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자신을 증오하게 될 운명을 타고 난 아이가 태어났다. 나는 그게 나라는 것을 세 살 때 알았다.


 6월 12일 만큼 보편적이고 적절한 생일은 없을 것이다. 어린 시절엔 내가 나의 생일을 기다렸고 그저 살아있는 것에 보상받기를 기대했다. 만약 내가 아직까지도 살아있기만 하는 데에 칭찬을 받을 수 있었더라면 내 삶은 좀 나아졌을까?


 무얼 해도 어설프다. 아무리 노력해도 허술하다. 가장 괴로운 것은 내가 나를 안다는 것이다. 만일 내가 나를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둔했다면, 내가 존재하는 지 모를 정도로 어리석었다면 여전히 행복했을까.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천진함과 어리석음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 수 있다면, 무엇도 원하지 않은 채로 존재할 수 있다면 삶은 아름다울 것이다. 


 나는 의식이 있기 때문에 괴로움을 느낀다. 나는 남자이기 때문에 고통을 느낀다. 내가 여자거나 영원히 어린아이였다면, 나의 무능력함에 얽매일 필요가 없었겠지. 가장 큰 적은 시간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하는 나였을까?


 두 답 모두 불충분하고 시답잖은 것들이란 것 쯤은 나 또한 안다. 한 명의 어른이 된다는 것. 자신이 어른이라고 착각하는 소년이 되는 일은 얼마나 어리석고 가여운 일인가.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를 어른으로 본다. 나는 여전히 내가 어리다는 것을 안다. 그럼으로써 나는 노인이 된다. 앎이 남았을 뿐 무력한 존재. 타고 남은 잿더미.


 단 한 순간이라도 내 미지근한 삶이 타올랐던 적이 있었나? 단 한 모금의 숨결이라도 내가 갈망한 적이 있었나? 나는 살고 싶은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죽어야 할 이유도 발견할 수 없었다. 삶이라는 것은 그랬다. 이토록 시시한 인생, 지루한 젊음, 끝나지 않는 기다림을 위해서 사람들은 산다.


 내가 이런 인간이 되어버린 까닭은 내가 원하는 모습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족할 줄 몰랐기 때문에, 사랑할 줄 몰랐기 때문에 내 인생에 대한 변명거리만이 남았다. 결국 남는 것은 이야기 뿐이다. 


 운명이라는 것이 있다면, 삶이 우연의 연속이 아니라면, 내가 나를 선택할 수 있다면... 변명들이 줄을 서고 이야기가 된다. 한 순간만 바뀌었다면, 무한한 변수 중 무엇 하나라도 잘못되었다면 모든 일이 해결됐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일이 잘 되었고 모든 일이 순조로웠기 때문에 내 삶이 무너지고 있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그 아이가 나라는 명료한 사실이 거짓말처럼 다가온다. 생일날의 기억들이 촛불의 연기처럼 흩날린다. 그땐 모르고 있었지만 사실 케이크에 떨어진 촛농은 촛불이 흘린 눈물이었다. 눈물이 굳어 흉이 되었다. 그것이 늙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어째서 그걸 알려주지 않았을까.


 누구도 원망할 까닭이 없음을 나는 안다. 사람이 살고 죽는 데 원망은 의미가 없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독화살을 누가 쏘았는지는 중요치 않으시단다. 당장 사는 것이 중하다고 하신다.


 납득할 수 없다. 사는 일 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 이해한다. 그러나 삶이 전부고 추구해야하는 모든 것임을 나는 거부한다. 내일을 살기 위해 오늘을 죽겠다.

 이 모든 것이 하잘데없는 반항이라는 것을 이미 안다. 그럼에도 반항한다. 살아있다는 것은 반항의 가장 원초적인 형태이다. 반항을 반항하는 것도 삶의 일종일 것이다. 반항하는 것이 곧 존재의 본질이다. 계속 자리잡기를 고집하는 것. 그게 바로 내 핵심이었다. 하지만 왜 고집해야 할까? 무생물이나 존재하지 않는 것 처럼 살아있을 수는 없을까?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는다. 사람은 많다. 그러나 대답해줄 사람이 단 한 명 뿐이다. 알다시피 그건 내 그림자였다. 내 생일을 축하하는 것도 내 그림자, 슬픈 생각 속에 소리없이 우는 것도 내 그림자였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고 마주치지 못하는 것도 내 그림자였다. 마음 속의 그늘을 말하는 나의 그림자.


 나의 인생에도 해질 무렵이 있다면, 아마 지금쯤일 것이다. 내 그림자가 늘어지고 왜곡됐듯이 나도 휘어지고 틀어진 모양이다. 곧 밤이 오겠지. 그러면 금방 달빛이 내 마음의 그늘을 숨겨줄 것이다.


해질녘이라 나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