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쁜 일 끝난 김에 연습해볼 겸 써봄


밝은 보름달이 풀밭을 은빛으로 물들였다. 바람이 구릉을 뒤덮은 긴 풀을 쓸어내리며 싱그러운 소리를 내었고 간간이 귀뚜라미 소리가 들리며 싱그러움에 느낌을 더했다. 그리고 말이 푸르릉 하며 콧김을 내뿜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센은 멍해졌던 정신을 차리며 자신의 말을 내려다보았다. 약간 불안한 듯 고개를 비틀며 콧김을 내뿜는 말을 그는 왼손으로 쓰다듬으며 천천히 달래었다.


아이센은 시간이 있을 때 다시 한번 장구를 점검해 보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길레인 아멘가드 경이 지휘하는 제12 중기병 카드레의 기병 90여 기는 느슨한 대열을 이룬 채 신호가 있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 신호가 금방 오를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6개월을 넘긴 전쟁은 아이센이 가진 것들에 큰 영향을 끼쳤다. 흉갑은 곳곳이 긁히고 우그러진 흔적들로 가득했고 왼쪽 견갑을 흉갑과 이어주던 가죽끈은 끊어져서 철사와 노끈이 이를 대신하고 있었다. 사슬을 엮어넣은 누비갑옷은 아랫단이 해어져 사슬이 드러나 있었고 곳곳이 뜯어져 기운 자국으로 가득했다. 외양은 어쩔 수 없었으나 아직까지 목숨을 지키는 데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아마 이번에도 그래줄 것 같다는 막연한 추측을 할 때쯤 뭔가가 아이센의 시선을 끌었다.


초원 저편에 불그스름한 불빛이 나타났다. 횃불이었다. 곧바로 아멘가드 경의 지시가 떨어졌고 기병들은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느슨하게 흩어져있던 대열이 빠르게 좁아졌고 대열의 앞 두 열은 각자 쥔 랜스를 세워들었다. 아이센도 발등에 끄트머리를 얹어 어깨에 기댄 랜스를 차올려 세워들었다. 갑작스런 움직임에 말들이 흥분해 콧김을 내뿜기 시작했다.


가장 가까운 횃불이 300미터까지 다가왔다. 횃불을 든 병사의 모습이 보일 정도의 거리였다. 아주 좋은 돌격 기회가 찾아온 듯 했지만 아직까지 신호라고 할 만한 게 보이지는 않았다. 아이센이 기회를 놓칠까봐 불안해지기 시작할 때였다. 전진하던 횃불들이 서서히 멈춰섰다. 몇 명이 소리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멘가드 경이 다급하게 외쳤다.


"젠장, 돌격해! 발각당했다! 중간 속도로!"


아이센은 명령에 무의식적으로 반응했다. 카드레가 급작스럽게 전진하며 대열이 출렁였다. 말들이 속보로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머리 위로 화살이 쏟아져내리기 시작했다.



머릿속이 순간 복잡해졌다. 어떻게 적이 매복 위치를 알았는지에 대한 생각이 자꾸만 맴돌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아이센은 그 번잡한 생각을 떨쳐냈다. 어차피 지금 달리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웠다. 화살이 투구와 흉갑에 부딪히며 충격이 몸을 흔들었다. 화살 몇 발이 말들을 맞추며 고통섞인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센 옆에서 전진하던 동료의 말이 화살 5발째에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다. 나동그라진 그는 발버둥치는 말과 뒤의 아군에게 깔리지 않기 위해 옆으로 굴렀고 다른 기병이 그 자리를 채우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몇 마리의 말이 더 쓰러지고 한 운 나쁜 병사가 눈에 화살을 맞고 쓰러진 뒤 카드레는 50미터에 도달했다. 누구의 지시도 없었지만 기병들은 일제히 말에 박차를 가했다. 돌격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고 앞쪽 두 열의 기병들이 일제히 랜스를 앞을 향해 겨눴다. 아이센은 궁병들이 물러나며 그 자리를 창병들이 채우는 것을 보았다. 아직 진형이 온전히 갖춰지지 않아 어수선해 보였다.


잘만 하면 돌파할 수 있어 보였다. 그리고 그 생각과 동시에 아멘가드 경의 목소리가 쩌렁거렸다.


"최대 속도로! 그대로 뚫고 지나간다!"


말들이 푸르륵거리며 속도를 더 올렸다. 대열이 흐트러지기 시작했고 아이센은 창을 내민 채 상체를 숙여 말 등에 최대한 붙였다. 적 보병들이 순식간에 지척으로 다가왔고 다음 순간 아이센의 어깨에 기분 좋게 묵직한 충격이 느껴졌다.


말에 들이받힌 자는 저 멀리 튕겨나가 일어나지 못했다. 그보다 불운한 자들은 순식간에 끔찍한 소음과 함께 말발굽 아래로 사라졌다. 한 병사는 아이센의 말을 노리고 창을 내밀다가 그대로 랜스에 꿰였다. 순식간에 꼬치가 된 그 시신은 얼마간 끌려가다 몸뚱이가 길게 찢어지며 랜스에서 뽑혀나왔다. 적 두 명이 창으로 말의 목을 찔러 중기병 하나를 거꾸러트렸다. 곧바로 넘어진 기수에게 달려들던 그들은 뒤따르던 기병들에게 목을 베이고 머리가 터졌다. 피와 뇌수가 사방으로 튀었다.


카드레는 적진을 빠져나와서 잠시 달린 뒤에야 멈춰서 진열을 가다듬었다. 언뜻 보아 열 명 정도가 사라져 있었다. 아멘가드 경은 흥분한 기병들을 진정시키고 다시 대열을 이루게 만드려고 노력했다. 어수선한 사이 아이센의 귀에 달리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6개월 동안 살아남은 아이센은 이 소리가 어떤 때 들리는지 알고 있었다.


"적 중기병대다! 놈들이 따라붙었다!"


가까이서 아이센의 목소리를 들은 이들이 반응했고 각자 무기를 꼬나쥔 채 발굽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의 반응은 약간 늦었다.


가장 먼저 아멘가드 경이 배갑과 뒷목에 랜스를 맞으며 말 아래로 떨어졌다. 검은 강철의 물결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빽빽한 대열을 이룬 채 랜스를 내밀고 달려든 기사들은 준비되지 않은 아군 기병들을 무자비하게 꿰찔렀다. 그 검은 갑옷들 위에 붉은 독수리 휘장이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