왠지 모르게 서늘하고 차갑게 살을 때리는 바람에 왠지 눈물이 나던 와중 평소에 이것저것 기웃거리며 구경만하던 다양한 채널들 중에 보이는 이 채널에서 수필이란 부분이 보이자 형식없이 자신의 체험이나 이야기를 쓰는 것이라는게 생각나서 우울한 시간을 보낼때면 가끔씩 떠오르는 뒤죽박죽 뒤섞인 저의 이야기를 누군가와 공유하면 어떨까라는 생각에 한번 끄적여봅니다.

내용도 뒤죽박죽이고, 저라는 편협한 사람에 시각으로만 쓰이다보니 남들이 보기엔 불쾌할 수 있는 내용과 많은 오타들이 있을것이라 생각됩니다만, 하나하나 찾아서 고쳐쓰고 그러기엔 뭔가 지쳐서 그냥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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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할머니, 큰아버지와 아버지가 함께 있는 집에서 어머니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초등학생 때까지 믿다가 어느날 갑자기 학교로 찾아온 자신이 어머니라 말하는 여성에게 이유도 모른채 그 집으로 데려가져

몇일간 생활하다가 기존에 살고있던 집과 처음보는 어머니라는 사람중 하나를 고르라는 양자택일을 하라고 강요받아 결국 좀더 익숙했던 아버지가 있는 집을 골랐지만

불과 몇년 지나지 않아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고 그 장례를 위해서 가족들이 집을 비운 사이 집에는 어떤 음식도 없어 저녁까지 굶으면서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그리워 하면서 울기만 하다가 지쳐

이후 돌아온 할머니가 해주는 밥을 먹고는 평소처럼 생활하면서도 할아버지를 그리워하면서 우는 날에는 아버지에게 집에서 울기나 하는 애새끼라 욕을 먹고 다음날 부터 평소처럼 생활하려 애쓰던 중

교실에서 울고있다는 이유로 담임선생에게 발길질을 당해 의자째로 쓰러져 발로채인것을 말하자 니가 그럴짓을 했겠지라며 다시 욕만먹고 생활하다

어찌저찌 중학교에 입학하여 생활하던 중 나의 성적 순위를 물어보는 아버지에게 생활기록부에 30몇이라 적혀있던 숫자를 말해주자, 자기혼자 전교 30몇위라 생각하더니 반 30몇위던 나를 동네에서 천하에 거짓말쟁이로 만들고선

전부 내탓으로 돌려 그럴바엔 학교를 가지 않는것이 괜찮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등교를 거부하자 평소와 달리 나에게 좋은말을 해주더니 자신이 알고지내던 깡패라면서 학교를 안다닐거면 깡패나하라며 겁박을 주고

나의 성적으로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해봤자 꼴등이나 할것같아 차라리 기술같은 것을 배우자는 생각으로 지원한 학교가 꼴통들이나 가는곳이라며 폄하하고 욕을하더니

결국 내가 고등학교에 진학해 왕따를 당하는 분위기가 생기든 말든 수업내용을 필사적으로 전부 필기하고 쉬는시간에는 그위에 똑같이 따라쓰며 공부를 해 중간고사에서 전교 10위권 내 성적에 들어 자랑을 하자 공부나하라며 면박을 주고

내가 중학생때부터 취미로 해왔던 웹소설 쓰기를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라며 비웃고 그게 돈이나 돼냐며 그만두라길래 그만뒀더니 고등학교 3학년시절에 갑작스레 너 소설같은거 쓰지않냐며 요즘은 그게 돈됀다던데 얼마버냐며 물어보더니 그래봤자 얼마나 벌겠냐며 자기 때문에 진작에 그만두고 잊었던 취미마저 끝까지 들춰내어 욕하고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지 얼마안돼 진학을 하냐 취업을 하냐에 혼란한 시기에 초등학교시절부터 나에게 지속적으로 해왔던 자신의 삶과 연애는 전부 나때문에 틀어지고 망가졌다며 술에 취해 할아버지를 찾으며 나에게 욕을 하자 옛날부터 도대체 나에게 왜 그러냐며 소리치자 고작 그딴 옛날이야기를 왜 지금꺼내냐며 소리치며 나를 때리려 하기에 팔다리를 붙잡고 이불를 뒤집어 씌워 그럴거면 잠이나 자라고 소리치자

