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바야흐로 온 세계에 피바람이 불어닥치던 격동의 시대. 그러나 금박의 바람막이를 입은 우리의 왕궁만은 그 바람에 쓸려 날아가지 않았다. 휘황찬란한, 난공불락의 군주의 요새에는 위대한ㅡ그를 칭송하지 않는 자는 모두 죽었으므로ㅡ여왕 폐하만이 남아 고독을 즐기고 있었다. 충신 거울과 함께.


"나의 충신 거울이여, 나의 왕국이 어떠한가?" 여왕이 가늘게 뺀 목소리로 물었다.


거울은 속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유리 무더기를 떠올린다. 지난날 이 궁전에 기거하던 그 거울들이, 이제는 잿빛의 하늘만을 비추는 그곳. 그는 항상 두려웠다. 언제 그에게 무자비한 쇠망치가 다가올지 몰랐기 때문이다. 


"예, 폐하, 오늘도 폐하의 왕국은 위대하옵니다. 폐하의 미모와 위엄이 하늘로 치솟으며, 백성은 입을 모아 폐하를 칭송하고 있사옵니다." 거울은 마치 연극 배우처럼, 미리 쓰여진 각본을 읽듯이 여왕의 가려운 곳을 긁는다.


"아아, 참으로 위대하다! 나의 왕국이여! 천하가 나의 것이로구나!"

거만하게 황금 권좌에 등을 기대 앉은 여왕은 흡족하다는 듯이 고개를 치켜들고 소리쳤다. 여왕에게 비춰 보이는 것은, 저 화려한 기둥들과, 금박 천장과, 대리석 바닥뿐이었으므로, 더는 무엇도 신경쓰지 않았다. 이곳에는 백성들의 원성도 감히 뚫고 들어오지 못했다. 여왕은 스스로를 이 찬란한, 조상 대대로 물려오는 감옥에 유폐하였다. 먹을 것은 충분하다. 권신들과, 그의 충직한ㅡ유약한ㅡ백성들이 내는 돈은 여왕을 기쁘게 하는 데에 충분했다. 달리 무엇도 필요하지 않았으며, 무엇도 그녀는 찾아나서려고 들지 않았다. 걱정거리란 존재하지 않았다ㅡ단 한 명의 여성을 빼고.


백설.

여왕에게는 숨겨진 딸이 있었다. 젊은 여왕의 미모를 빼닮은 그녀의 피부는 백옥과도 같았다. 그리하여 모두가 그녀를 '백설'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백설이 커가며 어미를 닮아가는 와중, 그 어미는 옛날의 영예를 잃어가고 있었다. 늘어가는 잔주름, 굽어지는 등. 그의 근심은 곧 증오와 질투로 변해갔고, 결국 백설을 내치고야 말았다.


한순간에 미래의 독재자에서 요주의 인물로 전락한 백설. 왕궁의 방패에서 벗어난 그녀는 불어닥치는 피바람을 맞게 되었다. 붉은 바람, 피비린내에 그녀는 매혹되고 말았다. 곧 그녀의 머릿속에는 그 붉은 것만이 남게 되었다. 장바닥을 기며 배운 글을 가지고 그녀는 붉은 것을 쫓기 시작했다. 젊은이들, 가난한 백성을 투우꾼 앞의 소로 만든 그 책, 만 입에서 입으로 불리워지는 노래. 세계가 하나되어 부르짖는 그 이름. 코뮤니즘. 백설은 어미의 자리를 코뮤니즘으로 채웠고, '혁명가가 된 포악한 여왕의 딸'이라는 이름은 온 눈을 그녀에게로 모아들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칼을 빼들었다. 


붉은 기가 휘날리는 의회의 연단. 백설은 당차게 걸어갔다. 팔에 찬 핏빛 완장이 그녀의 눈처럼 흰 피부와는 대조를 이루었다. 민중은 그 대조에 눈멀고 긴장에 압도되었다. 백설이 연단을 주먹으로 한 번 치고 입을 열었다.

