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대단한 사람인 줄 알았다.  숙명의 불꽃을 이어받아 길고 긴 양피지에 수천개의 찬사로서 칭송받는 대영웅. 그것이  바로 나의 운명인 줄 알았다.


그야 당연했다.  평생을 건 숙원에 너무도 쉽게 답을 낼 수 있는 사람이었고 인생을 걸고서 완수하는 가문의 위업이 하루 아침에 해결 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 


 칼자루를 들면 샘솟는 힘은 그 누구도 비견될 수 없었고, 그 어떤 악의 무리들도 나에게 감히 무구를 들고 서 있지 못했다. 그렇기에 나는 내가 적법한 양피지의 주인으로서 또, 시대의 인간으로서 맨 앞줄에 서서 하늘 높이 반짝이는 검을 들고 천하를 호령 할 줄 알았다. 


 할 줄 알았다, 아니 할 수 있었다.  그 놈이 오기 전 까진. 그 놈이 그곳에 발을 들여놓기 전 까지. 


 안녕하세요 하며 허리를 꾸벅 굽혀 세우며 도장 안으로 뚜벅 뚜벅 걸어오던  놈. 첫 재회는 불쾌하고 쿰쿰한 냄새로 기억된다.  잔뜩 땀을 흘렸음에도 제대로 씻지 않았는지 얼굴은 꾀죄죄 했으며, 옷가지는 몇번을 물려 받았는지 모르게 허름했다.  


 여기......영감님께서 전달하신 추천서 입니다. 라고 말 하며 꼬깃꼬깃 주머니 안쪽에 다섯번 여섯번 접은 종이서적을 넘겨 줄 때는 실소가 절로 나왔다. 대체 어떤 영감이 저런 작자를 이 곳으로 추천했는가. 그 양반도 저 옷가지만큼이나 별 볼일 없는 사람이겠지. 


 그럼 한수 부탁드리겠습니다. 하며 꺼내어놓는 칼.  그 또한 별 볼일 없는 그의 복식, 차림 만큼이나 대단치 않았다. 칼은 꽤 잘 섯

지만 그것도 딱히. 그냥 기름을 애써 먹였다. 딱 그정도의 평범한 검.  그놈은 그 칼을 천천히 들어 사범 앞으로 섰다. 


 .....예 그럼 한수 부탁드리지요.


 귀찮은 표정으로 대충 칼을 잡아 들고 올라오는 새끼 사범의 모습은 그럴만했다고 생각했다. 하루에도 수십번씩 들락날락 거리는 것이 검술 수련생들이고, 도처에 내려간 영감들의 추천서를 받아 왔다 손 치더라도 지방과 도시의 검술차이는 명확하여 한 수만에 승부가 나곤 했기 때문에.


 서로 자세를 취하고 마주 본 칼. 기본기의 자세부터 열심히 했다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녀석의 모습에 나는 평소대로 하던 운동을 연습하기 위해 고개를 돌려 칼을 휘둘렀다.  곧 있으면 뒤에서 비명 소리와 함께 사범이 먼저 손을 내밀면서 수고 하셧습니다 하고 이야기를 나눌 줄 알았다.   그렇게 평소처럼 칼이 부딧치는 소리가 났고, 승부가 갈렸다.


......수고 하셨습니다.


......

 

하지만 목소리는, 녀석에게서 먼저 들려왔다.   나는 놀란 표정으로 그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거친 호흡을 뱉어가며 기본기에 열중하고 있었지만,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새끼 사범을 삽시간에 쓰러뜨린것도 대단하다면 대단한 일이었지만, 겨우 그정도 부분에서 의문을 차지하기엔 새끼 사범도 대단한 검술을 가진이는 분명 아니었다. 의문을 품었던 것은 단 하나. 


 영성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한 합에, 새끼 사범을 베어 넘길 수준이라면 그 속도와 힘에 있어서 만큼은 조금의 영성이라도 느껴져야 할 것인데. 마치 어떠한 영성도 얻지 못하여 그저, 휘두르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초짜 검사처럼 어떠한 힘도

느껴지지 않았다.  


 영성이 닿지 않은 신체의 힘이라 하는것은 갓난 아이와 같아서 영성을 두른 사범과는 비할나위 없이 큰 힘의 차이가 있었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힘도 실지 않은 아이와도 같은 놈은 너무도 쉽게 새끼 사범을 바닥에 떨구웠다. 


 무엇인가. 얕은 수가 있었나?  시시 콜콜한 잡기술에 누워버린 것이겠지. 아직,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아 그저 영성에 힘을 실을 뿐인지라 지방에서 발전된 얕은 잡기술에 당해버린것이겠지 생각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내일 다시 이 자리에서 뵙겠습니다!


 도장 전체에 큰 목소리로 허리를 굽히며 인사하는 그 놈.  뒤로 돌아가는 그놈의 모습을 바라보며 내일은 한번 시간이라도 조금 써봐야겠다. 어떠한 잡기술로 사범들을 바닥에 뉘인것인지 확인 해 보아야겠다 생각하며 기본기를 다졌다. 이때까지는 아직도 그에대해 그리 깊이 생각하지 않았었다. 특이한 놈인거 같다, 일 년에 한 두번 세명 쯤 되는 지방 검객이겠거니 했다.


 하지만, 다음날 겨루게 된 둘째 사부와의 싸움에서 목격한 그 놈의 검술은 나의 의문은 풀리기는 커녕 궁금증을 훨씬 증폭시킬 뿐

이었다.


