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하늘이 눈에 들어온다.


차가운 비가 몸을 적시고,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체온마저 빼앗아 가는 것 같다.


애초에 인형인 나에게 체온이라는 것이 있기는 할까. 나는 이제 버려졌고, 비등록 인형이 되어버렸다.


이제 남은 전력이 다하면 아무것도 보지 못하겠지. 삶의 마지막에 눈에 담는 것이 잿빛 하늘이라니. 너무나도 비참한 결말이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닥쳐! 이 쓸모없는 고철덩어리야! 감히 VIP의 몸에 상처를 내? 내가 볼 손해를 어떻게 감당할 거냐!?"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기회를 주세요...!"


나는 서커스단에서 일하고 있었다. 애초에 그렇게 만들어진 몸이다. 민간용으로 만들어진, 무형예술 산업에 종사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형.


나는 출고되자마자 곡예를 하는 훈련을 받았고, 2년간 훈련받은 끝에 한 서커스단에 인계되었다.


처음 몇달간은 관객이 많아 벌이가 많았다. 비록 나에게 주어지는 수입은 적었지만, 안정된 거처와 전력, 식량을 공급받을 수 있었다.


그래. 처음 몇달간은 그랬다. 철혈공조공단의 인형들이 반란을 일으켜 대규모 유혈사태를 일으키기 전 까지는.


관객이 없어진 서커스단은 유지될 수 없었고, 단장은 매춘업에 눈길을 돌렸다. 동료 인형들은 매일 남자를 상대했고, 가끔은 몸이 망가져서 오는 동료들도 있었다.


처음에는 그녀들을 수리해주던 단장은 어느 순간부터 더 많은 손님을 받고, 부상당한 동료들을 돌보지 않았다. 이미 버림패였던 우리가 완전히 망가지기 전까지 최대한 많은 돈을 벌 생각인 것 같았다.


나는 남자들을 상대하지 않았다. 가학적이고 퇴폐적인 욕망을 품은 그들을 상대하는 것이 무서웠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몸을 맡기고 싶지 않았다.


손님이 볼 때마다 도망쳤고, 일부러 바쁘게 일을 찾아다니며 번 돈을 단장에게 가져다 바쳤다. 한번은 몸이 상한 동료를 몰래 정비사에게 대리고 갔다가 잡혔다.


욕을 듣고. 때리고. 모욕당하고. 그럼에도 나는 잠깐 도망쳤다가 단장에게 돌아갔다. 인형인 내가 돌아갈 곳은 그곳밖에 없었으니까.


"썩 꺼져버려!! 길거리에서 썩어버리라고!!"


어느날 어떤 고객이 나를 지목했고, 단장은 나를 억지로 고객과 나를 한 방에 몰아넣었다. 기분나쁠 정도로 뚱뚱했던 남자는 전기충격기로 나에게 고통을 주면서 범하려고 했다.


나는 그에게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인간을 해칠 수 없게 프로그래밍된 프로토콜이 나에게 경고를 했지만 머리가 타버릴 것 같은 고통을 참고 저항했다.


이런 남자에게 안기다니. 죽어도 싫었다. 안네리제라는 내 존재를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


인형의 힘은 인간보다 훨씬 강하다. 나는 저항하다가 고객의 팔을 부러뜨려 버렸고, 화가 난 단장에게 몽둥이로 실컷 얻어맞고 길거리에 버려졌다.


내 인형 등록도 말소당했으니, 나는 불법 인형이 되겠지.


"음.... 저기. 괜찮아?"


그런 나에게 한 남자가 찾아왔다. 붉은 제복을 입은, 젊지만 얼굴에 흉터가 남아버린 남자. 그는 분명 힘든 삶을 살아왔겠지.


"감사합니다만.... 저를 왜 도와주신거죠?"


"음... 그냥 괜한 참견이야. 나는 곤경에 처한 인형을 지나치지 못하는 성격이라서."


"음... 왜요?"


"너희들이 너무 사람같달까. 스스로 생각도 하고, 감정도 있잖아. 물건이라는 느낌은 전혀 안들어서."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인형을 사람처럼 생각하다니. 우리는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텅 비어버린 인간의 자리를 매워넣기 위한 인형일 뿐인데.


"나는 이런 사람이야. 아까 확인해보니 불법 인형이던데... 관심 있으면 연락해줘. 솔직히 일은 힘들지만, 그만큼 보람있는 일이야. 위험하지만... 스스로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어."


"......."


