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이 지거든 꼭 돌아오겠소. 

처음 배에 오를 때부터 그대를 잊은 적이 단 한 순간도 없소.


끝없이 펼쳐진 벽해가 우리 사이를 갈라놓고 있지만, 이렇게나마 서로의 생사를 확인할 수 있으니

어찌 기쁘지 아니하다 할 수가 있겠소.


내 오늘도 그대가 보내준 인형을 매만지며 그대를 그린다오. 


추신: 어머니와 아저씨, 아주머니에게도 안부 좀 전해주오.

                                                        쇼와 20년 3월, 히로시가 유우코에게.'


 편지를 끝맺으며 다시금 망망대해에 끝없이 펼쳐진 푸른 물을 바라보았다.


 그 물의 색은 마치 마지막에 고향땅을 떠날 때 바라보았던, 상록수가 잔뜩 우거진 앞산의 그것과도 같이 느껴졌다. 


 바람이 불자 짭짤하고 비릿한 바다 내음이 얼굴에 고루 부닥쳤다. 


 문득 부산에 도착해 난생 처음 바다의 냄새를 맡았던 것이 떠올랐다. 


 그리 싫은 냄새는 아니었지만 육지에서 석달, 배에 올라 보름간 그 비릿하고도 짭조름한 냄새를 맡다보면 어물전에서 나름대로 잔뼈가 굵다는 상인들도 고개를 휘휘 저으며 질색을 하지 않고는 못 배겨날 것이다.


 내가 몸을 싣고 있는 이 군함의 이름은 유키카제. 한문으로는 雪風, 눈바람 이라는 뜻을 지닌 카게로(陽炎)급 구축함의 8번째 함이며, 나를 포함한 240명의 승무원들과 운명을 같이하고 있는 배이다. 


 그렇기에 나는 조선 팔도에서 징병된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운이 좋은 놈이라고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다. 

 

강운함 유키카제. 대동아 전쟁 내내 여태껏 단 한 명의 사상자도 내지 않은 불침함에 몸을 실었으니까.


 "키노시타 이등병조, 또 유우코 씨에게 보내는 겁니까?"

 "아, 야마모토 일병."


 별안간 시커먼 사내놈 하나가 능글맞은 웃음을 흘리며 말을 건네 왔다. 


 지난달 구레항을 떠날 때 자신을 내지, 그것도 교토 출신이라며 내 앞에서 보란 듯이 으스대며 자기자랑을 하던 어린 친구… 아직 이름은 제대로 못 외웠지만 특징을 잡아 '넙치 야마모토'라고 기억하고 있는 친구다.


 "벌써 점심시간인가?"

 "네, 오늘 특식은 고기감자라 저도 평소보다 10분 정도 더 기다려야 맛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일단 편지부터 부치고 나서 먹든가 해야겠군…"


 "이등병조님!"

 "뭔가, 일병?"


 편지를 넣을 봉투를 찾아들고 내무실을 나서려는데, 다시 나를 부르는 야마모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번에 유우코 씨의 사진을 보여주시겠다고 했지 않으셨습니까?"

 "혹시 오늘 당직근무 서는 날인가, 일병?

 "아‥ 아뇨, 내일입니다만…"

 "그럼 내일 보여주도록 하지."

 

 그렇게 말하며 군화를 고쳐 신고 줄달음을 치듯 빠져나왔다. 


 저 친구와 오래 이야기해서 좋을 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농담 섞인 말이라도 한 번 잘못 던졌다간 뭔가 재미라도 있는 소문인 양, 크게 과장되어 순식간에 함 전체로 퍼져나가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 하니까. 


 녀석 덕분에 배에서의 첫날밤을 보낼 때 내가 조선 출신이오. 라고 밝힌지 사흘도 안 되어 내가 배속된 대공포반은 물론이요, 얼굴도 모르는 수병들까지 지나가며 나를 쳐다보며 조선인 이등병조라며 키드득 거렸으니, 말 다 한 셈이다.


"키노시타 병조, 유키카제 에서의 생활은 이제 익숙해졌나?"

"예, 병조장님. 덕분에 완전히 익숙해진 것 같습니다."


