족 배반 혐의로 체포한다.”
 

6.

 

결국 동이 트기 시작하자 중위는 미처 잡아들이지 못한 사람들을 포기하는 수 밖에 없었다경찰서 앞 광장에는 새벽 일찍 주민들이 모여들었다그들은 부패한 정부군 경찰들과 소위 배신자들이라고 불리는 이들의 죽음을 보고 싶어했다그들이 돌 바닥에 엎드린 죄인들을 향해 소리를 지르고 침을 뱉는 모습은 마치 광기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였다가장 욕을 먹고 있는 것은 단연 주정뱅이 코넬리오였다몇몇 마을 남자들이 그를 때려죽이려고 드는 바람에 중위가 나서 그들을 제지시켜야 할 판이었다.

 

꼴 좋다이 망나니 새끼야!”

 

진정하시오어차피 그는 곧 죽을거요.”

 

카악 퉤

 

결국 더 이상 마을 주민들을 통제하며 기다릴 수 없다고 판단한 중위가 빨리 모두를 총살할 것을 명령했다라파엘에게도 그들을 총살하라는 임무가 주어졌다.

 

하기 싫으면 내가 하마.”

 

중위가 제안했다그는 라파엘에게 이 일을 맡기고 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됐어요.”

 

라파엘은 소총에 총알을 집어넣고 장전한 후 바닥에 눕혀진 한 경찰을 향해 겨누었다경찰들은 더 이상 공포의 존재가 아니었다곧 있으면 세상을 떠날 운명인총알 앞에 무력한 존재였다많은 자가 죽음을 앞두고 눈물을 참지 못했다라파엘이 두 손으로 총을 감싸 쥐자 오른손에 방아쇠의 매끈한 감촉이 느껴졌다.

 

총 스물 두 명의 죄인들중위의 대원들은 스무 명이었기 때문에 두 차례에 나눠서 사격해야 했다시장은 경찰서 건물 안에서 두 번째로 희생될 자신의 운명을 기다리고 있었다시장의 딸로 오인 받고 잡혀온 에스텔라는 처벌 대상이 아니었다다만 시장과 같은 감방에 갇혀있을 뿐이었다그들을 경찰서 건물 안에서 대기시킨 것은 중위의 어떤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그는 시장이 체포되었다는 사실을 주민들에게 공개하지 않았다.

 

신호와 함께 여러 발의 총성이 함께 울렸다그러나 라파엘은 쏘지 않았다어째서인지 그는 평소보다 방아쇠가 무겁게 느껴져서 제때 총을 쏘지 못한 것이다라파엘이 겨누고 있던 경찰은 자신이 아직 총에 맞지 않은 것을 알아차리고 자리에서 일어서서 떨리는 목소리로 애원했다본의 아니게 경찰의 얼굴을 겨누게 되어버린 라파엘은 그를 알아보았다.


그 경찰은 3년 전 정부군이 라파엘의 마을에서 사람들을 총살했을 때 총을 쏘지 않은 단 한 명의 군인이었다그는 복무 기간을 마치고 제대한 후 이곳 산 마르코스에서 경찰이 된 것이었다제복이 바뀌었을 뿐 그의 얼굴은 그대로였기에 그날 총살에 가담한 군인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던 라파엘은 그를 바로 알아보았다.

 

쏘지 말아요저는 맹세코 죄 없는 사람에게 폭력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라파엘의 마음 속에서 오랫동안 억누르고 있던 죄책감이 고개를 들었다.

 

그때의 군인들을 만나 복수하기를 원했는데 만난 것이 왜 하필 이자인 걸까…!’

 

일발의 총성이 울리고 애원하던 경찰은 곧 라파엘의 발치에 쓰러졌다파비오가 당황한 얼굴로 다가와 라파엘의 어깨를 붙잡고 상태를 물었다.

 

괜찮아갑자기 무슨 일이야?”