이리도 가혹한 운명이 있을까. 그렇게 생각했었다. 불법 인형으로서 음지에 숨어 살아갈 것인가, 무기를 들고 전장으로 향할 것인가.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춤 추고 묘기를 부리는 것 밖에 없는 나에게는 어느쪽도 선택하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선택했다. 그가 내민 손을 잡고 G&K에 입사했다.


"전술인형 Mk.23. 전입을 신고합니다."


"어서 와. 기다리고 있었어."


그가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불법 인형이었던 나는 신분을 되찾고 화력관제 코어를 부여받아 안전계약사 G&K에 입사하게 되었다. 그가 어둠의 루트로 나를 이렇게 끌어올린 것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크루거... 라는 사람이 도와줬다는 것 같은데.


Mk.23.  권총 주제에 부담스럽게 큰 크기. 1.3kg라는 무게. 하지만 그 단점을 눈감아줄 만한 정밀도와 신뢰성. 봉을 잡고 묘기를 부리고, 인형들을 지탱하며 서커스를 해온 나에게는 그다지 부담스럽지는 않은 무기였다. 오히려 다른 권총보다 성능이 뛰어나 작전 수행에는 조금 더 유리했다.


전술인형으로 다시 태어난 나에게 주어진 임무는, 지휘관의 경호. 그를 항상 따라다니며 그의 신변을 보호하는 일이었다.


"지휘관! 지휘관! 게임하자!"


"RFB... 훈련은 다 끝낸거야?"


"엑... 조금은 쉬다가 해도 괜찮잖아."


"요녀석. 일보다 게임을 우선시하면 어쩌자는 거냐."


"우읏.... 아파! 여자의 머리를 때리는건 범죄라구! 폭력 반대! 뿌뿌-!"


"지휘관. 이 옷 어때?"


"야...! P90! FAL의 옷을 훔쳐입으면 어떻게 해...!"


"저... 저 도둑년 잡아!"

"으아아아아---- 알몸으로 돌아다니면 어쩌자는 거야 FAL...!!"


"도망쳐~"


그를 따라다니며 본  지휘부의 삶은 바깥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작전과 훈련 시간 외에 인형들은 자유를 보장받았고, 노력해서 이룬 성과의 보상으로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 그녀들에게 지휘관은 사적으로 보상을 주기도 했다.


지휘부의 인형들은 모두 민간용 인형이었지만, 이곳에서는 병사이자 자유인이었다. 그들의 삶은... 마치 인간 같았다.


열심히 일하고. 동료의 부상에 분노하고 슬퍼하고. 서로 장난치면서 웃고. 울거나 싸우기도 한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지휘관이 울타리가 되어 인형들의 권리를 보장하고 그가 그녀들을 인간과 다를 것 없이 대했기 때문이다.


사회에서 지쳐버린 나는 한동안 내 할일만 하자는 주의에 빠져 살았다. 내 할일만 하고, 딱히 친구를 만들거나 구태여 일을 더 하지는 않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지휘부의 일상을 본 나에게도 지휘관에게 주목받고 싶다는 욕심이 싹텄다. 경호 업무 외에도 다른 업무를 배워 지휘관의 일을 보조했고, 인형들이 자율적으로 하는 전술 시뮬레이션 훈련에도 꾸준히 참가했다.


"저번 전술평가 보고서 봤어. 실력이 눈에띄게 많이 늘었는걸. Mk.23"


"그런가요...? 저는 권총 뿐이라 화력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걸요."


"단순 화력만이 전장의 판도를 바꾸는게 아니야. 적의 숫자와 대형을 파악하고, 적의 약점에 화력을 유도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데. Mk.23은 그 역할을 자처해서 했어.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어. 지난 전술평가 보고서를 보니, 네가 속한 기관총 제대의 작전능력이 36%나 증가했는걸. 그래서 생각해 봤는데, 너를 내 호위로만 두기에는 너무 아까워. 기관총 제대에 편입해서 전투를 이끌어주었으면 하는데... 어때? 네가 전투를 이끌어준다면 더욱 효과적인 전술을 펼칠 수 있다는게 내 판단이야. 물론 강요하는건 아니야. 선택은 너에게 맡길게."


"지휘관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알겠습니다. 저를 전투 제대에 편입시켜주세요."


"그래. 알겠어. 열심히 해줘."


지휘관의 큰 손이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의 손은 크고 거칠었지만, 머릿결을 쓰다듬는 그의 손은 너무나도 따뜻했고, 마인드맵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것 같았다. 머릿 속에 햇살이 비치는 것 같다는 느낌은 이럴 때 쓰는 표현이겠지.


