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음. 반복되는. 일정하게...'

  '대화.... 누구....'

  '나는.... 여기....'

  깊은 물 속에 가라앉고 있는 돌처럼, 그의 머릿속은 어둡고 외로웠다. 마치 꿈을 꾸는 듯, 그의 생각은 자신의 현재와 과거를 향해 가라앉고 있었다. 남은 모든 의식을 쥐어짜내며, 그는 기억의 편린을 천천히 줏어담았다.

  '반란.... 평양.... 리만수.... 리만.... 리....'

  돌이 무언가에 의해 낚아채여 수면을 향해 급속도로 솟구쳤다. 한번 연결된 기억은 이내 순식간에 재조립되었다. 금발의 백인 남성의 눈이 뜨였고, 자신의 몸 온곳에 관이 꽂혀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의 마지막 기억에 의거해, 마음이 급해진 그는 주사들을 뽑아내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러자 시야가 흐려지며, 온 몸의 힘이 빠져나갔다. 그는 휘청이며 자신이 일어났던 자리에 기대 겨우 쓰러짐을 면했다.

  "얼마나 지난거지?! 리만수.... 리만수는 어딨나! 그는 어떻게....!"

그가 일어날 때 주변으로 흩어져 몸을 숨긴 기계회 사제들과 간호사들을 흘겨보며, 힘겹게 입을 벌려 말을 꺼냈다.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서로에게 사태를 떠넘기는 듯한 그들의 태도에 보다못한 간호사 한명이 앞으로 몸을 내밀어 심호흡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쓰러지신 뒤 3개월이 지났고, 리만수는.... 이제 없습니다."

  거친 숨을 들이쉬던 남자의 눈이 커졌다.

  "없다니, 그게 무슨.....어억!!"

  급히 고개를 돌리던 그는 흉부에서 밀려오는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땅에 쓰러졌다. 그러자 숨어있던 인원들이 모두 앞으로 달려나와 그를 부축했지만 650kg의 거구를 지탱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힘이었다.

  "리만수는... 솔에서 격전을 벌이다 근위전차에 의해 사살되었습니다. 시체조차 찾을 수 없었죠. 그리고, 상처가 아직 다 낫지 않아서... 움직이시면 안됩니다."

  "우리는.... 제국은.... 승리했나?"

  고통이 줄어들자, 정신을 차린 그는 움직이지도 않는 몸을 억지로 이끌어 말을 꺼냈고, 그는 그 공간의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순간 얼어붙는 느낌을 받았다. 간호사의 표정에선 마치 금기의 단어를 들은 사람처럼 공포와 망설임이 묻어나왔다. 입술은 열리려다 닫히기를 수도 없이 반복했고,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는...."

  "패배했습니다. 단장님."

  모든 시선이 한 곳에 뭉쳤다. 수술 도구를 정리하던 기계회 사제가 간호사의 말을 자르고 이어 말했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기계팔에 달린 소독제로 도구들을 씻고선 통에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기계음 섞인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좌우로 천천히 젓고 다시 입을 열었다. 여전히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지금 계신 이곳은.... 부산입니다. 솔을 두고 세 네 차례 쟁탈전이 벌어졌지만, 패배를 직감한 셀로디우스가 결국 서쪽의 괴수들을 끌고 왔습니다."

  남자의 눈이 그의 등을 향해 하염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는 고통조차 잊어버린 채, 자신이 들은 이 충격적인 소식을 이성적으로 분석하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동안 참 많이도 번식했더군요. 성전 동안에도 삼파전으로 겨우 균형이 유지되었는데, 군대는 반으로 갈라지고 적들은 몇배나 되었으니.... 지금은 낙동강에서 최후의 항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도구를 모두 정리한 그는 서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붉은 로브 안의 그림자에 덮인 얼굴 곳곳에서 푸른 빛이 비치고 있었다. 그는 노태길을 향해 손을 뻗었다. 곱추처럼 휜 등을 덮은 로브 속에서 다수의 기계팔이 그를 향해 다가왔다. 약간의 혐오감을 느꼈지만, 그보다 더 큰 것은 그가 받은 충격이었다. 8명의 사람들이 들지 못했던 그를, 그 사제는 단숨에 끌어올렸다.

  "일어서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렇네."

 노태길은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정신을 정리했다. 온 몸의 근육에 힘이 돌아왔다. 그렇게 사제의 부축을 받아, 253cm의 거인의 머리가 천장을 향해 올라왔다. 다시 땅을 밟는 기분. 두 발로 서 있는 기분. 가까우면서도 먼 기분을 느끼며 그는 자신의 신체가 제대로 움직이는지 확인했다.

  "너희들은 뭘 하고 있는 거야, 당장 가서 단장님이 깨어나셨다  전하지 않고."

  기사를 올려다보며 멍하니 서있는 이들을 향해 그 사제가 핀잔을 주었다. 그러자 정신을 차린 간호사들과 기계회인들은 분주히 문 밖으로 달려나갔다.

  "그러고 보니, 자네 이름이 뭔가?"

  자신의 오른편에서 문을 여전히 쳐다보고 있는 사제를 향해, 노태길은 질문을 건넸다. 고마움과 의문에서 나오는 궁금증이었다.

  "111011001010.... 아, 마키눔 스콜라 학장, 기주 파울로입니다. 그냥 파울로라고 부르십시오."

  "파울로.... 학장다운 이름이군. 고맙네, 파울로. 그대 덕에 내 목숨을 건졌구려."

  파울로의 눈이 잠깐 노태길과 마주쳤다가 곧 다시 다른 곳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에도 그의 다른 기계팔들은 노태길이 일어날 때 벌인 난장판을 수습하고 있었다.

  "일어나신 지 1시간도 안 되어 이런 말을 하긴 그렇습니다만, 곧 준비하셔야 합니다.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비록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오체아눔 기사대의 사령관이 돌아왔다는 소식은 분명 큰 힘이 될 것입니다."

  "다른 기사대 사령관들은?"

  기주가 행동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미간은 몹시 일그러져 있었다.

  "나예준, 배가람, 안가온... 모두 전사했습니다. 남은 이는 당신뿐입니다, 노태길 단장님."

  "나뿐이라.... 청해기사단은 건재한가?"

  "궤멸 직전까지 갔었지만, 이제 회복 중에 있습니다."

  "나처럼 말이지." 그가 쓴 실소를 내뱉었다.

  "아직 난 살아있네, 파울로. 그들도 마찬가지지. 살아있기만 한다면, 아직 희망이 존재하는 걸세. 희망이란.... 믿음만큼 강한 무기니까."

  노태길이 고개를 들었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암울한 미래가 문 밖에 서 있는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