 몇 발작 걸은 것 같지도 않았는데, 벌써 전령의 이름이 적힌 내무실에 도착했다. 막 노크를 하고 들어서려는 순간, 옆에서 중년남성 특유의 굵직하고 시원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거 다행이군. 반도 출신, 조선인 이라고 너무 움츠리면 아랫것들이 더 얕보고 기어오르려 하거든. 그럴 땐 바로 정강이를 걷어차게. 그러면 따로 시정하라고 지시하지 않아도 알아서들 고개까지 숙여주니까, 아주 효과적이지. 하하핫!"

 "알겠습니다, 병조장님."

 "그럼 나는, 부함장님과 내기마작 약속이 잡혀서 이만."

 "살펴가십시오!"


 게다를 질질 끌며 번개같이 나타났다 사라진 타무라 병조장은 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백주대낮부터 거의 바닥난 사케병을 옆구리에 끼고 문뱃내를 풍기며 갈지자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외모로 보나 나이로 보나 나를 포함한 젊은 수병들에겐 거진 아버지뻘인 타무라 병조장은 듣자하니 레이테 해전 이후 지속적으로 감행된 카미카제 자살특공에 큰아들이 동원되어 지난달에 전사 통지를 받았다고 한다.


 한 술 더 떠서 야마모토의 말에 의하면 그의 큰아들에겐 두 살 아래의 약혼녀도 있었다던데, 이건 뭐 한사람 죽어서 사람 서너 명 신세 조지는 꼴이니 말도 안 나온다. 


 더 웃기는 건, 이러한 자살특공을 두고 천황폐하를 위해 몸을 던져 귀축영미를 쳐부수고 대일본제국을 수호하는 최고의 영광이라고 얼토당토 않는 궤변을 늘어뜨리며 '대대적'이고 '지속적'으로 감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언젠가 타무라 병조장이 말한 것처럼 우리의 진정한 적은 ‘탁상에 앉아 자존심 싸움이나 하는데 정신이 쏠린 멍청한 간부들'이 확실하다.


 "볼일이 있으면 문 앞에서 서성거리지 말고 냉큼 들어오십쇼."


 내무실 문에 대고 노크를 하려는 찰나, 안쪽에서 먼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이미 중식을 먹고 난 뒤인지, 부풀어 오른 배때지를 긁적거리며 전령이 문을 열어젖혔다. 


 일본어라면 징그러울 정도로 익숙했으나, 노골적으로 귀찮음과 싫은 기색이 묻어나는 그것은 상당히 퉁명스러웠다. 


 내선일체니 뭐니 해도 일단 식민지 조선 출신인 것을 밝혔으니 어느 정도 평가절하 되는 것이 이상한 것은 아니지만… 


 "실례하겠습니다."

 "또 애인에게 보내는 겁니까?"

 "뭐, 그렇죠. 가족이 같은 동네에 살아서 종이도 아낄 겸‥"

 "이번엔 저번보다 훨씬 오래 걸릴 겁니다."


 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가로채고 그리 말하더니, 전령은 배를 긁적이던 손으로 대충 편지를 받아들고 도로 방으로 들어갔다. 


사실 편지가 도착하는 데에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별 불만은 없다. 일단 도착하기만 해도 감사할 만한 일이니까. 


 운이 좋으면 보름에서 한 달 사이, 운이 나쁘면 두어 달 정도 걸리겠지… 정말 운이 나쁘다면 우편물을 실은 함선이 격침당해 영영 도착하지 못 할 수도 있다. 


 이미 고향에는 매화들이 만개했을 것이다. 비단 매화 뿐 만이 아니다. 유우코네 과수원의 복숭아꽃도 꽃 봉우리를 터뜨렸을 테고, 10년 넘게 자신의 것도 아닌 논밭을 손발이 불어터져라 일궈 온 농부들은 으레 그래왔듯이 다시 그들의 육신을 혹사시킬 것이다. 


 유우코에게 받은 마지막 편지에는 배급제가 실시되었지만 그마저도 제대로 행해지지 않는데다, 주민들 대부분이 문자를 모르는 것도 있지만,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반발심으로 인해 창씨개명과 주민등록 등에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여 하루 한 끼도 챙겨먹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한다.


 동네 주민들의 눈총을 받으면서도 주민등록과 창씨개명을 하고, 동네에서도 이장이나 겨우 하는 주민협조까지 해서 영락없는 친일파 딱지가 앉은 우리 집도 별반 다른 건 없다고 한다. 


