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는 순애물 단편이구요 19금... 따위는 딱 세 마디 대사면 충분합니다. 늒네가 처음 써본 망상소설 초안 완성본 맛 함 봐주세요


1.

 

중경에서 여름을 맞는다는 것은 이런 것들을 의미한다뜨겁고 습한 공기적당히를 모르고 쏟아지는 장맛비.

 

산과 강으로 둘러싸인 이 오래된 도시는 마치 커다란 찜기와도 같다산맥에 갇힌 열기와 습기가 사람들을 쪄버리는…  아침에 길에 모여 앉은 사람들 뒤로 가게 주인이 만토우를 찌는 모습을 볼 때면 항상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

 

중경에서 네번째 여름방학을 보내고 있던 나에게도 이런 날씨가 견디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였다그래서 나는 여름 동안은 그냥 집에서 지내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밖에서 햇빛도 보고 좀 그래야지올해가 마지막 여름방학이잖아?”

 

마지막 여름방학을 저 밖에서 보내라고요?...”

 

나는 베란다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태양이 모두를 말려죽일 기세로 길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싫어요죽을지도 모른다구요.”

 

어머니는 한심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고는 밖을 내다보셨다그리고는 흠칫 놀라셨다이 더위에 밖에 나갔다간 정말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신 모양이었다어머니가 머쓱해하며 말씀하셨다.

 

“…오늘은 정말 덥구나.”

 

 

그날은 일요일이었고 나는 점심을 먹으러 아파트의 40층에 있는 식당으로 올라갔다우리 아파트는 특이하게도 식당에서 매일 아침을 제공했고 일요일에는 점심까지 제공했다보통은 연어 회나 굴 구이 같은 것들인데 4년째 먹으니까 조금 질려버렸다하지만 동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40층의 시원한 실내에서 남이 준비한 점심을 먹을 수 있다는 건 역시 좋은 조건이었다.

 

식당에는 매일 보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포드 사에서 일하고 계신다는 친절한 미국인 아저씨커다란 리트리버 강아지와 그 주인 아주머니어느 나라인지는 모르겠지만 영사관에서 일하신다는 직원 분

 

나는 냉장고에서 사이다 한 캔을 꺼내서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있는 자리로 향했다하지만 매일 앉던 그 테이블에는 처음 보는 두 사람이 이미 앉아있었다.

 

… 누가 이미 앉아있네.’

 

하는 수없이 나는 그 옆 테이블에 앉았다문득 나는 처음 본 그들에게 관심이 생겼다그 테이블을 다시 돌아보니 한 여자와 그녀의 아버지로 보이는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덕분에 그들의 국적은 쉽게 알 수 있었다두 사람은 일본어로 대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리고 나는 곧 여자에게서 정말 특이한 부분을 발견했다.

 

나는 그녀에게는 어딘가 상큼한 매력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가슴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발랄함이 드러나는 얼굴… 그녀가 풍기는 전체적인 인상은 마치 라임… 아니,

 

민트꼭 민트같아민트색 옷 때문일까?’

 

내가 조금 놀란 것은 그녀의 옷 때문이었다얼핏 보면 그냥 생활 체육복처럼 보이는 그건 이 근처에 있는 중국 고등학교의 교복이었다그녀는 분명 일본인인데 중국 현지 학교에 재학 중이었던 것이다.

 

당시 나는 차를 타고 집에서 40분 거리에 있는 국제학교에 다니고 있었다그곳에선 모든 수업을 영어로 진행했고 중국어는 젬병이지만 영어는 꽤 잘했던 나는 어렵지 않게 적응할 수 있었다그런데 외국인이 중국어를 배워서 중국 학교에 다닌다니… 그런 건 그때의 나에겐 거의 불가능하게 보였다.

 

대단하다… 중국어를 잘하나 보네.’

