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례에 대해서는 배운적이 없나 보군?"


에와라닐은 차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앞으로 흘러내려 차를 마시려드는 머리카락을 대충 귀 뒤로 쓸어넘긴 채, 엘로니아는 그저 어깨를 으쓱 하며 차를 홀짝일 뿐이였다..

에와라닐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이 사냥꾼을 만나고 나서 몇번의 한숨을 내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찾아온 이유 정도는 들어봐줘야겠지. 뭔가?"


엘로니아는 눈을 감았다. 그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다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저희 어머니는 사냥꾼이에요."


대를 이어 사냥꾼이 되는 것은 그리 놀라운 것이 아니였다. 그가 서 있는 땅. 사르가바룬 대륙의 중부 황무지에서 마나를 쓰는 자들은 크게 두 부류였다. 괴물을 사냥하는 사냥꾼, 그리고 기사.

그리고 사이킥을, 현실을 직조할 수 있는 힘을 쓸 수 있는 자들인 선택받은 자들은 피를 이어 나타나니까.


"놀라운 사실은 아닌 것 같군. 그리고 네 어머니의 직업과 나와의 관련성을 엮기도 힘들어 보이고."


에와라닐이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에와라닐의 시큰둥한 반응에도 엘로니아는 별다른 반응 없이 말을 그대로 이었다.


"저희 어머니는 하발란드에 거점을 둔 사냥꾼이셨죠. 석 달 전, 어머니는 옛 폐허로 사냥을 떠나셨죠. 그리고 두 달 전, 폐허 앞의 자유도시, 페스카나에 도착했다는 편지를 마지막으로 함께 연락이 끊겼어요."


"그렇다면 아직 폐허에서 사냥하고있나보지. 사냥꾼이 사냥을 시작하면 기약이 없다는 걸 모르나?"


에와라닐은 차를 재탕해 다시 엘로니아와 자신의 찻잔에 따랐다.

엘로니아는 에와라닐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요. 페스카나에서 온 대상들이 말했어요. 자유도시가, 페스카나가 폐허로 가는 길을 봉쇄했다고. 이제 그 누구도 페스카나에서 폐허로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고."


"으흠."


"저는 제 어머니를 찾아야만 해요. 만약, 제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두통이 오는 것 같았다. 눈 앞에 보이는 사냥꾼은 이제 막 스무살을 넘긴 것 처럼 보였다. 에와라닐은 몸을 숙였다. 눈 앞에 있는 인간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서는 거의 엎드리다시피 해야했다. 딱한 이야기이지만, 그는 사냥꾼을 도울 수도, 도울 이유도 없었다.


"좋아. 어머니를 찾기 위해 나서는 사냥꾼의 감동적인 이야기는 잘 들었네."


"도와주지 않을건가요?"


"자유도시가 폐쇄한 지역에 들어가있는 사냥꾼을 어떻게 구해내나? 그 안에서 살아있는지 여부는 둘째치고, 그 곳에는 어떻게 들어갈 텐가? 그리고 내가 왜 자네를 도와야하지? 나는 자네를 도울 이유가 없네."


"..."


엘로니아의 침묵에 에와라닐은 숨을 깊게 들이키며 몸을 다시 세웠다. 그러고는 딱한 표정으로 엘로니아를 내려다보았다. 경험없고 어리기에 자신이 이 세상의 주인공이며,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


"좋아. 사냥꾼의 길을 조금 더 걸은 사람으로써, 자네가 왜 어머니를 구할 수 없는 지 말해주지."


에와라닐은 손을 뻗어 손가락을 하나 하나 폈다.


"첫 번째. 사냥꾼이 된지 얼마나 됬지?"


"...한 달 전이요."


"....... 그래. 첫 번째 이유는 알고 있었으리라 짐작하겠네."


에와라닐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각했다. 한 달이면 제대로 된 사냥을 해봤을리 만무할 터. 거기에다가 사냥단에 소속되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정상적인 사냥단이라면 이제 막 입단한 한달짜리 사냥꾼을 이렇게 혼자 나돌아다니게 둘 리가 없으니까. 


"좋아. 두 번째. 괴물에 대해서 얼마나 아나?"


"... 놈들을 다 죽여야한다는 건 알죠."


