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 경상도 사투리가 있습니다.


뚜두둑 하고 초록색 알코올 병의 뚜껑이 튿겨진다.


한 남자가 텅빈 방 한가운데 앉는다.


"어, 시영아 나 왔다. 오랜마이네."


그 낯익은 남자는 꼴꼴꼴 한 잔을 따르더니 크게 한번 들이킨다.


"야 나와 바라 쪼옴. 요즘 목소리밖에 못 듣는다. 응? 얼굴 좀 보자."


"우리 너무 안보고 살았는지 오늘은 니 얼굴도 기억 안난데이."


"니 어머이 보고 왔다. 아버이는 거기 잘 살고 계시드나?"


아무도 없어요 아저씨.


그는 눈앞에 있는 작은 화환을 만지작댄다.


"아― 치아라, 수접게 가시나가 진짜― 남자는 화환 같은거 필요 없다 아이가."


누구와 대화를 하는 걸까. 여자친구일까.


그 남자는 아마도 술을 마시면 여자친구가 생기는가 보다.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아주 웃고 있다.


그 낯익은 남자는 잔뜩 들떠 침을 튀기며,


"응, 느그 어머이는 아직도 나만 보시면 그렇게 뚝별시려워 하시구, 느그 동생놈은 계속 그리 공부하드라."


"느그 동생놈이 진-짜 독한 놈이드라. 지 살기도 뽀독한데. 제작년에 행정고시인가 덜컥 붙어버리고는 기어코 느그 어머이 밥 한끼를 안 굶기드라. 즈그 남편이랑 아뜩바뜩 살림도 독하니 해가서, 지 딸래미도 어엿하니 인물좋게 잘 컷드라."


"나 밥 먹는 건 걱정하지 마라― 안 그래도 셋이서 어저께 따시한 매운탕 끓여서 먹고 왔다. 내가 직접 잡아다 온 건디, 국물이 아주 꼬시하고 얼큰하드라."


"시영이 니도 같이 있었으면 좋았을낀데. 니도―. 니도 여름에 같이 계곡 가면 내 잡아다 준 고기―"


그는 잠깐 멈추었다. 살짝 웅크리다가 한숨을 내쉰다.


남자는 꼴꼴꼴 한 잔을 더 따르더니 쭉 들이킨다.


방 안에서 연기가 작게 피어오른다.


"응. 요즘 직장은 안나간다. 그만 뒀다. 그까이거."


남자는 자신의 신세가 허탈한지 비련히 실소한다.


"이렇게 간간히 니 만나러 오는게 얼숙한 내 일이지 뭐. 직장은 몰라도 여그는 안오면 영 허숭수하드라."


"참. 오랜마이다. 니 생각 이렇게 오랫토록 잡아두고 있는게."


"요즘 꿈자리가 뒤숭숭해서 그런가― 그, 꿈에 자꾸 니 목소리가 나온다."


"시영아. 그러니까 얼굴 좀 보자― 시영아―."


남자는 언성을 높인다.


"너무 안 봐서 니 얼굴도 기억이 안 난다. 이제. 사진속에 이쁘장하게 나온 니 얼굴 지업토록 봤어도 이젠 돌아서면 기억이 안 난다."


"유원지에서 웃기게 찍은 사진이며, 꽃놀이에서 뾰루퉁한 사진이며 닳아 없어지도록 봐도 여기에 니가 없다."


"그러니까 좀 보자 시영아――."


남자는 불규칙해진 숨을 설설 골랐다.


몇 분의 침묵이 이어졌다.


연기가 계속 피어오른다.


다시금 차분해진 남자의 목소리가 밀실을 채운다.


"니 동생 시은이네 딸이 고등학교 입학했다드라. 내가 해줄 게 없어서, 짤따란 편지 하나 없는 솜씨로 써 줬다. 나 잘 했지? 응?"


"또―, 또. 우리 아들 놈 태어났으면 올해가 그놈 성인 되는 해다. 이거 좀 대단하지 않나?"


남자는 실없이 카카카 웃는다.


"고놈 민재로 하기로 했었는데, 니 기억은 하나?"


익숙한 이름이다.


왜일까.


그야. 흔한 이름이니까.


"…솔직히, 이젠 니 있었으면 어떻게 됐을지 하나도 모르겠다. 니 쓰러지고 경황이 하나도 없어 정신이 안들고, 니 거기―. 거기로― 가던 날, 은 그냥 생각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드라. 그 뒤로도 니 있었으면 지금 어땠을지는 생각을 못 하겠드라."


"직장 그만 두고 보니까. 시은이한테 미안하드라. 깡촌서 배경두 없이 혼자 거까이 간 애가, 아직도 니한테 못 벗어나는 초라한 나까지 먹여살리더라. 나 한거 머 있따고 짼하게 시리."