 

잠시 후 나는 내가 그녀를 너무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그녀와 함께 앉아있던 아저씨랑 눈이 마주쳐서 알아차렸는데 도둑이 제발 저리는 기분이었다나는 그의 시선으로부터 도망치듯 자리에서 일어나 음식을 가지러 갔다그날은 마늘과 함께 굴을 구운 요리가 제공되어 있었다원래 밥을 많이 먹는 편이 아닌데다가 그날 아침을 늦게 먹은 나는 굴 세 개그리고 크루아상 하나로 대충 식사를 떼울 생각이었다.

 

사이다 캔을 따서 컵에 따르자 거품이 순식간에 부풀어올랐다그래도 거의 매일 같은 컵에 같은 음료를 따라서 마셔본 나에게 넘치지 않을 정도로 양을 조절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그리고 4년 내내 질리도록 먹은 굴구이… 그만큼이나 나는 굴을 좋아했다굴은 마늘과 소금이 아주 잘 어울리는 음식이다사실은 그걸 매주 먹는다고 해도… 그 끝내주는 맛은 어디 가지 않는다.

 

굴 세 개랑 크루아상 하나를 다 먹는 데에는 몇 분 밖에 걸리지 않았다그때 옆 테이블에 앉아있던 여학생과 아저씨도 마침 식사를 다 한 참이어서 우연히도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게 됐다그리고 알게 된 건 그들이 나와 같은 층으로 향하고 있었다는 것.

 

우리 앞집에 이사를 오셨나 보네요.”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우리 앞집은 집주인이 무슨 생각이었는지 세도 주지 않고 몇 년째 집을 비워두고 있었다그 집에 드디어 이 두 사람이 입주를 한 모양이었다그런데 이삿짐을 옮기는 꼴은 요 며칠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들이 다른 곳으로 이주를 하는 동안 그 집에 짧은 시간 머무르는 것이라고 짐작했다그리고 내 추측은 정확했다.

 

네 맞아요. 얼마 간 이 아파트에서 지내게 됐어요반갑습니다저희는 일본인입니다.”

 

아저씨가 유창한 영어로 대답했다그 아파트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중국에 이사를 온 외국인이 많았는데 이웃끼리 친하게 지내는 것이 그곳만의 문화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여학생이 나에게 중국어로 물었다..

 

어라당신은 중국인이신가요?”

 

아니요… 전 한국 사람이에요만나서 반가워요.”

 

이런… 나는 중국어는 정말 젬병인데하지만 중국어로 묻는 말에 영어로 답하는 것이 실례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나는 얼떨결에 서투른 중국어로 대답을 하고 말았다.

 

새로 온 이웃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집에 들어왔다그리고는 한동안 그들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그 잠깐의 만남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던 것이다.

 

엄마앞 집에 이사 온 사람들 아세요일본 사람들이에요.”

 

아니… 몰랐는데식당에서 만났니?”

 

좋은 사람들이에요.”

 

그렇구나나중에 인사나 한번 드려야겠네.”

 

방으로 들어온 나는 이웃들에 대한 생각을 그만해보려고 했다그러자 방학 동안 해야할 많은 과제들이 떠올랐다졸업하기 위해서는 꼭 마쳐야 하는 과제들이었는데 학기 중에는 바빠서 할 틈이 없어서 긴 여름방학 동안 끝을 내놓아야 했다.

 

이걸 언제 다 하지?’

 

언제부터 과제를 시작해야 할지 생각만 계속하다 보니 그대로 잠이 들었던 것 같다일어나서 대충 씻고는 저녁도 먹지않고 나는 다시 다음날까지 잠에 들었다.

 

 

다음날은 평소보다 아주 일찍 일어났다전날 하루를 잠만 자서 그랬던 것 같다월요일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출근하는 7시 쯤에 식당에 가면 아침을 먹을 수 있었다원래 방학이 시작한 후부터 평일에도 10시에나 일어나는 게으른 나는 항상 평일 아침식사를 놓치곤 했는데그날은 일찍 일어난 덕에 늦지 않게 식당에 갈 수 있었다.

