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히 여느때와 크게 다를 것 없던 하루의 시작이였다.


창문을 통해 드리워진 햇살이 잠을 꺠웠고, 간밤에 함정으로부터 이어놓은 인계선 중 하나가 작동되어 거실 한켠에 세워둔 나무토막을 쓰러트려놓았었다.

함정에 걸린 괴물을  죽이고, 가죽과 이빨과 발톱을 파는 게 이 외떨어진 곳에 사는 그의 주된 수입원. 자유도시가 지척인 이 근방에는 사냥꾼이나 기사들이 나타나 사냥할 만큼의 거대하거나 가치있는 괴물은 없었다. 여기에 사는 괴물이라봐야 가장 흔한 종류인 늑대괴물, 바르그나 시체파먹는 괴물인 구울 정도.


하지만 작동된 함정을 찾아 수풀을 헤쳐나간 그의 눈 앞에 보이는 건 여느때와는 달랐다.


"뭐야...?"


"보면 모르나요? 풀어줘요."


그가 만들어놓은 함정에는 괴물 대신, 발목에 몇겹을 꼬아 만든 밧줄을 달고 거꾸로 매달린 채, 한 젊은 인간 여자가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얼마나 매달려 있었는지, 얼굴은 붉은색을 넘어 보랏빛에 가까워져 있었다.

그는 기가 차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러곤 팔짱을 끼며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여자를 훑어보았다.

그리핀의 털가죽으로 만든 망토에 동굴에 사는 혈거룡, 너커의 가죽을 끓여 만든 갑옷. 키는 170정도. 그 밑에는 2m쯤은 되어보이는 철창이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여자의 복장 또한 그리 특이할 게 없었다. 전형적인 사냥꾼의 복식. 하지만 그의 눈길이 향하는 곳은 여자의 갑옷이나 복장이 아니였다. 에와라닐은 여자의 얼굴을 흥미롭게 쳐다보았다.

은발. 그리고 자안. 은발의 머리카락도, 자줏빛 눈동자도 모두 이 황무지에서, 아니. 지금껏 살아오면서 모두 처음 보는 색깔이였다.


"사냥꾼인가?"


"그러면 그쪽은 트루드인가?... 당연한 소리는 됐으니, 풀어줘요. 이제 슬슬 머리가 좀 아파오는거같은데. 다리에도 감각이 없는 것 같고."


남자의 물음에 여자는 비꼬듯이 그의 말투를 따라하며 성난 목소리로 답했다. 남자는 기찬 헛웃음을 날렸다. 아무리 황무지에서 타지의 법도나 계급이 적용되지 않는다 해도, 감히 트루드에게 함부로 구는 인간은 없었다. 거기다가 함정에 걸린 처지라면 더더욱.

남자는 잠시 풀어줄 지 말 지에 대한 고약한 상상을 했다. 이대로 두고 가더라도 크게 문제될 건 없어 보였다. 오히려 괴물들을 끌어들여 더 많은 괴물을 사냥할 수 있게 해줄지도. 그런 그의 생각을 눈치첐는지, 여자는 더 크게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남자는 생각을 그만두고 사냥꾼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고 품 속에서 단검을 꺼내 사냥꾼을 매달고있는 밧줄을 잘랐다.


쿵 하며, 사냥꾼이 땅으로 떨어지는 소리와 약간의 비명이 같이 들렸다. 사냥꾼이 꿈틀대며 몸을 일으키는 사이, 그는 떨어진 창으로 다가가 주워들었다. 창대마저 강철로 만들어졌지만 기묘하게도 가벼운 느낌이 들었다. 그는 몇번 공중에 창을 휘두르다가 몸을 돌렸다. 

한 손은 이마를, 다른 한 손은 함정에 걸렸던 발목을  감싸쥔 채, 눈을 게슴츠레 뜨고 사냥꾼이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좋은 창이군. 황무지의 대장장이들이 만들만한 물건은 아닌데. 여제의 대장장이가 만든 창인가?"


남자는 창을 들어보이며 말했다. 여자는 눈에 경계심을 가득 담은 채로 대답했다.


"제 어머니께 받은 물건이죠."


