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방패의 전설 모음집(계속 업데이트) - 창작문학 채널 (arca.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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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트라우마 극복


바로 머리 위, 잔의 뒤편에서 태양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잔이 내뿜는 마력은 태양의 빛조차 압도하고 있었다. 잔은 투기장 위에서 천천히 주변을 바라보다, 이내 양 팔을 위로 들었다. 그와 동시에 찬란한 빛이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감히 마리에게 손을 데려던 군중들의 목을 그대로 잘라버렸다. 한순간에 200명에 달하는 폭력배들이 비명조차 남기지 못하고 척살당하자, 피그리티아는 할 말을 잊고 말았다. 잔은 천천히 쓰러지기 직전인 아인과 당황한 피그리티아 사이에 착지했다.


“난 네 이름을 모르지만 말이야… 네가 지은 죄는 두 개다. 하나는! 마을의 주민들을 괴롭힌 것. 그리고 두 번째는… 감히 내 친구를 건드린 것! 죄에는 대가가 따라야 겠지…? 그 처벌은… 사형이다!”


그제야 피그리티아도 이성을 되찾았다.


“어림없는 소리! 네놈은 또다시 힘을 잃고 내 먹이가 될 뿐이다!”


피그리티아가 뿜은 보라색 안개가 잔을 휘감았으나, 잔은 고작 이거냐는 듯 미소까지 지으며, 하지만 분노에 찬 눈으로 피그리티아를 바라보았다.


“처음 당했을 땐 속수무책이었지만… 한번 겪어보니 알겠더라고. 별 볼일 없는 마법이라는 걸 말이야.”


잔이 허공에 한번 팔을 휘두르자, 부서진 천장 잔해가 두둥실 떠올라 그대로 피그리티아의한쪽 날개에 박혔다. 피그리티아가 고통에 울부짖자 잔은 더 크게 소리쳤다.


“아프냐?! 그런데 그 정도 고통은!!”


잔이 양 팔을 벌리자 작은 단검에서부터 거대한 철판까지 투기장의 모든 금속 물체들이 제자리에서 뜯어져 나와 공중에 떠올랐다. 


“마리와! 아인이 당한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그 말과 함께 잔이 팔을 뻗자 모든 철물들이 그대로 피그리티아에게 처박혔다.


“으으윽…! 이, 이럴수가!”


그러나, 피그리티아는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잔이 손을 펼쳤다가 다시 접자, 그의 몸에 박힌 철물들이 그대로 뭉쳐져 피와 철의 냄새가 풀풀 풍기는 구체로 변해버렸다. 곧이어 아인도 기운이 돌아오는 것을 느끼고는 숨을 몰아쉬었다.


“아슬아슬했어, 잔.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으니까. 그나저나 마리는? 괜찮은 거야?”


“가보자.”


다급히 마법으로 날아간 둘은 목이 잘린 채 쓰러진 시체 들을 치우며 마리를 찾았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시체들 사이에 피를 뒤집어쓴 채로 계속 구역질을 하는 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잔이 가장 먼저 그녀에게 다가갔다.


“마리, 괜찮…!”


그리고,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것은 뒤이어 다가온 아인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걸레짝이 되어버린 옷을 붙들고 계속 토해낼 것이 없음에도 구역질을 하는 상처투성이 그녀의 모습에 아인은 자기도 모르게 몇 걸음 뒤로 물러났고, 잔이 다급히 그녀를 껴안고 진정시켰다.


“괜찮아, 마리. 다 끝났어… 널 건들던 놈들은 전부 죽여버렸으니까.”


그제야 마리는 구역질을 멈추고, 대신 잔을 붙들고 눈물을 흘렸다.


“그 새끼들이… 날 만지고… 10골드나 하는 옷인데…! 날 깨물고… 그걸… 그걸 내 눈 앞에… 보여져 버렸어… 젠장…”


“괜찮아… 내가 왔잖아.”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아인이 조심스럽게 마리의 시선을 피해 잔 가까이 다가와 방패에 무어라 적어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트리움피한과 가까우니까 네 방으로 옮기자. 순간이동 쓸 줄 알지?”


잔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신이 두르고 있던 로브로 그녀를 가리고 주문을 외웠다. 순식간에 피비린내 나는 투기장이 아늑한 방으로 변하자, 아인은 잔과 눈빛을 교환하더니 빠르게 방 밖으로 나갔다. 다음날 이른 아침, 아인은 스톰힐에 있던 일행의 짐과 자신의 말을 데리고 돌아왔다. 말이 마법사의 탑 앞에 서자 잔이 내려와 그를 맞았다.


“어떻게, 마리는 괜찮아?”


잔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전혀.”


그 순간, 잔의 방 쪽에서 비명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무언가 부서지고 깨지는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보다시피 아주 심각해. 밤새 저러고 있어서 탑에 모든 사람들한테 양해 구하고 다녔거든.”


아인이 바로 옆에 있는 벤치에 앉자 잔도 따라 앉았다. 아인은 한숨을 푹 쉬었다.


“마리도 그 도박에 동참해서 조금이라도 나을 줄 알았는데… 내 불찰이었어.”


