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첫 사랑은, 한여름에 찾아온 1주일의 장마였다. 


나랑 1살 차이나는 대학 동아리 후배랑 불과 1주일 전에 사귀게 됐다. 대학 1학기 초반에 봤을때부터 내가 이 아이를 좋아한다는 것을,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을 태어나서 처음으로 깨달았지만, 내 상황들-동아리 전 회장, 대학교 3학년, 현재 부회장, 주변 동아리 부원들-로 인해 내 마음은 잘 접어서 철저하게 티내지 않고 숨기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내 전여친이자, 내 후배, 나의 첫사랑인 소연이는 3수를 한 뒤 우리학교 미대에 진학한 미대생이다. 


그렇기에 나랑은 1살밖에 차이가 안났고 나도 다른 나이 차이 많이 나는 후배들보다 더 편하고 친해지기도 좋았다. 소연이가 나에게 어느 정도의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확신은 없었기에 혹시라도 고백을 했다가 내가 그동안 대학교에서 쌓아온 것들이 모두 무너질까봐, 나와 친한 사람들과의 관계가 무너질까봐 좋아한다는 감정을 더욱 철저하게 숨기고 그저 서로 장난치고 편하게 대해주는 선배로써 행동했다. 


학기 초부터 친한 동아리 부원들끼리 모여 술자리를 가질때면, 소연이와 내 동기가 서로 티키타카가 잘 되고 친하게 지내는 것을 보며 으레 20대 초반의 대학생들이 그러듯, 나를 포함한 부원들은 괜히 엮으며 "둘이 뭐야~", "어머 어머 잘어울린다~" 등. 뭐 이러면서 놀리고 장난을 쳤다. 나 또한 그 장난을 이용해서 내 마음을 숨기고 계속해서 소연이의 마음을 떠봤다. 정말로 내 동기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는지, 지금 관심있는 사람은 있는지, 남친은 사귀고 싶은지... 등등. 소연이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더 알고 확신을 가지려고 온갖 질문들을 돌려서 물어봤지만, 그럼에도 내 스스로 이 아이가 나를 좋아할 것이라는 완벽한 확신을 가지지 못해 결국 내 마음은 잘 접어 한쪽에 묻어 두고 좋은 선후배로 지내야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종강을 하고 나는 대학원 진학 준비를 위해 실험실 인턴을 하며 방학 기간에도 학교에 남아있었고 개강까지 얼마 안남은 시점에서 학기 중 내가 감기로 고생할 때 간단한 약과 피로 회복제를 사다준 후배들이 있어서 그 후배들에게 내가 밥을 사준다고 한 적이 있었는데, 그 중 한명이 소연이였다. 어쩌면 이것 또한 나에게 어필을 하려고 했던 것일지도. 그 후배들이 친구들과 놀 겸 학교로 찾아 온다고 했고 나는 그날 소연이를 포함한 후배들에게 밥을 사줬다. 그날은 특별한 일 없이 그저 안부와 요즘 무엇을 하는지, 개강이 얼마 남지 않았다던지 등과 같은 평범한 이야기를 하며 식사를 마치고 후배들을 보냈다. 내 후배들은 다음날 바로 다시 본가로 돌아갔고 소연이는 친구 한명을 더 본다며 학교에 하루 더 남는다고 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일이람, 기록적인 폭우로 인해 침수가 일어나 강남쪽으로 돌아가야 하는 소연이는 집으로 가지 못 하고 부모님께서 상황이 진정될 때 까지 1주일정도는 학교쪽 자취방에 있으라고 하셨단다. 


그렇게 학교에 남게 된 소연이와 나. 


