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이 집어 삼켜진 듯이 사위가 온통 깜깜했다. 그러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멸망 이후에 날마다 찾아오는 암전(暗電)이었다. 이 도시에서는 멸망의 날 이후에 일어나는 기현상을 암전이라 불렀다.


 나는 그 자리에서 멈춰 서 있었다. 이 때에는 한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 가장 안전했다. 지금의 암전은 이 도시 전체의 일이었다. 도로 한 복판에서도 자동차가 움직이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암전 때에는 멈춰 서 있는 것이 규칙이었다. 아무리 급박한 일임에도 그랬다. 암전 때에는 아무도 앞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눈 바로 앞에 태양이 있다 해도 앞을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암전이 지나면 세상은 다시 밝아졌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멸망 전과 다를 것 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 그래서 이 도시에는 무언가에 감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다른 도시들보다도 끔찍한 멸망이 닥치지 않았음을. 안온한 멸망을 맞이했음을. 이 도시에는 사이비들도 많았다.


 10여 분이 지나자 시야가 밝아졌다. 암전이 끝났다. 가로등이 켜진 길을 따라 나는 집으로 걸어갔다. 저 멀리서 통곡 소리가 들렸다. 암전을 맞이한 사람들의 가족일 것이다. 이 도시에서 일어나는 일은 단순히 세상이 온통 깜깜해지는 것 뿐만이 아니었다. 암전이라 부르는 기현상이 지나가면 하나에서 두 명이 죽었다. 죽음에 대해서 가장 긍정적인 묘사는 끝나지 않을 잠을 잔다는 말이었고 죽어갈 때에 대한 가장 흔한 묘사는 깊은 어둠이 찾아왔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그들을 암전을 맞이한 이들이라 불렀다.


 가로등의 불빛이 점점 옅어졌다. 흐릿한 빛을 받은 낡은 판자집이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 불빛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도시의 한 구석. 언제나 암전에 가까운 삶을 살아왔던 삶의 터전이었다. 나는 계속해서 걸었다. 집은 더 먼 곳에 있었다. 도시에 가까울 수록 더 잘사는 집이었다.


 길 위에 어둠이 내렸다. 유일한 광원은 흐릿한 달 뿐이었다. 그나마 구름이 끼지 않은 것에 감사하며 나는 집으로 들어갔다. 판자 쪼까리와 종이 박스가 얽힌 집에서 불쾌한 소리가 났다. 자주 나는 소리라 별다른 신경을 쓸 필요는 없었다. 곰팡이 슨 종이가 9할하고도 5푼을, 낡아빠진 판자는 5푼을 차지하는 집은 의외로 튼튼했다.


 나는 그나마 성한 종이 박스 위에 구겨진 지폐 몇 장과 동전 몇 개를 올려놓았다. 종잇장이 서너 장은 되었다. 오늘은 꽤 벌이가 괜찮은 편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죄다 생활에 쓸 수 없었다. 그러고 싶음에도 그러지 못했다. 두 장 정도는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돈이 부족하다고 욕을 먹을 테지만, 상관없었다.


 금 간 액자가 발에 밟혔다. 오래된 가족 사진이었다. 나는 발을 떼지 않고 그대로 밟았다. 유리가 깨지며 요란한 소리가 났다. 나는 깨진 액자를 발로 차 한 구석에 던져 넣었다. 꼴 보기 싫은 사진이었다. 한 때 밥값을 아껴가며 모은 돈으로 찍었던 바보 같은 사진이었다. 지금은 사이비에 빠져서 돈에 미친 인간이 된 그의 얼굴을 더 이상 보기 싫었다.


 나는 그 날을 기억한다. 가장 끔찍했던 날은 멸망의 날이 아니라 멸망이 찾아오기까지 한 달 전의 날이었다. 미신을 믿는 것은 아니지만 가족 사진의 액자에 금이 갔던 날에 가족은 산산조각 났다. 그 날에는 교통 사고가 있었다. 넷 중에 둘이나 죽어버린 사고가 말이다. 빈민가라 불리는 곳을 조금 벗어났던 곳에서는 술에 취한 차가 흔하게 보였다. 그곳에서 사고가 났었다. 병원에 데려갈 돈도 없었지만 그딴 걱정을 하기도 전에 죽어버렸다. 할 수 있는 것은 사진이나 껴안고 우는 것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조차도 사치였다.