 

라파엘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주저앉았다그는 숨을 거칠게 쉬었다파비오는 그런 그를 부축해 경찰서 건물 안으로 옮겼다다행히도 옮겨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라파엘은 스스로 일어설 수 있었다라파엘은 스스로도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한편 소년이 무너지는 모습을 본 알바로 중위는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차라리 자신이 대신 하였다면.

 

작은 소란으로 인해 시장의 처형 집행이 지연되던 때한 주민이 달려와 소리쳤다.

 

정부군이 오고 있답니다어서 도망가요!”

 

중위는 시계를 보았다오전 7시를 조금 넘은 시각그가 예상한 것보다 철수가 늦어지고 있었다어쩔 수 없었다그는 자신이 생각해 놓은 계획을 실행에 옮겨야 했다.

 

해산모두 집으로 돌아가시오처형은 끝났소!” 중위는 크게 소리쳤다.

 

그러지 않아도 주민들은 정부군이 곧 온다는 소식에 혼비백산하여 흩어지는 중이었다.

 

시간을 너무 지체했다지금 당장 철수해야 한다.” 중위가 대원들에게 말했다.

 

경찰서 안에 대기시켜 둔 그들은 어떻게 합니까?”

 

산 마르코스 시장은 단순히 마을의 대표가 아니었다그는 이 마을에서 자라긴 했지만 어른이 되어 수도로 떠난 후 출세하여 고위 공무원이 된 사람이었다그는 정부군이 1년 전 마을을 점령한 후 원래 시장을 납치하고 대신 앉혀놓은 인물이었다알바로 중위가 보기에 정부 측의 고위 인사인 시장은 정부군의 추격을 늦춰줄 지도 모르는 좋은 미끼였다.

 

시장은 우리가 데리고 간다머리에 대충 속이 보이지 않는 천을 덮어씌우고 이동시켜라.”

 

그들은 경험 많은 정예답게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시장과 그의 딸(로 추정되는 인물)을 데리고 마을을 벗어나는 데에는 십 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추격받고 있다는 걸 알아서인지 그들은 마을을 들어왔을 때 보다 더욱 신속하게 이동하고 있었다.

 

 

정오가 되자 해안은 바로 위에서 빛을 받아 반짝였다바다에서는 소금기를 가득 먹은 바람이 불어와 군인들의 상처를 따갑게 했다그들은 남쪽으로 해안가의 구릉을 따라 산맥으로 향하고 있었다그들이 전날 걸어온 개활지를 통해 숲으로 후퇴할 수 없는 이유는 정부군 추격대가 차량을 이용한다면 개활지를 지날 때 따라잡힐 수 있기 때문이었다알바로 중위는 산악 보병의 이점을 살려 차량이 지나다닐 수 없는 구릉과 산악 지대를 통해 가야만 탈출할 희망이 있다고 판단했다.

 

해안선을 따라 길게 자리한 그 험준한 산맥은 타국에서는 보기 힘든 이 나라만의 독특한 지형이었다산맥은 예로부터 바다를 건너오는 외적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방벽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허나 지금적은 국외가 아닌 국내에 있었다수년 동안 벌어진 내전은 산맥을 끼고 내륙에서 벌어졌고 나라의 거의 모든 것을 파괴했다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산맥 너머의 해안지대는 전쟁으로부터 원래의 모습을 지킬 수 있었다.

 

라파엘과 그의 일행은 지금 나라에서 가장 잘 보존된 자연 속을 걷고 있었다남쪽으로더더욱 남쪽으로.

 

정부군 놈들이 벌써 코 앞에 왔답니다.”

 

중위는 철수가 너무 늦었던 것을 후회했다이대로라면 아무리 빨리 걸어도 산을 바로 앞에 두고 적과 교전을 벌이게 될 것 같았다이제 믿어볼 만한 것은 인질로 데리고 있는 시장과 그의 딸이었다.