 

그날은 식빵과 베이컨계란 후라이가 있었다레몬을 띄워서 냉장고에 식혀 둔 물이 그날의 음료였다

 

이번에는 다른 테이블이 사람들로 모두 차 있었고 평소에 내가 앉던 그 창가 자리만이 비어있었다내가 음식을 가지러 자리를 비우기 전까지는식빵과 베이컨을 가지고 돌아오니 그녀가 앉아있었기 때문이다.

 

미안내가 자리를 뺐었구나.”

 

상황을 눈치챈 그녀는 이번에는 서투른 영어로 내게 말하며 자리를 비워주려고 했다그러나 곧 다른 자리가 없다는 것을 눈치챘다.

 

아니야같이 앉아도 돼.”

 

어색한 분위기에서 식사를 하게 될 것이 걱정이 되었지만 어쩌겠는가내가 같이 앉자고 제안하지 않았다면 분명 그녀는 나보다 더 난감했을 것이다하지만 어색해질 분위기에 대한 내 걱정은 괜한 것이었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활발한 성격의 그녀가 먼저 대화를 잘 주도해나갔기 때문이다.

 

어제는 미안했어습관이 돼서 중국어로 말을 걸었던 거야그러고는 꽤나 부끄러웠어

 

괜찮아별로 당황하지 않았어그것보다 중국어를 유창하게 한다니 대단하다.”

 

그녀는 어릴 때 중경으로 이사를 와서 중국어를 잘한다고 내게 말해줬다나는 외국에 오래 산다고 해서 그 나라의 말을 쉽게 배울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아마도 그녀는 계속해서 자신을 낯선 환경에 노출시키며 자연스럽게 중국어를 익혔을 것이었다나는 그런 그녀가 새삼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구나나는 4년째 살고있지만 그렇게 잘하지는 못해학교에서도 영어로 수업을 하거든.”

 

국제학교에 다닌다고… 그럼 지금은 방학이야?”

 

그래우리는 방학이 꽤 길어두 달 정도.”

 

그것을 들은 그녀는 놀라면서도 부러운 눈치였다내가 생각해도 우리 학교 방학은 정말 길었다.

 

부럽다매년 두 달을 연이어 쉬는 방학이라니.”

 

대신 겨울엔 방학이 없어성탄절에 2주 쉬는게 다야.”

 

그래도나는 안 그래도 짧은 방학을 이사 준비로 절반이나 날려버렸단 말이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그녀와 나는 서로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다그녀는 우리나라로 치면 고등학교 2학년이었는데 아버지가 일을 옮기시면서 그해 여름에 다시 일본으로 떠날 예정이었다어머니는 계속 일본에서 일하고 계셨기 때문에 그녀는 아버지와 같이 사는 중이었다.

 

이제 다 먹었어즐거웠어.”

 

나는 먼저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러자 그녀도 일어났다기어이 엘리베이터까지 같이 탄 우리 두 사람은 현관문 앞에서 헤어졌다.

 

“Have a nice day.”

 

“You too.”

 

집에 돌아온 나는 아차 싶었다긴 대화를 하는 동안 그녀의 이름도 물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고… 이것도 실례인가다음에 보면 물어봐야지.’


 

 

2.

 

그러고는 일주일이 지났다나는 그녀의 이름이 코나츠’ 라는 것을 알아냈다그녀가 종종 입고 오는 교복의 이름표에는 소하(小夏)라는 한자가 적혀 있었는데 나는 코나츠’ 를 한자로 적으면 그렇게 된다는 것을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다만 그녀가 학교에서는 샤오샤라는 이름으로 불릴 것이라고 짐작했을 뿐이었다.

