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이렇게 될 운명이였다는건가?”


남자는 성벽 위에 우뚝 서서 불타는 요새를 내려다보았다. 함성과 비명, 폭음은 귀를 멍멍하게 먹어들어오고 있었다. 남자는 그의 옆에서 가만히 그를 지켜보고있던 자에게 다가가며 거칠게 멱살을 쥐어들며 소리쳤다.


“네놈은 알고 있었겠지! 빌어먹을 예언자니까. 왜 말하지 않았지? 어쨰서!”


“각하. 일단 놔주십시오.”


남자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멱살을 놓고 예언자를 밀쳤다.

한 걸음, 두 걸음. 뒤로 물러선 예언자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의 눈에는 분노가 이글거리며 타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예언자는 분노를 보고 있지 않았다. 분노보다 더 깊숙한 곳에서는 절망과 슬픔이 굽이치고 있었다.


“내 동지들을 살릴 방법이라도 알려다오.”


예언자는 남자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증오를 꺾고 남자는 그에게 부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예언자는 당황하지 않았다. 이미 알고있었던 사실이였기에.

예언자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미 늦었습니다. 지금 저 아래에 있는 자들은 각하를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각하의 목숨을 위해 싸우고 있죠. 성문이 열리고 왕국의 근위군이 들이닥친 순간 각하의 모든 희망은 끝났습니다. 목숨이라도 부지하십시오.”


“헛소리…마! 너는 예언자잖아. 방법을 알고 있지? 모두를 살릴 방법을!”


“예언자를 과신해서는 안됩니다. 저희는 낙엽의 떨어짐에서 산사태를 보고, 나비의 날개짓에서 들이닥치는 폭풍을 봅니다. 각하. 정해진 미래를 바꿀 수 없습니다. 미래를 바꾸려는 시도마저, 이미 그 미래로 향하는 하나의 궤이니까요. 각하. 이 실패와 당신을 따르는 이들의 죽음은 이미 정해져 있던 사실입니다. 예정된 미래요, 운명입니다.”


차분히 내려지는 예언자의 선고는 남자의 분노를 잠재우고 그 속의 절망과 슬픔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남자가 다시 말하려 하자, 예언자는 손을 들어 남자를 막고는 다시 말했다.


“네. 저는 이렇게 될 운명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꾸려하지 않았습니다. 어째서 그러했느냐 묻지 마십시오. 그건 저도 대답할 수 없으니. 달이 지면 해가 뜨는것과 바람이 불면 파도가 쳐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저희는 감히 미래를 바꾸려 들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군요.”


예언자는 남자를 쓸쓸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남자가 예언자의 눈을 바라본 순간, 남자는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전장의 소음도, 시야 너머에서 타오르는 불길도, 성벽 위를 매섭게 불어닥치는 겨울의 추운 바람도 느껴지지 않았다.


“각하. 원래대로라면 저는 각하에게 권토중래 하시라 말씀드렸을 겁니다. 남쪽의 샤라스 군도로 가서, 왕국의 지배를 납득하지 못하는 유지들을 끌어모아 새로운 세력을 만들어 다시 한 번 기회를 노리라 말씀드렸을 겁니다. 

그렇다면 각하께서는 샤라스 군도에서 복수의 칼날을 갈다가 배신당하셨겠지요. 그렇게 스러지셨겠지요. 저는 제가 그렇게 말씀드렸어야 함을 압니다. 

하지만 지금, 어떤 바람이 불고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저는 이제 더 이상 제 운명에 묶여있지 않군요. 그러니 말씀드리겠습니다. 운명을 벗어난 사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예언자는 손을 들어 성벽 너머를 가리켰다. 남자는 예언자의 손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북쪽이였다. 남자가 다시 예언자를 쳐다보자 예언자는 말했다.


“황무지로 가십시오. 그것만이 제가 각하에게 드릴 답입니다. 황무지로 가십시오. 괴물들의 땅으로. 사냥꾼이 춤추는 대지로. 8개 자유도시가 지배하는 곳으로.

그 곳에서 새로운 운명을 찾으십시오.”


===================================

예전에 쓰던걸 좀 손봤습니다.


https://arca.live/b/writingnovel?target=all&keyword=황무지%2C+사냥꾼%2C+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