 

젠장… 하지만 아무리 정부군이라 해도 시장 정도 되는 인물이면 최대한 노력해서 그를 구하려고 할 거야어떻게든 그들과 무전으로 접선할 방법을 찾아야 되겠군

 

아니 그런데시장은 어디 쯤에서 걷고 있는 거야?”

 

인질들이 보이지 않자 그가 주변에 물어보았다.

 

포박한 채로 걷느라고 많이 뒤처진 모양이에요” 파비오가 대답했다.

 

아직도 묶어 놨단 말이야마을을 벗어날 때 진작에 풀어줬어야지…”

 

라파엘의 앞으로 밧줄로 포박한 시장과 에스텔라가 걷고 있었다중위가 그에게 인질들의 경비를 맡긴 것이었다바위투성이 언덕을 걷는 동안 손이 묶인 두 사람은 돌뿌리에 발이 걸려 자주 휘청거렸다에스텔라는 안 그래도 더운 날씨에 손까지 묶인 채로 걷는 것이 괴로웠다그녀의 흰 손목은 밧줄에 쓸려 발갛게 되었다.

 

그것을 보다 못한 라파엘은 두 사람을 멈춰 세웠다그는 이들을 왜 묶어 놓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더군다나 시장은 머리에 천까지 덮어씌운 채로 걷고 있어서 라파엘이 보기에 그대로 두면 고꾸라져 죽을 것 같았다.

 

손을 이리 주시오.”

 

라파엘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주머니칼로 두 사람의 밧줄을 끊어냈다그리고는 시장의 머리 위에 씌워진 천도 벗겨주었다.

 

고마워” 에스텔라가 한 마디로 감사를 표했다.

 

그녀가 손이 묶여 힘이 들 때 두 손을 해방시켜준 것은 이번에도 그 소년이었다소년은 그녀에게 전날부터 깊은 인상을 주고 있었다그러나 라파엘은 전날 밤 자신도 모르게 눈이 마주친 소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이제 허튼 짓 하지 마시오도망치려고 한다면 이 권총이 불을 뿜을테니.”

 

라파엘은 어쩌면 정부군과 한통속일지도 모를그러나 겉보기에는 덧없이 순수해보이는 소녀에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도망치지 않아어차피 갈 곳도 없는 걸.”

 

“…”

 

그 때 라파엘의 둘도 없는 전우가 멀리서 다가와 말을 걸었다.

 

뭐하냐 라파엘연애하냐?”

 

뭐래.”

 

담배 있어? …없어?”

 

라파엘이 담배가 없다고 하자 파비오는 시장 쪽을 보더니 그에게 다가갔다.

 

어이시장담배 가지고 있소그래 이거 나 좀 주시오.”

 

파비오는 시장의 외투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발견하자 기쁜 눈치였다시장의 담배는 수도에서만 구할 수 있는 외국제 상표였다근방에서 꽤나 수요가 있었기 때문에 대체 화폐로 쓰이기도 했다그러나 파비오는 담배의 가치에는 관심이 없는 듯이 담뱃갑에서 담배 몇 개비를 꺼내고는 담뱃갑을 도로 돌려주었다.

 

무슨 일이야?”

 

라파엘이 묻자 파비오가 인질들이 듣지 못하게 라파엘의 귀에 대고 말했다.

 

알바로가 너네 빨리 오래우리 정부군한테 거의 따라잡혔어.”

 

이 말을 듣자 라파엘은 시장과 에스텔라를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빨리 빨리 걸으시오괜히 줄을 풀어준 것이 아니란 말요.”

 

이제는 인질들을 앞에 두고 라파엘과 파비오가 나란히 걷고 있었다파비오는 라파엘과 소녀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재밌다는 듯이 말했다.

 

-예쁘네

 

제발 좀 닥쳐.”

 

 

두 손이 자유로워진 인질들과 라파엘은 아까보다 더욱 열심히 걸어서 본대와 합류했다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부터 걸었는데 지금은 또 다시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라파엘의 매일은 이런 식이었다그는 고단하면서도 변함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파비오 말이 맞아도대체 언제쯤 끝이 날까.’

