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 워 오브 마인 하다가 삘받아서 써봄


 재앙

포격이 끝나고 그 자리에 죽음만이 남아있을때는, 매번 똑같은 냄새가 난다.

거의 퍼붓는듯한 빗속을 뚫고 앞을 향해 한없이 내달리던 베르너 또한 그 냄새를 느낄 수 있었다. 풀과 흙 냄새가 섞인듯한, 오묘한 비 냄새마저 뚫고 새어나오는 죽음의 냄새. 그는 발걸음을 더욱 빨리 재촉하기 시작했다.

이미 내리는 비로 인해 진흙탕이 되어버린 비포장 흙길 사이로 바큇자국이 들어서있었다. 누구의 것인지는 몰라도 그의 머릿속에는 온갓 불길한 상상들이 날뛰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다시금 다리를 움직였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그게 맞춰 행동하는것 만큼이나 멍청한 짓은 없었다.

흙탕물이 고인 웅덩이와 불에 타 절반이 사라져버린, 한때 마을의 자랑이었던 유서깊은 목제다리를 건너 흰색 마을 이정표에 다다르자, 베르너의 뜀박질은 점차 멎어들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앞에 놓인 풍경을 보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이제 더 이상 달려가지도 않았다. 뛰어야 할 이유 자체가 이미 새까만 잿더미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무너진 집 사이로 간간히 삐져나온 팔 들이 비바람에 흔들렸다. 궂은 비에도 힘겹게 살아남은 불씨는 얼마 뻗어가지도 못하는 희미한 연기를 내뿜으며 본인의 존재감을 과시했다.

매캐한 화약, 비릿한 피 냄새와 살, 목재, 그 외 불타버린 잿더미에서 나는 불쾌한 탄내가 섞인 죽음의 냄새가 마을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한때 베르너와 그의 가족들이 살아가던 보금자리 또한 비슷한 악취와 함께 폐허가 되어버렸다.

이곳은 한때 그를 포함한 다섯명의 가족이 단란하게 살던 '집'이라는 공간이었다. 그리 화려하거나 크지는 않았지만, 집에서 생활하는 모두에게 편안함을 제공해 준 안식처였다.

이제 그 편안한 안식처의 자리는 커다란 포탄 구덩이와 불타버린 목재 파래트가 차지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살아가던 4명의 가족과 함께 말이다.

베르너는 한때 자신의 집이었던 곳을 향해 천천히, 떨리는 발걸음으로 전진했다. 부서진 가구들과 벽돌 사이로 익숙한 모습들이 비쳤다.

그제서야 그는 자신이 이번에도 늦어버렸다는것을 자신의 눈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늦지 않겠다, 꼭 돌아오겠다는 약속이 머릿속에서 요동쳤다. 가족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지만 정말 어이없게도, 늦지 않겠다는 약속을 너무나 늦게 이행해버렸다. 소중히 여기는 이들을 지키겠다며 자신에게 약속했다. 약속의 결과는, 약속과 가족 둘 다 지키지 못했다.

사방을 둘러싸는 빗소리와 저 멀리 침엽수림이 바람에 흔들려 나는 소리가 고요한 마을을 뒤덮었다. 병사는 잔해를 해집어 이미 없어져버린 집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살면서 수십번을 정리해온 집이었지만 이런 모습의 집을 정리하는건 처음이었다.

또한 이것이 마지막일것이기도 하다. 그에게는 더 이상 자신이 집이라 부를 공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이틀전부터 살아가고 있는 병영은 집이 될수는 없었다.

집 한 가운데를 뒤덮고 있었던 커다란 포탄 구덩이 위로 흙이 쏟아져내렸다. 그 위로 슬픔이, 죄책감이, 자괴감이, 그리고 분노가 구덩이를 뒤덮었다.

퍼붓는 비가 그치고, 회색빛 구름이 낮게 깔렸을때, 그곳에는 삐뚤어진 새하얀 십자가 하나가 쓸쓸히 바람을 맞으며 서 있을 뿐이었다.