 배급되는 양도 적거니와, 그나마도 작은 동네 일수록 도중에 면장이나 이장들이 가로채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니까 아예 답이 없는 상황이다.


 이래서야 마음에도 없이 '황국신민으로서 위급한 시국에 당연히 취해야 하는 모범적 자세' 운운하며 희떠운 소리를 지껄이고 군대에 지원한 것이 완전히 죽 쒀서 개 준 꼴 아닌가. 


 사과라도 구걸해 받아먹으려는 요량으로 식당에 들어서자, 돼지새끼들 마냥 접시에 얼굴을 묻고 게걸스레 밥을 쳐 먹는 수병들이 잔뜩 들어 차 있었다. 


 식당 구석에는 막 할 일이 끝났는지, 선 채로 다리를 꼬고 담배를 피는 취사병 하나가 맞은 편 테이블에서 식사를 마치고 앉아 있는 수병들과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뒷거래를 하기엔 일단 글러먹은 상대다. 다시 눈알을 굴리니 조리실 안에서 부단히 설거지를 하는 병사 둘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의 표적은 저들로 낙찰이다.


 "수고들이 많네."

 "아…"

 "쉿, 목소리 낮춰."


 설거지 중에 거수경례라도 하려 한 건지, 그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목소리를 냈다. 


 그 즉시 나는 검지를 입술에 대고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했고, 


 "사과 2개."


 호주머니에서 담배 한 갑을 꺼내 5개피 씩 나누어 주머니에 꽂아줬다. 


 순간 취사병들은 상황을 이해했는지 헤벌쭉 웃으며 선반을 열어 사과를 건네주었다.


 어차피 담배는 피지도 않는 나에게 있어, 보급품으로 나오는 담배는 이런 뒷거래를 할 때에나 써먹고, 그래도 남으면 그냥 마음 내키는 사람에게 몰아주고 마는 물건일 뿐이다.


 아마도 이러한 시국에는 담배 한 개피, 술 한 잔이 유일한 삶의 낙이라며 희떠운 소리를 하는 치들은 이러한 짓을 하는 나를 절대 이해하지 못하겠지…


 뒷거래를 할 때는 그 자리에 오래 머물러 봤자 좋을 것이 하나도 없다. 


 커피나 양갱 따위라도 얻어먹으려 했지만, 기본적인 군수물자도 부족한 마당에 그런 기호식품들이 있을 리가 없었다.


 설탕물이라도 챙겨 주냐며 묻는 취사병들을 뒤로하고 황급히 자리를 떴다. 내무실로 돌아와 보니 아무도 없었다. 


 두 손에 들린 사과들은 예상대로 보존상태가 개판이었다. 과즙이 적고 푸석푸석한, 그다지 좋지 않은 느낌의 그 사과를 한 입 베어 물고 드러누우며, 이 배에 오른 뒤로는 처음으로 이 전쟁과 전쟁을 일으킨 일본을 저주했다.


 나의 작은 자랑거리였던 경성제대 철학과 출신의 사촌동생과 타무라 병조장의 큰아들, 그리고 수많은 조선과 일본 젊은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전쟁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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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어김없이 봄이 찾아왔지만, 이번에 온 봄은 예년만 못하나 봅니다.


 새생명이 움트는 두근거림은 당신이 곁에 없는 지금, 느껴질 리가 만무하고

수확에 대한 기대감도 당신과 나누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니 부질없어져만 갑니다.


 이곳에는 벌써 벚꽃이 만개한 지 오랩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제가 어리광을 부리는 것 같아 보일 수도 있지만, 

올해만큼은 어서 봄이 지나고 여름이 와 당신과 함께 벚나무의 녹음을 거닐고 싶은 마음 뿐입니다.


                                쇼와 20년 4월,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라며, 유우코가 히로시에게.'  


 아마기 유우코는 히로시에게 보낼 편지를 곱게 접으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도 곁에 그가 있었다면 '행복이 달아난다'며 핀잔을 주었겠지만, 지금 그는 오키나와 특공을 위해 구레항의 불침함, 구축함 유키카제에 몸을 싣고 일본제국 해군의 자랑인 전함 야마토와 같은 함대에 배속되어 제국의 안전과 천황의 옥체를 보전하기 위한 결사보국의 전선에 뛰어든 상태여서, 아쉽게도 그의 애정 어린 잔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이미 해는 서산 뒤로 넘어간 지가 오래고, 하늘에는 별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유우코는 한동안 탁상 앞에 앉아 그와 함께 했던 옛 추억들을 회상하다 문득 해야 할 일을 막 떠올리기라도 한 건지 부엌으로 들어가 작은 보따리 하나를 들고 나오더니 그대로 집 밖으로 나섰다. 


