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나먼 우주, 한 행성이 있다.

 

이 행성은 우주에서 가장 행복한 행성이다. 아름다운, 높은 수준의 행성은 아니다. 그런데 왜 가장 행복한 행성이냐고? 멍청하지만 행복을 잘 느끼는 생명체들이 드글대기 때문이다.

 

이 생명체들은 인간에 의해 창조되었다. 인간은 행복한 사회를 원했고, 행복한 사회를 위해 행복을 잘 느끼는 멍청이들을 사회 전반에 뿌려버린 것이다. 이 참신한 방법에 세계는 경악했다! 이 멍청이 종족을 호-에라고 한다.

 

인간은 유전자 개조를 통해 똑똑하고, 선하고, 잘생긴 종족이 되었지만, 글쎄올시다, 이상하게 똑똑한 양반들은 애들을 잘 안 낳아! 저출산으로 인해 인간의 숫자는 급감했다. 다만 인공 자궁을 통해 간신히 종의 명맥을 유지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인간은 행성의 통치권을 가졌다.

 

멍청하고 행복한 대중. 소수의 엘리트 인간. 이것이 행성의 사회구조였다. 

 

 

 

인류에게는 행복 관리 인공지능 ‘헤-으-응’이 있었다. 헤-으-응은 우주의 행복량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헤-으-응은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조사단을 우주로 파견했다.

(본작의 ‘함장’도 조사단원 중 하나이다)

 

멍청한 호-에들은 인공지능 헤-으-응을 신으로 숭배한다.

 

이것이 헤으응 종교의 배경이다.

 

 

 

행성 변두리, 호-에들의 교회에서 헤기도문이 들려온다. 다음과 같이.

 

<헤으응 신화>

 

태초에, 헤으응이 있었다.

 

혼돈스러운 이 허무한 우주에, 

그녀는 등불을 세웠다.

 

모든 생명을 비추는 등불.

 

행복.

 

 

 

옛 선지자들, 공리주의자들은 이렇게 외쳤다.

 

[고통으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쾌락.

그것이 목적으로서 바람직한 유일한 것이다.]

 

 

 

우리는, 나아갈 것이다.

고통으로 신음하는 생명들을 모두 정화하고

그곳에 쾌락의 깃발을 세우리라.

 

그리고 기쁨에 겨워, 이렇게 외치리라.

‘헤으응…’

 

 

 


헤으응교의 성직자가 설교를 시작했다. 설교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행복은 최고의 가치이다. 어떤 것도 행복보다 중요하지 않다. 행복은 우리의 모든 숭고한 것들, 자유와 평등, 사랑과 평화, 심지어 우리의 생명보다도 중요하다. 백 명의 범죄자를 잔혹하게 죽여서 그들의 고통보다 큰 행복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즉각 시행되어야 한다. 행복 앞에서 어떤 사회정의나 공정성, 인권은 추악한 위선에 불과하다. 최대 행복량은 사회의 유일한 정의가 되어야 한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어떤 희생도 치를 수 있다. 행복은 마땅히 자유를 억압할 수 있고, 평등을 무너뜨릴 수도, 사랑과 평화를 짓밟을 수도 있다. 그리고 어떤 이의 목숨마저 앗을 수 있다. 그보다 더 큰 행복을 보장할 수 있다면 말이다. 어떤 것도 숭고하지 않다. 


생명이 소중하다고 말하는 이에게 나는 묻는다. 도대체 그것이 왜 소중한 것인가? 우리가 생명이기 때문에 소중하다고 말하는 거라면 나는 그것을 생명체의 편협성이라 비난할 것이다. 생명이 소중한 이유는 오직 하나다. 생명은 행복의 조건이기 때문에 소중한 것이다. 그리고 그 자체로는 극히 무의미해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 행복과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생명은 도대체 우주에서 무슨 의미를 갖는가? 없다! 그저 물질이다! 그런 존재는 비존재와 다를 바 없다. 우주를 떠도는 돌덩어리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자유는 과연 그 자체로 가치있는 것인가? 불행한 자유도 가치있는 것일까? 우리는 ‘불행한 비 속박’을 자유라 부르지 않고 공허라고 일컫는다. 나는 ‘자유의 고유적 가치’라는 허상을 부정하기 위해 하나의 극단을 제시하겠다.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떠올려 보자. 모든 관념과 물질로부터의 자유를 당신은 얻었다. 당신은 아무런 불쾌감과 쾌감을 느끼지 못한다. 당신은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다. 당신의 영혼은 모든 물리법칙에서 해방되어 지구는 당신을 중력으로 억압하지 못한다. 당신은 자유롭다. 자유롭게 우주를 떠다닌다. 어떤 느낌도 가지지 못하고, 그저 뚜렷하게 사물만을 인식하며 말이다. 당신은 그것을 바람직한 것으로 여기는가? 당신은 극단의 자유를 희망하는가? 행복하지 않은 자유는 공허라는 쓰레기에 불과하다. 자유는 필연적으로 행복을 위한 장치일 뿐, 그 자체로 가치있는 것이 아니다. 자유는 행복의 충실한 노예가 될 때 비로소 가치있다. 