 

라파엘은 아침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라파엘이 차마 쏘지 못했던 그 경찰의 죽음은 왠지 모르게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전에 그를 한 번 보았다는 사실 말고 특별한 점은 없었는데왜 나는 마음이 이렇게나 아픈 걸까.’

 

일행은 이제 평지와 산맥 사이의 구릉을 지나 산의 초입부에 들어선 참이었다걷다 보니 어느새 딱딱한 모래투성이 바닥이 아니라 솔잎에 덮인 푹신한 흙 위를 걷고 있었고 주변에는 높은 나무가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경사는 가면 갈수록 가팔라졌다본격적인 산행의 시작이었다앞으로 이어질 가파른 길을 생각하니 병사들의 입에서 탄식이 절로 나왔다.

 

우웩

 

헛구역질을 한 것은 파비오였다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한 마당에 담배 연기를 들이마시자 속이 뒤집어진 것이었다.

 

이그 병신아그리고 누가 저녁에 담배 피우래.” 대원들 중 누군가가 그를 나무랐다.

 

배가 고픈 것은 모두 마찬가지였다어느 정도는 예상을 했었지만 전날 야영지를 떠나 온 뒤로 아무것도 먹지 못한 사람이 대부분이었다이렇듯이 유격전의 의미는 적과 교전을 벌이는 것보다도 피로나 배고픔제때 치료할 수 없는 부상 등의 요소 때문에 자기 자신만의 싸움을 하는 것에 가까웠다.

 

모두가 지쳐가던 그때 누군가가 하늘에서 들리는 소음을 눈치채고는 소리쳤다

 

항공 정찰이다!”

 

라파엘은 하늘을 쳐다보았다적군 항공기가 아래에 있는 이들의 존재를 알아챈 듯 머리 위를 맴돌기 시작했다마치 먹잇감을 좇는 맹금과도 같은 모습이었다동체 크기에 비해 유난히 긴 날개와 검은색 도장이 눈에 띄는 기체였다경험있는 유격대원이라면 누구나 그 비행기가 머리 위를 맴돌고 있는 것이 무슨 상황인지 잘 알고 있었다그것을 뜻하는 정부군 측 암호명은 '검독수리였다하지만 포격을 부르는 그 불길한 새를 반군들끼리는 '시체매라고 불렀다.

 

너무 늦었다우리가 이 밑에 있는 걸 눈치챘어.”

 

위험한 상황이었다그들은 곧 시작될 지도 모르는 포격에 대비하기 위해 엄폐물을 찾았지만 주변에는 포격으로부터 그들을 방어해줄 수 있는 구조물이 없었다라파엘 역시 엄폐물을 찾아 헤맸다그의 눈에 경사면 위쪽 50미터 쯤 떨어져 있는 곳에 큰 바위가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바위 밑에는 엎드리면 사람이 두어 명 정도 들어갈 만큼 땅이 패여 있었다라파엘은 시장과 소녀에게 그곳으로 가서 엎드리라고 했다.

 

곧 포격이 시작될 거요산산조각이 나기 싫다면 가서 엎드려 있으시오.”

 

산산조각이 난다고?” 시장이 물었다.

 

그렇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공기를 찢는 듯한 소음과 함께 여기저기로 포탄이 날아들었다.

 

어서 가서 엎드리시오어서!”

 

라파엘은 바위 쪽으로 냅다 달렸다그의 조금 앞에서 시장과 소녀가 뛰고 있었다바위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포격은 일대를 불로 뒤덮었고 강철 파편과 나뭇조각 따위를 사방에 흩날렸다경사면 아래쪽부터 시작해 점점 라파엘이 있는 곳까지 폭발이 다가오고 있었다마침내 라파엘과 두 인질 근처에 포탄 하나가 떨어졌다.

 

…!’