까마귀
이름 모를 누군가의 무덤 옆으로, 무한궤도가 끌리는 쇳소리와 함께 전차 한대가 지나가며 땅이 울리는 괴소음과 진동을 만들어냈다.

이에 한무리의 병사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전차를 따라 시가지로 쏟아져 들어왔다. 멀리서 들려오는 폭발음과 총성이 전투의 시작을 알렸다.

전투는 짧을때는 몇시간만에, 길어봤자 사흘을 넘어가지 않는다. 그 짧은 기간의 전투 동안 수십명의 시체가 쌓여갈즈음이면 양 군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듯 조용히 그 자리를 벗어난다. 남는건 먼지와 콘크리트 더미 뿐. 병사들은 전투가 끝나는 그 즉시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1994년 7월 6일, 그리치아 혁명 정부는 '현 정부의 '무능과 강압적인 독재 정치의 종식을 선언' 한다는 최후통첩과 함께 그리치아 민주 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반군의 첫번째 공세 목표는 아드리니아 연방의 수도인 레츠니그라드였다. 수십일에 걸친 그들의 공세는 도시 절반을 점령하는것에서 중단되었고, 양측은 추가로 공세를 펼치는 대신 서로 방어를 굳히기 시작했다.

그렇게 정부군과 반군의 길고, 지루한 3년간의 공방전이 시작되었다. 공방전 기간 동안 레츠니그라드의 대부분은 이런 모습이었다. 절반은 전쟁터이고 절반은 폐허였다.

전투가 끝난 전장은 매번 고요하다. 기껏해야 전우의 시신을 수습해주기 위해 온 군인이나 약탈자들이 전장을 배회할 뿐이었다.

달은 높게 떠올랐다. 달빛이 만들어낸 건물의 긴 그림자는 시체와 버려진 차량들로 뒤덮인 도로를 가로질렀다. 수집을 나가기에는 나쁘지 않은 밤이었다.

짧게 자른 노란빛 머리칼을 묶은 소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권총 한자루, 탄창 두개, 등산 배낭 하나를 챙긴 뒤 어두운색의 재킷을 걸치고 집을 나섰다.

그녀에게도, 한때 이름이란것이 있었다. 하지만 이름은 무법지대의 모든 이들에게 그렇듯 스스로 포기해야 하는 것이었다. 도시 외곽 빈민가에선 모두가 같은 이름이었다. '쥐'

규칙과 법의 부재, 훔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고 모두가 모두에게 총과 칼을 겨누어대는곳, 범죄조직들의 땅따먹기가 일상인 곳. 그녀가 나고 자란 빈민가에서나 유행했던 일상은 유행에 민감한 도시 답게 내전이 터진 후 도시 전체로 퍼져나갔다.

그렇기에 열다섯의 이 소녀는 도시에 가장 빠르게 적응한 사람들중 한명이었다. 빈민굴에서의 삶은 지금의 도시에서 살아갈 힘과 지혜를 제공해 주었다. 적합한 자가 생존한다는 자연의 법칙은 여전히 유효한 개념이었다.

어둠에서 또 다른 어둠 속으로, 소녀는 재빠르게 움직였다. 그림자 속에서는 언제나 안전했다. 그 어떤 방탄복보다 효과적으로 총알을 막아주는것이 그림자였다.

그녀가 물건을 수집할 공원에 도달하자, 시간은 막 2시를 넘은 시점이었다. 건전지로 작동하는 일본제 시계는 어느 상황에서나 유용한 물건이었다. 특히 시간을 안다는것은 수색에서 엄청난 이점을 갖는다.

시계에서 눈을 떼자, 치열한 전투의 흔적이 소녀의 눈 앞에서 펼쳐졌다. 공원 이곳 저곳에서의 총탄의 흔적과 사방에 흩뿌려진 핏자국들. 널부러진 시체들의 표정은 한결같았다. 고통을 느끼며 눈을 감았거나 그럴 새도 없이 그대로 쇼크사 했거나.

그녀는 찬찬히, 시체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매번 할 때 마다 속이 뒤집어지는 짓이었다. 빈민굴에서 시체는 일상이지만 굳이 건드리거나 만지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일상적으로 마주하는것이 시체요, 곧 죽음이었다.