 

그녀는 한번 마음을 튼 상대와는 급속도로 친해지는 성격이었다일주일 동안 수요일을 제외하고는(늦잠 잤다매일 같은 자리에서 아침을 같이 먹었는데 그동안 그녀와의 관계는 상당히 진전이 있었다짧은 시간 만에 그렇게나 빨리 친해질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녀의 엄청난 친화력 덕분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녀에 대한 나의 인식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가장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내가 그녀를 이성으로서 좋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언제나 대화를 즐겁게 이끌어나가는 그녀에 대해서는 상큼하고 귀엽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녀 내면에 지닌 지혜가 대화 중에 언뜻 드러날 때에는 존경하는 마음이 들었다겉모습 속에 더 큰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그것을 알아보는 상대를 휘어잡을 수 있다코나츠는 그런 사람이었다.

 

흐아있지… 여기서 지내는 것도 벌써 며칠 밖에 안 남았어.”

 

하지만 나는 곧 떠나버릴 코나츠에게 스스로가 더욱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했다좋아하는 마음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어쩌면 코나츠는 그때 가라앉지 않는 나의 설렘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그걸 지금 생각하니 조금 부끄럽기도 하다.

 

아쉽네.”

 

감정을 거르고 걸러서 내 입 밖으로 내놓은 말은 이 건조한 한마디였다.

 

그리고 코나츠가 말했다.

 

마지막으로 시내를 여행(travel)해보고 싶어어차피 다 가본 곳이겠지만.”

 

좋은 생각이야한번 가보았다고 해서 그곳의 모든 면을 다 알 수는 없지나도 이 동네에 오래 살았지만 근처에 대해 잘 모르는 것도 많아.”

 

코나츠는 이 제안을 계획하고 있었던 걸까그녀는 나에게 갑작스런 제안을 했다.

 

그럼 바쁘지 않다면 오늘 점심 때 같이 시내를 돌아보지 않을래?”

 

해방비 근처를?”

 

안 가본 곳이 있다면 모두 가보자.”

 

 

무심코 너무 쉽게 제안을 받아버린게 아닐까 나는 생각했다그렇지만 조금 더 고민했더라도 나는 같은 대답을 했을 것 같다흔쾌히 okay라고 말해서 오히려 덜 이상하지 않았을까아무튼 설레는 마음에 덥석 승낙해버린 시내 여행코나츠와 나는 어느새 해방비의 거리를 걷고 있었다.

 

해방비(解放碑). 대륙을 가로지르는 장강과 그 지류인 가릉강을 끼고 있는 구 시가지의 중심에는 마오쩌둥 주석이 세웠다고 하는 작은 시계탑이 있다중경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해방비가 바로 그것이다.

 

월요일인데도 이렇게나 사람이 많다니… 주말이었다면 여유있게 주변을 둘러보기는 글렀겠지.’

 

생각해보니 여름에 한낮의 거리를 걷는 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었던 것 같다코나츠의 제안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행위였다나는 뜨거운 햇빛과 공기에 구워질 맛이었는데(혹시 이런 걸 두고 에어프라이’ 라고 하나?) 그녀는 이런 날씨에 길을 걷는게 익숙한지 아무렇지 않아보였다많이 더웠지만 오히려 내색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데이트를 하고 있는게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들었다그리고 나는 묶은 머리를 하고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를 낸 코나츠가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그녀는 아침마다 입고 있던 교복이 아닌 흰 티셔츠와 짧은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그리고 물론 나와 코나츠는 살인적인 햇빛에 대비해 야구모자를 쓰고 있었다모자는 상식이다.

 

코나츠이곳저곳 많이 둘러보았으니 쇼핑몰 안에 들어가서 조금 쉬자점심도 먹을래?”

 

“Ok!”

 

나는 코나츠에게 이 주변에 좋아하는 먹을거리가 있는지 물어보았다그녀는 자신있게 추천할 만한 식당을 많이 알고 있었다고민하던 코나츠는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나를 끌고 홍콩 음식을 파는 곳으로 갔다으아아

 

좋지 않아난 나중에 홍콩에도 꼭 가봐야겠어.” 코나츠가 말했다.

 

파인애플 번과 홍차는 정말 맛있었다버터인지 연유인지 모를 것이 가득 들어있는 달콤한 빵은 그 맛에 자칫 질릴 수도 있었지만 홍차가 있어서 맛있게 하나를 다 먹었다.