 

폭발과 함께 라파엘은 뒤로 나동그라졌다귀를 찢을 듯한 이명이 들렸고 누운 자리에서 조차 중심을 잡기가 어려웠다곧바로 정신을 차린 그는 비틀거리며 바위 쪽으로 나아갔다그는 땅이 조금 패인 곳 앞에 시장과 소녀 두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다그는 두 사람을 구덩이 안으로 밀어 넣고 자신도 그 위에 엎드렸다.

 

한 차례의 포격이 지나가자 여기저기서 고통에 신음하는 소리가 들렸다그들은 포격에 상당한 피해를 입은 것이 분명했다.

 

파비오!”

 

라파엘은 친구의 생사가 걱정이 되었다그러나 그는 구덩이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두 번째 포격이 다시 한번 일대를 뒤집어 놓았기 때문이다라파엘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무력감을 느꼈다이후에도 포격은 한동안 이어졌다.

 


 

 

7.

 

밤이 되자 중위는 몇가지 절망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첫번째는 아까의 포격으로 인해 자신과 부하들이 전투 능력을 상당 부분 상실했다는 사실이었다죽거나 부상당한 대원들이 열네 명이나 되었고 아무도 제대로 된 치료를 해줄 수 없었기에 사람들은 계속해서 죽어가고 있었다두번째는 그들이 산의 초입부에서 정부군에 완전히 포위 당했다는 사실이었다게다가 인질로서 보호하고 있던 시장이 아까의 포격에서 죽어버렸기 때문에 중위로서는 포위에서 벗어날 뾰족한 수가 없었다.

 

라파엘은 포격이 지나가자 일단 바로 옆에 있던 두 사람의 생사를 확인했다소녀는 크게 다친 곳 없이 무사했지만 시장은 귀 바로 밑 동맥에 포탄의 파편을 맞고 죽어있었다라파엘 자신은 오른손에 작은 나뭇가지가 박혀 상처가 난 채였지만 감염만 조심한다면 큰 부상은 아니었다그리고 그는 구덩이 주변을 살피던 중 한가지 희망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파비오가 죽지 않았다는 것다만 그는 포격에 한쪽 다리를 잃고 죽어가고 있었다라파엘은 검은 그을음으로 뒤덮인 땅에 그가 누워있는 것을 발견하고 다가갔다.

 

파비오살아있었구나오오…”

 

파비오는 가장 친한 친구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어둠이 그의 눈을 가리고 있었다.

 

라파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마지막으로 그는 친구의 품에서 눈을 감았다라파엘의 한줄기 희망은 그렇게 더욱 괴로운 절망이 되어 다가왔다마음 속에서 커져가던 공허함이 결국 그를 집어삼키는 순간이었다.

 

알바로 중위 역시 그 모습을 보고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그는 자신이 어린 소년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팠다그는 결국 파비오를 포함한 부하들의 생명을 책임지지 못한 것에 대해 스스로에게 울분을 쏟아내었다.

 

아아 결국에는 이렇게 될 줄 몰랐던가받아주지 말았어야 했어내가 그를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야.’

 

그는 자신이 이제껏 죄를 지었음을 깨닫고 만 것이다강요하진 않았지만 어린 소년을 전투의 길로 이끈 것은 그의 책임이었다중위는 하늘에 자신의 죄를 고백했다그리고 모든 것을 바로잡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구름이 끼지 않은 밤달이 땅을 환하게 비추었다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지옥도가 펼쳐졌던 라파엘의 주위에는 고요한 침묵이 깔렸다지금은 정부군 쪽에서도 별 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생사의 경계에서 끝까지 버티던 대원들이 모두 안식을 얻자 고통에 힘겨워하는 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달빛 아래 모든 것이 은은하게 빛나는 이 순간이 모르는 이가 봤더라면 낭만적이었을 것이다하지만 지금 라파엘은 깊은 슬픔에 빠진 채 바위 밑에 앉아있었다그에게는 이제 모든 것이 의미가 없었다마음이 텅 비어버렸기 때문이다그의 두 눈에서 타오르던 불꽃은 꺼지고 말았다그러자 참으로 오랜만에 눈물이 맺혔다.