시체로부터 얻을 수 있는것은 무수히 많다. 총과 총알, 여러 군용물품들과 식량, 군복에 담배 한보루까지. 사람들은 시체로부터 가져갈 수 있는것은 전부, 몸뚱아리를 제외한 모든것을 가져갔다.

그로 인해 소녀와 같이 시체를 주로 약탈하는 사람들에게 붙여진 이름이 까마귀이다. 시체에 몰려드는것이 마치 까마귀 같다고 해 붙여진것이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모두는 까마귀였다. 시체를 만지기도 싫어하던 사람들은 시간이 흘러 가족의 시체의 옷을 아무렇지 않게 벗겨갔고 버려진 건물의 주인없는 물건만을 가져갔던 사람들은 이제 옆집에서 살아가던 이웃에게 총을 겨누어댄다.

가방이 충분히 차자, 그녀는 슬슬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오늘의 수입은 꽤 괜찮은 편이었다. 평소라면 가방의 절반도 채우지 못했다.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는것은 곧 무리에서의 방출을 의미했다.

해가 뜨기 전에 학교로 돌아가야 했다. 해가 뜬다는 것은 더이상 밤이 주는 보호의 이점을 받지 못하는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강도는 낮과 밤을 가리고 돌아다니지 않았다. 기왕이면 안전하게 움직일 수 있는 밤이 더욱 안전했다.

공원에서 발걸음을 돌려 떠나려던 그때, 돌무더기 뒷편에서 콘크리트 조각을 밟는 발소리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귀찮아질 모양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으며 돌무더기에 접근했다. 돌무더기 뒤에서 움직이는 존재를 '처리' 하지 않는다면 강도나, 혹은 더 골칫거리인 미행을 당할 수 있었다. 습격자들에게 굳이 본인의 은신처를 알려주는 멍청한 짓은 할 필요가 없었다.

미리 장전된 건총을 뒷주머니에서 꺼낸 소녀는 돌무더기 너머로 고개를 살짝 내밀었다. 눈치라도 챈다면 손 쓸 틈조차 없이 그대로 헤드샷이다.

돌무더기 너머로 그녀가 본것은... 의외의 풍경이었다. 총을 들며 서성거리는 강도도, 어설프게 주위를 살피는 염탐꾼도 아닌 군인 한명이 그곳에 서있었다.

복장을 보면 정부군 소속이었다. 그 군인은 총을 한쪽에 세워둔 채로, 돌과 콘크리트를 쌓아 만든 작은 무덤 앞에서 작은 십자가를 세우고 있었다. 

아까도 설명했듯, 전투가 끝난 전장에서 군인이 돌아다니는 경우는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이런 장면을 본것은 처음이었다. 달빛 아래서 죽은 동료를 추모하는 군인의 모습은 그녀가 지금까지 알고있던 군인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그 모습에, 그녀는 무심코 발걸음을 떼었다. 그러자 그녀가 딛고 서있던 콘크리트 무더기에서 몇조각이 바닥으로 굴러내려가 누군가 들을 수 있을정도의 소리를 만들어냈다.

군인은 그 소리를 듣자 황급히 총으로 손을 뻗었다. 이제 소녀에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 뿐이었다.

"움직이지마."

그녀가 군인의 머리통을 향해 권총을 겨누며 말했다. 군인은 소녀와 소녀가 든 권총을 보고 동작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두 손을 들었다.

그녀는 이전에 권총을 타인을 향해 겨누어본적이 없었다. 자신이 쥐고있는 방아쇠 하나로 타인의 생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상황은 단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다.

"뒤돌아. 앞으로 가."

소녀는 권총을 겨누며 천천히 군인을 향해 다가갔다. 군인은 그녀의 말에 순순히 따르며 뒤를 돌아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권총 때문에 따르는건지, 그냥 따라 주는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녀는 무덤 앞으로 가 군인의 소총을 주워들었다. 접철식 개머리판이 달린 돌격소총이었다. 흔하다면 흔한 이 소총을 처음 보는것은 아니었지만 직접 손에 쥐어본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건 내가 가져갈게. 불만 없지?"