"그렇군. 사실, 놀랐네. 자네가 걸린 덫은 괴물을 잡으려고 쳐놓은 게 아니라, 들짐승을 잡으려고 쳐놓은 것이였거든. 그런  덫에 걸리는 사냥꾼이 있을줄은 상상도 못해봤어서."


"지금 보시게 되다니. 영광이시겠군요."


남자는 여자의 말에 코웃음쳤다. 예의없고, 실력마저 부족한 사냥꾼이라. 남자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사냥꾼이 맞는지 의심이 되기는 하는 실력이군. 혹시, 하발란드를 찾아가는 거라면 여기서 북쪽으로 올라가게. 해의 반대방향으로 걸으면 될거야."


"아뇨. 하발란드는 관심없어요. 그것보다, 당신. 에와라닐 맞죠? 피투성이 검사 에와라닐?"


그는 잠깐 흠칫했다. 자신이 누군지를 알고 찾아온 이가 얼마만인지. 5년만인가?

허나, 자신이 누군지를 알고 찾아왔던 사람 중에 반가웠던 사람은 없었다. 아니, 자신이 누군지 알고 찾아왔던 사람 중에 그에게 위험하지 않았던 사람은 없었다.


"그래. 내가 에와라닐이네. 그... 피투성이 검사같은 건 누구한테 들은 소리지?"


에와라닐이 약간 인상을 쓰며 되물었다. 하지만 사냥꾼은 일어나 가슴팍을 탁탁 털면서 그의 질문을 무시하고 말했다.


"저는 엘로스 니아젤. 보시다시피, 사냥꾼이죠. 엘로니아라고 불러요."


에와라닐은 그의 얕은 턱수염을 살살 매만졌다. 그보다 세뼘은 더 작아보이는 당돌한 사냥꾼에게 무어라 대답해야 할 지 감이 오지 않았다. 에와라닐이 잠시 말을 않고 있자, 엘로니아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뭐. 악수라도 하자고?"


"줘요. 그 창."


뭔가 말려드는 기분이였다. 보통 트루드에게 이렇게나 예의없게 구는 인간은, 특히 황무지라면 절대 심신이 멀쩡한 상태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들고있던 창을 곱게 엘로니아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자. 이제 뭐 때문에 날 찾아왔는지는 몰라도, 나는 관심 없네. 마을은 여기서 동쪽에 있으니 해 보면서 걸어가고. 해 지기 전에는 마을에 도착하는 게 좋을걸세. 여기가 깊은 숲같이 위험한 지역은 아니지만 그래도 바르그 정도 되는 괴물들은 득실거리는 땅이거든."


뭔지는 몰라도, 그리고 무엇을 요구할지는 몰라도 그냥 말을 꺼내거나 요구하기 전에 무시하면 그만이였다. 


"저기, 잠깐만요!"


엘로니아가 소리쳤지만 그는 손을 휘휘 저으며 몸을 돌려 다시 그의 집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귀찮은 일에 휘말리는 건 질색이였다. 특히나 사냥꾼의 일이라면.

그가 걷기 시작하자 엘로니아는 창을 집어들고 한동안 매달려있어 제대로 말을 듣지 않는 다리를 이끌면서 절뚝 절뚝 그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제 말 좀 들어봐요. 저기요!"


"따라오지 말게. 다치니까."


에와라닐은 이리저리 방향을 휙휙 틀며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따라잡기 위해서는 거의 달려야 했지만, 엘로니아는 그를 집요하게 따라왔다.

에와라닐은 계속해서 걷다가 거대한 아름드리 나무 앞에서 몸을 홱 틀고는 제자리에 멈춰섰다. 에와라닐의 거의 한발짝 뒤까지 따라오며 달리던 엘로니아는 미처 멈추지 못하고 그를 지나쳐가더니, 이윽고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몇 번 구르고, 부딪히는 소리.  마지막에는 땅에 떨어지는 쿵 소리가 났다. 깊게 파놓은 함정이였지만 에와라닐은 엘로니아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녀가 말한 대로라면, 그래도 사이킥을 다루는 자. 선택받은 자 중 하나인 사냥꾼이니까. 아니였다면 어쩔 수 없고.


