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8년 5월 20일 위화도

고려 요동도행군 막사

 

 

“우도통사 대감!”

 

남은이 장맛비를 맞으며 이성계의 막사로 달려온다. 남은이 다가옴을 본 병정들이 창을 치워 문을 열어 준다. 남은이 다급히 이성계 앞에 달려와서 경례한다.

 

탁자 우에 초를 올려 두고 요동 지도를 보던 이성계가 고개를 들고 묻는다.

 

“이 밤중에 어인 일인가? 부교가 또 무너졌는가?”

 

“개, 개경의 포은 대감이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꼭 읽어 보시라 하셨습니다.”

 

“포은 대감이?”

 

이성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편지를 받아 든다. 그리고 그 편지를 개봉하여 꾸깃꾸깃한 종이를 펼쳐 올린다.

 

이성계의 눈빛이 크게 흔들린다. 그 백전노장이 고개를 들고 남은을 보며 재쳐 묻는다.

 

“틀림없는 포은 대감의 편지가 사실이렷다?”

 

“그렇습니다. 대감.”

 

“아무에게도 포은 대감이 이곳에 편지를 보냈음을 말하지 말라. 내 생각 좀 해 보겠다.”

 

이성계가 탁자 위에서 타오르던 촛불에 그 편지를 가져다 댄다. 편지의 가장자리에서부터 붉은 혀가 날름거리며 종이를 먹어치우기 시작한다.

 

“...외람되오나, 포은 대감이 뭐랍디까?”

 

“꼭 알아야겠는가?”

 

이성계가 남은을 보며 마뜩찮게 대답한다.

 

“빨리 뵙고 싶다 하신다.”

 

“그것이 뭐가 문제가 됩니까요?”

 

“전장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는 장수에게 빨리 보고 싶다 함은 무슨 뜻이겠는가?”

 

이성계가 타오르는 종이를 바닥에 떨구고 발로 밟는다. 한 조각 재로 변한 종이쪼가리에서 알아볼 수 있는 글자가 하나 있다.

 

회(回. 돌아올 회).

 

 

+ + +

 

 

같은 시각

고려 수도 개경, 포은 정몽주의 집

 

 

“그 말이 사실인가, 포은?”

 

삼봉 정도전이 기겁한 표정을 짓는다. 내가 말없이 술잔을 기울이면서 대답한다.

 

“어디서 들었는지는 모르겠네만 정확히 알고 있네.”

 

“아니 어쩌자고 그런 짓을 했나?”

 

“내가 안 했으면 자네가 했을 것 아닌가?”

 

술잔을 내려놓는다. 정도전이 수긍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싸늘한 눈빛으로 정도전을 바라보며 한마디 붙인다.

 

“아마 이성계 대감은 역도가 되진 않을 것일세.”

 

“그게 무슨 소린가?”

 

“이성계 대감을 감히 역도라 부를 수 있는 자는 더 이상 이 고려에 없네. 아니지, 아직은 있네만, 오늘 밤 안에 없어질 걸세.”

 

“그게 무슨 소린가?”

 

정도전이 놀란 목소리로 묻는다. 난 지지리 눈치없는 친구라고 생각하면서 다시 술잔을 기울인다.

 

“삼봉, 자네답지 않게 왜 이러나, 이성계 대감을 역도라 부를 자가 이 조선에 누구 있겠나?”

 

“지금으로선 최영 대감뿐이지.”

 

“그래, 그러니까 아직은 있고, 곧 없어질 거란 얘길세.”

 

정도전의 눈빛이 크게 흔들린다. 그 눈빛을 보고 참으로 우스워 술잔을 기울이다 말고 천장을 보며 광소한다.

 

문이 열리고 노비 김경남이 들어와서 인사한다. 기다리던 사람인지라 미소지어 보이며 앉도록 손짓한다. 김경남이 날 보며 처참하게 아뢴다.

 

“대감마님, 최영 대감이 간밤에 선지교에서 급체로 쓰러져 돌아가셨다 합니다.”

 

“오, 그런가?”

 

내가 피식 웃고 대답한다.

 

“그건 안타까운 소식이로군. 삼봉, 아니 그런가?”

 

정도전이 마치 바다 한가운데에서 코끼리를 본 사람 같은 눈빛으로 날 쳐다본다. 그가 날 똑바로 쳐다보면서 입 모양으로 묻는다.

