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한다는 것은 오래전에 귀찮은 일이 되었다. 걸어간다는 것조차, 발을 내딛는 것조차, 이것에 대해 생각하고 또 표현하는 것조차 내겐 너무나도 괴롭고 번거로운 일이 되었다. 숨을 쉬는 것조차 지병과 코로나로 협소해진 기관지에게는 무리한 일인지, 폐를 찢어발기는 듯한 기침이 멎지 않는다. 무언가를 먹어도, 망가진 소화기에서는 끔찍한 복통을 안겨줄 뿐이다.
삶의 모든 요소가, 또 인생이, 세상이 내게는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것이 되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은 마음도, 천금을 바라는 것도,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괴롭지 않기만을 바라는 것뿐인데. 고통에서 벗어나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제시하는 해결책은 그저 새로운 고통을 더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너무나도 게으르고, 너무나도 나약했다. 자살이라는 가장 간편한 해결책마저, 단돈 5만 원으로 해결하는 방법조차 그저 갈팡질팡하며 허송세월할 뿐이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가만 자리에 드러누워 말라죽기를 바라는 것뿐이다. 엄청난 겁쟁이인 내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 멀리, 그러면서도 죽음을 향한 선망을 충족시킬 만큼 가까이, 불을 쐬려는 두 마리 고슴도치의 이야기처럼 적절한 거리를 두고 마냥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삶은 무의미하다. 누군가에게는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을 이끌어 더 나은 곳으로 향하려는 사람도, 학문에서, 혹은 육체나 예술과 관련된 분야에서 진일보하려는 이들도 있겠지. 그러나 내게는 그렇지 않다. 나는 구태여 이 황무지에서 존재의의를 찾고 싶지 않다. 오아시스에서 뛰놀고, 야자나무의 그늘 아래서 선선한 바람을 맞는 이들은 인생이 충분히 즐길 만한 일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더 나은 즐거움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들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내게 의미를 가르쳐준다고, 더 좋은 것들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거라고는, 그들에게나 의미있는 야자나무 열매 음료라던가, 잎을 엮어 만든 부채나 장신구 따위의, 나랑은 너무나도 거리가 먼 것이다.
생각을 배설하는 것마저도 끔찍한 고통이 되기 전에, 나는 이 글을 남긴다. 혹여 내가 땅 속에 묻혀, 온갖 곰팡이와 벌레가 몸을 물어뜯어 한 줌 먼지가 되어버릴지라도, 내가 남긴 이 약간의 데이터 조각은 광활한 인터넷 공간에 버려진 플라스틱 쓰레기처럼 오래도록 남을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이 조잡한 글자 뭉치를 읽느라 시간을 낭비한 사람들에게는 유감이지만, 길거리에 버려진 페트병 보듯이, 그냥 그렇게, 조용히 지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