며칠간은 서로 별 연락이 없다가 토요일 점심, 집에 가기전 간만에 학교에 온 김에 같이 학교 주변의 유명한 음식점을 가기로 했고 거기서 점심을 먹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미 서로가 서로를 좋아하고 있었기에 같이 점심도 먹고 용건이 끝났음에도 괜히 오랜만의 학교라며 교정을 산책 하고, 나 또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이 시간이 너무나도 즐겁고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어 일부러 짓궂은 장난을 치며 짧지만 마치 연인이 된 듯한 기분을 즐기며 더 붙잡아뒀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아직 장마의 여운이 가시지 못한 8월의 여름 저녁, 축축하고 약간은 흐릿한 하늘에 조금씩 어둠이 깔릴 때 쯤 나는 이 아이에게 도발을 하듯, 그동안 나에게 장난쳤던 것들에 대한 업보를 받게 해주겠다며 둘이 술로 겨뤄보자는, 핑계아닌 핑계를 만들어냈다. 당연히 소연이도 이를 받아들였고, 서로 집에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밤 10시에 자주 가던 학교 근처의 술집에서 만났다. 


나는 한가지 다짐을 하며 술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술의 힘을 빌려서라도 그동안 감춰놓은채 꺼내지 못한 나의 마음을, 오늘 전해야겠구나. 개강 전이기에 오로지 둘이서만 있었던 일로, 한 여름밤의 실수로 덮어둘 수 있으니 오늘 만큼은 내 마음을 전달해야 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술집으로 갔고 물 흐르듯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을 나누고 장난치며 한번 오늘 둘 다 죽을때까지 마셔보자며 달리기 시작했다. 


처음의 살짝은 어색한 분위기에서 별 시덥잖은 이야기를 하며 연신 들이키는 소주에 어느샌가 어색함은 사라지고 서로 취기가 오를대로 올라 지금 두근대는 심장이 이 아이와 있어서인지, 그저 소주의 알콜 때문인지 구분짓기 버거울 만큼 취기가 올랐고, 그 타이밍에 소연이는 "잠깐 나가서 바람좀 쐴까요?" 라는 말에 당연히 좋다고 했고 술집 앞에서 취한 몸과 정신을 겨우 붙잡고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데 이렇게 단 둘이서 마신적이 처음이어서 였을까, 네 앞이어서 그랬을까, 이렇게 취해버린 적이 거의 없었는데. 꽁꽁 숨겨 풀지못할, 어쩌면 풀리기를 바랐던 내 마음의 매듭이 하나 둘 풀려버리면서 그나마 덜 취해 보이는 소연이에게, 나의 소중한 후배에게, 내가 정말 사랑하는 후배에게 몸을 기대며 너에게 만큼은 들려주고 싶지 않았던 취한 목소리를 내었다. 


"내가 취해서 미안해, 너한테 이런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라며 추한 모습을 보였고 그 말에 너는 


"왜 저한테는 이런 모습 보이기 싫어요?" 라는 대답을 해줬고 나는 그 말을 듣고, 나의 모든 진심을, 24년의 삶 중 처음 겪어본 이 감정을, 너무나도 혼란스럽고 나를 아프고 가슴 한켠을 시리다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준 이 마음을, 마치 하나님께 고해성사하는 독실한 신자가 되어 내 앞의 후배에게, 소연이에게 전부 토해냈다. 


고백은 성공했다. 나의 감은 맞았고, 확신이 없다며 핑계를 대고 도망쳤을 뿐이었다. 첫사랑에게 바친 첫 고백은, 그렇게 닿을 수 있었다. 


소연이 또한 나를 학기 초부터 너무 좋아했다고, 나름 표현을 했는데 몰라줘서 사실 여러번 포기한 순간도 많았다고, 포기할거라 다짐했지만 그럴때마다 한번씩 자신의 마음을 툭, 툭 건드리는 행동에 끝끝내 포기하지 못했다고. 그런데 이렇게 자신의 짝사랑이라 생각한 선배 입으로부터 먼저 좋아하는다는 말을 들으니 너무 현실같지가 않고 지금 취해서 그런말 해놓고 내일 일어나서 없었던 일로 하는거 아니냐는 말을 하며 불안감을 보였다. 