 일주일이었는 지도 몰랐던 날이 지나자 멸망의 날이라 불리는 날이 찾아왔었다. 그러나 나는 멸망이라는 끔찍한 단어에도 감흥이 별로 없었다. 조금의 동요는 있었지만 이 도시의 멸망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알게 된 이후로는 그조차도 없었다. 암전이라는 이름의 멸망은 안온해 보였지만, 동시에 막을 수 조차도 없는 멸망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점이 그 날과도 제법 비슷해보였다. 지키고 싶은 사람은 하나 남았지만, 멸망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나는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일을 했다. 쥐꼬리만한 봉급을 받고, 오가는 길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소매를 털면서 돈을 모았다. 불법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법에 의해서 보호를 받은 적도 없으니 법을 지킬 필요도 없었다. 한 번의 암전을 겪고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사이비에 빠진 그가 돈을 원하자 말 없이 돈을 건넸다. 어느 날에는 돈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얻어 맞을 때도 있었지만 가만히 있었다. 기이할 정도의 광신, 미친 것만 같은 장면이었지만 사이비들과 있던 그는 웃고 있었다. 드디어 행복을 찾고, 구원받은 사람처럼. 그래서 나는 가만히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이 일상이 된 것은 1년 전의 일이다. 지금은 조금의 돈은 악을 쓰고서도 지켜내서 생활비에 보태는 요령이 생겼다. 사용하는 물이 구더기 살던 흙탕물에서 지렁이 없는 진흙탕의 물로 바뀌었다는 점에서 만족스러운 변화였다. 받는 빗물로는 한계가 있을 때에 사용하는 물이었지만, 꽤 큰 의미가 있었다. 썩은 부분이 9할이던 음식이 1할 정도만 썩은 음식으로 바뀌었다는 것도 좋았다. 그의 몸은 약해서 썩은 음식을 먹으면 큰 탈이 날 터였다.


 나는 싸구려 길거리 음식을 식탁으로 쓰는 종이 상자에 올려놓았다. 썩지 않았다는 점에서 나름 호사스러운 음식이었다. 음식을 차려 놓고서는 어두운 거리를 바라보며 그를 기다렸다. 지금쯤이면 사이비의 예배에 나가있을 시간대였다. 곳곳이 깨진 시계는 없지만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암전은 시간을 알려 줄 수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한 5분 안팎이 그가 돌아오는 시간이다.


 그러나 10분 쯤이 지났음에도 그는 오지 않았다. 오늘은 좀 늦는 날일지도 모른다. 얻어 맞을 각오를 하고서 나는 상자에 앉은 채로 눈을 감았다. 쪽잠이라도 자두는 것이 나았다.


 몸이 나른해졌을 때, 발소리가 여럿 들렸다. 다른 곳으로 탈출하려는 사람들일 것이다. 이 도시는 축복 받았다는 소리를 듣곤 하지만, 빈민가의 사람들 만큼은 다른 도시로 탈출하는 경우가 많았다. 완벽한 무법지대가 그나마 살 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발소리들은 집에 점점 가까워졌다. 나는 녹슨 칼을 집어들었다. 우리 집이라고 해서 살만한 것은 아니지만, 빼앗는다면 조금 살만해 질 수는 있었다. 칼을 집어들고 조심스럽게 문 역할을 하는 종이 더미로 향했다.


"어이, 이 집 아들 있는 가? 잠시만 나오게나. 할 말이 있어서 그러네."


 교주였다. 나는 지긋지긋한 감정을 숨기고 칼을 안주머니에 넣은 채 밖으로 나왔다. 뒤룩뒤룩 살찐 얼굴이 보였고 그 뒤에는 큰 덩치의 팔에 엎힌 그가 있었다. 나는 인상을 쓰지 않기 위해 노력하면서 교주를 바라보았다.


"무슨 용건이신데요?"

"우선은 기쁜 소식을 알려줄게 있어서 그렇다네. 물론 자네에게는 그다지 기쁘지 않을 수 있지만, 그것은 자네가 교인이 아니라서 그러니 양해하게."