 

소개해줘서 고마워다음에도 자주 찾아올 거야.”

 

이 다음은 아이스크림을 꼭 먹어야 해너도.”

 

아이스크림이라니… 역시 여자애들은 다들 단 걸 좋아하는 걸지도 모른다그래서 그녀가 다음으로 나를 데려간 곳은 아이스크림 가게였다아아 그런데 상표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베스킨라빈스는 아니었다그런 건 중국에 없다.

 

맛은 민트초콜릿민트초코 세 가지가 있는 재미있는(이런맙소사가게였다.

 

민트초코를 좋아해?” 내가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초코민트혹시 안 좋아해?”

 

초콜릿이랑 민트초코를 싫어했던 나는 민트로 주문했다나는 맛있는 민트에 굳이 왜 초콜릿 따위를 끼얹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코나츠는 그걸 꽤나 좋아하는 모양이었다그녀가 말하길어릴 적에 중국에서 처음으로 민트초코 맛 아이스크림을 먹어보았는데 한번 먹고 말기에는 아쉬운 맛이었다고 한다그래서 먹다 보니 이제는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는 항상 주문하는 맛이라고

 

난 그냥 민트 좋아해.”

 

그런데 그때 코나츠가 나에게 손을 뻗는 바람에 나는 놀랐다내가 움찔하자 그녀도 놀란 것 같았다마치 자신도 모르게 손을 대려 했다는 듯이.

 

놀랐다면 미안근데 너 얼굴에 뭐 묻었어.”

 

그렇게 말하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 얼굴에 묻은 것을 손가락으로 닦아내는 것이었다그 모습에 나는 웃고 말았다.

 

얼굴에 묻히다니 나도 참 깔끔하지 못하네.”

 

초콜릿에 초콜릿이 묻은 것 뿐인데.”

 

코나츠는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가끔은 이해할 수 없는 구석도 있는 그녀였다그녀도 웃었다아 그 모습이란.

 

 

중심지를 벗어나 조금 한적한 거리들까지우리는 근처의 거의 모든 장소를 가보았다대부분은 가본 곳들이었지만 코나츠 덕에 모르는 골목도 많이 알게 되었다그래서 나는 코나츠가 떠난 이후에도 시간이 날 때면 그녀와 걸었던 거리들을 다시 걷고는 했다.

 

많은 장소들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곳이 있다아마 그때는 조금 당황스러웠기 때문이리라코나츠는 한번도 가보지 못했던 곳인데 나는 그 장소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해가 지기 전 집으로 걸어서 돌아가고 있을 때 코나츠가 나에게 물어보았다.

 

저것 봐수십년은 되어보이는 건물인데 아직도 잘 남아있어난 저기가 어떤 곳인지 항상 궁금했어.”

 

뭐가?”

 

그녀의 손가락은 오래된 청사를 가리키고 있었다.

 

한글이 적혀있잖아언젠가 검색을 해봤지만 뜻을 알 수 없었어.”

 

부정시림국민한대’. 으음 이건 조금 당황스러운걸.

 

저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야 해.”

 

“…아니 그래서 무슨 뜻인데?”

 

대한민국임시정부조선이 일본에 강제로 병합되었을 적에 독립을 희망하던 사람들이 세운 망명 정부야.”

 

잠시 정적이 흘렀다코나츠… 실례했다고 생각했다면 그땐 전혀 실례가 아니었어.

 

네가 저걸 물어봐서 조금 당황했어안은 기념관인데 혹시 들어가보고 싶어?”

 

.”

 

 

그렇게 우리는 반나절 만에 시내의 모든 장소를 둘러볼 수 있었다해는 지고 있었고 우리는 걸어서 언덕을 올라 아파트 단지의 입구를 들어오고 있었다코나츠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어디가 제일 좋았어?”

 

네가 데려간 식당파인애플 번이랑 홍차.”

 

대답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그녀는 기쁜 얼굴이었다그녀가 말했다.