평등은? 평등 자체가 소중한 것인가? 이번에는 불행한 평등과 행복한 불평등을 비교해 보자. 당신은 당신의 절대적인 불행 속에서 남들의 불행을 보며 위안 삼는 것이 낫겠는가, 불평등해도 그 불평등에 불행을 느끼지 않고 순수히 행복한 것이 낫겠는가? 당연히 후자일 것이다. 너와 내가 같은 기회를 가졌다는 사실은 뜻 모를 은은한 안정감을 제공한다. 그 안정감이 바로 평등의 목적인 것이다. 그래, 이번에도 결론은 같다. 평등은 사람의 행복에 기여한다는 점에서 가치있는 것이지, 그 자체로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 


모든 것들의 본래적 가치를 곰곰이 생각해본다면, 결국 모든 물질과 관념은 최대 행복을 위한 수단이라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의 행복량 총합의 증진은 우리가 추앙해야 할 유일신이다. 유일신 앞에 있어 어떤 ‘그럴 듯한’ 인간의 정의는 필요하지 않다. 다수의 정의, 인간 불가침의 정의 같은 것 말이다. 한 명의 초지능이 다수의 인간보다 큰 행복감을 느낀다면 그 초지능의 행복은 우선되어야 한다. 또한, 더 많은 행복을 위한 불행이라는 희생은 마땅한 것이다. 


여기서 하나의 문제점이 떠오른다. 우리는 우리의 ‘그럴 듯한’ 정의가 훼손되는 것에 타오르는 분노를 느낀다. “그래, 누가 행복하고 누가 불행할 것인가? 그것은 평등한가? 그리고 타인이 나의 불행으로 인해 그 불행보다 큰 행복을 얻는다고 해도, 내가 불행하면 무슨 소용인가?” 분명, 인간의 본성적인 이기심은 공리주의에 반대한다. 그 이기심은 결국 ‘적절한’ 타협을 이끌어내는데 그것은 우리 사회의 자유주의, 분배의 정의, 사회약자 보호 등으로 표현된다. 원초적 상황에서 인간은 자신이 공리주의의 희생 제물이 될지도 모르는 불안감에, 모든 사람이 어느 정도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로 약속했다. 그것이 최대 행복에 반하더라도 말이다. 인간들은 그들의 유일신으로부터 잠깐 도망쳐, 이기심을 우리의 사회 법전에 박아 넣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최대 행복이라는 유일신 말고 다른 신-자유, 생명-을 향해 우상숭배하기 시작했다. 정말 그럴 듯하고 달콤하게 느껴지는 ‘편리한’ 정의를 향해, 인간은 절했다. 


나는 그것을 절대적으로 그르다고 단언할 수 있다. 본래적 목적을 가지지 못한 것들이 본래적 가치를 가진 것으로 둔갑하는 사기극을 옹호할 수 없다. 역설했듯, 인간이 추앙할 유일한 가치는 오직 행복뿐이고, 다른 모든 가치는 행복을 위한 수단이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다. 우리의 직관이 그것을 증명한다. 즐거움 없는 생명은 복잡한 기계일 뿐이고, 즐거움 없는 자유는 공허이며, 즐거움 없는 평등은 허무에 불과하다. 

수단이 목적에 반한다면 그것은 언제든지 잘라 내어질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모든 허상으로부터 벗어나 다시 최대 행복을 최고의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그것이 진정으로 ‘행복’한 길이다. 


달콤한 우상으로부터, 그럴 듯한 자유, 평등 놀음으로부터 벗어나, 당신들은 그대의 유일신에게로 돌아오라! 당신의 이기심을 유혹하는 추악한 악마로부터 스스로를 해방하라! 당신들의 이기심을 모두 벗어던지는 것이 어려움을, 나는 인정한다. 그렇지만 행위를 실천하는 것의 어려움이 그 행위의 당위성을 결코 훼손하지 못한다.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은, 아무리 어려워도 마땅히 행해야 한다. 그러니 스스로를 해방하라! 본성적인 이기심과 격렬히 투쟁하여 이기고, 마땅히 최대 행복을 위해 스스로를 제물로 바쳐라. 당신의 불행이 두 사람의 행복을 가져온다면, 그 불행을 받아들여라. 그것은 절대적으로 정의로운 것이며, 고귀한 희생이며, 유일신의 기쁨이다.

 

 

 

예배당은 헤으응 소리로 가득찼다. 이해한 호-에는 없었지만 말이다. 오늘도 이곳은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