 교주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혐오스럽기 짝이 없었다. 이 곳에서 유일하게 살이 찐 이 자는 거둔 돈으로 제 배를 채웠다. 차라리 그가 살이 쪄 있다면 기분 좋게 바라볼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빙빙 돌려대는 말조차도 마음에 듣지 않았다. 결국은 성금을 내라는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랬다.


"빨리 말해요."

"이 자식이 보자보자 하니까 교주님께 버릇없게!"


 퉁명스럽게 말하자 뒤의 덩치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 덩치가 나를 해칠 일은 없다는 것을 알아서 태연히 있었다. 저 교주는 제 돈줄이 될 사람 하나 만큼은 기가 막히게 챙긴다. 아직 교인이 되지 않은 사람들에게서 조차도 돈을 뜯어내는 것이 "구원을 모든 이에게 전할 수 있기"를 이라는 말로 포장된 그의 목표였다.


"나는 괜찮으니 진정하게나. 아직 교인이 아니니 교주로 모실 수 없겠지."


 예상대로인 행동에 나는 교주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교주가 할 말이 뭔지를 듣고, 그를 집으로 데려오는 일만이 남았다. 빨리 말하라고 입을 열러던 나는 잠시 멈칫했다. 부는 바람이 싸늘했다. 왠지 모를 소름이 서늘하게 돋았다. 그럼에도 교주는 웃고 있었다. 나는 한 쪽 눈썹을 치켜 세웠다.


"자네 아버지는 원하던 바를 이루었네. 그러니까... 자네 아버지가 극락에 닿았다는 것이네. 참 잘 된 일이지 않은가?"

"...예?"


 나는 입을 벌리고서 다시 되물었다. 교주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극락이라는 단어가 뇌리를 강하게 강타했다. 나는 잠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극락이란, 누군가가 죽었을 때에 간다고 알려져 있는 곳이다. 달리지 않았음에도 숨이 점점 거칠어졌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되듯이 달아올랐다.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 지 의문이 들었다. 끔찍한 소리를 들었음에도 현실감이 들지 않아서 그딴 생각이 들었다.


 나는 덩치 놈이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달려가서 그의 몸을 잡고 흔들었다. 힘 없이 흔들리는 몸이 차갑기만 했다. 정말로 죽었다. 다른 둘과 마찬가지로. 숨이 더욱 거칠어지고 눈에서 실핏줄이 터졌다. 그럼에도 교주는 뒤에서 계속 지껄이고 있었다.


"나는 자네가 아버지를 따라서 교인이 되줄 것이라고 믿고 있네. 아버지의 뜻을 이어서 말일세."


 교주는 무방비한 상태였다. 그를 지키는 놈들은 그렇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숨을 진정시키면서 그에게 걸어갔다. 화가 나지 않은 사람을 흉내내면서. 오히려 감탄한 사람을 흉내내면서.


"교주님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불신자였던 저도 교인이 될 수 있다고 말해주시니 너무나도 감사합니다. 아버지의 뜻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은 했지만 너무나도 못한 불신자라서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눈물을 감춘 채로 기쁘게 웃으면서 거짓말을 뱉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이 아닌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말에 속았다. 이정도 연기야 참으로 쉬웠다. 나는 교주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성금을 직접 바치고 싶습니다. 부디 기꺼이 받아주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안주머니에 손을 가져다 댔다. 교주는 기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곧 암전의 시작임에도 그랬다.


 콰직.


 파열음이 귀를 울렸다. 바닥에 녹슨 칼이 떨어졌다. 심장을 찌른 게 확실하니, 첫 살인이었다. 그러나 나는 아무런 감흥이 들지 않았다. 얼굴에 튄 피에도 현실감은 들지 않았다. 우레처럼 쏟아진 고함소리에서야 현실감이 들었다. 휘둘러지는 몽둥이와 욕설을 뒤로 하고서 나는 계속 달렸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곧 암전이 한 번 더 찾아올 테니 잠시 쉴 수는 있었다. 그러나 이게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하늘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암전의 시작이다. 나는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숨을 한 번 토해냈다.


 태양이 집어 삼켜진 듯이 사위가 온통 깜깜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