 

그래좋았지정말 다행이야.”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아직 가보지 못했던 곳도 덕분에 알게 되었다면서 마침 한국 사람과 함께 마지막으로 거리를 둘러볼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고 고마움을 전했다.

 

 

 

 

 

 

 

 

 

 

아아… 위험해곧 떠날 사람에게 무슨 마음을 이리 두는 거야.’

 

 

 

 

 

 

 

 

 

“…”

 

코나츠가 무언가를 말하는 것을 들었다일본어인가.

 

“…뭐라고?”

 

아니야잘 들어가.”


 

 

3.

 

그날 이후 사흘 동안 비가 내렸다나는 매일 한결같이 식당에서 아침을 먹었지만 코나츠는 볼 수 없었다그녀가 없는 자리에 앉아창 밖으로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보며 그녀에 대해 생각했다.

 

‘…더 마음이 생기기 전에 떠났어.’

 

나는 코나츠와 함께할 동안 사진 한 장 조차 남기지 않았다평소에는 사진 같은 건 관심도 없었으니까 오히려 그 편이 자연스러웠다그러니까 시간이 지나면 그녀와의 일도 잊혀질 것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나 미련이 남는 거지.’

 

그때 걔는 무슨 말을 하려고 했을까.’

 

사진 한 장 정도는 남겨둘 걸 그랬나.’

 

‘…민트초코나 한 번 먹어볼까?’

 

 

얼마 남지 않은 방학코나츠를 빨리 잊을수록 좋았다나에겐 할 일이 아주 많이 남아있었다식사를 마치고 서둘러 집에 들어온 나는 아무것도 하기 싫은 기분에 저녁이 되어서야 무슨 과제부터 시작해야 할지 생각했다예상했던 것보다 많은 계획이 밀려있어서 놀랐다그것보다

 

아니 근데 책상이 뭐가 이리 너저분해그동안 청소도 안했던가.’

 

내 방은 구겨진 종이과제물휴지나 연필심 따위로 난장판이 되어있었다그날은 집에 부모님이 안계셨지만 어머니가 돌아오시면 내 방을 보고 무슨 잔소리를 하실지 뻔했다.  어서 치우지 않으면 안 그래도 심란한 마음이 가라앉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나는 종이 뭉치와 쓰레기를 모아서 비닐봉지에 쓸어담았다버리는 김에 집 곳곳에 있는 쓰레기까지 모아서 같이 가지고 나갔다나는 꼼꼼하니까.

 

하지만 나는 역시 꼼꼼한 사람은 아닌건지, 1층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우산을 가지러 올라와야 했다보기 드문 규모의 폭우였다마침 슬리퍼를 신고 있던 나는 양말을 벗어서 주머니에 찔러 넣고는 문을 나섰다.

 

역시 누군가가 하늘 위에서 바가지로 물을 퍼붓고 있는게 분명했다찜기에 다시 물을 채우는 것처럼물은 바닥에서 발목까지 차올라서 걷기가 힘들었다쓰레기를 모아두는 곳을 가보니 상황은 아주 처참했다분명 모아둔 쓰레기가 있었을 텐데 바닥에 물이 차오른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들고 있던 비닐봉지는 그냥 물이 찬 바닥에 두고 집으로 향했다아니면 어쩔텐가.

 

바람을 탄 폭우는 우산을 무시하고 나를 물에 빠진 생쥐 꼴로 만들어버렸다이미 해가 진 저녁이어서 춥기도 많이 추웠다나는 비에 가려 앞도 잘 보이지 않는 상태로 어두운 길을 따라 집 근처까지 걸었다첨벙첨벙.

 

그런데 장대비 속에서 고생을 하던 것은 나 혼자만은 아니었다건물 앞 가로등 밑 희미한 불빛 아래에는 물에 빠진 생쥐가 한 마리 더 있었다내가 아주 잘 알고 있는 녀석이었다.

 

코나츠!”

