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 ××일.

코가 삐뚤어지게 추운 겨울.
그리고 왕가의 행차가 있는 날.

백성들은 일찍부터 거리에 나와 몸을 땅에 바짝 대고 넙죽 엎드렸다. 고개를 들었다간 목이 날아갈 것이었기 때문이다. 호위 무사들은 눈에 불을 켜고 불순분자를 색출해내고 있었다. 마침내, 먼발치에서 팡파레가 울리고, 형형색색의 마차를 탄 왕과 그 일족이 모습을 드러냈다. 왕족의 옷은 더없이 찬란하게 빛났다. 그 시종들과 왼손잡이 마부의 투박한 옷과 대조를 이루어 거추장스럽게도 아름다웠다. 하늘에서도 거룩한 왕조를 축복하듯이 흰 눈발 대신에 폭탄이... 앗, 폭탄!?

투쾅—!

폭음이 울리자 천지가 흔들리고, 왕가의 가두행렬은 산산조각이 났다. 백성들은 혼비백산하여 그 자리에서 고개를 들고 지켜보는 가운데, 이번엔 호위무사들의 옆으로 폭탄이 하나 더 떨어졌다. 그리고, 그 앞 높은 탑에서 웬 책자들이 떨어지며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하늘에서 울렸다.

"인민들은 들으시오! 폭탄을 던진 것은 나, 리철만이오! 인민들이여, 왕가와 령주들의 착취 아래에서 우리는 살아왔으나, 이제 더는 저들의 폭정을 두고볼 수 없소! 그리하여 이제 나는 썩어빠진 저 압제자의 몸을 폭파하여 없애고, 인민을, 로동자 백성을 자유케 할 것이오! 저 성을 주추 하나 남기지 않고 모조리 허물어뜨릴 것이오! 이 땅의 저쪽 끝에서 다른 끝까지 붉은 기가 흩날리게 할 것이오!"

당황한 인민의 무리 중 하나가 큰 소리로 물었다. "붉은 기라니, 당신은 대체 어느 가문의 공자요? 가문이 아니면 어느 교단의 소속이오?" 그러자 하늘의 목소리는, 아니, 우리의 젊은 혁명가 리철만은 자신만만하게 답하였다. "코뮤니즘! 공산당이오!"

...

"오셨군요, 가련한 인간."

눈을 뜨니 웬 이상한 곳이었다. 난 분명 어제 총에 맞아... "죽었죠." 아차, 속마음을 또 입 밖으로 낸 모양이다. 눈 앞에는 웬 미모의 녀성이 서 있었다. "당신, 그 버릇 고치는 게 좋겠군요. 전생에서도 수령이라는 작자에게 그렇게 간언하다가 총에 맞아놓고선." 그랬다. 나는 얼마 전, 주체조선의 반동성을 조목조목 따지다가 총에 맞았다. 그리고 눈을 뜨니 이곳에 끌려왔다. 그런데 저 녀자, 나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다. 나는 궁금증을 풀기 위하여 불쑥 말을 꺼냈다. "당신은 누구인데 나에 대해 이리 잘 아는 기요? 남조선에서 보낸 공작원인가? 하나 말해두지. 나는 주체사상이라는 헛소리만큼 자본주의도 싫소. 전향은 꿈도 꾸지 말라구."

녀성은 손을 내저으며 일장연설을 시작했다. 자기는 이 천지를 다스리는 녀신이고, 악인에게 당하여 불쌍하게 죽어 버린 내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주고자 이곳에 불렀단다. 나는 코웃음을 쳤다. "이것 봐, 지금 맑스주의자인 나더러 그 따위 망발을 믿으라는 게요? 녀신 따윈 없다. 그것은 봉건제의 착취계급이 노예 대중을 구슬리기 위하여 만들어낸 아편임을 모른단 말요?" 그러자 녀성은 미소를 띠며 반박했다. "후후, 내가 다른 세계로 당신을 보내면 내 말을 믿을 건가요? 그 세계는 왕과 령주가 다스리는 세계, 그러나 마왕의 핍박으로 백성들은 불안에 떨고..."

"그만," 나는 듣다 못해 이 자칭 녀신의 말을 끊고 윽박질렀다. "지금 날 봉건령주의 압제 하로 보내겠단 말요! 녀신이 어쩌니 하더니 역시 로동자의 적들과 한패였어! 내가 순순히 봉건지주의 개가 될 줄 알구? 꿈도 꾸지 마시오!" 그러자 녀신은 안색이 파랗게 되어 흥정을 시작했다. "아, 그러지 말고! 당신이 원하는 것을 주겠어요! 돈, 보검, 체력, 마법, 뭐든지!" 그러자 뇌리에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혁명! 저 리세계는 아직도 로동착취 계급이 득세하는 봉건사회, 그렇다면 저 세계에 나의 이상을 관철할 수도 있을 터이다! 그러자 원하는 것이 술술 나왔다. "공산당선언, 붉은 천, 그리고 폭탄." 녀신이 되물었다. "폭탄? 당신 설마..."

"맞아. 인민과 함께 압제자를 짓부시고, 코뮤니즘 공화국을 선포할 게요." 나의 요구와는 정반대로, 녀신의 얼굴이 더욱 파랗게 되었다. "제발, 오늘은 왕가 행차가 있는 날이란 말야! 당신이 미치지 않고서야..." 그렇다, 난 미쳤다. 맑스에게 미쳤고, 레닌에게 미쳤다. 코뮤니즘에 미쳤다. 세력을 어떻게 불릴까 고뇌했는데, 이젠 그 모든 고뇌가 필요없어졌다. 왕가의 행차라니! 이렇게 만사가 다 풀리다니! 그것도 나 리철만이 죽고 나서! 고맙다, 인민의 아편! 맑스주의 만만세! 나는 흥분하여 녀신을 부둥켜안고 소리쳤다. "자, 그럼 갑시다! 혁명을 향하여! 반동의 가두행진이 제일 잘 보이는 탑으로!" 녀신의 비명소리가 귀를 찌르는 가운데, 마침내 눈앞에는 장래의 지상락원이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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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필이 와서 웹소설 느낌으로 '재미를 위해' 썼습니다. 

제목도 그렇고, 내용에서도 '이 멋진 세계에 축복을'에서 패러디 및 오마주한 부분이 있습니다.

저 이상한 사람 아닙니다. 저는 공산당이 싫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