 과수원을 벗어나자 논밭을 낀 작은 부락이 보였다. 부락에 들어서자 띄엄띄엄 외로이 서 있는 가스등 덕에 조금이나마 어둠이 가시는 듯 했고, 가스등의 퇴폐적이고 은은한 불빛이 간간히 그녀를 비추었고, 그때마다 눈물로 얼룩진 기모노자락과 충혈 되고 젖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어둠과 가스등 사이를 한참을 걸으며, 그 끝에 유우코가 도착한 곳은 '木下 弘'라고 적힌 문패가 붙어있는 낡은 집 앞이었다. 


 조심스레 문을 두어 번 두드리자 얼마 안 있어 윤활유 칠을 제대로 하지 않았는지 녹슨 철제 현관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고, 머리가 하얗게 새기 시작한 초로의 중년 부인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맞이했다.


 "밖은 쌀쌀하니, 일단 들어와서 차라도 한 잔 하자꾸나."

 "예 아주머니, 실례 하겠습니다…"


 작게 고개를 숙이고 조심스레 집안으로 들어서는 유우코의 모습은 전통적인 일본 여성의 그것과도 같았다. '모던 걸'과 '모던 보이'들이 판을 치고 다녔던, 십년 즈음 전만 해도 '구식여성'이라 조롱 받던, 그러나 군국주의가 장터의 어린애들 행동거지까지 파고든 지금은 매우 바람직한 여성상으로 다시 떠오른 '야마토 나데시코' 말이다. 


 키노시타 히로시가 없는 키노시타 히로시의 집에서는 사람이 살고 있다는 느낌이 나지 않았다. 


 몇 가지 되지도 않는 가구들이 엉성하게 자리하고 있었고, 그의 방은 물론, 방으로 이어지는 통로, 그 외에 비교적 사람의 손길이 자주 닿는 자잘한 공간까지도 먼지가 뿌옇게 앉고, 곰팡내가 났다. 


 그나마 사람이 있었던 흔적이 보이는 곳은 현재 그의 어머니와 유우코가 앉아 있는 거실과 부엌 뿐 이었다. 

 그녀는 가지고 온 보따리를 거실구석에 내려놓고, 히로시의 어머니가 내온 녹차를 마시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당연한 얘기지만, 집안에서 쇠붙이는 아예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공출이 시작된 후로는 식기와 밥숟가락은 물론이고, 어린애 돌반지까지 쓸어 담아 가는 마당에 친일파의 집이라고 해서 딱히 그 여파가 비껴간 것은 아니었다. 


 아니, 집에서 없어진 것이 쇠붙이에서 끝난 거라면 그나마 양반이다.


 강제징병과 징용으로 아들을, 심한 집은 정신대 차출로 딸까지 공출당해 얼마 안 있어 '귀댁의 자녀는 천황 폐하와 대일본제국의 충용한 병사로서 장렬하게 전사하셨습니다.'라는 내용의 편지와 함께 '영령의 집'이라는 딱지가 문패 옆에 자리하게 될 집들이 대부분이었고, 이미 자리하고 있는 집도 심심찮게 보이고 있었다.


 "아직도‥ 후회하고 계시는 건가요? 히로시군을 군대로 보낸 것을…"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세상에 어느 부모가 곧 자식을 잃게 될 마당에 후회를 하지 않을 수가 있겠니."


 자신을 맞이하며 인자한 미소를 짓던 초로의 중년 부인은 어느새 자식을 잃을 걱정과 불안이 앞서 고뇌하고 있었다.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고, 부실공사로 이곳저곳 갈라진 틈 사이로 차가운 밤바람이 새어 들어와 기분 나쁜 휘파람 소리를 내고 있었다. 


 봄이 만연했다지만 밤바람의 차가움은 여전했다. 유우코는 가스난로를 찾다가, 순간적으로 공출물품 중 가스와 석유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이 생각이 나 얼굴을 붉혔다.


 자신의 집과는 다르게, 히로시의 집에는 가스난로도, 석유난로도 없었으니까.