 

포은, 설마 자네가 한 것인가?

 

내가 싸늘한 미소를 입가에 건다. 그리고 김경남에게 말한다.

 

“참으로 참담한 일이구나. 너는 어서 가서 최영 대감의 절개를 기리는 의미로 선지교에 대나무를 꽂아두고 오거라. 대쪽 같던 최영 대감을 위하는 것이다.”

 

“예, 알겠습니다요.”

 

김경남이 밖으로 나간다. 내가 술잔을 다시 기울이면서 정도전에게 말한다.

 

“이제 더 이상 이성계 대감을 역적이라 할 자는 고려에 남아있지 않네. 이성계 대감은 만고의 충신일세. 내가 그렇게 만들 걸세.”

 

정도전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멋대로 장수를 죽이다니, 세상 사람들이 이성계 대감이 이를 몰랐다고 여기겠는가?”

 

“몰랐다고 여길 걸세. 아직 회군을 결정지은 것도 아니고, 실제로 이성계 대감은 모르고 있으니까. 이성계 대감 본인도 최영이 정말로 급체하여 죽었다 여기겠지. 이는 회군에 더 도움이 될 걸세.”

 

내가 싱긋 웃으면서 종이를 정도전에게 내민다.

 

“삼봉, 이제 모든 건 이성계 대감에게 맡기고, 우린 그 뒷일이나 준비하도록 하세.”

 

정도전이 종이를 펼친다. 그리고 내가 거기 적어 놓은 4글자를 보며 크게 동요한다.

 

폐가입진(廢假立眞. 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움).

 

 

+ + +

 

 

사람들이 웅성거리면서 선지교 주변을 둘러본다. 내가 최영 대감의 시신을 붙들고 통곡한다.

 

“아아, 최영 대감! 대고려국의 명장께서 어찌 이리 허망하게 가시나이까... 요동 땅을 밟아 보지도 못하시고 이렇게 가시면 어떡하나이까! 최영 대감! 최영 대감!”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슬퍼한다. 한 여인이 인파 사이에서 말한다.

 

“포은... 포은 대감이시잖아?”

 

“저렇게 몸이 아플 정도로 오열하시는 건 내 처음 봅니다그려.”

 

“포은 대감이 최영 장군을 죽였다고 소문이 파다하던데, 사실이 아닌 모양입니다.”

 

내가 선지교를 치며 하늘을 우러러 더 격렬하게 부르짖는다.

 

“아아, 최영 대감! 대감이 없으면 고려가 어찌 살 수 있으리요, 어찌 살 수 있으리요! 평생을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셨던 대감을 어찌 하늘이 이렇게 거둬간단 말이오! 하늘이시여! 원망스러운 하늘이시여!”

 

사람들이 안타까워한다.

 

“어쩜, 포은 대감께서 최영 장군과 저렇게 친하셨던 줄은 몰랐네그려.”

 

노비 몇 명이 버드나무로 짠 관을 가져와 선지교 옆에 놓는다. 내가 그 모습을 보고 더더욱 슬프고 비통하게 울부짖는다. 노비들이 최영 대감의 시신을 모셔 관에 넣고 뚜껑을 덮는다.

 

“아아, 최영 대감! 최영 대감, 이리 가시면 나는 어이 하라고... 나는 어찌하라고!”

 

곧 관이 옮겨진다. 그리고 나도 그 관을 따라서 천천히 걸어간다. 인파들이 없는 곳으로 도달하자, 나는 조용히 옷깃으로 눈물을 닦고 입고리에 차가운 미소를 건다.

 

“정중히 장례를 치러 드려라. 이 장례는 최영 장군에 대한 장례가 아니라, 고려에 대한 장례이니라.”

 

“대감께서는 어찌하실 것이옵니까?”

 

“가서 전하를 알현하겠다.”

 

돌아서서 걷기 시작한다.

 

 

+ + +

 

 

잠시 후

만월대(고려 왕궁)

 

 

“전하!”

 

내가 다급히 달려가서 우왕 앞에 엎드려 통곡한다. 우왕의 표정은 몹시 우울해 보인다.

 

“전하, 어찌 이런 참담한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이오니까! 최영 대감께서... 팔도 도통사께서!”

 

우왕이 날 보며 하교한다.

