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짐가방을 옆에 내려놓은 채, 에와라닐은 엘로니아가 낑낑거리며 자신의 몸집만한 가방을 들어매는 것을 지켜보았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에와라닐은 말했다.


"설마 그걸 하발란드에서 여기까지 들고 온 건가?"


"어... 안되나요?"


약간 벙 찐 얼굴로 엘로니아가 되물었다. 에와라닐은 한숨을 한 번 내쉬고 손을 들어 그 끝에 사이킥 에너지를 집중했다.


"kalias. oigo."


손가락이 그리는 원을 따라 공간이 비틀리더니 2차원형태의 기묘한 구멍이 생겨났다. 엘로니아가 구멍을 옆에서 봤다가 앞에서 봤다가를 하면서 놀라워하는 사이, 에와라닐은 자신의 짐가방을 던져놓고 엘로니아의 가방을 뺏어들어 마찬가지로 공간 안에 집어던졌다. 


"그게 그거죠? 마술? 공간마술?"


"함께하기로 했으니, 이제부터 모든 걸 솔직하게 말하는게 좋을거야. 마술에 대해 얼마나 아나?"


"현실을 뒤틀고 직조해내는 힘인 사이킥을 사용한 결과를 마술이라고 부르죠."


“그걸 물어본 건 아니였네. 물어본 건, 마술의 정의가 아니라 자네가 마술 그 자체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어느정도 사용할 수 있는 지 였네.”


엘로니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에와라닐은 잠깐 한숨을 내쉬었다.


"마술의 종류에는 한계가 없네. 다만, 효율성이 문제일 뿐. 방금 보여준건 아공간을 열어내는 마술이지. 내 팔을 매개체로, 사이킥이라는 힘이 작동하고 형태를 바로잡기 위한 주문과 동작으로 완성되네."


에와라닐은 그렇게 말하고는 폐허까지의 방향을 잠깐 가늠해보았다. 폐허로 가려면 어찌 됬건간에 자유도시, 페스카나까지는 가야만 했다.

페스카나에는 문제가 없었다. 허나 가는 길이, 가는 시기가 문제였다. 하발란드와 페스카나 사이에는 갈색 평야가 있었다. 그리고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가을의 막바지. 겨울잠에 드는 괴물들은 한창 먹이를 찾아 날뛸 시기.


그는 방향을 대충 정하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엘로니아를 쳐다보았다. 이 시기에 괴물들이 날뛰는 장소를 가로지르는 것 자체가 미친 짓인데 짐덩어리까지 하나 안고 가야한다니.


"좋아. 가면서 마술에 대해 좀 알려주도록 하지. 사냥꾼이 되기 전에 마술에 대해 얼마나 배웠나?"


아까 잡은 방향으로 걸으면서 에와라닐은 함정을 하나 해제했다. 보기에도 살벌한 나무창에 걸린 인계선을 풀어낸 다음에, 에와라닐이 엘로니아에게 물었다. 엘로니아는 잠시 멈칫하다가 대답했다.


"배운건... 없어요."


"에르키엔이 가르친 건 없나?"


"어머니는 제가 사냥꾼이 되길 원하지 않으셨어요."


"마술은."


에와라닐은 말을 끊고 사이킥 에너지를 끌어올렸다. 온 몸에서 퍼져나온 힘이 손으로 모이자 손이 푸르게 빛나는 듯 했다.


"자네가 알고있는 대로, 기본적으로 사이킥을 활용한 힘이지. 사이킥은 현실을 뒤틀고 직조하는 힘. 사이킥으로 불가능한 건 없네."


에와라닐은 그러고는 눈 앞에 있는 마지막 함정에 다가갔다. 가느다란 인계철선을 발로 걷어차자 철선이 길 옆에 세워놓았던 막대를 쓰러트리며 막대가 아슬아슬하게 지탱하고 있던 나무가 그대로 그들에게 쓰러졌다.

