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


보라빛 머리카락에 보라빛 눈동자.

9살 정도 되었을까.

또랑또랑한 눈이 특징인 이 여자아이는 맹렬히 고개를 저었다.


"그만."

"하지만 릴리야..."

"그으마안."


소녀의 완강한 거절은 양보라는 단어를 몰랐다.

아이의 뒤에 서 있던 여성은 시무룩해져서는 입술을 삐죽거릴 뿐이었다.


"왜 남의 머리로 장난질을 치려는 거에요."

"그냥 릴리 머리가 고우니까 매만져준 거 뿐인데..."

"전 싫단 말이에요."

"그러지 말고 한번만 해보자. 어?"

"싫어싫어싫어싫어싫어."


도리질에 마력을 담을 수 있었다면 그때의 아이는 바람 마법의 새로운 경지를 열었으리라.

아이의 도리질은 혁명적인 속도의 그것이었다.


"애초에..."


아이의, '릴리' 의 과거는 굳이 들추어볼 정도로 가치가 있는 물건은 아니었다.

릴리는 그저 흔한 독신 중년남성이었고 흔한 모험가였다.

그는 흔한 퀘스트를 수행하다가 흔한 던전에서 흔한 죽음을 맞이했다.

단지 그뿐이었다.


다만 그것은 전생의 일.

환생한 이번 생에서의 이 자는, '릴리' 는 한명의 어린 수녀일 뿐이었다.

'그' 는 '그녀' 가 되어 성별, 연령, 신분, 힘 그 어느 것도 이전과 똑같이 유지할 수 없었다.

얌전히 한명의 여아가 될 뿐이었다.


물론,

성격은 별개였다.


"애초에 다리털 덥수룩하게 났던 머스마가 세갈래 땋기를 왜 한다는 거야..."

"응 머스마? 성기사님 누구 오셨어?"

"아무것도 아니에요."


남자로서의 기억이 남아있어서였을까.

성정이나 기호 등의 문제에 있어서 릴리는

다른 여자아이들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독특한 취향을 지녔다.


"그런 '나 귀엽다' 어필 같은 행동은 못해먹겠단 말이에요."


교단에 몇 없는 어린 아이랍시고 귀여움 좀 받을라치면 곧잘 펼치던 그녀의 지론이었다.


어린 아이로서도 여자로서도

그녀는 썩 현생의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전생이 어쨌든 지금으로서는 그저 한명의 작고 귀여운 보라머리 여자아이인 자신을.
썩 받아들이지 못했다.


"본인이 싫다는 거 어쩌겠수. 냅두슈, 갸도 나이 좀 먹으면 낫겄지."


결국 뭇 어른들의 선택지는 둘중 하나가 되곤 했다.

시도를 계속하다가 실패에 지쳐 포기하거나

반복된 경험으로 그것을 예상하고 도중에 포기하거나.

어느 쪽이든 포기로 귀결되는 이 선택지는, 릴리로서는 불만이 없는 전개였다.




한가지 안타까운 것은

그녀가 한낱 인간이었다는 점이다.


하늘의 신이나 타락한 악마들과 달리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 육체의 불완전성에 기대 일생을 살아가기에

때로 작은 계기에 의해 변화를 겪기도 했다.


"으... 릴리."


릴리의 경우

그 계기라는 것이 다소 억울한 이유였지만 말이다.


"괜찮아?"

"아니 머리 아파..."


릴리에겐 같은 방을 쓰던 동료 수녀, 시아가 있었다.

둘은 어렸을 적부터 함께 자란 단짝 비스무리한 사이였다.


"스프는?"

"못 먹겠어. 입맛도 없고 자꾸 토해버려서."

"뭐라도 먹어야 낫지."


언젠가는 그 시아가 역병에 걸린 적이 있었다.

며칠간 정신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로 호되게 앓았다.

심하면 사망에까지 이를 수 있는 병이었기에, 릴리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으음... 피닉스의 알이 그렇게 맛있다던데..."

"... 농담할 기운이 남아있니?"


따끔하게 쏘아붙인 릴리의 면박에 시아는 헤헤 웃을 뿐이었다.


"... 비스킷."

"너 비스킷 진짜 좋아하는구나."

"맛있잖아."


아닌 게 아니라

외출증을 끊어서 밖으로 나갈 때도

시아가 제일 먼저 찾던 물건이 바로 비스킷이었다.


"주방에 가서 부탁해볼게."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릴리였지만

그녀도 막막했다.


당시 비스킷이라 하면 수도원의 몇 안 되는 사치품이었다.

역병 때문에 수도원에 환자가 한둘도 아니었는데 그렇게 쉽게 내줄 리가 없지 않겠는가.

비단 수녀들 뿐만이 아니라 교단 전체에 역병의 마수가 닿지 않은 자가 손에 꼽히던 실정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주방장의 반응은 단호했다.


"안 돼."

"시아가 많이 아파요..."

"안 돼. 요즘 다들 아프다."


달리 뭐라 더 하겠는가.

주방장은 일요일에 배급하는 것이나 기다리라는 말 뿐이었다.


하나

시아는 용태가 중했다.

일요일에 한두개 나올까말까한 것을 기다리라고 하기엔 미안할 만큼.


릴리는 아픈 친구의 부탁을 거절할 만큼 매몰차지는 않았다.