지휘관의 호위에서 전출되어 전투제대에 편입된 나는 주로 야간 작전에 투입되었다. 더미를 산개해서 정찰 정보를 수집하고, 기관총 인형들의 화력을 적에게 유도하여 적을 소탕하고 거점을 점령했다. 피해를 입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작전을 큰 피해 없이 성공시켰다.


"고양이 누나. 저랑 파파, 마마를 지켜줘서 고마워요."


"응...? 이건 내가 해야할 일인걸.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


"저희 가족들을 지켜줬으니 누나들이 영웅이에요. 누나가 권총으로 마마를 때리려던 나쁜 로봇을 해치우는걸 봤어요."


전우들과 전장을 누비며 쌓은 노하우. 작전 성공의 성취감과 전투의 고양감, 동료가 부상당했을 때 느끼는 분노. 누군가를 지켜냈다는 보람. 잿빛으로 끝날 것 같은 내 인생은 다양한 색깔로 칠해지기 시작했고, 마인드맵은 풍부한 기억으로 채워져 나갔다.


"이번 작전도 고생했어. Mk.23. 크흠... 흠... 이건 선물이야. 받아줘."


"지휘관... 이건..."


"아...! 지금 열지 말고 숙소에 가서 열어! 명령이야. 알겠지?"


"그렇게까지 할 일이야...? 명령이라니까 그렇게 하겠지만."


지휘관이 얼굴까지 붉혀가며 숙소로 돌아가서 열라고 했던, 천 재질로 덮인 케이스. 그 속에는 한 쌍의 분홍빛 하트모양의 귀걸이가 있었다.


내용물을 보자마자 눈물이 쏟아졌다. 왜 그랬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무언가를 받았다는게, 지휘관에게 무언가를 받았다는게 너무 기뻐서 그랬을까.


지금까지 겪어온 억울함과 절망. 그리폰에 입사해서 기울인 노력. 그 전부를 지휘관에게 인정받고 보상받은 것 같아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죽음을 기다리고 있던 나에게 기회를 준 지휘관. 내가 있을 곳을 제공해준 지휘관. 삶을 풍부한 기억으로 채워준 지휘관. 사람같은 삶과 자유, 책임을 누리게 해준 해준 지휘관. 훈련에 지칠 때 나를 격려해준 지휘관. 성과를 내면 미소와 칭찬, 급여로 보상해준 지휘관. 내가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인도해주고 등을 밀어준 지휘관.


나를 긍정해준. 단 한명의 사람. 아마 그다지 비싸지도 않을 이 귀걸이는 나에게 지휘관에게 인정받았다는 상징이었다.


내 삶에는 어느새 지휘관이라는 큰 존재가 있었다. 그가 내 삶을 채워줬고, 그를 위해서 무언가 하고 싶고, 그에게 더 인정받고 싶다. 그의 따스함을, 그의 온정을 더욱 깊이 느끼고 싶다.


눈물이 멈춘 그때. 나는 깨달았다. 이것은 사랑이다. 나는 지휘관을 사랑하고 있다. 그에게 사랑받고 싶고, 그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고싶다.


지휘관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었지만, 지휘부에는 적이 너무 많았다. 인간의 호감에 거스르지 않도록 만들어진 민간 인형들은 겉모습이 왠만한 인간보다 아름다웠고, 하필이면 이 지휘부의 인형들은 그런 인형들 중에서도 더 예쁘고 지휘관에게 매우 호의적이었다. 심지어 일부는 지휘관에게 연심을 품고 있었다.


지휘관에게 귀걸이를 선물받은 그날부터, 나는 내 자신을 가꾸기 시작했다.


화장하는 법을 배우고. 몸매를 가꾸고. 피부관리를 시작했다. 항상 곧은 신체자세를 유지했고, 머릿결은 항상 청결하고 윤기있게 유지한다.


외모를 가꾸는 것으로는 그에게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없다. 전술 훈련으로 작전 능력을 더욱 올린다. 그의 부관이 될 수 있도록 문서와 사무를 처리하는 일도 배운다. 누구도 나를 따라잡을 수 없도록 능률을 올린다. 마인드맵을 태워버릴 것 같은 노력 끝에, 나는 지휘관의 부관이라는 자리를 얻어냈다.


"신입. 달링은 내꺼야."


"어... 네."


