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부터가 갈색 평야네. 린트부름. 니드호그. 그렌델. 그리고 그 밖에 무수히 많은 괴물들의 고향."


겹겹이 쌓인 숲 밖으로 나오자, 에와라닐은 검을 땅에 짚고 서며 멀리 내다보았다. 빽빽한 나무를 경계로, 갈색과 붉은색의 풀들이 길디 긴 초원을 이루고 있었다. 그 위로 겨울을 앞둔 바람이 길게 불었다.

갈색의 지평선이 끝도없이 펼쳐져 있었고, 저 멀리에선 소떼들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엘로니아가 순수하게 경탄을 표하며 두리번 거리는 사이, 에와라닐은 이어 말했다.


"황무지에 있는 여섯 개의 지역 중에서도 초원은 가장 위험하면서도 가장 안전한 장소지."


"말이 좀 이상한데요?"


엘로니아의 질문에 에와라닐은 어깨를 으쓱 했다.


"사방이 트여있어서 괴물들의 기습을 피할 수 있겟지만, 그만큼 황무지에 들끓는 무법자들의 눈을 피할 수는 없네. 인간 여자와 트루드 남자 단 둘이라. 많은 사랑들을 받겠군. 특히나 겨울이 가까워지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달랐다.

하루 종일을 걸어 자유도시 하발란드로 향하는 대로에 세워진 첫번째 요새가 눈 앞에 보일 때 까지, 그 어떤 괴물이나 인간의 습격도 없었다. 요새가 지평선 끝에 희미하게 보이는 곳에 서서 에와라닐은 불을 피우기 시작했다.


"지금 저희가 어디로 가고 있는거죠?"


"중부대로를 따라 하발란드로. 그리고 거기서 페스카나까지 간다. 얼추 일주일 남짓 걸리겠군. 더 안전한 길이 있겠지만, 이게 제일 빨라."


삭정이를 불에 던져넣으며 에와라닐이 대답했다. 사방이 탁 트인곳에서 불을 피우고 야영하는건 미친 짓이였지만 그는 불과 5km거리밖에 떨어져있지 않은 요새의 수비대를 믿었다.


"그런데 불은 왜 피운 거죠? 말씀하신대로 주변에 무법자들 천지라면, 밤에 불 피우는건 자살행위 아닌가요?"


에와라닐은 말없이 요새가 있는 쪽을 가리켰다. 엘로니아는 그쪽을 빤히 바라보다가 일어나서 다시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요새가 보이지 않았다. 엘로니아가 고개를 저으며 다시 자리에 앉자, 에와라닐은 말했다.


"저기에, 하발란드에서 갈색 평야 위에 세운 요새가 위치하네. 내 기억에 저 요새 이름이 하..."


"하르펜테. 일거에요. 제 기억으로는. 지도는 외웠으니까."


"그래. 하르펜테가 맞을걸세."


“요새에 들려서 말이라도 사서 가나요? 신용거래는 가능할테니까… 제가 에르키엔의 딸이라는 것만 요새 수비대에게 잘 증명하면…”


“트루드가 말을 어떻게 타나. 말 허리부러져. 탈 수 있는 말이 있더라도, 겨울이 다가워져온다. 말에게 먹일 게 없어.”


“아.”


잠시 침묵이 있었다. 삭정이가 타들어가며 내는 타닥 타닥 거리는 소리만이 조용히 울릴 뿐이였다. 에와라닐이 침묵을 깨고 말했다.


"그리고 무법자들이 제 아무리 용감해도 요새가 뻔히 보이는 위치에서 우리에게 시비를 걸지 않을걸세. 그리고 오늘 내내 습격의 징조가 없기도 했고."


"저는 안보여요."


"키가 더 크면 볼 수 있을걸세."


"이미 다 자랐는데요."


"그럼 500m만 더 걸어가면 보일걸세."


엘로니아는 벌떡 일어나 에와라닐이 가르킨 방향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에와라닐과 달리 그는 지평선 너머에 희끄무리하게 비칠 요새가 보이지 않았다. 엘로니아는 다시 투덜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다시 품에서 안티눔 광석을 꺼내들었다. 그녀가 다시 안티눔 광석에 힘을 주입하는 걸 보면서 에와라닐은 희미하게 웃었다.