엘로니아는 반사적으로 사이킥을 끌어올리면서 몸을 웅크렸다. 하지만 예상했던 충격은 없었다. 살며시 눈을 뜨며 고개를 들자 쓰러지던 거대한 나무를 한 손으로 받치고 선 에와라닐이 보였다.

에와라닐이 남은 한 손으로 손짓했다. 엘로니아가 나무 밑을 통과하고 나자, 에와라닐은 나무를 땅바닥에 내려놓았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땅이 살짝 울렸다.


에와라닐은 손을 탁탁 털었다. 그러고는 다시 엘로니아를 한 발자국 앞질러나간 후 뒤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사이킥의 가장 주된 활용은 마술이 아니라, 순수하게 그 힘 자체를 사용하는 것이네. 몸에 둘러 충격을 완하시켜주는 층을 만들 수 도, 공격을 막아낼 수 도 있고 인공근육으로서 기능해 신체능력 자체를 강화시킬 수 도 있지."


"신체능력을 강화시키는 것 정도는 할 줄 알아요."


에와라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안그랬다면, 나를 찾아와 함정에 걸렸을 때 몸 성한 채로 나오지는 못했겠지. 이 이야기를 다시 하는 이유는 마술을 처음 배우는 자들이 저 단순한 사실을 자주 까먹기 때문이네. 정말로 현실을 바꾸는 마술의 힘을 한 번 느끼고 나면, 사이킥은 오로지 마술을 사용하기 위해 필요한 힘이라고만 생각하기 때문에.

하지만, 사냥꾼과 기사들. 사이킥 능력을 쓰는 모든 선택받은 자들에게 있어서 순수한 사이킥 그 자체의 활용이 가장 중요하네. 마술은 만능이 아니기에."


엘로니아는 고개를 살짝 틀며 묘한 표정으로 끄덕거렸다. 에와라닐은 다시 허공에 원을 그리며 주문을 외웠다.


"kalias. oigo."


에와라닐의 주문에 따라 허공에 그려진 원의 궤적을 따라 사이킥이 실체화되면서 공간을 비틀었다. 에와라닐 그 속에 손을 넣어 잠시 뒤적거리더니, 조그마한 돌 하나를 꺼내 엘로니아에게 던져주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모양새의 돌맹이였다. 다만, 다른 돌과는 다르게 선홍빛이 은은하게 감돌았다다. 엘로니아는 돌을 받아들고는 어깨를 살짝 들며 이게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을 표했다.


"그건 오직 여제들의 땅, 성소가 있는 곳에서만 채굴되는 광석 안티눔이네. 사이킥을 흡수해 경질화되며 강화되는 물건이지."


"아, 이게 그거군요! 사이킥을 강화시켜주는 보석! 당신 검에도 있던데!"


엘로니아의 말에 에와라닐은 슬쩍 허리춤의 검을 들어보였다. 검의 코등이 중심부분과 검파두식의 끝부분에 진홍색 보석이 박혀있었다. 에와라닐은 긍정했다.


"맞네. 자네에게 건네준 것 보다 더 순수하게 제련된 물건이지."


"그런데, 저 광석이 사이킥을 흡수해서 경질화된다면 어째서, 검신에 달아둔 게 아니라 검파두식하고 코등이에 달아놓은거죠?"


"안티눔이 흡수하는 사이킥의 양에는 한계가 있네. 그 한계를 벗어나면, 안티눔은 모았던 사이킥을 일시에 방출해, 술자의 사이킥과 공명하여 그 힘을 증폭시켜주지."


엘로니아는 그닥 이해가 간다는 표정이 아니였다. 하지만 별로 이해를 바라고 설명한 것도 아니였다. 

에와라닐은 콧등은 잠깐 두들기다가 다시 말했다.


“쉽게 말하자면, 저걸로 검신을 만들면 검신에 사이킥을 실을 수 없네. 무딘 연습용 검의 검신에 사이킥을 실어 가장 예리한 강철검으로 만들 수 도 있는데 무엇하러 그런 능력을 포기하겠나? 그리고 그런 짓을 하면 선택받은 자들이 휘두르는 그 무지막지한 힘에 검신이 너무 손쉽게 상하네.”