작전외의 업무 시간에는 그와 함께 있는다. 지휘관의 사생활을 존중하는 선에서, 자유 시간에는 그를 따라다니면서 다른 인형들이 그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지휘관의 주의를 나에게 돌린다. 신입이 전입되면 지휘관을 넘보지 못하게 으름장을 놓는다.


"달링. 오늘 아침에 들어온 군수물자 실셈해서 정리해왔어. 확인해줄레?"


"어. 고마워 Mk.23.... 어...? 방금 뭐라고 했어?"


"달링~ 이라고 했는데?"


"크흡...! 야! 너 갑자기 무슨...!"


"앞으로는 계속 달링이라고 부를거야. 그야, 지휘관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달링이니까~"


"ㄴ,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들으면 뭐 어때? 내가 지휘관을 엄청엄청- 좋아하는건 사실인데."


나는 지휘관을 달링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내가 서커스 훈련을 받을 때 인간 트레이너가 가르쳐준, 사랑하는 사람을 부르는 호칭,


지휘관은 내가 세상에서 유일하게 사랑하는 사람. 사랑받고 싶은 대상. 나에게 달링은 지휘관 하나 뿐이었으니, 그를 달링이라고 부르는건 당연했다.


다른 인형이 듣던 말던, 옆에 누가 있던간에 나는 지휘관을 달링이라고 불렀다.


"4소대가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철혈 외의 그... 하얀 녀석들은 이 지하 시설에 자리잡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 달링."


"확실히... 이렇게 정보를 정리해놓으니 보기 쉽네. 그리고 달링이라고 부르지 마."


"싫~어~ 달링~ 이건 절대 양보 못해~"


"너... 후... 그래. 알겠다. 너 하고 싶은대로 해라."


"좋아해. 달링."


"윽...! 야...! 너 갑자기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했잖아!"


"좋.아.해 달링~"


"윽... 으으으...."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을 더욱 늘려나가고. 나 자신을 가꾸고. 내가 없으면 일을 제대로 못 할 정도로 그의 업무스타일을 파악해서 맞춘다. 지휘관에게 내 사랑을 계속 표현한다. 언젠가 지휘관이 내 사랑에 물들어 나를 사랑해줄 때까지.


나는 지휘관을 더욱 휘어잡기 위해 음식에도 손을 댔다. 그가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기 위해서 아시아 음식의 레시피까지 입수해서, 매일 연습했다.


가능한 한 많이 지휘관의 숙소에 찾아가서 음식을 만들었다. 지휘관이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질 높은 음식을 만든다. 그의 입맞에 맞는 음식을 만든다.


"달링~ 이 옷 어때? 어울려? 그리고 나, 오늘 어딘가 달라 보이지 않아?'


"으흠... 명절 음식 해준건 고마운데... 옷이 너무 좀... 그런거 아니야? 치파오인데 몸매가 다... 좀 가리고 다녀."


"...달링 바보."


"어...? Mk.23?"


"달링 바보! 멍청이! 둔탱이! 저녁은 혼자서 먹어! 나 갈거야!"

"야...! 갑자기 왜그래!"


"달링이 너무 둔감해서 내 기분을 망쳤어. 미워. 달링이 죽을 만큼 밉지만, 그래도 좋아해."


"윽... 야! 어디가!"


그가 나에게 해주었던 것 처럼. 그의 삶에 내 존재를 키워간다. 그의 삶을 더욱 윤택하게 하며, 유대를 쌓아간다.


"이거... 내가 하는거야?"


"응. 이번에 그리폰에서 대외 인식개선을 하려고 화보를 찍는데. 우리 부대는 웨딩 테마를 부여 받았어. 네가 참가해줬으면 해."


"웨딩 드레스를 입고 사진을 찍는거야...?


"응. 네가 적임자라고 생각하는데... 역시 하기 싫어?"


"아니야. 해볼게. 지휘관을 위한 일이라면."


웨딩드레스. 인간이 짝을 맺고, 서로 미래로 향해가는 여정에 오르는 약속을 거행하는 의식의 의상. 인간의 궁극의 행복.


인형이라면 입을 일이 없지만, 인형의 아름다운 모습을 찍어 대중에게 보여준다는 다소 웃긴 계획 덕분에 입을 일이 생겼다.


"귀걸이는 이걸로 바꿔주세요."


"싫어요. 이 귀걸이를 하고 촬영에 임하겠어요."


"곤란해요. 웨딩드레스랑 가장 잘 어울리는 귀걸이로 준비한 것입니다."


"거절하겠습니다. 이건 양보할 수 없어요."


