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는걸 이해할 수 없었다. 주변에서 여자친구를 사귀거나 여사친들을 만났을 때 나는 그들이 왜 서로에게 묶여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 나는 여자라는 존재와 관계가 없을 줄 알았다. 그 여자를 만나기 전까진 말이다.


그녀를 만난건 헌팅 포차에서였다. 친구들의 권유 반, 또는 사랑을 알고싶다는 호기심 반으로 꾸준히 가 봤지만 곧이어 나는 후회했다. 시끄럽고 요란스러운 남녀들의 잡담은 불편하기만 했다. 결국 나는 포차 구석 자리에서 술이나 홀짝이며 친구들의 뒷모습을 부러운 듯이 쳐다봤다. 


아무도 오지 않는 자리였기에 대충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왠걸 몇 분 뒤 한 여자가 이쪽으로 천천히 다가오는게 보였다. 


단발 머리에 양복을 입은 모양새로 미루어보아 직장인인 줄 알았다. 퇴근을하고 즐기러 이곳에 온 줄 알았지만 왠지 그녀의 얼굴은 한 없이 차갑기만 했다. 


"혹시 여기 계속 앉아계실건가요?"


여자는 내 반대편 자리를 보며 넌지시 말했다. 그러고보니 작은 헌팅 포차라 다른 곳에는 이미 사람 무리가 꽉꽉 차있었다. 눈치로 미루어보아 혼자 있고 싶은듯했다. 


"아뇨 이제 나갈거에요."


내가 자리를 양보하니 그녀는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더니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나는 멀리서 그녀의 모습을 보았다. 


신기하게 두 잔의 술잔을 놓아둔 채 나머지 한 잔에 소주를 따라마셨다. 얼굴은 반반하게 생겼는데 일행도 없어보였다. 왜 그녀가 그런 기이한 행동을 보이는지 강한 호기심이 떠올랐다. 


나는 카운터에서 안주 하나를 시켜 그녀가 앉아 있는 테이블 앞에 놓았다.


"다시 생각해보니 저도 조용히 있고 싶은데 반대편에 앉아도 될까요?"


그녀는 흠칫 놀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이내 괘념치 않다는 듯 앉은 자리로부터 대각선 자리를 가리켰다.


"네."


내가 시켜준 안주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그녀는 멍하니 창 너머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 신비로운 분위기에 나는 빨려가듯 그 시선을 따라 눈길을 돌렸다. 지나가는 차들과 가로등 불빛, 반짝이는 네온 사인만이 밤거리를 가득 채울 뿐이었다. 그녀는 그 분위기를 안주삼아 술을 홀짝이는 것 같았다.


"혹시 그쪽 억지로 끌려나오셨나요?"


그때 여자가 먼저 내게 말을 걸어왔다. 방금전 그 쌀쌀한 표정이 심장을 꿰뚫는 듯했다.


"네?"

"여자에 관심 없냐는 뜻이에요."

"네? 아 뭐 그런 셈이죠."

"그렇구나."


여자는 낮게 읊조렸다. 그 모습이 왠지 묘한 동질감을 불러일으켰다.


"근데 왜 저한테 말 걸으신거죠?"

"네? 아... 그 소주잔 때문에?"


내가 나머지 소주잔을 가리키자 그녀는 짧게 말을 내뱉었다.


"아, 남자친구를 기다리는 중이라."

"그렇군요."


남자친구를 헌팅포차에서 혼자 기다리는 여자에 대해 은근한 호기심이 떠오르다가도 이내 그냥 고개를 돌렸다. 모든 호기심은 풀렸으니까 더는 용건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준 안주를 집어먹으며 말을 이어갔다.


"혹시 저한테 관심 있으세요?"

"아뇨. 진짜 소주잔에만 정신이 팔려있어서."

"혹시 게이세요?"


나는 흠칫 놀랐다. 첫만남에 다짜고짜 동성애자냐고 물어보는 여자는 내 생애 처음이었다. 


"아뇨, 근데 굳이 따지자면 맞을 수도 있네요."

"정말이세요?"


여자는 피식 웃었다. 아까까지 차가운 눈을 하던 그녀가 갑자기 웃음을 지으니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사실 저는 누구에게 호감이란걸 품은 적이 없어서요."

"흐으음, 그럼 무성애자?"

"그럴 수도 있겠네요."

"역시 제 눈은 틀리지 않았네요."

"네?"


그러더니 그녀는 내게 나머지 빈 술잔을 건넸다. 


"같이 술한잔 마실래요?"

"아까 남자친구 있으시다고 하시지 않으셨나요?"

"거짓말이에요."


순간 뒷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배신감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 내게 그녀는 술잔 가득 소주를 따라주었다.


"왜 저한테..."

"사실 아까부터 보고있었거든요. 뭔가 저랑 같은 눈을 하고 있으셔서 뭔가 닮은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어요."

"그렇군요."


그럼 처음부터 내게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말인가. 근데 왜 갑자기 나한테 접근했는가. 여자에 대한 인식은 점점 헷갈려만 갔다. 


"사실 저번에 이 앞을 지나면서 한 번 봤어요. 항상 멍하니 앉아 있는 모습이 마음에 걸리더라구요."

"왜 굳이 저한테?"

"글쎼? 감?"


감이라고는 말했지만 그녀의 표정에는 확신이 있었다. 그 당당한 태도가 나와 비교되었다.


"용건은 없어요. 그냥 한 번 둘러본거 뿐이에요. 같이 술이나 마시죠."


여자는 술잔을 넘겼다. 그 잔을 나는 받아 마시고 또 마셨다.


"무성애자라는 거 사실이에요?"

"네. 아마도 그럴 거에요."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못 찾은 건 아니고?"

"글쎄요. 전 말이죠. 사랑이란걸 잘 모르겠어요."

"그래요?"


이 이야기에는 취기가 필요할 듯 했다.


어렸을 적에도 어머니와 아버지가 사랑의 결실로 내가 태어났다는 것, 주변 사람들의 연애사, 그리고 내게 다가온 여자들.


그런 얘기를 하다보니 시간은 어느새 한 시간을 지나고 있었다. 


"그러니까. 사랑을 이해하기 힘들다는 거죠?"

"맞아요."

"왜 그런거 같아요?"

"글쎄요. 사랑이란건 뭔가 불합리한 구조잖아요? 서로가 서로에게 악영향을 주는 것도 사랑이라는 이름아래 정당화하고 그런게 싫었나봐요."

"흐음 그렇구나."


여자는 술잔을 돌리며 넌지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전 그쪽이 마음에 드는데."

"인간적으로요?"

"이해가 안 되나 보네요."

"그럴지도요."


나는 피식 웃었다.


어느새 그녀와의 대화는 무르익어만 갔다. 


"나이를 먹다보니 저도 사랑에 대해 회의감이 들더라구요. 더이상 순수한 사랑이란건 존재하지 않는게 아닐까 늘 고민해요."

"그럴 수도 있죠."

"그치만 아직도 이렇게 떨리는거보면 저도 참 바보일지도 몰라요."

"제가 좋나요?"

"네."

"단도직입적이네요."

"사실 이렇게까지 말 안하려고 했어요."

 

그녀는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안주 잘 먹었어요. 얘기 고마웠어요. 언젠간 다시 만날 날이 있을까요?"

"없을거에요."

"후훗. 그래요. 잘 있어요. 나의 어린 왕자."


그녀는 자리를 떠났다. 나는 멍하니 그녀가 떠나간 자리를 바라봤다.


어린 왕자라.


그녀의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몰랐지만 나는 마음 한속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