나는 여전히 취한 상태였기 때문에, 내 진심을 보였기 때문에, 소연이의 모든 질문에 그동안 담아두었던 날것의 감정 그대로의 대답을 했고 여러 부끄러운 질문들과 시간이 지나고 결국 우리는 서로의 첫 연인이 되었지. 뭐 그렇게 우리는 사귀게 됐고, 만취한 부축해주며 내 자취방으로 갔다. 우리는 밤새 이야기 꽃을 피우며 사랑을 속삭였고, 조금이나마 정신을 차리며 앞으로 해야할 일들을 정했다. 시간은 상대적이라 했던가, 어느샌가 서연이가 떠나야 할 시간이 되었고 이제는 여자친구가 된 소연이가 본가로 올라가야 했기에 나는 내 여자친구를 자취방까지 바래다주며 1주일 뒤, 첫 데이트를 약속하고 내 방으로 돌아와 카톡을 주고 받으며 이 모든것이 한 여름밤의 꿈이 아니길 바라며 깊디 깊은 잠에 들었다. 




자, 그런데 결국 1주일만에 헤어졌고, 이제 그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위에서 말했던 소연이와 내 동기를 엮었다고 한 것, 그게 시발점이었다. 


나는 내 동기가 소연이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소연이는 전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 얘기가 정말 사시인지 나에게 물어봤고, 나는 거짓말을 하기 싫었기에 내 동기는 너를 좋아한게 맞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소연이는 그저 안믿긴다는 반응 뿐이었기에 크게 문제로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게 모든 일의 원흉이었다. 


나의 고백 이후 우리는 동아리 내 커플로, 학교 CC이기에 이를 숨기자고 이야기를 했고 그렇다면 내 동기에게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동기 입장에서는 그렇겠지, 자신이 좋아하고 있는 아이를, 심지어 내가 잘 해보라고까지 얘기했던 애를, 그 사실을 알고있음에도 내가 먼저 고백해버리고 사귀게 되었다는 얘기를 들어버린다면, 나같아도 정신이 나가버릴거라 생각한다. 그렇기에 나와 소연이는 이 문제로 엄청난 고민을 시작했다. 


그런데 참 웃긴게, 내가 소연이를 동기와 엮으며 마음을 떠본 행동에 대한 업보를 받은거더라. 


소연이는 자신이랑 엮인 동기에게 상상 이상으로 많은 조언들을 받았고 사소한 질문이나 궁금증, 술에 취하면 어떻게 하는지, 어떤 상황에서 뭘 하면 좋을지, 동아리 활동 갈때 어떻게 행동하면 되는 지 등 생각보다 가까운 사이였고, 전여친의 입으로 정말 많은 조언과 도움을 받았고 너무 편한 선배이고 마치 자신의 친오빠 같은 사람인데 나랑 사귀게 되면서 내가 싫어할테니 이 관계를 유지하면 안되는다는게 너무 힘들다더라. 그리고 만약에 나랑 사귀게 되었다는 사실을 듣고 내 동기가 동아리를 나간다거나 동아리 내 분위기가 바뀔 수 있고 친오빠 같은 이에게 상처를 준다는 생각에, 동아리에 피해를 준다는 사실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호소했다. 



나도 이해는 한다. 군 입대 전, 회장을 하던시절 내 삶에 있어서 동아리는 전부였고 나의 20대 초반을 전부 쏟아부은, 너무나도 소중한 곳이었으니까. 지금도 그 마음이 있기에 고백하기 전까지 내 마음을 어떻게든 접고 숨겼던 거니까. 그래서 이 부분은 내가 따로 내 동기와 이야기를 할 것이고 동아리에 피해를 끼치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건 내가 잘못한 것이지 너가 마음을 쓸 일이 아니니까 걱정말라며 어떻게든 안심시켜주려 했다. 