"아니 무슨 함정을 이렇게 많이 파놨어!"


족히 수직으로 6m는 넘게 파인 깊은 구덩이 아래에서 엘로니아는 소리질렀다. 에와라닐은 함정으로 다가가 주저앉아있는 엘로니아를 쳐다보며 에와라닐은 바로 위에 뻗어나온 나무의 가지에 잘 펼쳐진 그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도, 그건 괴물을 잡으려고 파놓은 함정이긴 하네. 너무 자존심 상해하지는 말고. 자, 위를 보면 알겠지만 그물이 있네. 뛰어넘어서 탈출하려 하면 또다른 덫에 걸릴 뿐이야. 벽을 기어올라 탈출하는 걸 추천하지. 여기서 나오면, 무엇 때문에 나를 찾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에 대해선 깨끗이 잊고. 알았지?"


"이봐요! 잠깐만 제 말좀 들어봐요. 저기요!"


에와라닐은 엘로니아의 간절한 부름에도 손을 한 번 흔들고는 그대로 집으로 향했다. 

다행스럽게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더이상의 방해가 없었다. 포기한 건지, 아직 함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집에 돌아와 주전자에 물과 불을 올리고 삐걱이는 안락 의자 위에 앉았다.

황무지에 온 지가 벌써 7년째였다. 그리고 이곳에 정착한지는 5년. 이런 생활에는 익숙해져있었다. 그리고 이런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다.

방금과 같은 예상치 못한 불청객을 제외하면. 


의자에 길게 앉아서 잠시 눈을 감고 있자, 주전자의 물이 끓으며 칙칙거리는 수증기를 내뿜었다. 에와라닐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전자를 들어 끓는 물을 빈 그릇에 옮겨담았다. 그리고는 찻잎을 담아놓은 통과 차숟가락을 미리 탁상에 두었던 찻잔 받침위에 올려놓았다. 

찻주전자와 개수그릇까지 올려 놓고, 에와라닐은 끓는 물을 둔 그릇에 잠시 손을 가져다댔다가 뗐다. 찻잎을 우리기엔 아직 물이 뜨거웠다. 물이 식기를 기다리는 사이, 에와라닐은 창문으로 다가가 밖을 보았다. 오늘의 그 불청객은 어떤 연유로 찾아온 것일까.

내쫒아내긴 했어도 찾아온 목적을 추측하는 것은 찻물이 식는 시간을 낭비하기에는 충분했다.


고향에서 나를 암살하러 온 암살자? 너무 허술했다. 밤 손님이 찾아오지 않았던 적이 없는건 아니였지만, 암살자라면 이런 대낮에, 그것도 대놓고 다가오면서 함정에 걸리지는 않을 것이였다.

그렇다면 위험한 괴물을 사냥하기 위해 포섭하러 온 사냥꾼?

그것도 이상했다. 한 때, 사냥을 했던 적이 있었지만 이미 사냥에서 손을 뗀 지 5년째였다.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자유도시, 하발란드에는 도와줄만한 사냥꾼이 차고 넘칠텐데 굳이 찾아올 이유는 없었다.

그럼 어떤 이유에서 그를 찾아온 것일까?


그는 거기까지 생각하고 헛웃음을 한번 짓고는 몸을 돌렸다. 다 쓸모없는 생각들이였다. 어찌 됐건간에, 그를 찾아온 이는 쫒아내었으니까, 다시 어제와 같은 시간을 보내면 될 것이였다. 그는 살짝 콧노래를 부르며 손을 머리 뒤로 가져다 댔다.


쿵. 쿵. 쿵.


물이 식는 잠깐의 평화를 깨고 창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하는 생각과 함께 에와라닐은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리자, 방금까지 그가 서 있던 창가의 창문 너머로 흙투성이 손으로 창문에 손자국을 새기고 있는 엘로니아가 보였다.


에와라닐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생각보다 더 집요한 사냥꾼이였다. 그는 다시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열었다.


"들어오게. 마침 차를 끓이고 있던 중이였으니, 천천히 한 잔 마시지. 아니, 창문으로 들어오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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