"들으시오! 인민들은 들으시오! 지금 우리는 혁명의 머릿돌을 놓으러 가려고 하오! 그 머릿돌은 저 폭압의 궁궐의 주추가 될 것이오! 인민이여, 우리는 수백 년을 포악한 군주의 폭정 속에 떨었지만, 이제 우리는 하나가 되었소! 코뮤니즘의 붉은 기 아래에 우리는 함께 섰소! 이제 우리가 행진하여 저 타락의 성을 허물고, 그 맹주를 효수하여 피로써 혁명을 이룩할 것이오! 인민이 주인이 되는 사회! 아무것도 아니었던 우리가 세상의 주인이 되리라!"


그녀는 일순, 무엇에 홀린 듯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인터내셔널을. 광분에 찬 인민은 눈물을 흘리며 함께 노래하였다. 이내 그들은 손에 쇠붙이를 든 채로 궁궐로 행진하였다. 광란에 휩싸인 대중 앞에 수천 병졸은 무용지물이었다. 그들은 닥치는 대로 쇠붙이를 휘두르며 온 세상을 붉은 빛으로 물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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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우매한 백성들이 폭동을 일으켰사옵니다ㅡ"

충신이 소리치기가 무섭게, 붉은 폭풍이 몰아닥쳤다. "압제자는 목을 내놓아라!" 분노한 백성의 떼가 소리치는 가운데, 여왕은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내군은 무얼 하느냐! 우두머리를 끌어내어 참하라!"

그러나 대답 대신 그녀의 발밑에 떨어진 것은 병졸의 머리였다. 그리고 여왕이 눈을 들자, 그곳에는 그녀의 딸이, 자기 손으로 내버렸던 후계자가 서 있었다.


"여왕. 아니, 어머니, 나를 기억합니까?" 백설은 이를 악물고 피를 토하듯이 물었다. 그녀의 피부가 발갛게 달아올라 팔에 찬 것과 같은 색이 되었다. 더는 그녀는 가련한 그의 딸이 아니었다. 이제 도로 그를 내치러 온 것이다. 여왕의 눈앞이 아찔해졌다.

"살려, 살려만 다오! 왕위도, 성도 주겠다! 원한다면 다시금 나의 후계자로 받아주마! 천하를 네 손에 넘기마!" 여왕은 손에 면류관을 받쳐든 채로 무릎까지 꿇고 엎디어 빌었다. 일전에 보이던 의기양양함은 온데간데 없었다. 천하는 더는 그의 손 안에 있지 않았다.


그의 손에서 무게가 느껴지지 않자, 여왕은 화색이 되어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여왕의 기대는 일순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챙강-하는 소리와 함께 권위가 내쳐졌다. 가문 대대의 절대 권력은 땅바닥에 구르고 있었다. 폭음이 허공을 뒤흔들자, 왕궁마저 붉은 피바람에 휩싸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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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장은 고뇌하고 있었다. 그토록 염원하던 혁명이 찾아왔고, 인민은 모두 평등하게 노동자가 되었다. 더는 소원이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곳, 혁명의 격전지에 들어와 그날을 곱씹자면, 그녀에게는 후회가 밀려오는 것이었다. 백동 왕관이 더없이 탐스러웠다. 황금 권좌는 정신을 빼어놓을 만큼 아름답고 아늑해 보였다.


순간, 어깨너머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은 가늘고 세찼다. 그녀의 등을 권좌 앞으로 떠밀고는, 그 후회를 조소하듯, 경멸하듯 '쉬익'하는 소리를 내고 이내 사라졌다.


서기장ㅡ왕녀ㅡ는 당차게 걸어갔다. 이번엔 붉은 색의 연단이 아닌, 황금의 권좌를 향해. 옛날 반동들은 광분한 인민들이 모두 깨어 버린 지 오래였으므로, 그녀는 가늘게 뺀 목소리로 충직한 심복을 불러냈다.


"제르칼로(зеркало, 거울) 동지, 나의 공화국이 어떠하오?"


눈을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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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에 문득 10월 혁명과 백설공주가 떠올라서 한 번 써봤습니다.

소설을 처음 쓰는 것이라 많이 미숙합니다. 사실 소설이라고 하기도 뭐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