사람의 희망은 빗나가고 불안은 빗나가질 않는다고 했던가, 이 얘기를 하고 다음날부터 연락을 해도 반응이 조금 뚝 뚝 끊기고 답장에서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느껴졌다. 처음에는 내가 뭔가 불안하게 만든것이 있나, 너무 관심 표현을 안해준 건가, 실수한 게 있나 생각하며 온갖 망상을 하고 있었고, 나는 어차피 곧 첫 데이트를 하며 볼 것이고, 서로가 첫 연애이기 때문에 데이트날 만났을때 서로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을 하며 맞춰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데이트 전날, 항상 카톡을 보내면 10초안에 전부 읽던 소연이가 새벽부터 오후 5시가 되도록 카톡을 읽지 않았다. 하루종일 엄청난 불안감에 휩싸였고 차마 전화를 해보지도 못하고 어쨌든 학교로 올테니까 기다려 보자며 스스로를 위로하며 최대한 버텼다. 그날 밤 10시,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자마자 울음기를 가득 머금은 채로 소연이가 한 말은 


"선배.. 정말 죄송한데요.. 저희 그냥 그만하면 안될까요?" 


였다. 약간은 각오하고 있던, 어쩌면 제발 내 감이 빗나갔으면 했던 그 말을 들었다. 이유를 물어보니 나에게 내 동기가 자신을 좋아한게 사실이었다는 말을 듣고 이러면 안되는걸 아는데 자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에 괜히 의식이 된다고, 저는 선배 너무 좋아했고 지금도 좋아하는데 그 말을 의식해버는 자신이 너무 쓰레기같고 싫고 선배에게 죄송해서 사귀면 안될 것 같다고, 이런 상태의 내가 선배랑 사귀는건 사람으로서 하면 안될 짓이라고, 스스로를 용납 못한다고, 그렇게 울면서 이야기를 하는데 그때 들은 생각은 


"아, 차인거구나. 나보다 내 동기가 더 좋은거구나." 


라는 생각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부정적인 사고로 무한히 빠져버릴거라는 생각에 일단 만나서 이야기 하자고 하고 참담한 기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만나기로 한 학교 정문 앞, 얼굴에는 눈물자국이 선명하고 눈주변은 빨갛게 부었으며 목소리가 떨리는 채로 


"선배...." 


하며 6일만에 다시 만난 나의 후배, 나의 첫 여자친구, 이제는 나의 전 여자친구. 


마음이 아팠다. 내가 아프게 한 것 같고, 내가 조금만 더 내 마음을 솔직하게 이야기 했다면, 내가 용기를 아주 조금만 더 냈다면, 이 아이는 울지 않았겠지 라며 스스로를 원망했다. 


소연이가 말하는 이별을 다짐한 이유는 5가지였다. 


내 동기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에 남자친구가 있음에도 괜히 의식하게 되어 미칠듯이 미안한것, 내 동기와 나의 4년넘게 이어진 친구 관계가 자신 하나로 인해 무너지는것에 대한 죄송함과 극심한 스트레스, 이번 일로 인해 동아리에 끼치게 될 영향에 대한 걱정, 자신에게 있어서 동아리는 학교생활의 전부고 너무 즐겁고 부원들 모두가 너무나도 소중한데 그것이 마치 모래성처럼 무너져버릴 수 있다는 공포감. 언젠가 나와 헤어지게 된다면 그때 닥치게 될 상황들과 자신의 감정에 대한 불안감. 


어느정도 눈치가 빠른 사람들은 알겠지만, 이 아이는 자존감이 매우 낮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으나 이렇게까지 모든것에 스트레스를 받을 줄은 몰랐던 것이고, 이것을 극복할 만큼의 정신력이 아직은 부족하나는 것을 몰랐다. 최대한의 설득을 해보았고 더이상 불가능 하다고 판단이 든 순간부터는 적어도 이 아이가 언젠가 비슷한 상황이 와도 이를 극복할 수 있는지, 지금 너의 행동이 결국은 도피가 되어버릴 수도 있다는 이야기, 어쨌든 나는 여전히 너를 사랑하고 너보다 더 많은 시간과 애정을 동아리에 투자한 내가 그 모든 위험부담을 감수하고서라도 너를 선택한 것이라는 이야기까지... 참 많은 이야기들을 나눴지만 결론은 이별이었다. 


