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너한테 거는 기대가 얼마나 큰지는 아나? 실망이다.


-큭 잘난척 하더니 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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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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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어억!"


나는 비명에 가까운 신음을 지르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온몸에는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있다.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꾸는 악몽이다. 혼란스러운 정신으로 머리맡에 놓아둔 휴대폰을 잡자 폰을 쥔 손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애써 그것을 무시하며 전원 버튼을 눌러 시각을 확인해보니 시간은 여덟시 이십분즈음, 내가 평소 일어나는 시간이 11시 쯤이라는것을 생각해 본다면 악몽으로 인해 잠을 설친것이 분명하다. 그런 몽롱한 상태에서 나는 몸을 덮고있던 이불을 대충 치우고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 앉았다. 내 갑작스러운 행동에 끼이익 하고 5년째 나와 함께하고 있는 침대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몽롱했던 정신이 확 깨어났다.


우리집 정문은 작다. 그리고 침대를 설치해줄 인원도 없다. 게다가 나는 침대를 구매할 여력도 없다. 한마디로 지금 이 침대가 부숴지면 나는 내일부터 땅 바닥에서 잠을 청해야한다는 뜻이다. 그건 절대로 싫었다. 보통 다른 침대라면 매트리스만 분리해서 바닥에 두고 잘 수 있겠지만 내 침대는 특이하게도 매트리스와 침대가 결합되어있는 일체형이기 때문에 만약 한쪽 다리만 부러진다면 이 침대는 경사면 45도로 누워서 자야 하는 침대로 변모할 것이다.


나는 경사면 45도로 기울어진 침대에서 자고 싶지 않았기에 얼른 침대 가장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침대에서 일어서자 내 몸무게에 따라 구겨져있던 매트리스가 펴지는게 보였다. 매트리스의 중앙은 축축하게 젖어 진회색을 띄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자 새삼 내 가 밤새 얼마나 많은 식은땀이 흘렸는지 알 수 있었다. 갑작스레 찝찝함이 몰려왔다. 이미 잠옷과 속옷도 식은땀에 축축하게 젖어 내 몸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왼손을 들어 냄새를 맡아보니 시큼한 냄새가 훅 올라왔다.


"으윽.."


그 오묘한 냄새에 나는 인상을 팍 찡그리며 옷을 전부 벗어 바닥에 패대기 쳤다. 뭐 나중에 또 닦아야 하겠지만 지금 기분이 중요한것 아니겠는가? 일단 샤워를 하고 싶었다. 나는 식은땀 가득한 손으로 만져 겉이 맨들맨들하게 반짝거리는 휴대폰을 휴지로 대충 닦고 안방에서 나가 거실로 향했다. 거실을 중앙으로 오른쪽 끝 가장자리에 화장실 겸 샤워실이 있다. 둘이 따로 분리되어 있지는 않지만 없는 살림에 그런 것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거실을 가로질러 걸어가자 이미 5년전에 고장난 센서가 깜박거렸다.


이미 익숙해진 광경이었기에 나는 잠깐 그 붉은 불빛에 시선을 주었다가 관심을 껐다. 그렇게 걸어 도착한 샤워실 앞은 어두컴컴해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샤워실이 거실에서 오른쪽 끝 가장자리에 있는 구조이기에 이쪽으론 빛이 잘 안들었기 때문이다. 잠깐 거실의 커튼을 걷을까 생각했지만 굳이 다시 돌아가기도 귀찮고, 또 샤워실안에 전등이 또 있기 때문에

굳이 커튼을 걷으려 발걸음을 돌리진 않았다.


그렇게 익숙한 손놀림으로 샤워실의 전등 온 오프 버튼을 찾아내었을 때였다.


나는 더듬어 확인한 전등의 버튼의 방향을 눈치채고 몸을 흠칫 떨었다. 전등버튼의 방향은 오른쪽으로 되어있었다. 이는 샤워실 안에 불이 켜져있다는 뜻으로 거의 일어나지 않는 일이었다. 나는 전기세의 소중함을 아는 인간이고 전등은 매일매일 의도적으로 끄고 다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혹시 누가 우리집에 칩입한것일까 하는 생각이 순간 뇌리에 스쳤다.


하지만 이내 그럴리 없다는 생각 또한 들었다. 나는 이미 재단에서 실패작이라고 판명난 몸이고 지난 오년동안 아무런 기별도 없다가 이렇게 갑작스레 찾아올리 없다. 아마 내가 어제 깜박하고 전등을 끄지 않은것이리라. 나는 속으로 그렇게 짐작하며 샤워실의 문고리를 잡고 열어젖혔다. 


그러자 그 순간 절대로 그럴 수 없는 뜨거운 공기가 내 알몸을 덮쳤다.