"…응. 그래 낼부터는 뭐든지 하려고 한다."


남자는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지, 한 잔 더 술을 따른다.


"술을 마시면, 그때처럼. 니 내 여자친구였을 적이 자꾸 떠올라 미칠 것 같다."


"꿈에 니 목소리 나오는게 이놈에 술 까닭이다. 그게 좋아서 이놈의 술을 못 끊는다. 내가."


"…그래도 꿈 꾸는 동안엔 니랑 같은 공간에 있는 것 같드라. 같이 시간 보내고, 얘기도 하고, 하다가 항상 똑같이 깬다."


"시금텁텁한 장면이다. 니 그 쪽으로 건너간 날 있지."


"오늘이다. 오늘…"


"병원 복도에 시언한 바람 씽씽 부는 날에, 창밖엔 살짝 어둑시근해 쨍 허니 불그딩딩한 마지막 햇빛이 들어온다. 니는 그 와중에 얼-마나 이쁜지, 참 곱게도 누워 있드라. 눈동자가 너무 기엽고, 또 손이 너무 곱다. 아직까지도 보는 내가 얼숩게 되고, 부끄룹게 되고 그러드라."


"시영이 넌 니가 얼마나 이쁜지도 모르지? 응?"


"그렇게 니 보고 계속 있으면, 어김없이 니 심장소리가 쩨삣하게 내 귀에 박혀들어와서 퍽 귀가 고롭다가 니 소리가 점점 얄피리해지면서 뚝― 하고 끊긴다. 그러곤 자꾸 니 무너지던 모습이 계속 떠올라 죽을 것만 같더라. 나 그때마다 좀 울면서 깨고 그런다."


"안다. 알고 있다. 사내새끼가 여자 하나로 눈물이나 쏙 빼고, 눈물이나…"


"시영아. 내 목소리 거기서 들리니? 응? 시영아…"


남자의 얼굴이 이지러졌다.


괴로워 말아요. 아저씨.


여자친구 분은 좋은 곳에 있을 거예요.


"니, 거기서 내 목소리 기릅지는 않던? 나 보고싶지는 않던? 응?"


남자는 조금 울먹거린다.


아저씨. 울지 마요. 생각한다.


"나는 여기 지옥에 떨거져서 미칠 것 같다. 여기는 생 지옥이다."


"내 직장 안다닌다는거도 거짓말이다. 예전에 짤리고 없다. 그런거 없다… 미안타…"


"여긴 니 없어서 생 지옥이다. 시은이한테 미안하고 느그 어머이한테 미안하다..."


남자는 조금 꺽꺽대며 숨을 고른다.


"시영이 너 잊고 살아가는게 두렵다…"


"시영아… 나만 니 보고 싶니? 응?"


"나만… 그런거니? 나만…"


움찔 했다.


이 낯익은 남자에게 살짝 흔들렸다.


뭘까 이건.


남자는 또다시 울부짖는다.


"나만, 니 흔적 하나하나 20년도 넘게 켜켜히 쌓아두고는 버리지도 못하고 이렇게 있는거니? 응?"


"나만… 니 흔적 속에 묻어 사는 거니? 어여 대답좀 해 봐라 가시나야…"


연기가 계속 자욱히 피어올랐다.


남자의 다리가 풀리고,


털썩 무릎이 바닥에 닿였다.


남자는 스스로 목을 죄었다.


"괘롭다, 시영아… 괘롭다…"


"얼굴 한 번만 보자 시영아…"


"나 이제 마지막이다. 시영아―"


"나 이제 어떡하니… 어떡하니…"


"한번만… 보자…"


"시영아…"


"시영아…"


남자는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눈물 구슬이 그의 세월섞인 뺨을 타고 내린다.


아. 낯익은 그 얼굴이다.


22년 째, 내 사진 앞에서 무릎꿇고 절규하던. 그 얼굴이다.


당신이다.


"쿨럭… 시영아… 나 이제… 어떡하니…"


"한 번만… 쿨럭."


"허끄윽…"


와당탕 무너지는 소리가 나고,


남자는 축 늘어졌다.


연기가 방 안 가득 채워져 내 사진조차 보이지 않는다.


설마.


그런.


나한테 이렇게까지 해 줘서 고마웠어요.


그러니까 제발, 여기서 죽지 말아요.


당신 눈 앞에서 내 얼굴 얼마든 보여 줄 테니까.


망각하고 있던 만큼 당신을 다시 그리워 해 줄 테니까…


천국에서도 당신을 절대 잊지 않을 테니까…


―작은 기적이 일어났다.




장챈에서 소재 쓰다가 조금 더 다듬어 봤음. 똑같은 거 다시 올리기 그래서 여기 쓰고 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