이젠 폭력도 내탓도 하지 않아 마음의 평안을 얻는듯 하여 넘어간 이후

비록 전문대라도 대학을 가자는 생각에 가장 저렴하고 합리적이라 생각한 폴리텍 대학이라는 곳으로 진학을 목표로 면접을 가고 결국 합격하여 당시 150만원 정도였던 금액을 요청하자 유치원때부터 고등학교 3학년때까지 손가락 갯수만으로도 셀 수 있을만큼 새옷을 사준 횟수가 적으면서도 매주 3회씩은 술에 쪄들어 집에 들어왔던 인간이 내가 관심도 없고 원하지도 않았으며 현재까지도 잘 신지도 않는 불편하기만한 메이커 신반을 억지로 쥐어주기만 했을뿐이면서 온갖 생색을 내며 학교 제대로 다녀라 공부는 제대로 하는것이냐며

말한 이후에나 돈을 주던 아버지와 중학교 시절 나와 가족들에게 주방식칼을 휘두르다가 결국 병원에 간 큰아버지도 대학에 다녔다는 취중이야기를 견디며 결국 전문대학교에 입학하여 1년을 마친 뒤 군대를 가게 되었다.

군대에서 만큼은, 정말이지 행복했었다.

비록 항상 스트레스를 받으면 친구들이 사주는 음식과 집에있는 라면으로 폭식을 하면서 불어오른 110kg이 넘는 몸때문에 힘들고 훈련소에서 구급차에 실려 호흡기가 씌워지기도 했지만 눈물을 흘리면서도 버티고 집에있는 것보다는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인지, 자대 전입이후 동기들이 휴가계획을 짤때 부대내 도서관에 있는 책을 읽거나 맞선임과 함께 저녁마다 운동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던 와중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나에게만 가혹한 중대장이 지속적으로 아직까지 이등병이었던 나에게 이것은 할줄아느냐 저것은 할줄아느냐 선임병들이 하는거 왜 안보고 다른 사람이 시킨일을 하고 있느냐며 괴롭혀오자 때마침 있었던 파병지원공고를 보고서 파병이라는 선택을 하게끔 되었다.

어찌저찌하여, 파병지 생활을 시작하고 타인과에 관계에 있어서 많은 어려움을 가지고 있었던 나는 최소한 함께 생활하는 병사들이 내 뒷담을 깔지언정 나를 괴롭히지는 않았고 필요한 일은 서로가 알아서 도움을 주거나 받았기에 평탄한 파병생활을 하던 중 그곳에서 조차도 팀장의 역할을 맡은 대위가 지속적으로 나를 괴롭혀왔다.

나에게 어째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느냐며 면박을 주고, 혹시 따돌림이나 괴롭힘을 당하고 있냐고 지속적으로 질문하고 그딴식으로 생활하는데 부모도 알만하다는 둥 온갖 모욕적인 언사를 하던 해당 대위는 결국 함께 일하는 간부들과 병사들이 있는 자리에서까지 나에게 면박을 주었고 나는 서러움에 눈물을 흘리다가 갑작스레 웃음이 터져나와 계속해서 웃기 시작했고 그것을 주위에서 보고있던 간부들과 병사들이 와서 나와 해당 대위를 떨어뜨린 뒤 나를 위로하며 해당 대위가 원래 자기들 사이에서 따돌림 당하는것 알지않냐며 머리를 식히란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던 중 집에 위안이라도 얻자는 생각으로 전화를 하자 대뜸 아버지는 나에게 정신병원에 있던 큰아버지를 어떻게 하면 좋겠냐며 이야기해오기 시작했고 할머니는 치매가 있는지 밖에서 길을 잃거나 집에서 소변을 지린다는 이야기를 해오기 시작했다.

위안은 얻지 못하더라도, 가족의 연이라도 이어나가야 이곳에서 버틸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몇년간 정신병원에 있었던 큰아버지도 결국 우리의 가족이고 할머니도 도움이 필요할것 같다고 이야기하자 니가 집에 올때쯤이면 할머니는 요양병원에 보내고 정신병원에 있던 큰아버지와 함께 살것이라는 아버지의 통보를 듣고서 몇일 후 나는 원인모를 통증과 아픔으로 부대내에 있던 의무실에서 몇일동안 치료를 받게 되었다.

그렇게 치료를 받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끼치는 것 같아 빠르게 나아야 겠다는 생각과 잦은 기침으로 나의 병이 타인에게 옳으면 안됀다는 생각에 항시 마스크를 착용하며 잠을자고 생활하던 중 그 대위가 또 나에게 면박을 주었다.

다들 군복입고있는데 왜 병상에 누워있다가 평상복을 입고서 식당에 와가지고 분위기를 흐리냐면서 말이다.

다른 부사관들과, 평소 나와 친하진 않더라도 무난하게 생활해온 생활관 병사들 조차도 빨리 나아서 하던일 해야지라고 화기애애하게 넘어가던 상황속에서 그 대위는 나에게 그렇게 말했고 다음날부터 어째서인지 나는 사람들이 많은곳에서는 고개를 들기 힘들고 타인의 얼굴을 마주보기 힘들정도로 온몸이 경련하듯 떨려왔었다.