"음... 뭐 됐어. 이대로도 충분히 이쁘니까, 이대로 하자."


"네? 하지만..."


"이자식이... 내가 괜찮다고 하잖아."


이 귀걸이는 절대 떼고싶지 않았다. 지휘관이 나에게 준 선물. 지휘관과 나의 관계를 상징하는 물건. 내가 아름다워 보여야 하는 순간이라면, 절대 


"자~ 여기 보세요~"


"네~"


펑펑 터지는 눈부신 카메라 플래쉬. 그 어느때보다 행복해 보이는 미소를 짓고, 행복에 젖은 소녀를 연기했다.


하지만 촬영이 지속될 수록 내 마음에는 기분나쁜 그들이 드리워졌다. 내가 이런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고 싶은 사람은, 사진사와 화보를 보는 사람이 아니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순간을 함께하고 싶은건 지휘관이다.


"저기... 지휘관... 부탁이 하나 있는데..."


"응? 뭐야?"


"나랑 사진 한장만 찍어주면 안될까...?"


"그... 그 차림으로?"


"아하하... 역시... 불편하지? 그렇다면 안 찍어도..."


"찍어줄게. 그런데 그 대신에.... 다른 애들한테 보여주면 안된다?"


"응!! 절대로 안보여줄게!! 무덤까지 가지고 갈게!"


신부처럼 웨딩드레스를 입고, 지휘관과 함께 찍은 사진. 지휘관은 붉은 그리폰 지휘관 제복 그대로였지만, 나에게는 너무나도 소중한 사진이 되었다.


언젠가 그가 사랑하는 여자가 되어서, 신부가 되어서 결혼식을 하는 상상을 하며 이 사진을 소중히 간직했다. 그에게 특별한 여자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더욱 더 커져만 갔다.


지휘관을 사랑할 수록, 지휘부에 인형이 늘어날 수록 내 불안은 커져갔다. 지휘관은 내 애정표현에 점점 둔감해지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를 향한 인형들의 호감도 늘어만 갔다. 지휘관은 여전히 모두를 평등하게 대했고, 나는 여전히 지휘관에게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다.


불안했다. 미치도록 불안하고 지휘관이 원망스러웠다. 나는 지휘관을 너무나도 사랑하는데, 항상 그를 지켜보고 그에게 필요하고, 지휘관만의 여자가 되려고 노력하는데도 지휘관은 나를 선택해주지 않았다.


어느 미래에, 그의 옆에 서 있는 여자가 내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그의 옆에서 행복한 표정을 짓는 여자가 내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채워나갔다.


"Mk.23...! 이게 뭐하는 짓이야! 인간에게 폭력을 쓰는건...!"


"지휘관. 눈치좀 채봐. 내가 지휘관을 공격하는 거라면, 내 행동에 당연히 제약이 생겨."


지휘관에게 내 사랑을 더욱 더 부딪히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이 든 날. 푸른 달빛이 창문을 물들이는 밤에 나는 지휘관의 방을 찾아갔다.


지휘관을 붙잡고, 억지로 들어올려서 침대에 눕힌다. 그의 위에 올라타서 그를 내려다본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표정. 부하에게 제압당했다는 당혹감과 인형의 완력을 경험한 공포가 표정에 서려있었다.


아... 지휘관의 이런 표정마저 나는 너무 사랑스러웠다. 나는 정말로 지휘관을 사랑하고 있다.


상의를 벗는다. 공기로 노출된 피부가 푸르스름한 빛에 물든다. 차가운 공기가 몸을 휘감았지만, 더 차갑게 느껴지는건 지휘관이 나를 여자로 보아주지 않는다는 이 절망적인 상황이다.


내 몸을 봐줘. 체형과 맵시는 엄격하게 식단 관리해서 최고의 상태로 유지했어. 매일 청결을 유지하고, 피부관리용품으로 최고의 피부를 유지해왔어.


내가 고른 속옷도 봐. 지휘관이 가끔 보던 야한 잡지에서 지휘관이 뚫어져라 보는 속옷이야. 지휘관은 피부색에 어우러져 녹아들면서도 속옷을 입었다는 느낌이 드는 야한 속옷을 좋아하잖아. 그래서 피부색이랑 어울리는 핑크 빛 속옷만 20벌이나 샀어.


목에 항상 하고 다니는 이 초커도 봐줄레? 나를 붙잡으라고, 지휘관의 여자로서 속박당하게 해달라는 뜻으로 항상 하고 다녔어. 왜 나를 잡아주지 않는거야?


