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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풍기가 좌우로 까딱거리며 중심을 축으로 회전하고 있었다. 회전하는 날개가 일으킨 아른거리는 바람이 한여름 밤의 열기를 품고 밀려왔다. 집 안팎의 모든 창과 문을 열어두었지만,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선풍기에 팔랑거리는 종이소리와 사각거리는 펜촉의 속삭임만 귀뚜라미대신 저녁을 밝히고 있었다. 종이 위로는 스탠드의 불빛이 방안을 비추고 있었는데, 이러한 집안의 분위기가 한층 더 필라멘트를 뜨겁게 타오르게 하는 듯 했다. 그러니깐 한마디로 말해서, 더웠다. 집안은 불타듯 무척이나 더웠다. 그치지 않는 열대야의 열기는 마치 제 짝을 찾는 매미의 울음소리만큼이나 지겹고 불쾌했다. 뺨을 타고 흐르며 추락하던 땀방울이 사각의 원고지 위로 툭 하고 떨어졌다. 여름 열기에 모든 것이 일렁이는 듯 했다. 바람도, 불빛도 종이와 생각도 모두. 원고지 위에 스며드는 땀방울에 잉크가 번지면서 글씨가 뭉개져갔다. 원고지 속에 있는 ‘훗’ 글자가 비웃듯이 팔랑거린다. 거 보라지, 그렇게 쉽게 포기할 거 괜히 붙잡고 고생하나.

  인할 인(因)의 자처럼, 사각의 감옥에 갇힌 사람 같은 훗에게 나는 대꾸한다. 모든 일에는 인과가 있으니 별 상관없지 않을 테지, 사각으로 꽉 막힌 너한테까지 그런 소릴 들으려고 이 저녁까지 깨어있는 건 아니라고. 훗이 원고지에서 벌떡 일어난다. 그리곤 원고지에서 기어 나오듯 사각의 틀에서 벗어나온다. 그리곤 제 머리의 자모 ‘ㅗ’ 를 모자처럼 마냥 부채질하듯 팔락거리며 말한다. 그렇다면 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꾸물거리나. 원고지 위에 잉크 웅덩이나 만들고 있는 모습이나 보라지. ‘훗’ 이 스탠드 아래로 걸어간다. 그러더니 스탠드 밑동을 붙잡고 빙글 돌며 나를 바라본다. 당신은 도대체 왜 지금껏 글을 쓰나. 단 한 번의 무대에 설 수 없는 주제에. 아름다운 선율도, 빛나는 색채도, 몸짓도, 아무런 박수갈채도 당신에겐 존재하지 못하는 걸. 그러더니 팍. 스탠드 전원을 꺼버린다. 순식간에 암흑이 방안의 공백에 가득 차오른다. 선풍기의 전원도 꺼진 듯 바람도 함께 멎어버린다. 여름 열기가 턱하고 숨통을 조여 온다. 마치 검은 잉크의 글자 속으로 빠져버린 것 같은. 손가락 끝으로 잉크 번지듯 푸르딩딩한 청색증이 피어오른다. 어둠이 가득 물든 눈동자에 내 손바닥이 보인다. 나는 그대로 다시 스탠드 불빛을 다시 켜낸다.

  다시 필라멘트가 발갛게 달아오른다. 순식간에 빛이 어둠을 조금 쓸어내고, 내 공간만큼을 다시 비워낸다. 상상의 ‘훗’ 은 어느새 사라진 상태였다. 나는 고개를 젖혀 의자 뒤로 몸을 기울인다. 새벽의 이른 여명의 색 바랜 푸름이 사각의 창으로 스며든다. 일찍 일어난 새들의 곡조가 울려 퍼지고, 새벽의 찬기가 흙먼지처럼 잠시 일어난다. 선풍기는 다시 중심을 축으로 회전한다. 프로펠러가 되고 싶었지만, 멈춰선 채 고개만 까닥거리는 선풍기. 고개를 내저으며 안 된다며 내게 말하고 싶은 거니. 나는 멍하니 선풍기를 바라본다. 나는 원고지를 다시 정갈하게 정돈한다.

 

  한때, 학교에서 하교하면서 등어리에 무언가를 짊어진 친구들을 보았었다. 캔버스와 붓통. 기타케이스처럼 보이는 가방과 구두를 담아놓은 것 같은 에코백. 학교에서 예체능 계열의 학생들이라 부르는 친구들이였다. 가끔씩 어느 학생이 악기케이스에서 악기를 꺼내 현을 튕겨보며 부러움의 환호를 받기도 했고, 무용을 하는 친구들은 토슈즈를 신고 동작을 지어보기도 했었다. 학교 축제 땐 벽마다 미술을 하는 학생들의 그림이 결려있었고, 무대는 춤과 악기와 연극을 하는 학생들의 차지였다. 모두들 자신의 깎아나가며 만들어낸 하나의 작품들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학생들에게 박수를 보내며 무언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나도 그 학생들 중 한사람이었지만, 글을 쓴다는 것은 무언가 다른 의미의 예술이었다. 어느 날 체대 입시를 준비하는 후배가 내게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우승 트로피나 샴페인 범벅이 되지는 못하더라도, 무대 아래도 아닌 길거리에 서지도 못하는, 그런 주류에서 벗어난 예술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멈춰있었다. 반박을 하고 싶었지만 말문이 막혔다. 왜 그런건지는 잘 모르겠다. 촘촘히 손가락으로 한 편의 작품을 짜내어도, 누군가 정성을 다해서 읽어 주지 않으면 피어날 수 없는 것이 문학이었다.

 

  나는 원고지를 손가락 끝으로 차례대로 넘겨본다. 나는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서 글을 쓰는가. 조용히 그 의미를 곰곰이 곱씹어보다 스탠드를 바라본다. 환하게 빛나는 불빛아래, 하얗게 펼쳐져 있는 종이와 아직 잉크가 채워져 있는 펜 촉. 나는 다시 손가락을 뻗은 다음에 다시 펜촉을 움직여 글자 한 자를 적어낸다. 마치 모자를 쓰고 있는 사람 같은, 훗 이라는 한 글자. 나는 천천히 춤을 추듯 글을 적어간다. 그림을 그리듯, 글씨의 현을 따라 연주를 하듯. 내가 있는 이곳, 그리고 글을 쓰는 나. 방 안의 빛과 어둠처럼 흰 종이와 검은 펜촉을 쥐고 있는 그 자체가. 하나의 무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