그녀는 뒤돌아 선 군인을 향해 말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이내 침묵이 이어지더니, 뒤돌아 서있던 군인이 불쑥 말을 꺼냈다.

"내건 아니고, 내 친구가 쓰던거야."

아마 총을 두고 하는 말인듯 싶었다. 그녀는 갑자기 무슨 소린가 싶어 잠시 생각하다 물었다.

"친구? 혹시 중요한거야?"

이런 질문을 굳이 왜 하나 싶었지만, 괜스레 묻고싶어져 소녀는 군인에게 되물었다. 그렇다고 해서 돌려줄 생각은 없었지만.

"총이야 널렸으니까, 딱히 중요한 물건은 아니야. 그냥 내가 친구가 쓰던 물건에 괜히 의미 부여하는 걸지도 모르지. 가져가고 싶다면 가져가."

가져가고 싶다면 가져가라. 마치 허락해주는듯한 말투였다. 괜스레 그 말투가 놀리는것 같아 그녀는 살짝 신경질을 내며 뒤돌았다.

"허락 필요 없어. 강도당한 주제에 아무렇지 않은 척 하기는..."

하늘 높이 떠올랐던 달은 어느새 산 너머로 자취를 감출 준비를 하며 천천히 하강하기 시작했다. 소녀는 소총을 등에 매고 학교로,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여어, 왔어? 오늘은 뭐 갖고 왔냐?"

문을 열고 버려진 학교 내부로 들어서자, 레온이 문 앞에서 그녀를 기다렸다는듯 맞이했다.

"..."

소녀는 말 없이 가방을 내팽겨치듯 내려놓곤 그를 노려보았다. 레온은 그런 그녀를 가소롭다는듯 응수하며 가방을 살펴보았다.

은신처에서 같이 살아가는 다른 아이들도 방에서 나와 그녀가 가져온 물건들을 하나씩 살피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는 소녀의 남동생 또한 있었다.

"이야~ 많이 가져왔네? 어라, 총도 있어?"

레온은 가방 내용물을 살펴본 뒤 감탄하더니, 그녀의 머리카락과 목 부분을 손으로 부드럽게 쓸었다.

"내 몸에 손대지마."

그녀는 낮은 어조로, 마치 으르렁대듯 경고하며 레온의 손을 쳐낸 뒤 최대한의 분노와 증오를 담아 그를 노려보았다.

"아 ㅋㅋ 오랜만에 물건 좀 잘 들고와서 칭찬 좀 해주려 했더니..."

레온은 그런 그녀를 보며 킥킥거리더니, 이내 갑자기 퍽 소리가 날 만큼 세게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어딜 개겨? 썅년이, 뒤질라고."

소녀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이를 악물었다. 그러면서 흘깃, 뒷쪽을 보았다. 다행히 남동생은 그녀가 가져온 물건들에 정신이 팔려 그녀가 뺨을 맞는걸 보지 못했다. 만약 동생이 그녀가 맞는것을 보았다면, 틀림없이 고함을 지르며 레온에게 달려들었을것이다. 그리고 그런 행동의 결과는 언제나 좋지 못하다.


"개자식..."


엘리아가 다시 고개를 빳빳히 쳐들고서 그의 면전에다 욕설을 내뱉었다. 레온은 그런 그녀의 반응을 귀엽다는듯, 피식 웃으며 엘리아를 벽으로 밀었다.

"우리 엘리아~ 군식구까지 끌고와서는 참 뻔뻔하네? 니 동생이랑 길거리에서 포탄 구덩이의 고인 물이나 퍼마시고 싶지? 아니야? 그러면..."

소녀, 엘리아는 말없이 뒤를 돌아 방으로 향했다. 맞은 뺨이 욱신거렸지만 아픈 척을 해서는 안된다. 약한 모습을 보이는것은 곧 물어뜯기는것이다.

"얌전히 굴어. 알았지?"

레온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엘리아는 문을 쾅 소리나게 닫으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