이 아이는 "저는 선배를 좋아했고, 지금도 좋아하고, 앞으로도 좋아할거에요." 라며, "저는 이 선택을 분명 후회할거에요." 라며, "더 늦기전에 차라리 예전처럼, 선배에게 제가 치근덕 대고 선배가 틱틱대며 피하는 그런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라며 눈물을 애써 참으며 말하는 너에게, 더 이상은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 이후에는 조금은 시덥잖은, 약간은 분위기를 풀 수 있는 이야기들을 하며 서로의 연인으로서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우리 둘은 서로 팔짱을 끼기도 하고, 손을 맞잡고, 툭 툭 건드리기도 하며 어쩌면 마지막이 될 둘만의 교정을 거닐었다. 


우리는, 아니 나는, 소연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교정을 거닐었고, 불과 6일 전에 걸었던 거리를 똑같이 지나갔다. 


같은 장소에서, 


우리는 사랑을 속삭였고, 


이별을 고했다. 


이 길은 모든일을 기억하고 잔잔히 담아두고 있겠지. 

이 길은 모든일을 담아두고 잔잔히 나에게 말을 건네겠지 

이 길은 모든일을 건네주며 묵묵히 우리의 비밀을 지키겠지. 


내가 이 길을 거닐때마다 나는 그 비밀을 되새기며, 그날의 감정을 떠올리겠지. 


행복, 기쁨, 희열, 쾌감, 사랑, 상애, 안심, 불안, 걱정, 슬픔, 비탄, 오열, 절망, 분노, 허탈, 황망 - - - -. 


이미 지금 내가 겪고있는 이 감정을 전부 겪은 뒤 이별을 다짐한 너를, 다시 붙잡고 설득하기에는 너의 모습이 너무나도 처연해 보여 차마 그럴수가 없었다. 


결국 최후를 고하며 학교 정문 앞, 내가 자취하는 동네와 전여친이 자취하는 동네가 갈라지는 횡단보도 앞에서 서연이는  


"이제 여길 건너면 남친에서 선배네요?" 


라며 애매한 미소를 짓는 너를 보고 지금 당장이라도 붙잡고 오열하며 제발 마음을 돌려달라고, 나는 너를 너무나도 사랑한다고, 이대로 끝난다면 내가 무너져버릴 것 같다고, 평생 후회할거 같다며 매달리고 싶었지만, 나는 그저 약간의 미소를 지으며 


"그러네." 


라는 말밖엔 하지 못했다. 그러자 


"오빠~" 


하고 날 부르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는 널 보고 나는 다시 고개를 돌리고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신호가 바뀌고 이젠 정말 가야하는 순간에, 


"선배,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라는 말을 나에게 건네는 널 두고 나는 그저 묵묵히 뒷짐을 쥔 채 길을 건넜지. 길을 다 건너고 뒤를 돌아보니 여전히 나를 바라보는 너에게 


"얼른 들어가, 비오니까 조심하고 먼저 들어가." 


라고 하자 알겠다고 말하며 여전히 서있었고, 결국 나는 가는척을 하다 뒤돌아서 다시 네게 다가가니 너는 장난을 치는줄 알고 살짝 웃으면서 조금씩 도망치는 듯한 행동을 했지. 내가 가다가 멈추면 너도 멈추고, 내가 다시 움직이면 너는 다시 도망치고, 결국 학교 정문앞을 벗어날 정도가 되어서야 너는 너의 자취방을 향해 움직였고, 나 또한 그모습을 한참을 바라보다 뒤돌아서 천천히, 느리게, 스스로가 걷고 있는디 의심이 될 정도의 속도로 마치 아틀라스가 떠받들고 있는 지구의 무게처럼 나를 짓누르는 마음을 이끌고 발걸음을 옮겼다. 



소연이는 MBTI를 좋아했다. 내 MBTI인 INTJ에 관한 설명들을 읽어보면서, 어느정도 맞는 부분은 있다고 생각은 하는데 결국 사람마다 다 차이가 나기에 재미로는 볼만 하다고 생각한다. 


INTJ의 특징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감정에 휘둘리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 


"어떤 상황에서도 그것을 분석하려 한다는 것" 이다. 