에와라닐은 엘로니아가 손에 쥔 안티눔 광석을 가리켰다.


"잠깐 주제가 셌는데, 마술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사이킥 그 자체의 활용에 통달해야만 하지. 그게 자네의 첫 번째 과제일세. 안티눔 광석을 사이킥 능력으로 부수는 것."


엘로니아가 잠시 손에 들린 광석과 에와라닐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여전히 맹한 얼굴을 한채 되물었다.


"어... 이건 사이킥을 흡수한다면서요."


"그래."


"그리고 한계치가 넘는 사이킥은 다시 방출한다는 거죠?"


"그래."


"그럼 사이킥 능력으로 어떻게 부수나요? 마술을 써서?"


"자네에게 건네준 광석은 순수하게 제련된 것이 아닐세. 불순물이 껴들어가있고, 균일하게 분포되어있지 않지. 달리말하면, 각 부분마다 사이킥을 흡수하고 방출해내는 임계점이 다르다는 것일세. 그 다른 부분을 찾아내 일부분은 사이킥을 방출하고, 일부분은 방출하지 않게 만든다면 내부에 그 힘으로 인해 균열이 생겨나겠지."


에와라닐의 말에 엘로니아는 손뼉을 짝 쳤다. 그러고는 손뼉을 치다가 떨어트린 광석을 주워들으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어요. 균일하게 제련된 광석이 아니니, 부분마다 사이킥 에너지를 흡수하는 한계치가 다르다. 그렇기에, 어느 부분은 한계치를 넘기고, 어느 부분은 한계치를 넘기지 않게끔 사이킥 에너지를 주입하면 광석의 일부분은 사이킥 에너지를 방출해내고 다른 광석의 일부분은 그렇지 않을테니 균열이 생겨날 것이란 말이죠?"


에와라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광석을 들여다보고 있는 엘로니아에게 경고했다.


"쉽지 않을걸세. 그 밀도를 파악하는 것부터가…"


"제가 이래뵈도 하발란드의 학원에서 사이킥으로 내로라한다는 수련생들 다 박살내고 다녔어요. 이 정도야 금방이죠."’


“기대해보지.”



"이거... 그 말씀하신 임계점 다른 것 맞죠?"


길을 나서고부터 태양이 옷자락을 지평선 위에 길게 깔 때까지, 광석을 부수려는 수십번의 시도 끝에 엘로니아는 갈라진 입술을 열어 마른 목소리를 냈다. 

에와라닐은 한번 코웃음을 치고는 허리춤에 달아놓은 작은 가방에서 가죽 물병을 꺼내 엘로니아에게 던져주었다. 물병을 받아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고는 엘로니아 다시 사이킥을 돌맹이에 집중했다. 잠시간의 집중 끝에, 돌맹이는 다시 사이킥 에너지를 거칠게 방출해내며 위로 튀었다. 튀어나온 돌맹이에 이마를 맞은 엘로니아가 약한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러고는 분노에 찬 눈길로 돌맹이를 흘겨보았다.


"아니, 이거 안되는데요?"


"그렇다면 아직 마술을 배울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겠지."


"이걸 꼭 부숴야만 마술을 배울 수 있는건가요?"


"그건 아니네. 하지만 안티눔 원석을 사이킥으로 부술 수 있다는 건, 곧 사이킥을 미세한 수준까지 조절할 수 있다는 증거일세. 그정도의 조절능력 없이 쓰는 마술은 그저 사이킥 능력의 낭비일 뿐이지."


엘로니아는 다시 이를 악물고 손에 쥔 광석에 사이킥을 집중했다. 사이킥이 광석의 속으로 서서히 모여들더니, 곧 머릿속을 울리는 정신적 파열음과 함께 거세게 사이킥을 뿜어내며 다시 튀었다. 튀어오르는 광석을 이번에는 가까스로 피하고, 엘로니아는 다시 떨어지는 광석을 낚아챘다. 흡수했던 사이킥을 내뿜은 안티눔 광석의 겉면에는 흠집조차 없었다.