“아니, 네 선택은 결과적으로 옳았잖아. 오히려 내가 더 일찍 도착했어야 하는 일이야.”


“…네가 조금이라도 늦게 도착했다면 상황이 더 심각했겠지.”


“사실 지금도 심각해. 방금 연금술사랑 의사가 와서 진찰했었는데… 그래, 그렇게까지 험한 꼴을 당한건 아니야. 그 직전에 내가 왔으니까. 하지만… 의사가 그러길 몸 전체에 물린 자국이랑 손가락 같은 거에 쓸린 자국, 손톱에 긁힌 상처가 수도 없이 나 있다고 했어. 몇 백명이나 되는 남자들한테 그런 짓을 당했는데 사제로서는 물론이고 일반 사람으로써도 버틸 수 없는 충격이겠지.”


“그래, 사제로서는 더더욱…”


“사제이기 때문에 저렇게 되어 버린 거야. 순결을 잃은 몸으론 온전히 솔리스를 섬길 수 없는데 그때 그 혼란 중에 잠깐 기절해 버려서 자신이 순결을 잃었다고 굳게 믿어버린 것 같아. 우리가 도착했을 때 계속 토하고 있던 것도 그 이유인 것 같고.”


그때, 탑에서 한 마법사가 헐레벌떡 나타났다.


“르블랑 님, 빨리 와주세요! 같이 오신 손님이!”


아인과 잔 모두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직감하고 다급히 방으로 올라갔다. 거의 문을 부수다시피 열고 들어간 방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폭발마법이라도 직격 당한 듯 성한 것이 없는 방 한쪽에 이마와 얼굴이 온통 피로 물들어 있는 마리가 있었다. 마리는 계속해서 자신의 손을 펼쳤다 오므리며 중얼거렸다.


“제발… 솔리스 님… 제발! 내 탓이 아니야… 내가 원한 게 아니라고!!”


마리는 자신의 머리를 그대로 벽에 처박았다. 이마에서 다시금 피가 튀더니, 마리는 넋이 나간 얼굴로 단검을 들어 자신의 손목을 그으려 했다.


“그만해! 마리, 제발! 넌 아무 짓도 안 당했어. 빛이 안 돌아오는 건 네가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야!”


잔이 다급히 마리를 말렸다. 이미 그녀의 손목은 온통 칼에 베인 상처로 더 이상 살이 남은 곳이 없었다.


“이거 놔! 네가 어떻게 알아. 넌 그때 도착하지도 않았잖아!”


결국 아인이 나서서 막으려 했다.


“제발, 마리. 그냥 정신적으로 몰려 있을 뿐이야. 정신차려!”


그러나 역효과만 날 뿐이었다. 오히려 마리는 더 강하게 발광하기 시작했다.


“오지마…! 다가오지 마!!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지 마!!”


마리는 집히는 물건들을 되는대로 집어 던졌고, 아인은 결국 뒤로 물러나 방 밖으로 나갈 수 밖에 없었다.


그러고 일주일이 더 지났다. 아인은 카이저에게 불려가 정식으로 작위를 하사 받았고, 직접 카이저에게 요청해 황실의 의사와 연금술사 -당연히 여자로-를 마리에게 붙여 주었다. 그리고 카이저의 명으로 이 대륙 어딘가에 있을 용, 그리고 3년 전 갑자기 등장한 이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한 달이 더 지나고, 그제야 틈이 생긴 아인은 오랜만에 마법사의 탑을 찾았다. 이번에도 잔이 그를 반겼다.


“오랜만이야, 아인.”


서로 악수를 나눈 뒤, 아인이 물었다.


“잔, 마리는 괜찮아?”


이번엔 다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많이 나아졌어. 네가 한번 만나도 괜찮을 거야.”


아인은 잔을 따라 그녀의 방으로 발길을 옮겼다. 


“잠시만 기다려 봐.”


먼저 잔이 방에 들어간 뒤, 잠깐동안 말소리가 들리더니 다시 문이 살짝 열리며 잔이 고개를 내밀었다.


“들어와.”


근 한달여 만에 마리를 본 아인은 깜짝 놀랐다. 원래 입던 검은색 로브와 숄은 어디로 가고 문양까지 새하얀 로브를 입고 있었으며, 눈에는 역시나 새하얀 눈가리개를 쓰고 있었다. 마리가 말했다.


“아인? 드디어 왔구나!”


“마리…?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눈에 쓴 건 또 뭐고?”


“카이저 님 덕분에 몸은 많이 추스렸어. 그래도… 여전히 남자를 직접 보기는 무섭더라고. 그래서 쓴 거야. 걱정 마, 눈을 가리고 있어도 대략적으로는 볼 수 있으니까. 계속 용에 대해서 조사하고 있다던데, 뭐라도 소득은 있었어?”


“…응. 그것 때문에 여기 온 거야. 둘 다 떠날 수 있겠어?”


두 사람 모두 동시에 답했다.


“당연하지.”


아인은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가자, 가장 의심이 가는 곳이 있어.”


“어딘데?”


“영원한 불의 땅 서쪽, 감시의 해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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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멘탈 마리... 참고로 눈가리개는 다크소울의 화방녀와 비슷한 그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