 

"제딴에는 배급쌀이 더 나온다는 소리에 내 배 곯게 하지 않으려고 자원을 했다지만, 어떤 부모가 자식 목숨 담보로 받은 쌀을 목구멍 너머로 넘길 수 있겠어, 내가 왜 남편이 죽었는데도 14년 넘게 궂은일 마다하지 않고 이 동네에서 살았는데…" 

 "아주머니, 히로시군은 반드시 살아서 돌아올 거예요. 아주머니는 히로시군이 그 날 기차역에서 한 말을 믿지 않는 건가요? 이럴 때 일수록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해요. 우리가 히로시군‥ 아니, 태식 씨를 믿지 않으면 세상 누가 태식 씨를 믿어주겠어요?"


 유우코는 떨리는 부인의 손을 잡으며 부드럽게, 그러나 단호히 말했다. 부인의 손에는 작년까지만 해도 중지에 끼워져 있었던 두 돈짜리 결혼반지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히로시를 학교에 보내주겠다며 팔아치우려고 하였던 그 반지였다. 


 키노시타 히로시‥ 아니, 이태식. 그는 원래 농림전문학교에 진학 해, 제대로 과수원 일을 하거나 농사를 짓고 싶어 했다. 


 그러나 입학금을 낼 길이 없었고, 그거 대주겠다고 어머니가 결혼반지를 팔아버리는 것 또한 원하지 않았다. 


 결국, 그가 선택한 길은 보통학교를 다닐 때부터 그래 왔듯이 유우코네 과수원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쟁의 소용돌이는 얌전히 과수원 잡부로 살아가기로 마음을 먹은 애꿎은 식민지 청년까지 집어삼켰고, 불행히도 그가 몸을 담게 된 곳은 항상 '낙관적 승리' 운운하며 정신력의 중요성만을 들먹이는 똥통집단이었다. 


 전쟁 초반에 진주만에서 2천명이 넘는 목숨을 잃은 미국은 지난 4년간 복수의 칼날을 갈며 차근차근 일본의 숨통을 조여 온 끝에 바로 코앞인 오키나와까지 쳐들어 왔고, 그들이 말했던 대동아공영권이라는 허상은 시도 때도 없이 날아드는 미국의 폭격세례에 그들의 수도인 도쿄와 함께 타들어 갔다. 


 그 불길이 삼천만이 불모가 된 식민조선의 젊은이들까지 집어삼킨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고.


 "히로시군은 곧 돌아 올 거예요.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현관에서 우리 과수원의 흙이 묻은 신발을 털고 들어와 재미없는 농담을 하며 냉수를 달라고 하겠죠. 아주머니는 미소를 지으시며 냉수가 담긴 컵을 내오실 것이고, 저는 부엌에서 같이 점심으로 먹을 국수를 삶고…"


 손의 떨림은 어느덧 멈추었고, 두 여인은 아무 말 없이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밤하늘의 달빛은 그리 밝지 않아 평소보다 별이 더욱 많이 보였다. 


 순간 별 하나가 산등성이 위로 길게 꼬리를 늘이며 떨어지는 것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편지를 쓰면서 기도를 했었지만, 유우코는 다시금 속으로 기도했다.


 일본제국 해군의 이등병조, 키노시타 히로시가, 아니, 과수원의 잡부 이태식이 벚꽃이 지거든 무사히 돌아오게 해 달라고.


---

 어제 일본제국 해군의 상징이자 자랑인 전함 야마토가 미국 뇌격기와 급강하 폭격기의 맹공을 받은 끝에 격침되었다고 한다. 


 멀리서 봐도 하얀색 별 도장이 박힌 항공기들이 풀잎을 한 입이라도 더 갉아먹으려 달려드는 메뚜기 떼처럼 하늘을 가득 메웠었으니, 그것을 막아 낼 수 있을 리가 없었던 건 뻔해 보였었다. 


 자매함 무사시를 레이테 해전에서 잃은 지 반년도 안 되서 벌어진 일이다. 


 제국해군의 상징이 가라앉았으니, 이제 일본제국의 해군은 끝장난 거나 다름없다.


 덧붙여서 우리 쪽의 제로센들은 허구한 날 '영광스런 죽음' 타령하며 자살돌격 질이나 해대고 앉아있었으나, 신문과 라디오에서 떠들어 대는 것과는 달리 이렇다 할 성과도 내지 못했다. 