엘로니아가 욕짓거리를 내뱉는 사이, 에와라닐은 자리에 잠시 멈춰섰다. 한 발자국만 나서면 이제 숲의 바깥, 갈색 평야가 있는 곳이였다. 


"이제 곧 갈색 평야다. 오늘은 여기서 야영하지. 갈색 평야에 밤에 들어서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네."


야영지를 준비하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공간에 보관해놓은 가방에서 엘로니아가 텐트를 꺼내 조립하는 사이, 에와라닐은 마른 나뭇가지와 풀들을 모아 불을 피웠다. 

불가에 앉아 불을 쬐면서 에와라닐은 엘로니아를 쳐다보았다. 엘로니아는 여전히 손에 들린 광석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에와라닐은 단조로운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술의 구성요소는 세가지이다. 마술의 근원이 되는 술자의 사이킥(psychic), 의지를 대변하는 술자의 주문(spell), 마지막으로 술자의 상상력을 실체화시켜주는 술자의 수인(gesture). 지금 네가 하는 건 그 첫번째, 사이킥을 자유자재로 다루기 위한 수련이야."


"하나라도 생략되면 안 되는 건가요?"


엘로니아의 물음에 에와라닐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충분한 사이킥만 존재한다면, 그 사이킥 에너지를 가공해내 마술을 사용할 수 있다. 다만, 사이킥을 조절하는 능력이 없다면 원하는 위력이 나오지 않을 테고, 의지를 대변하는 주문이 없다면 네가 원하는대로 마술로 바뀌지 않을 것이며, 수인이 없다면 원하는 형상대로 마술을 가공해내기가 어렵겠지. 

마술이란, 사이킥을 가공해낸 힘이네. 그리고 가공하기 위한 도구가 주문과 수인인 것이지. 대리석을 깎아 조각상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생각해보게."


에와라닐의 대답과 설명에도 엘로니아는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에와라닐은 엘로니아에게 해줄 적절한 말을 생각하며 잠시 턱을 긁다가 잘라 말하고는 입을 닫았다.


"마술을 사용할 수 있을 때가 되면 알 수 있을 걸세."


“그럼 재미없는 이야기는 그만 하죠. 밤도 긴데. 제 이야기 좀 해드릴까요?


에와라닐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로니아도 그닥 대답을 원한 것 같지는 않았다.


“흔쾌히 저를 도와주신다고 했을 때, 솔직히 많은 부분들이 좀 걱정스럽긴 했어요. 저를 어디 노예로 팔아먹지는 않을까 하고…”


“…내가 왜? 신용이 부족했나?”


“제가 좀 생겼잖아요.”


엘로니아는 고개를 살짝 틀며 턱에 두 손을 가져다대면서 말했다. 에와라닐은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의식 과잉이군. 에르키엔이 잘못 키웠어.”


“저희 어머니의 교육방침에 대해서 불만이 있으시면 찾아낸 다음에 직접 말씀하시죠.”


“말하는 거나 예의 수준은 딱 에르키엔 수준이군. 에르키엔의 자식이 맞나 보군.”


“어찌됬건간에.”


엘로니아는 에와라닐의 말을 턱 잘랐다. 


“제 얘기나 좀 들어봐요. 도와주려는 사람 태도가 뭐야.”


도움 받으려는 사람의 태도를 지적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이 무의미한 대화의 시간을 오히려 늘릴 뿐이란 것을 알았기에 에와라닐은 입을 다물었다. 대신에 한번 엘로니아의 이야기를 경청하려는 시늉이라도 해보기로 결심했다.


“제가 몇 살이나 됬을 것 같나요?”


“그 철없는 수준…… 아니. 글쎄, 인간 나이는 가늠하기 어려워서. 열 여덟살 정도 됬나?”


“올해로 스물 하나입니다. 아마도.”


“지적 수준이나 행동거지를 보면 이제 막 성년이 되어 스스로가 모든걸 해결해도 되는 경지에 도달한 것으로 착각하는 나이일 줄 알았더만 생각보다 더 먹었군. 그런데 아마도는 뭐인가?”