전생의 사나이 시절 때도 그랬고, 현생의 수녀로서도 그랬다.

어쩌면 죽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더욱 그러했다.


"어디... 가?"

"산책 갔다올게. 마저 자."

"한밤에...?"


고심 끝에 고른 방법은 서리였다.

그녀는 직접 주방까지 침입해 몰래 비스킷을 뺏어올 심산이었다.


말로 안 되면 강행돌파.

전생 시절부터 이어졌던 안 좋은 습관이었다.


"뭐야 껌이네."

'철컥'


처음에 그녀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전생 시절 익혀두었던 감각이 점차 돌아오고 있었기에.

그 손버릇이 점차 돌아오고 있었기에.


[은신] 스킬도, [열쇠따기] 스킬도

굳게 잠긴 문 앞에서 몇번 꼼지락거리자 금새 발동법이 다시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스탯이야 안 돌아온다지만 이 정도면 괜찮겠는데."


주방에서 부스럭거리며 비스킷 몇개를 주워담았다.

들키면 곤란했기에 티가 나게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결코 적은 양은 아니었다.


"시아가 좋아했으면 좋겠다."


웃움꽃이 만개할 시아를 상상하며 릴리는 훔친 비스킷을 입에 물었다.

기왕 훔친 거, 맛이라도 볼 심산에 한 일이었다.


나중에 릴리가 이때를 회상하며 한 말은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였다.


"어휴 추워라, 무슨 보초를 서라는 거야, 이 추위에... 도둑도 추워 달아나겠는데."

'덜컥'

"아."

"아."


릴리 또래 나이였을까.

어린 남자아이 한명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한손에 양초를 든 그 귀여운 소년은, 그 자리에 멈춰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

"어... 어어, 어..."

"못 본 걸로... 하지 않을래요?"

"어, 저기 그, 저도 그게... 여기 누구 도둑이라도 들지 않을까 싶어서 온, 거라서요..."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횡설수설 못하는 소년을 의심할 이 대화는

놀랍게도 소년이 추궁을 하는 입장이어야 했다.


릴리는 침착하게 머리를 굴렸다.

당황한 것은 소년도 마찬가지였다.

그녀 자신만이 아니었다.


"앗 그렇군요! 힘드시겠네요!"

"네...? 아 네, 다른 건 괜찮은데 추운 게 문제네요."

"성기사 출신이신가봐요? 갑옷이 멋지세요!"

"그, 그런가요? 전 아직 견습이긴 한데 헤헤..."


릴리의 선택은 소년을 혼란케 하는 것이었다.

소년은 쑥쓰러운 듯이 뒷머리를 긁었다.


"성기사님들 숙소면 여기서 거리가 조금 있지 않나요?"

"꽤 멀죠! 걸어서 30분 정도 걸려요!"

"거기서부터 음... 연애사업이라도 하러 오신거에요?"


릴리는 태연한 얼굴로 어린 기사의 주의를 돌렸다.

릴리가 가리킨 손가락 끝에는 수녀원이 있었다.

소년은 얼굴이 빨개져선 손을 내저었다.


"아니, 순찰이에요 순찰! 혹시 수상한 사람이 들지 않았을까 싶어서요!"

"우와 멋지세요!"

"헷... 그런가요?"


성기사 훈련이란 것은 철저히 동성들끼리만 부대끼는 활동이었다.

또래의 여자아이를 만난다는 것은 소년에게는 작지 않은 자극이었다.

자꾸만 부끄러워하며 맥을 못 추는 것도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릴리의 외모가 그 나이에 비해서는 이쁘장한 편이었던 것도 한몫했을 지도 모르겠다.


"여기만 돌면 끝인가요?"

"아니요 장원 쪽도 한바퀴 돌아야 한답니다."

"그렇군요. 그럼 수고하세요!"

"네 안녕히 주무... 어라?"


릴리의 화술에 이리저리 쓸려다니던 소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신을 차린 것이었다.


슬며시 돌아가려는 릴리의 팔을 붙들고 성기사는 물었다.


"저기... 혹시 여기 어떻게 들어오셨나요?"

"... 문 따고 들어왔죠."

"네?!"

"별 수 없네요."


후우 하고 릴리는 크게 한숨 쉬었다.


"이러기 싫었는데..."

"예? 뭐라고요?"


릴리는 그녀의 어리고 오밀조밀한 손을 얼굴에 대었다.

친구인 시아가 으레, 애교부릴 때 쓰던 자세였다.


"흐윽..."


결론만 놓고 말했을 때

그녀의 작고 은밀한 계획은 성공했다.


"으에엥 졔송해요! 비스킷이 너무 먹고 시퍼서요..."


무사귀환을 위해 팔자에도 없는 연기를 해야했지만

성공은 성공이었다.


"앞으로는 안 그럴 게오... 한번만 봐주세요!"


릴리 자신에게 있어서 처음 부려본 앙탈.

[모험가파티의 불여우 프리스트]

후일 뭇 동성들의 질투를 받은 여성은,

필히 이날이 탄생의 계기였을 것이다.


계절로 말하자면,

소년의 말마따나,

도둑도 추워서 제 발로 돌아갈 듯한

지독히 추운 겨울이었다.



*


ts물 채널 대회 출품작
일단은 여기다가도 백업해놓음
당시 마감시간에 딱 맞춰서 제출해서 진짜로 저 제목이었음...
ts챈 버전은 이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