 

에스텔라도 하루 사이에 벌어진 이 모든 사건들로부터 큰 충격을 받았다아주머니의 죽음과 거리에서 벌어진 총살그리고 몇 시간 전의 포격은 그녀가 감당하기 힘든 일들이었다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그녀를 한 번 괴로운 일상에서 구해준 소년이 너무나도 슬픈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이날과 같은 경험을 오랫동안 겪어왔을 소년을 생각하니 무너진 그의 모습에 연민을 느꼈다그녀는 이번에는 자신이 소년을 절망에서 구해주고 싶었다.

 

소년과 소녀는 바위 아래 비좁은 공간에 나란히 앉아있었다.

 

저기…” 소녀가 먼저 말을 걸었다.

 

그녀가 말을 걸자 소년은 고개를 돌렸다그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소녀는 흙먼지를 온몸에 뒤집어쓰고 있었지만 그것이 그녀의 아름다움을 감추지는 못했다

 

상대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두 사람은 잠시 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름은?”

 

“…라파엘.”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에스텔라는 라파엘에 대해 이런저런 것들을 물어보았지만 그는 왠지 그녀가 부담스러워 묻는 말에 대답을 할 뿐이었다에스텔라는 라파엘의 나이가 몇 살인지 물어보았다.

 

열다섯.”

 

나보다 고작 한 살 많네.”

 

다음 달이 생일이니까 곧 열여섯이야.”

 

그건 나도 마찬가지인걸.”

 

어색함을 참을 수 없던 라파엘이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이름을 물어보았다.

 

그럼 네 이름은?”


나는 에스텔라.”

 

에스텔라별과도 같은라파엘은 그 이름에 대해 뭔가 촌스럽다는 느낌을 받았다그렇지만 그는 곧 그 이름의 의미를 나름대로 알 수 있었다.

 

어쩌다가 싸우게 됐어?”

 

그녀의 질문이 라파엘의 정곡을 찔렀다여러 이유들이 생각났지만 라파엘은 그것들을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진실만을 강요하는 듯한 소녀의 눈… 라파엘은 생각했다.

 

라파엘은 3년 전의 일을 떠올렸다아버지가 총에 맞아 돌아가신 일과 혼자 울던 그에게 다가왔던 알바로 중위… 그때의 라파엘은 정부군을 향한 복수심에 가득 차 있었다.

 

알바로가 나를 부추겨서 였을까?’

 

아니었다중위는 라파엘에게 전투에서 자신을 도울 것을 강요하지 않았다그 순간 라파엘은 자신을 괴롭게 했던 죄책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이제껏 그 누구도 내게 그들을 죽이라고 강요하지 않았어과연 나는 정말로 복수를 생각하며 이 모든 일들을 저질렀을까?’

 

스스로의 의지로 손에 피를 묻히는 것은 잘못이었다그리고 지금 라파엘은 자신이 그것을 행했던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모르겠어.”

 

비참한 기운이 밀려오자 라파엘은 흘러나오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알았는데이제는 잊어버렸어미안해나는 너에게도 나쁜 짓을 하고 있던 걸지도 몰라.”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3년 전 모든 것이 시작된 사건그리고 복수하기 위해 이제껏 싸워왔지만 언제부터인가 동기를 잃어버렸다는 사실까지.

 

나는 악당일지도이후에는 그걸 즐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게 무서워.”

 

에스텔라는 그렇게 라파엘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그녀는 그가 가여웠다.

 

진정해넌 즐기고 있던 게 아니야그리고 악당은 울지 않아.”

 

그녀는 스커트의 주머니에서 파란 손수건을 꺼내 라파엘에게 건넸다.

 

그리고 깨달았다면 이제는 멈춰야 해.”