“말 좀 곱게 해요. 여하튼간에, 아마도 스물 한 살인 이유는 저랑 에르키엔이 처음 만났을 때 에르키엔이 제 나이가 열 다섯이라고 했거든요. 6년 전에.”


엘로니아의 말에 에와라닐의 눈 속에서 살짝 불이 튀었다. 하지만 엘로니아는 눈치채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6년 전에, 옛 폐허와 회색 고원의 사이에서 어머니가 저를 발견했어요. 어쩌다 저를 발견했는지는 몰라요. 그저 폐허 속에 파묻혀서 간신히 숨쉬던것을 구해냈다고 했으니까. 그 이전의 기억은 없어요. 첫 기억은 부정확하다고 말하죠. 스스로의 상상을 덧씌운 채색일 뿐이라고요. 하지만 저는 뚜렷하게 기억해요. 겨울철 퍼지던 제 숨결을. 그리고 저를 들어올리던 어머니의 손길을.”


엘로니아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눈을 깜빡이며 먼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잠시동안 그러다가 그녀는 살짝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제 나이는 스물 하나겠지만 제 기억은 6년이에요. 그 6년의 전부는… 제 어머니로 채워져있죠. 누가 말하더군요. 상실을 받아들이라고. 하지만 저는 그럴 수 없었어요. 저 나름대로 그래서 생각도 해봤어요.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생각 할 수록, 더 확실해지더군요. 

저는 어머니를 잃는 건 견딜 수 없어요. 제 세계는 그 뿐이였으니까. 6년의 짧은 기억 속에서 오직 그 뿐이였으니까. 다른 부모잃은 아이들은 부모의 빈자리를 쉽사리 채울만한 걸 찾아내죠. 제 또래의 부모잃은 사람들은 상실을 견뎌낼 수 있을 만큼의 깊은 기억을, 그리고 지탱해줄 사람을 가지고 있어요. 

하지만 저는 그렇지 않죠. 어린애의 기억의 깊이와 다 큰 성인의 집중력 때문에. 그래서 저는 기다릴 수 없어요. 그리고 포기할 수 도 없어요. 그게 제가 어머니를 찾으려는 이유에요.”


말을 멈춘 채로 여전히 밤하늘의 달을 바라보고 있는 엘로니아를 에와라닐은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서 그는 에르키엔을 볼 수 있었다. 6년 전, 그와 함께했던 자의 모습을.


“그런가. 이해한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 너와 나의 기억은 다르니까. 내게 있는 상실의 경험이 너와 같다고 말할 수 없겠지.”


에와라닐은 투박하게 답했다. 에와라닐은 어설픈 위로를 하려는 대신에 침묵하기를 선택했다. 그렇게 어색한 침묵이 야영지를 맴돌았다. 

잠깐의 정적 후에 엘로니아가 말했다.


“그래서, 당신이 저를 돕는 이유는 뭐죠?”


에와라닐은 엘로니아를 빤히 쳐다보았다. 마찬가지로 엘로니아도 에와라닐을 쳐다보고 있었다. 에와라닐은 잠깐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다시 닫았다. 그 이유는 추악한 진실이였다. 말하면 이 위태한 여정을 삼킬만한. 

에와라닐은 하지 못한 말을 가까스로 삼키고는 말했다.


“그 눈이 마음에 들어서.”


“제 눈이요? 제 눈이 무.. 뭐 어떄서요? 눈 색깔로 차별하는 거에요? 제 눈색깔이 특이하긴 하지만…”


에와라닐은 콧방귀를 뀌었다. 에와라닐의 반응에 씩씩대는 엘로니아의 반응을 무시하며 에와라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불을 툭툭 발로 차 살짝 꺼트리며 말했다.


“자라. 내일부터는 많이 힘들테니. 한치 앞만 더 가면 갈색 평야니까. 갈색평야에서는 지금처럼 느긋하기는 힘들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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