이렇게까지 고개를 들기 힘들고 타인과 시선을 부딪히는 것이 힘든 경험을 처음이었기에 나는 단순히 내가 병상에 오래 누워 있어서 그런것일 거라며 온몸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계속해서 눈물이 흐름에도 불구하고 억지로라도 계속해서 움직이고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며 이것을 떨쳐내려 노력했다.

그리고 결국엔 움직였다, 그리고 병상에서 일어나 다시 평소처럼 일하고 남은 파병생활을 마친 뒤 한국으로 복귀한 뒤 각종 질병검사를 하던 중 그 대위에게서 갑작스레 통보를 받게되었다.

너 검사받은게 안좋게 나왔으니 휴가기간중에 군병원에 방문하여 재검사를 받아야 한다는 통보였었고, 그것을 가족에게 알리라는 이야기였다.

나는 그것을 그날 저녁 전화를 통해 아버지에게 말한 후, 다음날 아침 코피를 쏟으며 그대로 의무실로 실려가게 되었다.

이후 여러 사건들이 있었지만, 병원에서 신경안정제와 간수치를 조절하기 위해서 복용해야하는 약과 몇가지를 받은 나는 아버지의 손에 붙들려 은행에 가서 머리가 아파 제대로 듣지도 못한 이야기들을 넘기며 신용카드를 한도 270만원가량으로 발급받은 후 아버지가 카드를 받는 것을 끝으로 자대로 복귀하게 되었다.

상병말로 자대복귀한 나는 기존에 안면이 있었던 선임병들이 병장이 된것을 보면서 서로 인사하고 포옹하기도 하면서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군생활을 보낸 후 병장으로 무사히 전역하여 밖으로 나오게 되어 파병생활동안 벌어들인 1600만원이 조금 넘는 금액을 어떻게 사용할지에 관하여 고민하며 집으로 귀가했다.

그후 12월에 전역한 나는 바로 대학에 복학신청과 복학준비로 내가 그동안 잊고 있었던 학과 관련 공부와 부족한 부분에 대한 준비를 하며 몇달을 보낸 후에야 알게되었다, 나에게 카드를 받아간 그 인간이 한달에 270만원 정도였던 한도치까지 꾸준히 신용카드를 긁었으며 내 통장 잔고가 사라질때까지 긁은 후 돈이없어 내가 빚까지 떠앉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도 양심은 있었던 것일까?, 리볼빙을 걸어 빚은 자신이 갚겠다던 그인간은 한달에 30만원정도씩 270만원에 카드값을 갚아나갔지만 그 와중에 내가 비상금으로 남겨뒀던 500만원을 비트코인을 한다는 자신의 지인에게 빌려줘야 한다며 빌려간 후 4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아무말이 없다.

결국 마지막 리볼빙으로 270만원이었던 카드값마저도 마지막 40만원 정도에 금액은 내 돈으로 갚으면서 나는 그 인간에 대한 불신감많이 쌓여가고 있었고

그러던 와중, 옷장에서 다음날 필요한 복장을 찾던 나에게 갑자기 옷장에서 옷을 찾기 위해서 티비앞을 계속 왔다갔다 하던 나에게 뭐하는 짓이냐며 시비를 걸던 그 인간은 내가 시비걸지 말라고 하자 자신이 언제 시비를 걸었냐며 언성을 높이더니 대화를 하지 말자며 소리친 후 현재까지 약 2년간 대화없이 생활하고 있다.

하지만 그인간의 밑바닥은 끝이 없었던 것일까?, 이제는 자신의 친구까지 집에 데려와 새벽 2시에 중국집 음식과 술을 들이키며 소리를 지르고 화장실에서 담배를 핀뒤 그것을 자랑하는냥 화장실 문을 열어놓고 돌아다니며 자신이 사용한 면봉이나 사탕 껍대기 담배꽁초등을 온집안에 던져놓으며 생활하는 아주 대단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 와중에 정신병원에서 몇년을 지내다온 큰아버지는 자기 집에서는 그럴수도 있는것 아니냐며 자신의 동생인 그인간을 옹호하는 생활을 보여주어 내가 미친것인지 계속해서 의문이 드는 삶을 살면서 나는 매일밤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후벼대며 잠들어 다음날 아침 귀에서 흘러나온 피들이 딱지를 진것을 물로 씻어내는 하루하루를 반복하며 취업에 의조차도 잃고 전문대를 졸업한지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저 현실을 도피하듯 인터넷 공간속에서 나보다 나은 삶을 살고있는 사람들에 이야기와 영상을 보면서 나보다 행복한 사람이 있으니까 괜찮은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저 나는 오늘도 웃으면서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