.....수고 하셨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친절하게 웃으며 손을 내미는 그 놈.  떨떠름한 표정의 둘쨰 사범. 승자와 패자가 갈렸고, 또다시 녀석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나는 

눈섭을 긁적였다. 


 분명히 보았다. 칼과 칼이 맞닿는 부분을.  그런대도 상황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둘째 사범의 검술은 정석적인 힘의 검술이었다. 힘으로서 칼을 맞대어 싸우는 검술. 주도권을 먼저 가지기 위해 먼저 선공을 이어나가기 위해 칼을 앞으로 내뻣는.  


 상대 또한 엄청난 기교를 선보인 것은 분명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조금 애매했다. 들어오는 칼날을 받아들이며 힘싸움을 피하지 않는데 이것이 별로 그에게 유리해보이지 않았다. 


 검의 선과 궤도, 신장의 차이로 인해 이러한 싸움은 분명 그에게 불리한 싸움인듯 싶었기 때문이다. 키가 적어도 10cm 이상 차이가

났기에 이런 태세로 싸우다간 영성으로 얻은 힘의 차이가 크지 않는이상 금방 무너질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먼저 무너진 것은 둘째 사부 쪽이었다. 분명히 점과 점이 부딧쳐 힘싸움으로 번지고, 곧 이어 한쪽이 다른 한쪽의 칼을 밀어낼 상황이었는데...... 


 무언가 화면이 잠깐 끊긴듯이 어느세 힘의 극점은  비스듬히 옆으로 흘러가고 있었고 미끄러지는 칼날을 놈은 옆으로 쳐 내려갔다그리고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인접해있던 칼의 끝은 너무도 쉽게 둘째 사부의 목 앞에 서 있었다. 


 하던 일도 멈추고 눈을 집중하여 바라본 장면이었는데도,  모르겠다. 속도가 빠르다고 하면 빠른 쪽에 가까웠지만,  눈으로 놓칠 속도였냐면 그것또한 아니었다. 기술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무언가. 짧은 순간 순간. 결과로 이어지는 중요한 일련의 과정 중간이 마치 '사라져버린듯' 한 느낌. 


 그것은 뭐랄까.....과정 없이 결과만으로  승패가 결정된 승부 같아 보였다. 운명적으로 이미 정해진 승부. 아무리 발버둥쳐도 이길 수 없을것만 같은 것. 


 처음으로 보는, 완전히 생소한 그의 검술에 나는 넋을 놓을 수 밖에 없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내일 다시 이 자리에서 뵙겠습니다!


 다시금 내일을 기약하며 떠나가는 놈. 그래도 세명의 사범이 남아 있는데 내일의 녀석은 이길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거기서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나, 정말로 만약에 저 다섯 사범들을 전부 재끼고 저 검이 나에게 다다랐을때, 나는 저 검을 이길 수 있을것인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정해진 루틴으로 오랫동안 이어나가야 보다 효과적인것이 훈련이었기에 나는 언제나 정해진 만큼만 했다. 덜

열심히 했다가 아니라 침착하게 오랫동안 하는것이 중요하다 여겼기 때문에. 허나 나는 불안함에 휩싸여 그 날 저녁 밤 새도록 검을

휘둘렀다.  녀석의 칼 반대편에 있는 나의 모습을 그리며.


.....감사합니다.


 손을 내밀고, 사범은 또 다시 그 손을 잡았다.   예상은 다음날에도 여김없이 맞아들었다. 세번째 사범도 한합의 승부를 넘지 못했다. 정해진 결과를 따르듯이 사범은 바닥으로 누웠고 그 놈은 손을 내밀었다. 이번에도, 그의 검술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윤곽조차 잡히지 않은 모습. 차라리, 강대한 영성으로 펼쳐진 화려하고 빠른 검술이었다면 이런 느낌은 아니었을거다. 


 녀석의 검술은 그것과는 완전히 궤를  달리했다. 하나의 자세에서 나올 수 있는 파생기술과 이어지는 연속 공격. 공격과 공격 사이의 빈틈을 노리는것이 검술의 변칙적 운용이라면 그의 검술은 애초부터 파생되어 나오는 첫 기술을 완전히 파훼했다.


 왼쪽일 수도, 오른쪽일수도 있는 것이고 위일수도 밑일수도 앞일수도 뒤일수도 있는 것인데 언제나 정답을 찔러 왔다. 어느쪽 일 것 같냐 라는 질문에 언제나 완벽한 해답을 내어 놓는, 답이 정해진 검술.  


 수고하셨습니다. 내일 다시 이 자리에서 뵙겠습니다!


 그렇게 두번째도, 첫번째 사범도 밀어 낸 그 놈의 검은 기어코 나의 차례 앞까지 다가왔다. 나는 처음 맞이하는 패배의 공포에 

손을 떨었다. 


 저녁, 불꺼진 도장에서 홀로 검을 휘둘렀다. 시커먼 어둠이 녀석이고 내가 녀석을 상대하기 위해 배운 영성의 힘과 기술들을 펼쳐서

어떻게하면 녀석을 이길 수 있을지 고민해봤다.  


 시그니쳐, 연속 기술, 하단 중단 상단  돌아치기,  페이크 모션 떠오르는 모든 힘과기술을 더 합쳐봐서 생각 해 보았지만 매번 정답을 찔러 들어 올 상대방의 검술을 생각 해보니 이 모든 과정들이 그저 몸부림이며 발버둥 치는 것에 불과하다고 느껴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 불안감을 떨쳐내기 위해 머릿속에서 생각나는 수천가지 검술들의 길을 생각하며 연습하고 또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그러다보니 햇빛은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했고, 날은 밝았다. 녀석과의 대결이, 곧 시작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