"괴물의 종류는 아나? 놈들의 등급은? 약점은?"


"5단계로 분류된다는 것 정도?"


"장담하건데, 자네 어머니를 찾아러 이대로 나선다면 나흘 안에 괴물의 밥이 되겠군. 자네가 찾으러 가는 것 보다, 자네 어머니가 살아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편이 더 극적인 상봉에 도움이 될 걸세. "


"아뇨. 더 기다릴 순 없어요. 그렇다면 그 괴물의 밥이 될 사람을 도와주시는 건 안되나요? 저 혼자서는 어머니를 구하러 갈 수 없겠죠. 그건 알아요. 그래서 당신을 찾아온 거에요. 저를 도와줄 사람을 찾아."


엘로니아는 고개를 빳빳이 세워 그를 올려다보았다. 올려다보는 자줏빛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는 순간, 그 눈에 마치 빠져드는 듯한 느낌이였다. 에와라닐은 가까스로 고개를 돌려 눈을 피했다. 에와라닐은 시선을 여전히 피한 채로 말했다.


"왜 나를 찾아온 거지? 그리고 내가 어떤 목적과 어떤 이유로 자네를 도와야 하나? 자네를 도우면 대체 나에게 어떤 득이 있길래?"


"...저의 어머니. 저의 어머니가 하발란드에서 이름있는 사냥꾼이세요. 저의 어머니께서 충분한 보답을 해주실거에요."


"허... 그래. 이름이나 들어보지. 누구이길래?"


"에르키엔. 하발란드의 에르키엔이요. 아라드 강의 영웅."


에와라닐은 대답을 멈췄다. 한동안 대답없이 가만히 있는 에와라닐을 보며 살짝 불안감이 깃들었는지, 엘로니아는 천천히 다시 말을 걸었다.


"혹시... 누군지 모르시나요? 하발란드의 에르키엔? 아라드 강에 창궐했던 요위들을 물리치고 그 우두머리를 죽인 영웅을요?"


에와라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뚜벅 뚜벅 걸어 방을 가로질러 무기를 걸어놓은 거치대로 가, 검의 손잡이를 쥐었다. 그러고는 되물었다.


"하발란드의 에르키엔? 아라드강의 영웅이자 요위사냥꾼을 말하는 건가?"


"맞아요! 역시 저희 어머니를 아시는 군요. 그렇다면…"


"둘이 종족이 다른데? 에르키엔은 나와 같은 트루드다. 하지만 너는 인간이지. 거짓을 말하려는 건가? 나를 꿰어내기 위해?"


"진정해요. 제 얘기를 마저 듣고..."


"진정? 나는 자네에게 진정하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동요되지 않았어. 나는 지금 차분한 상태고, 옛 동료의 이름을 끄집어내 나를 자극하는 이유를 묻는 것일 뿐이야!"


에와라닐의 마지막 말은 거의 고함이 되어 퍼져나왔다. 목소리에 사이킥이 미미하게 실려 있었다. 힘이 담긴 목소리에 엘로니아는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바닥에 놓인 창을 집어들었다.


”증명할 수 있어요.”


”증명?”


이를 갈며 소리친 에와라닐에게 엘로니아는 품 속에서 무언가를 끄집어내 들이밀었다. 인간에게는 조금 큰 브로치. 엘로니아의 한 손바닥 안에 간신히 들어가는 크기의 브로치의 중간에는 하얀색 주먹을 쥔 손이 새겨져 있었고 그 주위로 월계수잎이 감싸 원을 그리고 있었다.

에와라닐은 숨이 멎는 것 같았다. 하얀 주먹과 그 주변을 둘러싼 월계수잎.

사르가바룬 대륙 뿐 아니라, 황제들, 여제들의 땅에서도 쓰이지 않는 상징이였지만 그에게는 익숙한 상징이였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줄 알았다. 하지만 과거는 여전히 지긋지긋하게 그의 그림자 속에 들러붙어 따라오고 있었다. 어느새인가 등 뒤로 다가온 과거가 그의 목을 휘어감아 조르고 있었다.