 

나는 한달음에 우산도 쓰지 않은 채로 비를 맞는 그녀에게 달려갔다일단은 그녀에게 우산을 씌워주었다.

 

“…여기서 뭐해?”

 

코나츠는 나를 보자 놀란 눈치였다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녀석을 마주친 건 그 애도 마찬가지였다.

 

“열쇠가 없어서 집에 들어갈 수가 없었어오늘은 아버지도 늦게 오시는데.”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게 맞았을까그때 나는 그녀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물론 이 제안은 계획한 건 아니었다.

 

그럼 우리 집에서 머리 말리고 가아버지 오시면 그때 가라.”

 

남녀칠세부동석나는 그딴 거 모른다.

 

 

집은 아직 덜 치워서 깨끗한 편이 아니었다우리 집에는 화장실이 2개 있었는데 하나는 내 방에 붙어있었다하지만 한 화장실에서 물을 쓰면 다른 화장실에서는 물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밖에 없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우리는 둘 다 흠뻑 젖었지만 우산을 쓰지 않은 코나츠는 상태가 더 심각해 보였다.

 

코나츠괜찮으니까 먼저 내 방에 들어가서 머리 말려옷은 괜찮다면 내 티셔츠를 입어.”

 

차마 샤워를 하라고 까지는 말하지 않았다애초에 무슨 용기로 그녀를 집에 들였던 걸까그때의 내가 한 것 치곤 놀라운 판단이 아닐 수 없다나는 소파 위에 개어져 있던 깨끗한 티셔츠와 반바지 한 벌을 그녀에게 주고 보냈다그리고 나는 거실의 대리석 바닥 위에 주저앉아서 그녀가 나오길 기다렸다물 소리가 들렸다.

 

‘…남자애 집에서 아무렇지 않게 씻는구나.’

 

물소리가 멈추고도 한참을 기다렸다코나츠는 머리까지 제대로 말린 다음에 나왔다내 옷을 입은 코나츠를 보는 건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럼 잠시 기다려냉장고를 보면 물도 있어.”

 

잠시 후 내가 깨끗하게 씻고 나왔을 때는 코나츠가 바닥의 물기를 모두 닦아낸 뒤였다그것을 본 나는 손님인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하지만 분명 그녀도 미안한 마음에 그리했던 것 같다나와 그녀는 우리 집 식탁에 마주 앉아서 물을 마셨다.

 

그런데 이렇게 어색할 수가처음 만났던 그때와는 달리 나와 그녀 사이 무겁게 깔린 정적은 깨질 기미가 없었다어째서인지 다시 만난 코나츠는 전보다 한껏 조용해진 게 아닌가나는 용기를 내서 말을 꺼냈다.

 

나는 너가 가버린 줄로 알았어.”

 

그녀는 말 없이 고개를 저었다잠시 후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차라리… 오늘 만나지 못했더라면잊을 수 없을 것 같았어… 이제는 잊을 수 없어.”

 

서투른 영어그럼에도 이해할 수 있었다나는 그때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혀있던 것을 기억한다떨리는 목소리로 이야기했던 것을 생각하면 분명 울고 있었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

 

뭐라고?”

 

“……”

 

잠깐우는 거야?”

 

“……”

 

무슨 생각이었는지나는 그 모습에 놀라서 그녀를 안아주었다사실은 그렇게라도 위로해주고 싶었다.

 

그것들은 분명 그녀의 서투른 영어로는 할 수 없는 말들이었다결국 자신의 언어로 그녀는 모든 이야기를 쏟아냈다나는 그녀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다만 짐작했다.

 

코나츠… 미안해.”

 

두 팔로 그녀의 머리를 감싸자 가슴에 따뜻함이 느껴졌다그건 아마도 다시는 느껴보지 못할 따뜻함이다언어 따위사람의 마음을 제대로 전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그때 깨달았다잠시 동안 안고있던 그녀를 놓아주며 나는 말했다.

 

이해했어.”