 어떻게 그걸 확신할 수 있냐고? 만약 제대로 된 성과를 냈다면, 지금 미국의 전함과 항공모함들이 물밀듯이 밀려와서 오키나와와 인근해의 제국군을 짓뭉개고 있을 리가 없을 터이다.


 "뒤지기 싫으면 엎드려 이 새끼들아!"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키노시타 이등병조! 야 이 새끼야, 대공포 반장이면 빨리 애들 데리고 자리로 가야 할 거 아냐!"

 "카토 상병이 죽었습니다! 나카지마 병장은 방금 전 기총소사로 오른팔이 잘렸고요!"

 "그럼 야마모토라도 데리고 가서 응사해! 저 새끼들 죄다 격추시키란 말야!"


 타무라 병조장은 아무래도 제대로 독이 오른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자기 큰아들을 죽인 원흉들이 눈앞에서 기어 다니고 앉아있으니 죽이고 싶어서 미치겠지…


 "야마모토 일병, 그 탄통 잘 챙겨라. 지금 제1 대공포반에서 전투가 가능한 게 우리들뿐이다."

 "예? 잘 못 들었습니다!"

 "멍하니 서 있다가 총 맞아 뒈지기 싫으면 따라오라고!"

 "알겠습니다!"


 야마모토 일병은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탄약고에서 15발 들이 탄창을 작은 목조상자에 주워 담아 챙겨들고 있었다. 


 거기까진 좋은데, 아까부터 계속되는 기총소사 때문에 언제 튀어나와야 할 줄을 몰라 구석에 박혀 있었고, 혼란스런 와중에 그런 그를 발견한 것은 나에게 있어선 작은 행운이었다.


 "내가 지시하기 전까지 머리 숙이고 있어."

 "지금 가도 될 것 같지 않습니까?"

 "대가리 숙이고 있으라고! 내가 조선말로 말했냐!? 교토 출신이면 제대로 알아들어야 할 거 아냐!"

 "시정하겠습니다!"


 방금 전 기총소사를 하고 지나간 구라망[1]이 선회를 해서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곧 제 2파가 닥칠 것은 물 보듯 뻔하다. 


 선회하기 전, 구라망의 꼬리날개를 쳐다보던 야마모토 일병은 고개를 쳐들고 그것을 바라보며 낮게 중얼거렸다가 나의 걸걸한 지시에 몸에 탄창이 열댓 개 정도 담긴 상자를 고쳐들고 쥐죽은 듯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이윽고 철판에 콩이 튀기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고, 수병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온 건 그 다음이었다. 

 

"지금이야! 빨리 올라가!"

 

 언제 기총소사가 다시 시작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그 전에 빨리 제자리로 가서 방아쇠를 당겨야 한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오로지 그것 뿐, 일본군이 자랑하는 정신력과 군기가 개판인 유키카제에서도 행동은 가려서 해야 하는 법이다.


 평소 군복을 대충 걸쳐 입고 게다를 질질 끌어대던 수병들은 누구보다도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것만 봐도 그것이 단박에 납득이 갔다.


 "장전하고, 가서 탄약 더 가져와. 가다가 팔다리 잘리고 고꾸라지는 한이 있어도 가져오란 말이야!"

 "예! 반장님!"

 "반장님 빼고 임마, 경례는 또 왜 붙여? 때가 어는 땐데, 빨리 가서 탄약이나 가져와!"


 세라복에는 피가 묻고, 온 몸에서 화약 찌꺼기 냄새가 풍기는 야마모토 일병은, 내 꾸짖음에 더 이상 토를 달지 않고 탄약을 가지러 내려갔다. 


 그에게 시선을 고정하는 것은 그만 두도록 하자. 시선을 달리해, 내 앞에 놓인 96식 고각기총을 훑어봤다.


 주변에 파편이 튀긴 했지만 크게 고장 나거나 한 부분은 보이지 않았다. 만약 고장이 났다고 해도 지금 이 상황에선 수리를 해서 사용을 할 수 있을 리도 없고.  


 96식 고각기총은 오래된 주제에 개량도 제대로 실시되지 않은 구닥다리 기관포다.


 15발 들이 탄창을 끼워 사용하고, 이 덕분에 잠깐만 넋 놓고 있어도 -이럴 경우, 적 전투기의 기총에 맞아 죽기 전에 타무라 병조장에게 얻어맞아 죽을 가능성이 더 높지만- 탄창이 금새 바닥난다. 