 

이제는 멈춰야 했다라파엘은 전부터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그것은 라파엘만이 느끼는 것이 아니었다그의 가장 친한 친구도 같은 생각을 했었다내전이 시작되자 많은 이들이 강한 동기를 느끼고 싸움에 뛰어들었다하지만 수년의 시간이 지나자 대의나 명분같은 것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쉽게 잊혀졌다.

 

라파엘은 감정을 추슬렀다그녀의 위로를 받자 마음이 텅 비어버린 듯한 느낌을 견딜 수 있었다.

 

그래이제는 그만할 거야.”

 

에스텔라는 라파엘의 관심을 다른 것으로 돌리기 위해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나에게 나쁜 짓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니… 전혀야넌 나를 구해줬잖아.”

 

그게 무슨 말이야?” 라파엘은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전날 밤부터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라파엘에게 알려주었다그녀가 계단 위에서 라파엘과 마주친 일을 이야기하자 라파엘은 놀라서 물었다.

 

뭐라고그게 네 집이었다고?”

 

그때 난 너랑 눈이 마주쳤었어네가 날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라파엘은 생각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럼 시장은 누구야네 아버지 아니야?”

 

모르는 사람이야어쩌다 보니 같이 잡혀왔는데 그래서 지금 그 얘길 하려고 하잖아.”

 

왜 이제껏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어그렇다면 우리를 따라오지 않아도 되었잖아… 아니이걸 지금 당장 알바로한테 말해야겠다.”

 

마을을 떠나고 싶었어결과적으론 그렇게 되었잖아.”

 

에스텔라는 라파엘이 혼란스러워 하는 와중에 그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덕분에 지옥같은 나날에서 벗어날 수 있었어네가 날 알아보지 못한 덕분에.”


그리고는 오랫동안 정적이 흘렀다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지만 그들은 서로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젠 어떻게 하지?”

 

라파엘은 고민했다그에게 무언가를 하라고 부추기는 것은 더는 남아있지 않았다라파엘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달이 밝아서 다른 때보다는 아니었지만 무수히 많은 별이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그는 옛날 뱃사람들이 대양에서 길을 찾을 때 별이 그들을 이끌어주었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산 아래 저 멀리 해안가에서 파도가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라파엘은 스스로가 조각배에 올라탄 채로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뱃사람처럼 느껴졌다그때 잠시 머뭇거리던 에스텔라가 대답했다

 

일단은 살아서 산을 내려가야 하고… 그 다음에는 함께 떠나지 않을래?”

 

함께?”

 

그래.”

 

 


 

 

8.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어스름 속에서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간밤의 고민 끝에 각자의 결심을 가슴에 품은 채.

 

알바로 중위와 남은 몇 명의 대원들은 결전을 준비했다다른 방법은 없었다어떻게든 적의 포위망을 뜷기 위해 싸우는 것이 그들 스스로가 운명을 받아들이는 방법이었다다만 중위는 라파엘을 그의 마지막 작전에서 제외시켰다그것은 그가 라파엘을 전쟁에 끌어들인 잘못을 뒤늦게라도 바로잡기 위함이었다어쩌면 이것이 그가 무리한 이번 작전을 감행하는 진짜 이유이기도 했다.

 

중위는 이것이 그의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자 두려웠다그는 단 몇명의 인원으로 잘 무장된 적을 무찌르는 기적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었다수많은 전투에서 앞장서서 싸워온 그였지만 이번 전투만은 그에게 큰 용기를 필요로 했다그는 그가 믿는 것을 위해 마지막까지 용맹하게 싸울 수 있도록 하느님께 도움을 구했다.

 

한편 라파엘은 입고 있던 황록색 군복의 상의를 벗었다이제는 색이 바랜 하얀 내복 차림이었다그는 앞으로 어떻게 산을 내려가야 할 지는 몰랐지만 더 이상 전투에서 싸우지 않겠다고 결심했다그는 잠에 든 에스텔라를 두고 알바로 중위를 찾아갔다중위는 라파엘을 보자 곧바로 자신이 결정한 바를 이야기했다.