 

“그래요, 참으로 애통한 일입니다. 그래서...”

 

그가 잠시 쓸쓸한 표정으로 날 내려다보다가, 이내 눈물을 흘리면서 고개를 숙이고 말을 잇는다.

 

“...회군...시켜야겠죠?”

 

내가 기겁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며 외친다.

 

“전하, 그 어인 하명이시옵니까! 지금 이성계가 십만대군을 끌고 위화도에 육박하였고 그 군세가 실로 막강해, 당장이라도 요동을 휩쓸어버릴 수 있는 상황이옵니다!”

 

“하지만 이성계가 못 가겠다 하지 않습니까... 최영도 없는데 내가 혼자 계속 막아서다가, 이성계가 말머리를 돌려서 돌아오면 어쩝니까? 과인은 꼼짝없이 폐위당하고 죽을 겁니다.”

 

“그 어인 참담한 명이시옵니까, 전하! 우도통사는 결코 그러지 않을 것이옵니다!”

 

내가 다시금 고개를 조아리며 외친다.

 

“전하, 정히 믿지 못하시겠다면 소신을 보내 주시옵소서. 소신이 이성계 대감을 설득하여 요동으로 진군케 하도록 하겠사옵니다! 소신은 과거부터 이성계 대감과 사적으로 친하였으니, 지난번처럼 구금할 수도 없을 것이옵니다!”

 

우왕의 얼굴이 밝아진다. 그 젊은 임금이 날 내려다보며 반갑게 대답한다.

 

“그, 그래, 그리하시오! 최소한 요동으로 들어가서 무력시위라도 한 번 하고 나오시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내가 고개를 숙이고 걸어나왔다. 그리고 밖에서 기다리던 말에 타고 김경남이 고삐를 끌고 가게 하면서 그에게 지시한다.

 

“경남이, 내 갑옷과 칼을 준비하시오. 그리고 내 사병 400여 명을 모두 완전 무장시켜 대기시키시오.”

 

“알겠습니다.”

 

“그리고 33번 편지를 이성계 대감께 보내시오.”

 

 

+ + +

 

 

그날 저녁, 우왕이 다시 나를 부른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아가 조아린다. 우왕이 날 보며 말한다.

 

“과인이 분명 이성계 대감에게 가라 했거늘, 어찌 가지 않고 사병들을 무장시킨 것이오?”

 

“상황이 급박하여, 소신이 우선 그 사병들을 통해 이성계 대감의 집을 포위하고 그 가솔들을 인질로 잡았나이다. 이제 그 집을 철통같이 지키도록 하고, 저는 오늘 해가 지는 대로 이성계 대감에게 갈 것이오니다.”

 

“그... 그렇군요.”

 

우왕이 다소 미심쩍은 표정으로 날 내려다보면서 하교한다.

 

“헌데 그렇게 하면 오히려 이성계에게 회군의 명분만 주지 않겠소이까?”

 

“심려치 마시옵소서. 소신은 반드시 이성계 대감을 요동으로 보낼 것이옵니다. 유사시를 대비하여, 개경의 잔여병력 오천 명 중 삼천오백 명만 소신에게 배속하여 주시옵소서.”

 

“삼천오백이나요?”

 

“그러하옵니다. 그리하면 만약 이성계 대감이 못할 짓을 한다 해도, 소신이 최대한 막아 볼 수 있을 것이옵니다.”

 

내가 차가운 웃음을 숨기며 고개를 깊이 숙인다. 우왕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하교한다.

 

“그렇다면 그렇게 하세요.”

 

우왕이 나를 내보낸다. 내가 걸어나가며 내 사병대장에게 묻는다.

 

“이성계 대감의 가솔들은 모두 제대로 피신시켰나?”

 

“예. 모두 동북면으로 보냈습니다.”

 

“잘했다.”

 

내가 걸어나가며 말한다.

 

“이제 남은 건 개경에 남은 수비병력을 모두 끌고 가서 이성계 대감에게 합류하는 것뿐. 우리가 회군했다는 것이 알려지면 즉시 이성계 대감 집을 포위하고 있던 사병들을 이끌고 궁궐을 치게.”

 

“알겠습니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고려는 공양왕까지 갈 것도 없을 것이다. 우왕 단계에서 모든 게 끝날 것이다.


정몽주에 빙의한 현대인이라면 그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