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어두워져간다. 낡은 창문도, 새하얀 벽지도, 침대도, 오랜만에 찾아온 친구들도, 가족들도 모두 형태가 뭉그러지듯이 아득해지더니 물감 번지듯 번지다가 결국은 사라진다.


이윽고 눈 앞의 형체들이 완전히 사라졌을때 비로소 세상에 빛이 사라졌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어둠의 장막이 세상을 완전히 뒤덮었고 나는 이 어두운 세상에 홀로 남겨진 작은 것이었다.


문득 입에 남아있던 떫은 맛이 옅어진다. 알약을 물과 단숨에 삼켜넣어 입에 남은 양약의 떫은 맛. 하도 싫어했고 다신 먹고싶지 않다고 생각했던 맛이었지만 이리 사라지니 어째선지 약간은 그립다는 생각마저 들게 된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은은한 알콜향과 어디선가 느껴지는 붕대의 쿱쿱한 냄새. 그리고 사람의 향기.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거리를 공기를 타고 바람을 타고 향기를 실어 코를 간지르고는 다시 아득히 멀어진다.


가장 소중한 것은 보이지 않아도, 느껴지지 않아도 그곳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보이지 않는 어두운 세상 속에 손을 뻗어 더듬는다. 한 곳을 건드리고 다른 곳을 건드리며 한 군데씩 찾아갈 때마다 침대의 차가운 철제 모서리가 뭉툭해져간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손을 움직여 다른 곳을 찾으려 할 때 이윽고 무딘 손에 유일하게 따뜻한 무엇인가를 찾아내었고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그 소중한 것을 손으로 꾸욱 잡는다.


따뜻함이 사라진다. 사라져간다. 어둠에 실려가는 것인가. 바람에 실려가는 것인가.


손에 남는 것은 따뜻함이다. 그것은 미련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먼 길을 떠나기 위해서는 결국에 놓아주어야 하는 것. 하지만 너무나 소중한 것. 그리 소중한 것을 놓아준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내게 정말로 소중한 사람."


소리가 멀어지기도 가까워지기도 한다. 그에 상관없이 소리의 한 글자 한 글자를 뇌에 되새겨 놓는다. 아름다운 음정도 목소리도 아니지만 저 눈물 가득한 목소리가 정말로 소중하다. 나의 미련이다.


"당신과 함께여서, 정말로 행복했어요."


목소리는 끝이 났다. 머리 속에서 마치 메아리처럼 꼬리를 물고 끊임없이 다시 상기시키지만 이걸로 더 이상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손을 놓고 싶지 않다. 미련을 놓아주기 싫다. 그저 이 따뜻함을 다시 함께 나누고 싶다.


하지만 영원한 것은 없다. 꽃은 피는 순간 지게 될 날이 오길 기다리고 아이는 점점 커가다가 어느 순간 늙어간다. 따뜻함 역시 마찬가지다. 언젠간 흩어져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래도 나는 사람의 마음 속에서 끊임없이 되새겨지는 것의 이름을 안다.


"나도"


작게 속삭인다.


그것의 이름은 미련이다. 또한 손에 남은 따뜻함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



사람이 죽을 때 사라지는 감각이 시각, 미각, 후각, 통각, 청각 순이라고 어딘가에서 본게 생각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