몇 번을 애쓰던 엘로니아는 마침내 광석을 다시 주머니 안에 거칠게 쑤셔넣고는 불을 쬐며 말했다.


“당신 얘기좀 해봐요. 지금까지 제 얘기만 했잖아요. 거의 나 혼자 주저리 떠드는 것 처럼.”


“미안하지만 내 이야기는 누군가에게 들려줄 만한 모범적인 내용이 아니라서.”


“상관없어요.”


에와라닐은 작대기를 들어 모닥불을 들쑤셨다. 살짝 사그라든 불이 새로운 연료를 머금고 다시 타올랐다. 그는 조용히 작대기를 내려놓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신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지. 황무지는 외부인의 간섭을 원하지 않지만, 외부인 없이는 유지될 수 없어. 그런 이야기 들어본 적 있나?”


“어… 아뇨?”


“황무지에서 침대 위에서 조용히 눈을 감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 것 같나? 하루에 수십명, 아니. 수백명이 온갖 이유로 황무지에서 죽어나가지. 괴물에게 죽거나, 사람에게 죽거나. 거상을 호위하다 죽거나, 사냥하다 죽거나.”


에와라닐의 마지막 말에 엘로니아는 잠시 움찔했다. 에와라닐은 엘로니아의 반응을 살짝 쳐다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8개 자유도시중 가장 거대한 릴라이드조차 도시에 사는 인구수가 7만을 넘지 못해. 릴라이드의 힘이 닿는 곳에 있는 인구를 모두 합쳐도 20만이 안 돼고. 황무지 전체의 모든 인간과 트루드의 수를 합쳐도 그 수가 70만보다는 아래일테니. 그런 지역에서 하루에 수백명이 죽어난다는게 어떤 의미인지 알겠나? 황무지는 사실상 인구 유지가 불가능한 곳이네. 정확히 말하면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지.”


에와라닐의 말에 엘로니아는 자신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그런 황무지에 살고있는 사람이 있지 않냐는 표현에 에와라닐은 피식 웃었다.


“그래. 정정하지. 사람이 못 사는 곳은 아니지만 이렇게 많은, 70만의 인구가 계속해서 유지될 수 있는 곳은 아니란 말이네. 하지만 그렇게나 많은 인간과 트루드들이 죽어나감에도  인구수는 유지되고 있어. 이게 무슨 뜻이겠나?”


에와라닐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던 엘로니아의 얼굴이 붉어졌다. 손을 입가에 가져다 대 잔뜩 상기된 얼굴의 반을 가린 채 그를 흘겨보는 엘로니아의 모습에 에와라닐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자네가 생각하는 그런 것 아닐세. 출산율로 그 사망률을 극복하려면… 부부가 무조건 아이를 열명은 낳아야 한다는 기적적인 결론이 나오니 말일세. 하지만 황무지에는 그런 기적적인 가족을 만드는 자들은 물론이거니와 결혼이란 풍습을 전설속에 나오는 이야기 정도로나 받아들이는 자들이 많다는 것을 알 걸세.”


“저희 어머니도 결혼은 안하셨죠. 애인은 많으셨던 것 같지만.”


“하지만 황무지의 인구는 유지되고 있지. 황무지가 가지는 지리적, 그리고 사회적 특징을 생각해보면 되네.”


“수업시간인가요?”


엘로니아는 눈을 약간 게슴츠레하게 뜨며 말했다. 에와라닐은 턱을 괴며 엘로니아를 빤히 쳐다보았다. 에와라닐의 시선에 엘로니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다시 물었다.


“얼굴에 뭐 묻었나요?”


“무지와 반지성을 표방하는 것은 죄다.”


엘로니아의 궁시렁거림을 무시하면서 에와라닐은 다시 말을 이었다.


“먼저 황무지의 위치는…”


“사르가바룬 대륙의 중북부. 그리고, 그 중에서도 서부. 그리고 사르가바룬 대륙 북부로 향하는 유일한 육로!”


에와라닐은 살짝 눈썹을 들어올렸다.


“생각만큼 멍청하지는 않군.”


“그런건 속으로만 생각해주세요.”


