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운 여름날의 날씨는 하루종일 뜨거웠다.
찜질방에 온 것처럼 땀은 마를 줄을 몰랐고 모두가 하나같이 더위에 죽어가고 있었다.

풀썩.

나 역시 그들과 다를바 없었다.
더위에게 피해간다는 개념이 없는 것만 같았다.
땀은 흘러내려 교복을 적셨고 덕분에 안그래도 하얀 와이셔츠는 안이 다 비쳤다.
안에 반팔을 입고 있어서 다행이지 안그랬다면 부끄러운 부위를 노출하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였다.

다른 친구들은 모두 각자가 가야할 곳으로 향했다.
친구들을 바라보고 있자면 어딘가 마음 한구석이 울적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미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나는 아니였다.
이른 아침의 산안개처럼 희뿌연 안개가 내가 가야할 길을 가리고 있었다.
나는 안개를 헤치고 나갈 자신이 없었다.
나는 두려움을 이겨낼 자신이 없었다.
나는 포기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 나는 늘 가던 곳으로 향했다.
평소와는 달리 이른 시간이였지만 딱히 갈 곳도 없었기에 쌩쌩 달리는 자동차들을 지나 이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이자 내 아지트인 곳으로 향했다.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 그리 높진 않지만 하도 험하기에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아 이제는 무성해진 산길을 따라 나는 빠르게 다리를 움직였다.
10여분을 걷자 드디어 우거진 수풀의 끝이 보였다. 머리를 간지럽히는 나뭇가지를 헤치고 공터로 나가자 점점 아래로 떨어지고 있는 태양이 나를 반겼다.
조금 더 걸어올라가자 이제는 덩굴로 뒤덮힌 아파트 몇 채가 서있었다.
얼마나 오래됬을지조차 모르는 이 아파트들은 과거 많은 사람들의 안식처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나밖에 찾지 않는 버려진 이들의 장소일 뿐이였다.

103동, 아파트 사이에서도 내 아지트가 있는 곳이다. 다른 동들과는 달리 언덕에 위치해 있기에 조금 더 높아 하늘을 보기에는 이곳만큼 좋은 곳이 없다.
엘레베이터가 있긴 하지만 작동하지는 않는다. 따라 옥상까지 올라가려면 늘 계단으로 걸어가야 한다.
다행힌 점이라면 이곳이 새가 지나가는 곳이기에 아파트의 높이가 그리 높지 않다는 것 정도랄까.

끼이익.

이제는 녹슬다 못해 부식되어버린 철문.
귀를 긁는 거친 소리와 함께 햇살이 가득한 옥상의 안락함이 언제나 그렇듯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안녕?"

활발한 소녀도 한명 포함해서 말이다.
소녀, 계명성은 늘 이 자리에 있는 것 같았다.
그녀와 만난 지 일주일이 되가는 지금까지, 내가 이곳에 올 때마다 그녀와 만날 수 있었으니까.

"자."
"앗, 차가!"

볼에 갑작스레 들어오는 차가움에 깜짝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뻗은 손에는 물방울이 맺혀있는 물병 하나가 들려있었다.
분명 가장 가까운 슈퍼까지도 30분 거리일 것인데 대체 어디서 이런 차가운 물병을 구한 것인지.
궁금했지만 생글생글 웃는 모습에 나는 아무말 없이 그녀가 내민 물병의 뚜껑을 열고 물을 들이켰다.

생각해보면 그녀는 항상 신비로웠다.
방금 전도 그렇고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쭉, 그녀를 볼 때마다 느껴지는 들뜸은 지금껏 느껴보지 못했던 감각이었다.

전에 집이 어디냐고 물었던 적이 있었다. 대답은 없었다. 대신 더 진한 미소를 지어주었을 뿐.
다른 질문들 역시 마찬가지 였다.
웃거나, 옅은 미소를 짓거나, 빵 터지거나.
재대로 된 대답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는 듯, 질문의 회피하는 그녀였지만 나는 그런 그녀의 행동을 비판하거나 강제로 억제할 수는 없었다.

대답을 하지 않는 것 역시 그녀의 자유, 같은 장소를 공유하는 것 뿐이지 우리가 무슨 연인 관계인 것도 아니였다.
그저, 조금 특이한 둘의 만남이지.

폴짝.

그녀는 심심할 때면 옥상 난간에 올라타 기우뚱거리며 스릴을 즐겼다.
처음에는 위험해보이는 모습에 말리려고도 해보았지만 익숙해진 나머지 이제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지켜보고 있다.

"오늘은 일찍 왔네?"

참 일찍도 물어본다.

"그냥, 할 일도 없어서."
"그냥은 없어, 나의 유일한 친구."
"우리가 친구였나?"

순수한 의문이였다. 친구 사이라기엔 우리는 서로를 너무나 모르는 게 많았다.
나는 그녀의 이름 빼고는 몰랐고, 그녀 역시도 내 이름과 이 근처를 산다는 것 빼고는 나에 대해 알고있는 것이 없었다.

"너무한걸? 그래도 꽤 오래 봐왔다고 생각했는데."
"꼭 오래 본다고 해서 친구는 아니잖아?"
"그럼 친구란 뭔데?"

갑자기 훅 들어오는 질문에 나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친구라... 내가 친구가 있어본 적이 있었어야 대답을 해주든 말든 했을텐데 딱히 친구라고 부를만한 인연이 없었기에 나는 섣불리 입을 열 수 없었다.
대체 언제 대답해 줄 거냐고 그녀가 여러번 제촉한 후에야 나는 입을 열었다.

"많이 시간을 같이 한 사람. 서로가 서로를 잘 아는 사람. 장난을 쳐도 웃어넘겨주는 사람. 마음을 나누는 사람. 진정으로 조언해 줄 수 있는 사람. 슬퍼할 때 울어주고 기쁠 때 웃어주는 사람. 그리고..."
"그리고?"
"깊은 속마음까지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랄까."

바람이 훅 불어왔다. 귓가가 간지러웠다. 눈을 감았다 뜨자 찰랑거리는 흑발이 눈앞을 가리고 있었다.

"■■■에 대해 알고싶어."
"그건 고백이야?"

순간의 농담이였지만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스쳐지나가는 순간 속 그녀의 얼굴에는 그동안 보지 못했던 표정이 잠깐 드러났다 사라졌다.
눈앞에 드리워진 흑발이 거두어지자 저녁 노을이 나를 감싸왔다.
다시 눈을 감았다 뜨자 그녀는 어느새 난간 위에 올라가 있었다.

"내 이름은 계명성."
"이미 알거든."
"내일을 기대해도 좋아. 재미있는 일이 일어날 거거든."

말을 끝낸 뒤, 그녀는 나를 지나쳐 옥상의 문을 열고 계단을 걸어내려갔다.
그러고보니 먼저 가는 건 늘 내가 먼저였다. 이 옥상에 혼자 있는 건 꽤 오랜만의 일이였다.

...

주먹을 꾹 쥐었다 폈다. 가슴 한구석에 피어오르는 이름 모르는 감정, 아니 잊어버린 감정.

외로움.

아주 오랜만에 나는 내일을 기다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