난데없는 뜨거운 공기와 함께 하얀 수증기가 내 시야를 뎦쳤고, 깜짝놀란 내가 손을 휘휘 저었다. 다행히 수증기는 채 2초가 안되어 사그라들었고, 그러자 그제야 샤워실 속의 풍경이 보였다. 따듯한 공기로 김이 잔뜩 서린 작은 세면 거울, 졸졸 흐르는 따듯한 물, 그리고.. 푸른머리에 보라색 눈동자가 인상적인 소녀가 거품기가 가득한 머리에 손을 올린채로 동공을 마구 떨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난데없는 등장에 소녀도 나도 할말을 잃고있을 때였다. 잠시 뒤 나와 말없이 시선을 교환하던 소녀의 볼이 엄청난 속도로 붉어지기 시작하더니 고개를 팍 숙이고는 내게 바닥에 떨어져있던 샤워기 헤드를 전력으로 던지며 소리쳤다.


"미..미친 변태새끼야!!"


문고리를 잡자마자 떠오르는 직감.


그 직감에 나는 문을 열려다 말고 정중하게 노크했다. 내가 엿본 미래에서 장담하건데 소녀가 던진 샤워기 헤드에 맞았다면 나는 분명 그대로 정신을 잃고 2일은 지나야 겨우겨우 일어났을 것이다.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미래시에 가까운 직감이다. 내가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던 능력중 하나이며 내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원인이기도 하다.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 사실을 떠올리니 아까의 끔찍한 악몽이 다시금 나를 좀먹는것 같다.


애써 고개를 휘휘 털며 그 기억을 잊으려 노력하고 있자 화장실 겸 샤워실 안에서 우당탕탕 하는 소리가 들리고 얼마안가 끼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살며시 열렸다. 


빼꼼 소녀의 행동에 효과음이 생긴다면 아마 그런 소리가 날것이다. 소녀는 조금 열린 문틈 사이로 고개만 내밀었다. 진청색의 머리카락, 보라색의 눈동자. 길가에서 마주치면 나도 모르게 한번쯤은 뒤를 돌아볼 정도의 외모를 가진 소녀가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노골적인 적의를 보내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여기 있는거지?


소녀의 외모나 태도보다는 그 생각이 먼저 내 뇌리에 떠올랐다. 우선 이 집은 매우 폐쇠적이다. 편의상 내 집이라고 생각하고는 있지만 본래 목적은 나를 가둬두는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공간이다. 그런 만큼 이 공간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인원은 매우 한정적이고 나 또한 그 인원에 포함되지 못한다. 내가 과거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없었다면 나는 여기 5년째 갇혀 인터넷도 사람도 없이 지냈을 것이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짚고 넘어가야하는 의문이 매우 많음을 느꼈지만 지금 당장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그것을 직접 물어보기엔 소녀의 태도가 너무 적대적이었고, 그런 소녀의 외모를 보다보니 무언가 추측가는 부분이 생겼기 때문이다. 진청색의 머리칼, 보라색의 눈동자.

소녀의 외모는 기이할 정도로 내가 어제 완결시킨 소설 '무지성 야설에 빙의했다' 속 주인공을 닯아있었다.


나는 이게 절대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눈앞의 소녀는 일반적으로는 절대 들어올 수 없는 내 집에 들어와 있고, 처음 보는 남자의 집에서 샤워까지 하고 있었다. 떠올려 보면 내가 어제 완결 시킨 소설 속 주인공이 현대로 귀환 했다고만 서술해뒀지 어디로 귀환했다고는 서술해두지 않았다. 소설 속 주인공 인물이 갑자기 내 집에서 튀어나온다? 솔직히 말도 안되는 이야기였지만 지금 이것만큼 상황을 잘 설명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물론 이 가정이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고 있다.


그렇기에 나는 소녀를 떠보기 위하여 일부러 밝게 미소지으며 내 소설속 주인공의 본명으로 소녀에게 인사했다.


"안녕 김아린?"


만약 이 인사에 넘어온다면 소녀는 내 소설 속 주인공이 맞는것이고 넘어 오지 않는다면 이 소녀는 정말로 내가 모르는 매우 위험한 사람 인것이리라. 나는 밝게 미소지으며 손을 흔들면서도 만약 모르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미친듯이 고민했다. 나는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 직감이 경종을 울리는것을 알아채는것이 조금 늦었다.


소녀는 이미 내게 엄청난 적개심을 보이고 있는 상태였고 만약 소녀가 진짜로 내 소설속 주인공이라면 작가인 나를 좋아할 이유가 없다는것을 말이다. 내 직감이 보여준 미래시가 눈앞을 스쳐지나가자마자 나는 전력으로 고개를 꺽었지만 소녀의 주먹은 번개처럼 빨랐다.


빠악-! 하는 소리가 들리고, 소녀가 씩씩대는 소리가 들렸다.


"이..이 개새끼야! 여긴 어딘데!!"


소녀가 으르렁 대는 소리와 함께 내 머리를 타고 뜨거운 무언가가 흐르는것이 느껴지자 곧이어 나는 정신을 잃었다.

다행인점은 눈앞의 소녀는 내 소설 속 주인공이 맞다는 점이고 불행인 점은 나는 앞으로 3일간 기절해있을 것이란 사실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