당연하게도 나 또한 이렇게 된 원인, 내 동기와 억지로 엮은것과 내가 용기를 내지 못한것, 끝까지 붙잡지 못한것, 이별을 결심하기 전에 연락해 미리 막지 못한 것... 오만가지 생각을 하며 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걷다가 더이상 서있고 싶지도 않아서, 이 감정을 알기 위해서, 지금 내 상황을 판단하기 위해서 그자리에 주저 앉았다. 


"하하. 마치 드라마 속 이야기 같은걸. 이별을 하고 새벽 밤길에 주저앉아 있다니 색다른 경험이야." 


라며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장마는 아직 끝난게 아니었던가 보다. 밤동안 빗방울들을 떨어뜨리던 하늘은, 이제는 우리의 상황을 대변하듯 빗줄기가 되어 더 많이 쏟아지더라. 영화처럼 말이다. 그저 떨어지는 비를 맞으면서, 여전히 지금이라도 붙잡을까, 나는 왜 솔직하지 못했을까 라며 평소의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원인을 찾아 그것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방향으로 돌아갔을 내 사고가, 그저 제자리에서 맴돌고만 있었다. 


그리고 다시금 깨달았다. 


"아, 나는 너를 말로 못다할 만큼 사랑하는구나, 네가 나를 좋아하는 것보다, 나는 너를 사랑하는구나, 뒤늦게 사랑을 깨달은 나는, 내 평생에 있어 모든것을 바칠 만큼 너를 사랑하는구나." 


그러면 뭐하겠나, 이미 끝나버린걸. 


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서연이가 엄청난 고통과 고민속에 이 결정을 내렸으리라는 생각에 차마 연락을 할 수 없었다. 지금 나만큼, 아니 나보다 더 힘들었고 힘들 것이라 생각이 되기에, 나는 그저 끝까지 내 진짜 감정들을 숨긴채 서연이를 걱정해주며 돌아갈 수밖에 없는 내 자신이 더럽게 미웠다. 


그렇게 멍하니 비를 맞으며 주저앉아 있다가 결국 집으로 돌아왔고, 얼마 뒤 카톡으로 나랑 서연이가 사귀는 것을 알고있던 후배 하나가 장문의 메세지를 보냈다. 


내 전여친에게 이야기는 들었다고 나를 위로하며 


"그 아이는 자존감이 낮기에 이렇게 된거다. 둘이 여전히 좋아하니까 이대로 끝나는건 너무 안타깝다. 2학기때는 철벽치던거 집어 치우고 대놓고 꼬셔라, 인연이라면 언젠가 다시 이어지지 않겠느냐, 자기의 조언대로 할지 고민해보라." 


나는 그 말에 나는 고민 끝에 답장을 보냈다. 


"조금이라도 설득 해보려고 하긴 했는데 이렇게 결정하기까지 분명 많은 생각을 했을거란걸 알아서 일단 받아들인거다. 충격적이지 않냐고 하면 거짓말이긴 하지만 내가 확실하게 했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잘못한 것들이 있기에 오히려 실수했던 부분을 알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나는 이대로 포기 안한다. 그 아이의 말을 들으면서도 속으로는 이미 결정 했다고, 그 아이가 다른 것들을 포기하면서 다시 나랑 만나는걸 선택하게 하면 되는거라고, 노력했는데 안되면 그때 가서 깔끔하게 인연이 아니었구나 하고 포기하면 되는 일이라고, 나랑 그 아이 사이에서 고생할 필요 없다고, 네게 부탁하고 싶은건 그 아이를 많이 다독여 줬으면 한다고, 지금 제일 상처받고 스스로에게 쓰레기라고 할 만큼 자존감 무너진 상태니까 그걸 케어해 줄 사람은 너랑 다른 후배 한명 뿐이라고. 이미 담배도 끊고 옷들도 잔뜩 샀고, 하던 운동 이제는 다이어트 더 해서 2학기때는 복근 만들거라고. 나에게 있어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목적의식의 유무인데, 그 목표가 생겼기 때문에 내 걱정은 말고 그 아이의 자존감을 올려주고 케어만 잘 해달라고. 너도 고생할텐데 미안하다고. 내가 더 확실했어야했다고." 