 

라파엘미안하다너를 이번 작전에서 제외시키기로 했다… 내 말은 작전에서 제외시켜서 미안하다는 게 아니라…”

 

잘됐어요 알바로저는 작별인사를 하러 왔어요.”

 

라파엘은 자신의 군복을 알바로 중위에게 건넸다중위는 라파엘의 뜻을 이해했다.

 

잘 생각했다그래도 넌 혼자가 아니란다언제나 네게 행운을 비마.”

 

라파엘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권총집에서 권총을 뽑아 중위에게 건네주었다.

 

행운을 빌어요.”

 

중위는 그의 마지막 작전을 설명했다작전이랄 것도 없었지만그는 자신이 정부군의 주의를 끌 동안 라파엘이 유유히 포위망을 빠져나가길 바랬다그는 라파엘을 마지막으로 한번 안아주고는 보냈다.

 

하늘이 점점 밝아졌다중위는 시계를 보지 않았다어차피 시간 같은 것은 상관없었다그는 그와 함께할 대원들의 의지를 확인한 다음 전투를 개시했다유격대는 적의 포위망을 뜷기 위해 돌격했다.


라파엘이 바위로 돌아오자 에스텔라는 일어나 있었다부스스한 모습을 한 그녀는 라파엘이 없어진 것에 대해 잠시 당황했던 듯이 보였다.

 

어디 갔었어?”

 

알바로에게그에게 인사를 전하고 왔어.”

 

라파엘이 걸어온 곳에서 총성이 울리기 시작했다그러자 에스텔라가 물었다.

 

무슨 일이야그들은 어떻게 된 거야?”

 

이제는 떠날 때가 된 거야그들은 산을 내려가기로 했어우리도 어서 내려가자.”

 

두 사람은 완만한 비탈을 달려 내려갔다잘 보이지 않는 발 밑을 조심하면서 그들은 빠르게 산을 내려갔다다행히도 산비탈을 내려가는 그들을 가로막는 별 다른 장애물은 없었다그때였다하늘에서 다시 한번 그 소름 돋는 소음이 울리는 것을 라파엘은 눈치챘다.

 

“…시체매.”

 

라파엘은 하늘을 살폈지만 그것의 검고 긴 날개는 어둠 속에서 잘 보이지 않았다라파엘과 에스텔라는 땅에 엎드렸다라파엘은 소음에 귀를 귀울였다소음은 비행기가 그들 머리 위를 맴돌았던 때와는 다르게 그대로 멀어지더니 곧 사라졌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한참을 지나도 포격 소리가 울리지 않자 라파엘은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다.

 

에스텔라잠시만 기다려꼭 돌아올게.”

 

라파엘은 무언가에 홀린 듯 내려온 산비탈을 다시 올라갔다그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야만 했다그는 아까 총성이 울렸었던 방향으로 달렸다기억을 더듬어 달려간 그곳에는 정부군도 중위도 보이지 않았다라파엘은 바닥에 수많은 종이 전단이 솔잎과 함께 섞여있는 것을 발견했다그는 자신의 발치에 가까이 묻혀있던 한 장을 집어 들고 내용을 읽었다정부에서 발행한 것이었다.

 

 

 

 

 

 

 

전쟁이 끝나다

 

어제 A국의 수도 B시에서 열린 평화 회의에서 각국 정상들이 모두 모인 가운데 총리께서 남부 지역의 신생 민주 공화국의 수립을 인정하는 조약에 서명하셨습니다이번 조약이 체결됨으로서 5년 간 지속된 내전은 완전하고도 영구적으로 종지부를 찍게 되었습니다.

 

신생 민주 공화국에 편입된 지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산 마르코스 

 

 

해당 지역에 주둔 중이거나 작전을 수행 중인 우리 군 병력은 12시간 내에 해당 지역에서 철수할 것을 정부에서 지시하는 바입니다.”

 

 

 

 

 

 

 

 

 

 

 

 

 

수평선 너머로 그날의 태양이 완전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