이 귀걸이. 왜 하루도 안 빼놓고 착용하는지 몰라? 지휘관이 나에게 처음 준 선물이라서 그런거잖아. 사랑하는 사람이 준 선물인데 어떻게 빼놓고 다녀? 제발 눈치좀 채줘.


작전할 때 빼고는 왜 방울을 달고 다니는지 알아? 나 여기에 있다고. 내 소리를 듣고 나를 봐달라는 뜻이야. 항상 나만 바라보는건 바라지 않아. 지휘관의 안목이 더 넓어지는 것도 내가 바라는 일이니까. 하지만 다른 여자를 눈에 담지 말아줘. 나를 봐줘. 그리고 나를 사랑해줘.


지휘관의 손을 잡아서 속옷 안쪽으로 밀어 넣는다. 지휘관 가슴 좋아하잖아. 탄력있고, 부드럽고, 너무 크지 않으면서도 한 손에 다 못쥐는 크기. 딱 내 가슴 크기잖아. 나는 지휘관이 만져도 상관없... 아니, 만져주기를 바랬는데 왜 다른 여자의 가슴을 봐? 내가 옆에 있는데.


그리고 느껴줘. 심장은 없지만, 지휘관을 사랑한다고 비명을 질러대는 마인드맵을 울리는 고동을.


"달링. 나는 달링에게 사랑받을 수 없는 여자야...?"


결국 그의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만다. 지금까지 했던 노력들이 전부 허사가 되어버렸다. 지휘관에게는 최고의 모습만 보여줘야 하는데.


순간 세상이 뒤집히고, 내 눈에 천장이 보였다. 이윽고 지휘관의 얼굴이 내 시선을 채웠고, 그의 거친 질감의 손이 내 양 팔을 구속했다.


분명 인형은 인간보다 완력이 강한데도, 저항할 수 없었다.


"나도... 좋아... 한다고...! 그런데 바보같이 용기가 없어서...!"


그 한마디에. 마인드맵이 요동쳤기 때문이다. 연산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아까 흘린 눈물과는 다른 눈물이 흘렀다.


사랑받았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받는 존재가 되었다. 그 한마디에 동화된 나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지휘관의 격한 진심. 그의 혀가 입술을 덮치고, 열심히 관리해온 피부를 핥으면서 피부를 망친다.


몸에 붉은 멍이 한두개 피어났지만, 너무나도 기뻤다. 그가 나를 선택해 주었고, 이렇게나 나를 원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행복했다.


"하.. 으... 달... 링..."


몸을 만지고, 질감을 즐기며 맛을 보는 것으로 부족했던 그는 안쪽까지 탐했다.


척추를 타고 온 몸을 뒤흔들며, 마인드맵을 하얗게 질려버리게 만드는 감각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하지만 한가지는 확실히 느껴졌다. 나를 사랑해주는 지휘관의 존재,


지금껏 쌓아왔던 불만을 터뜨리듯이 그가 몸 안쪽에 표식을 남기고, 그것을 받아버린 나는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강렬함과, 그 뒤에 찾아오는 평온함을 느꼈다.


만들어진 그날 뒤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좋아해."


"사랑하고 있어요... 달링..."


나에게는 지휘관이 남겨준 선물이 하나 더 늘어났다. 왼손 약지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은빛 반지. 성대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둘 만의 행복한 결혼식을 단 둘이 올렸다.


그 뒤로는 행복한 시간이  이어졌다. 같이 출근해서 일한다. 새로 생긴 보금자리로 퇴근한다. 같이 밥을 먹고, 더 많은 이야기를 한다. 같은 시각에 잠들고 같은 시간에 눈을 뜨며, 가끔은 서로 몸을 맞댄다.


이미 충분히 풍부해진 내 마인드맵이, 행복이라는 조각으로 채워져가고 있었다. 인간이 될 수는 없었지만, 인간보다 더 풍족한 삶을 살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아픔을 겪고 절망한 아이를 품어줄 울타리가 되어줄 수 있었다.


하지만 행복은 길지 않은 짧은 동화같은 이야기만을 남긴 채, 차가운 땅 속으로 뭍혔다.


서슬퍼런 하얀 사신의 낫에 져버린 작은 꽃과, 아름다운 나무가 스러져버린 지금.


왼손 약지에 남은 서약의 증표를 품에 간직한 채. 나는 하얀 사신을 찾아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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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글로 존나 못쓴 글 하나 던지고 감.

여기까지 봐줬다면 고마워. 처음 서약해준 Mk.23 삘받아서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