숨이 막히는 기분이였다. 그렇게나 도망쳐오고 숨어왔지만, 잊히지 않은 기억은 어느새인가 그를 앞질러 시커먼 입을 크게 벌린 채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나 그렇게 서 있었을까? 낮게 깔려오던 침묵이 숨 막힐때까지 쌓이고 나자, 터져나온 감정의 소용돌이가 천천히 머릿 속에서 가라앉았다. 에와라닐은 그제야 눈앞의 인간이 공포와 함께 그를 쳐다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자줏빛 눈에 보이는건 생명체로써 보이는 공포. 그리고 공포 속, 그 모든 것을 초월한 한 줄기 의지.

에와라닐은 그제서야 자신이 이 자의 눈을 계속해서 피해 시선을 돌렸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사냥꾼의 눈 속에는 의지가 새겨져있었다. 그 자신에게는 없는.


부끄러웠다. 과거에서 벗어나고자 도망친 삶이. 그리고 거기에 안주했던 자신이. 

깔보고 비웃던 인간은 스스로의 의지로써 행동하건만, 꺾여져 무너져내린 자신이.


"미안하네."


그리고 거치대에 올려놓았던 손을 다시 내려놓고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옛 이야기가 나와 잠시 흥분했네. 에르키엔의 딸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에르키엔과 관련이 있는 자는 맞는 것 같군. 하려던 이야기를 마져 들려주게."


에와라닐이 고개를 숙이자 엘로니아는 긴장됬던 몸을 살짝 풀었다. 하지만 여전히 손에 창은 꾹 쥔 채였다.


"좋아요. 저의 어머니는 에르키엔이에요. 맞아요. 에르키엔은 트루드고, 저는 인간이죠. 어머니가 말씀하시길 폐허에 버려진 저를 입양하셨다고 했어요.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나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게 되었나?"


"사람들은 저희 어머니를 아라드강의 영웅으로 떠받들었죠. 하지만 어머니가 사라지고 나서... 그 어떤 사냥꾼도, 그 어떤 용병도 저를 도우려 하지 않았어요."


에와라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그러려 했던 것 처럼, 자유도시가 봉쇄한 지역에 들어가는 사냥꾼은 없었다. 용병들이면 모를까. 하지만 사냥꾼하고 용병들과의 유명한 관계를 생각해본다면, 사냥꾼중에 이름높은 자를 구하기 위해서 봉쇄할정도로 위험한 지역에 들어갈 용병들은 없을 것이였다.


"저희 어머니는 가끔 저에게 아라드 강에서 싸웠던 또다른 친구의 이야기를 해줬어요. 아라드 강의 또 다른 영웅의 이야기를... 에와라닐의 이야기를요. 그래서 찾아온 거에요. 하발란드의 모든 거상들과 사냥꾼들에게 물어서. 그 중 하나가 하발란드 남쪽의 동떨어진 마을에 사는 에와라닐이라는 사냥꾼이 있다는 이야기를 해줬죠."


에와라닐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잊었던 과거는 지독하게 그를 따라오고 있었다. 오랫동안 외면해왔던 질문을 더이상 외면할 수는 없었다. 에와라닐은 고개를 들어 엘로니아의 보랏빛 눈을 쳐다보았다. 눈에 담겨있는 의지를 쳐다보았다.


"아직, 기회는 남았는가?"


"뭐라고요?"


에와라닐의 중얼거림에 엘로니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무기는 여전히 손에 단단히 쥔 상태였고 언제라도 싸이킥을 끌어올릴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놓은 상태였다. 에와라닐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닐세. 좋아. 그대의 어머니가 정말로 아라드 강의 영웅, 에르키엔이라면, 찾을 때 까지 동행하겠네. 나 또한 그녀에게 볼 일이 있으니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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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세계관을 다루다보면 가끔 생각하는게, 과연 체형의 크고 작음이 전투에서의 유불리를 가져올까 하는 생각입니다.

개인간 전투에서는 당연히 몸집이 큰 쪽이 작은 쪽을 압도하겠지만요. 하지만 집단간 전투에서 지상전은 평면적인 전투가 될 수밖에 없고, 몸집이 작은 쪽이 밀집도가 더 커진다는 점을 고려한으면 조금 모호해질까 싶습니다.

완전히 같은 예시로 들 수는 없겠지만, 스타크래프트에서 질럿이 저글링하고 개활지에서 붙는 건 왠만하면 기피하는 것 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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