 

 

저녁은 먹지 않았다코나츠에게 물어보았는데 먹지 않겠다고 했다생각이 없는 건 나도 마찬가지이기도 했고그런데 갑자기 코나츠는 정말 집에서 자고 가도 되는 것이냐고 물어보는 것이었다.

 

“…아버지 오늘 안 오셔늦게 오신다는 게 내일이야?”

 

내일데리러 오시는데.”

 

오해가 조금 있었던 것 같다집에서 쉬다가 아버지가 오시면 돌아가도 된다고 한 것을 그녀가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생각하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나는 그녀가 이 오해를 알아차리고 당황하기 전에 서둘러 대답했다.

 

그래자고 가.”

 

그러든지 말든지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그때 뭘 생각했는지는 모르겠다만 나랑은 사뭇 다른 이유에서 얼굴을 붉힌 게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그 뒤에 일어난 일을 생각하면 말이다우리는 자정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우울한 분위기를 떨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나는 친구와 헤어지기 전에는 항상 이렇게 시간을 보내왔으니까이상할 건 없었다나는 코나츠에게 거실이나 넓은 안방에서 자도 된다고 했다.

 

오늘 부모님 안 들어오셔저 침대 너 써.”

 

잘 자.”


그날 내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몸을 던지고선 얼마나 시간이 지났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잠을 이룰 수 없었다설레는 마음이 가라앉지 않아서 이리저리 뒤척일 뿐 나는 그대로 밤을 샐 기세였다. 그때 열어둔 방문으로 코나츠가 조용히 들어왔고그 다음은 그녀의 믿을 수 없는 적극적인 주도로 갈 데까지 갔다.

 

 

 

 

 

 

 

 

 

 

 

 

 

 

 

잠깐만 코나츠.”

 

“…”

 

.”


 





 

4.

 

내가 일어났을 때 코나츠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새벽… 아니어쩌면 그날 밤에 바로 떠났을지도 모른다.

 

그해 여름은 코나츠와 헤어진 이후로 바쁘게 흘러갔다그녀와 즐거운 시간을 보낸 대가로 남은 과제를 하기 위해 여름이 끝날 때까지 내 혼을 불살라야만 했다그 다음 학기가 끝나고 나서는 대학에도 붙었다나쁘지 않았다.

 

그녀는 내게 코나츠라는 이름 외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지만내 예상과 달리 그녀를 쉽사리 잊을 수 없었다무슨 미련이 남았는지 나는 일본어를 익혔다중국어를 이미 어느정도 할 수 있었던 나에게 한국어와 어순도 비슷한 일본어는 어렵지 않았다진작에 배워 두었다면 더 많은 대화를 할 수 있었을 텐데아쉬움이 남는다.

 

결국 여행을 오고 만 홍콩은 작은 땅에 많은 것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 인상적인 도시였다나는 지금 구룡(Kowloon) 반도 남쪽 끝에서 밤바다를 바라보고 있다빵과 홍차도 다시 먹어보았다그건 원래 아침에 먹는 빵인 모양이지만 저녁에 간다고 팔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맛은 조금 이상했던 것 같다그 이상한 맛을 홍차로 헹구어 버린 뒤나는 초콜릿 맛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예상했던 대로 괴악한 맛에 차마 다 먹지는 못한 채로건너편의 홍콩 섬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더운 와중에 마천루가 즐비한 홍콩 섬의 야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역시 야경으로는 어디에도 꿀리지 않는 중경 곳곳의 아름다움이 생각이 나고 그러면 또 그녀와 함께 보낸 여름이 또렷하게 생각이 나는 것이다.

 

문득 옆을 보자 민트 맛 아이스크림을 한입 머금은 그녀가 보인다더운 날씨에 이마에는 구슬땀이 맺힌 채머리는 바람에 조금 흩날리는 기쁜 얼굴의 코나츠가홍차가 사람을 취하게 한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는데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입을 연다.

 

    "역시 한번 먹기에는 너무나 아쉬운 맛이다."

 

 

 

 

그날 맛 본 민트 초콜릿은 상큼하면서 부드러운 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