“그래. 거기에 더불어, 황무지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국가는 나말라스, 나이르, 인카라스, 엘림, 마르두스. 사르가바룬 대륙의 7개 국가 중 5개와 국경을 맞대고 있지. 그리고 황무지는 외부인의 간섭을 극도로 기피하네. 뭐, 지난 1000년 중에 반은 괴물에게, 반은 마주보고 있는 왕국들에게 시달리면 그럴 법도 하지만. 그렇기에 황무지는 황무지 바깥에 사는 이들에게는 최고의 치외법권 지역일세.”


“왜죠?”


“괴물이 득실거리는 땅에 굳이 사람을 보내 잡아갈 필요도 없고, 사람을 보내 잡아갈 필요가 있다 하더라도 그런 사람들을 보내면 자유도시들이 뒤집어질테니까. 그리고 또한 기회의 땅이기도 하지. 개발되지 않은 땅이 넓게 펼쳐져있고 사르가바룬의 남북 무역의 핵심 통로이니. 그래서 황무지 바깥에서 유입되는 인구 덕분에 그 엄청난 사망자 수에도 불구하고 황무지의 인구가 유지되는 것이네.  외부인의 간섭을 극도로 피하지만, 그 구성원은 따지고 보면 대부분이 황무지 외부인인거지.”


엘로니아는 살짝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황무지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음?”


“황무지에 살고있는, 자유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원래 외부인이였느니 황무지에서 태어난 사람이였느니 하는 피곤한 구분은 안하는 것 같다고요. 그냥 지금 황무지에 살면서 자유도시의 법에 따라 살면 황무지 사람인거고 그렇지 않고 황무지 바깥의 법도에 따르면서 황무지에 간섭하려들면 외부인인거고.”


에와라닐은 물끄러미 엘로니아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엘로니아가 자신의 시선에 반응을 보이기 전에 말했다.


“그 말이 맞군.“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에와라닐은 다시 작대기를 들어 불꽃을 쿡쿡 쑤셨다. 다 타오른 재가 쿨럭이는 검은 기침을 뿜어내고 불이 다시 타올랐다. 어두운 밤하늘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검은 연기를 보며 에와라닐은 말했다.


“그나저나 걱정이군.”


“왜요?”


“내가 요새 수비대와는 사이가 별로 안 좋거든. 여러 방면으로 말이야. 과연 저 요새의 수비대들이 나를 다시 보게 되어 반가워할지 아니면 나를 해코지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어 반가워 할 지 장담하지 못하겠군.”


엘로니아는 경직된 채로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에와라닐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말게. 어찌 잘 지나갈 방법은 있으니 말이야. 그 전에.”


에와라닐은 불쑥 엘로니아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갑자기 들이미는 에와라닐에게 놀란 엘로니아가 벌떡 일어나며 손을 휘휘 내젖다가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야… 이게 무슨 짓…”


“그 눈하고, 머리카락. 너무 눈에 띄어. 좀 바꾸자고.”


“… 네?”


“Kara, Pseudo.”


사이킥이 엘로니아의 얼굴과 머리를 한 차례 휘감았다. 에와라닐은 만족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뻗어 엘로니아의 머리카락 한 가닥을 잡아 당겼다.


“아야!”


화난 얼굴로 엘로니아가 에와라닐을 째려봤지만 그는 아랑곳않고 엘로니아에게 뽑아낸 머리카락을 건넸다.


“자. 맘에 드는 색깔인가? 참고로 눈 색깔도 같은 색으로 바꿨다네.”


엘로니아는 받아든 머리카락을 보고 눈을 한 번, 그리고 두 번 깜빡였다. 은색이여야 할 그녀의 머리카락은 옅은 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오… 이것도 마술?”


“그래. 마술이다. 어려운 마술도 아니고, 작정하면 밝혀내기도 쉽지만 당장에 그 머리카락 색이랑 눈 색깔때문에 주목받을 일은 없을거야.”


“혹시 거울 있어요? 제 모습이 어떤지 한 번 보고싶은데.”


“그런걸 내가 가지고 다닐 것 같나? 내일 하르펜테에 도착하면 한번 거울부터 찾아 봐 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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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 못 올릴 거 같아 미리 올리고 감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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