 그런 주제에 몇 번 사격훈련을 해 본 결과, 고각 조절을 위한 마운트의 구동속도가 느려 터진데다, 대공화망 강화를 위한 궁여지책으로 총열을 단장이 아닌, 연장이나 삼연장으로 배열해놨지만 부실한 조준장치와 과도한 진동 덕분에 되려 정확성만 떨어뜨렸다.


 유키카제에는 이 고물을 3연장 5문, 단장 14문으로 총 29문이나 탑재해 놨다. 


 강력한 미 해군 전투기에 맞서기 위한 것이라고는 하나, 얼마나 효용성이 있을 지는 내가 알 리가 만무하다. 


 "제기랄! 장전 좀 하자! 죽더라도 한 발 정도는 쏘고 죽어야 될 거 아냐!"


 내 포반에서 사용하는 기총은 총열이 삼연장 짜리였다. 당연히 탄창도 3개를 꽂아야 하고, 그만큼 장전시간이 더 걸린다. 


 보통은 카토 상병과 야마모토 일병이 장전을 하고, 나카지마 병장이 조준 및 사격, 내가 사격 타이밍에 맞춰 신호를 내리는 것을 분담하고 있었다.


 하지만 송장과 외팔뚝이가 대공사격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은가. 


 그러나 미국의 전투기들은 이런 나의 사정을 알아 줄 리가 만무했고, 곧이어 가까이서 콩 튀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그냥 기분 탓 인줄 알았다. 왼쪽 다리와 옆구리에서 피가 배어나와 새하얀 세라복을 적셨고, 따끔한 통증이 이어졌다. 


 어디가 잘려나가거나 하진 않았으니 아마도 파편이 조금 튄 것 일거다. 피를 보니 예상외로 겁이 나지 않았다. 오히려 정신이 빠릿빠릿해지는 기분이다. 


 조준기를 정렬한 후, 장전 손잡이를 당기고 양 손의 검지를 방아쇠에 걸어놓고 전투기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목구멍 아래로 고른 심장고동 소리가 느껴졌다.


 모의훈련도 충분히 받지 않았지만, 왠지 할 수 있을 것 같다. 


 "뒈져! 시팔, 뒈져!"


 새된 프로펠러 소리가 다가오자, 방아쇠를 당기며 욕지거리와 함께 총탄들을 뱉어냈다. 


 분당 200발의 속도로 날아가는 고각기총의 고폭탄들은 내 기대와는 달리 한 발도 통통한 구라망 전투기에 명중하지 못했다.


 별안간 옆으로 구라망 한 대가 내 뺨따귀를 후릴 기세로 날아갔다. 그 뒤를 이어 뜨거운 공기가 내 몸을 엄습했다. 


 방금 전 사격으로 15발 들이 탄창은 바닥이 났을 거다. 어서 그것을 갈아 끼우고 자세를 가다듬어야 하지만,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다. 


 수평선 위로 하얀색 별 도장이 박힌 항공기들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고, 계속해서 일본제국 함대의 군함들을 쳐부수고 있었다. 


 뇌격기에서 떨어진 어뢰를 피하려고 정신없이 움직이던 순양함은 위에서 접근하는 급강하 폭격기를 발견하지 못하고 수병들과 함께 폭탄의 화염에 휩싸였다.


 구축함들은 전투기들의 기총사격에 난자당했고 그 끝내는 어뢰공격을 받아 두 동강이 난 채 가라앉았다.


 그리고 불행히도,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유키카제의 수병들은 장님이 아니었기에 그러한 상황을 똑똑히 지켜볼 수 있었다.


 항공기의 엔진소리가 더욱 짙어진 것으로 미루어 보아 데라우치 함장님은 아 함대의 생존자들을 구조하기 위해 뱃머리를 돌리신 모양이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고각기총의 탄창을 갈아 끼우기 위해 목조상자에서 새 탄창을 꺼내들었다.


 당장 구조는 고사하고 중파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인데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곳에서 구조작업이라니… 죽기 싫으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만 한다. 


 상황에 맞지 않을 수도 있지만 유우코 생각이 났다.


 나보다도 훨씬 잘난 골수 친일파와 항상 과수원 언저리로 멋들어지게 말을 타고 다니던 일본인 장교 대신 나와 결혼을 하겠다고 약속을 했던 내지 출신의 아가씨 말이다.