내가 겪었던 아픔과 감정은 배제한 채, 내가 앞으로 할 수 있는 것들만을 정리해 답장 해 주었다. 


그러자 답장으로 이미 케어해주고 있으니 걱정말라며 둘이 다시 만나게 되는 날까지 화이팅이라며 진심어린 응원을 해주는 내 후배, 그래도 잘못 살지는 않았구나 라는 생각도 잠깐 들었다. 


그렇게 나름대로 답장을 보내고 나니 그래도 조금은 머리속이 정리가 됐다. 술의 힘을 빌려 잠에 들고 난 뒤, 잠자리에서 일어나 늘 가던 헬스장에 가서 운동을 격하게 했다. 그런데 머릿속에 이 모든 행동들이 그 아이와 다시 재회하기 위해, 그 아이를 다시 내게 돌아오도록 만들기 위해서 라고 생각하니 스스로를 정말 극한까지 몰아갔다. 정말 쓰러지기 직전까지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고 런닝머신을 달렸다. 미치듯이 달리던 도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 떠올랐다. 


니체의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 


참 좋은 문구다. 이 말을 떠올리며 미친듯이 운동했다. 운동을 하면 적어도 사고방식이 조금은 긍적적으로 변하고 에너지를 소모할 수 있어 잡생각이 덜해지니까. 그리고 다짐했다. 


"아, 강해져야 겠다. 이 아이가 그렇게 울며 말해준 진심을 알았으니 그 모든것을 감싸고 나에게 의지할 수 있게 강해지면  되는구나" 


그렇게 나의 마음과 방향을 정했다. 탈진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와 밥을먹고 씻고 누워 생각을 정리하며 인터넷, 유튜브, 구글 등에 이별에 관한, 나에게 참고가 될 법한 양질의 정보들을 찾아다녔다. 과연 이런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할까, 이런 감정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까, 어떤 상황이 닥쳐도 늘 해오던 정보 수집을 시작했다. 


그런데 누가 이렇게 말하더라, 상황이별은 참 잔인한 행위라고. 


차이는 사람 입장에서는 자책하게 되고 여전히 서로 좋아한다고 생각하기에 너무나도 괴롭고 더욱 미치게 만드는 말이라고, 정말 사랑했다면,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컸더라면 오히려 헤어지지 않을거라는 말. 그 말을 보고 정말 가슴이 찢어지는거 같았다. 인정하지 않으려 했는데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말이었다. 


여전히 나는 이 아이가 나를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본인이 직접 말하기도 했고. 단지 그 마음의 크기가 아주 조금, 정말 미세한 만큼 부족해서 이별을 택한 것 뿐이라고, 머릿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마음 한편으로는 정말로 이 아이가 나랑 이어졌지만 별로여서, 마음이 떠나서, 내 동기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말에 마음이 변해서, 그 동기가 더 좋아져서 떠난거라면 나는 정말 어떻게 해야할까. 이게 흔히 말하는 차였다는 것일까 라는 생각들.... 


해결되지 않은 수많은 의문들과 해소되지 않은 수많은 감정들을 내 머릿속에 여전히 담아둔 채로, 마치 장마철의 먹구름이 잔뜩 껴 흐릿한 하늘처럼, 종종 아주 약간의 햇살이 내리쬐는 하늘처럼, 나는 장마를 맞이한 내 마음을 이끌고 오늘도 강해지기 위해, 앞을 향한다. 


나에게 있어 첫 사랑은 마치 한여름의 장마처럼 축축하고 불쾌하지만, 언젠가 이 모든것이 지나갈때면, 맑게 갠 하늘의 가을 바람이 불어오리라는, 그런 희망을 가지며 


나의 첫사랑은 


나의 장마는 


그렇게 이별을 고했다. 



수필임 ㅅ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