 비단 유우코 뿐만이 아니다. 그리운 것들, 보고 싶은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처음 부산항을 떠날 때부터 제대하기 전까지 절대로 향수에 젖어 울지 않겠노라고 다짐을 했건만… 기어코 떠올리고야 말았다. 


 "12시 방향 적기 접근 중! 거리 1500!"

 

예를 들자면, 밭고랑을 갈 때 발바닥 아래로 느껴지는 봄 흙의 부드러움이라던가, 봄비가 내리기 전에 이는 흙먼지의 냄새라던가, 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서산 너머로 지는 석양의 푸근함이라던가.


 한여름 밤 과수원의 원두막에 드러누웠을 때 구름 너머로 보이는 은하수라던가.


 의미 없이 별을 셀 때 코끝을 간질이는 모기향의 냄새라던가, 그리고 풀벌레 소리마저 가라앉았을 때 느껴지는 알 수 없는 평온한 분위기라던가… 


평소에는 한없이 작고 사소하게만 느껴졌던 것들마저도 추억과 향수를 감싸고 너무나도 큰 것이 되어 나에게 다가왔다. 


 "반장님, 쏘세요!"

 "나도 알아! 야마모토 일병!"


 함수에 있던 관측병이 신호를 보내고 얼마 안 있어 야마모토 일병의 다급한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저것들은 구조작업을 하고 있어도 자비 없이 공격을 멈추지 않는 모양이다. 뭐, 이것도 결국은 일본제국이 파멸을 자초한 꼴이다. 감당하지 못할 상대에겐 시비조차 걸어선 안되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반장님!"

 "위험한 거 나도 안다고! 급한데 왜 자꾸 부르고 난리야!"

 "위험합니다! 피하십시오!"


 구라망 한 대가 이쪽을 향해 기총소사를 하며 로켓탄을 쏴 갈기는 것이 보였다. 


 나 또한 그것을 똑바로 쳐다보며 대공사격으로 응수했으나 총탄과 로켓탄들은 오지 말라고 이렇게 격렬히 거부를 해도 징그럽게 자꾸만 이쪽을 향해 날아왔다. 


 그것들이 유키카제에 바람구멍을 뚫는 순간 마지막 탄을 뿜어내는 고각기총의 포구의 포연 너머로 희미하게 어머니와 유우코의 얼굴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젠장맞을…"


 그 짧은 욕지거리는 아마 안 될 것을 알면서도 멍청하게 무의미한 저항을 계속하다 화를 입은 나에게 보내는 자조였으리라.


 중지만한 기총탄은 내 어깨를 헤집어 놓은 것만으로는 모자랐는지 그대로 내 몸을 끌고 차가운 선체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파편을 맞았을 때와는 비교를 불허할 정도의 고통이 온몸에 엄습했고, 어깨에선 선혈이 터져 나왔다.


 그 이루어 말할 수 없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려고 했지만 피가 목구멍까지 차오른 덕에 짧은 단말마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컥컥거리는 기분 나쁜 소리만이 메아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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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렬한 빛이 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 빛은 끝없이 펼쳐져 두 눈은 물론 머릿속까지 가득 들어차 나를 괴롭히는 듯 했다. 


 희미한 정신을 붙든 채로 빛 사이를 헤맨 끝에 보인 것은 끝없이 지고 있는 벚꽃들이었다.


 영원히 피어있을 것만 같았던 벚꽃들이 눈발처럼 흩날리는 그 모습은 허망하고, 또 아름다웠다.


 그 벚나무 언덕 위에서 어머니와 유우코가 곱게 나들이옷을 차려입고는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숨이 차는 것에 개의치 않고 한달음에 흩날리는 꽃잎 사이를 헤치고 달려가 두 사람의 손을 맞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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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구라망: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미 해군의 F4F 와일드 캣, F6F 헬캣을 두고 지칭했던 말. 


알 사람은 다들 알겠지만, 실제로 일본 해군, 그것도 유키카제에 조선인 수병이 승선했었다는 기록은 없었음. 


그냥 소설이니까 그러려니 하고 넘기면 되는 부분임.


고등학교 2학년, 지금으로부터 10년도 더 전에 썼던 글인데 지금와서 다시 보니까 여전히 아쉬운 마음이 남는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