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야에 보이는 것은 하얀색 커튼, 시선을 조금 내려 보면 하얀색 침대에 하얀색 이불, 거기다 하얀색 베개까지 모든 것이 하얀색인 이곳, 그 인공적인 계절감을 드러내는 공간의 한 가운데에 누워있는 한 남성이 조용히 눈을 뜬다. 역시나 그의 눈에도 어딘가 이질적인 방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어딘가 어색하지만 반면에 어딘가 익숙한 모순적인 느낌을 주는 방. 그는 고개를 돌려 다시 한 번 천천히 방안을 살펴본다. 8평 남짓한 정사각형 모양의 방, 그러나 방이라고 부르기는 창문이나 문이 없는, 오히려 방보다는 감옥에 비슷한 공간. 막 깨어난 그의 귀에 높고 긴 형태를 알 수 없는 이명이 들려온다. 

그러나 그는 마치 이런 일은 별로 놀랄 만한 일이 아니라는 듯이 담담한 반응을 보이며 그곳에 있다. 현실이기 보다는 꿈이라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저, 다시 한 번 눈을 감았다 뜨면 그 공간은 사라지고 자신이 원래 존재하던 공간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어디선가 스쳐 지나가듯 들은 말, 만약 자신이 있는 곳이 꿈이라고 생각된다면 본인이 처한 상황을 생각하여 보라고 만약 너무나도 침착하거나 누군가 틀어놓은 영상을 보는 느낌이 든다면 그것은 꿈이라고. 그러나 남자는 침착하다, 과할 정도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다시 고이 접어 돌려보내며 그는 다른 방법을 생각하여본다. 꿈을 구별하는 가장 쉬운 방법, 자신의 팔이나 허벅지, 얼굴 등을 꼬집어본다.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필히 꿈일 테니. 손을 들어 얼굴을 꼬집는다. 하지만 얼굴은 자신이 무슨 일을 당하였는지 눈치 채지 못하고 있다. 꿈이라는 것을 확인 받은 남성은 본인의 행실이 꽤나 웃겼던지 그의 입 꼬리가 살짝이나마 올라갔다.

자신이 지금 겪는 순간이 꿈이라는 것을 확신하자 그의 행동 또한 여유를 되찾았다. 모처럼 찾아온 여유에 그는 다시 눈을 감고 생각에 빠져간다 점점 깊게 점점 느리게. 얼마나 시간이 걸린 것일까? 남성은 두 눈을 감은 채로 하얀 방의 한가운데, 하얀 커튼으로 감싸 안아진 하얀 침대에 누워, 하얀 이불을 덮고, 하얀 베개를 베고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마치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그렇다면 과연 그 남성은 누구인가? 그리고 어찌하여 이런 곳에 존재하는 것인가? 그도 다른 평범한 사람들과 같은 삶을 살아왔다 말할 수 있다. 어느 날 이른 새벽 가족들의 축하를 받으며 태어났고 다른 평범한 이들과 같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나왔으며 친구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꽤나 친하게 지내 고민을 털어 놓을 수 있는 친구는 몇 명 있었다. 학창시절, 공부는 그리 잘하지 않았지만 못하지도 않았기에 고등학교 졸업 후에 적당한 대학에 입학하여 다니다 휴학하고 군대도 같다왔다. 최근에는 졸업 후 그리 작지도 또 그리 크지도 않은 회사에 취직하여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인생. 아마 시간이 더욱 흐른다 할 지여도 평범한 인생이 송두리째 바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인생은 어느 소설처럼 반전이 가득하지도, 어느 영화처럼 드라마틱한 전개를 가지고 있지도 않을 것이다. 그들은 그런 속성을 지니고 있기에 소설과 영화로 불리는 것이니까. 너무나도 평범하기에 너무나도 무난한 인생,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기에 그는 흔히 우리 사회가 부르는 “일반인“이라는 조건을 만족하기에 너무나도 완벽하다. 그러기에 질문의 답은 더욱 어려워진다. 하필이면 일반인인 그가 어째서 이런 일을 겪는 것인가.

부스럭, 이불과 사람이 만나 나는 그 소리와 함께 좀 전까지 누워있던 남성이 다시 눈을 뜬다. 분명히 눈을 감았다 뜨면 원래 자신이 있던 곳으로 돌아가야 할 것을 아는 그였기에 그는 처음으로 당황했다. 당황? 원래 꿈에서 당황하는가? 이런 원초적인 물음은 집어 던진 채 꿈속에서 또 꿈을 경우도 흔하지 않지만 충분히 벌어질 수 있는 일이기에 그는 스스로를 진정시킨다. 이윽고 남성에 눈에 들어온 것은 바뀐 방의 모습. 커튼은 침대 옆의 한쪽으로 가지런히 모아져 있었고 그곳을 통해 보이는 하얀 벽에는 오후 12시를 가리키고 있는 하얀색의 시계가 있었다. 그것의 분침과 시침은 움직임을 멈춘 채 마치 남성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이 상황에 남성의 눈은 한차례 더 감긴다. 그의 생각은 이제 자신이 최근 겪어왔던 일로 넘어갔다. 분명히 어제는 회사의 회식이 있어 동료들과 술을 한잔 걸친 채 집으로 잘 돌아왔을 터이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그의 기억의 파노라마에는 술을 마시고 집으로 걸어오는 장면만 존재하지 집에 돌아온 기억은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생각나지 않는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그것이 아니라면 누군가가 자신의 머릿속을 헤집어 기억의 필름을 꺼내 마치 그 부분만 잘라 낸 후 다시 이어 붙여버린 느낌이 들었다. 복잡해진 머리를 털어내며 다시금 고개를 들어보자 보이는 것은 움직이기 시작한 시계였다. 벽면에 걸린 시계는 일정한 리듬감을 지닌 채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삶을 살아오며 남에게 이렇다 할 큰 피해를 입혀본 적도, 입어본 적도 없었다. 또한 사람들을 무례하게 다룬 적도 없었으며 누군가에게 큰 참견을 한 적도 없었다. 이 말은 얼핏 들어보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다는 이야기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그 누구에게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수준 이상의 관심과 사랑을 주지 않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때로는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허락된 무관심이지만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줄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줄을 끊어버리는 가위가 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나중에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면 흔히들 이런 반응을 내보인다. 본인의 행동은 남을 위한 것 이였다고, 본인은 진실을 몰랐다고, 그것이 아니면 누군가에게 관심을 주었을 때 오히려 자신이 상처받는 것이 두렵다고들 말한다. 

몰론 방안에 누워있는 남자는 그런 사실을 모를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사고 안에서 그의 행동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닌 진심으로 남을 위한 것이니까. 타인에 대한 적당한 관심은 자신에게 이득을 가져다주는 경우는 적으나 그만큼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는 일 또한 적기 때문에 그는 자연스럽게 이를 택한 것이다. 그러니 그의 적당한 관심으로 인하여 누군가가 잘못되더라도 우리는 그를 비판할 자격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들 또한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그러고 있었으니.

어느새 시계는 오후 십이시를 지나 오전 세시에 일렀다. 째깍째깍 들려오는 분침과 시침이 방황하는 소리는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워버린 지 오래였다. 결국 그는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 목적을 상실한 채 톱니바퀴에 맞물려 돌아가는 분침과 시침처럼 감히 거스를 수 없는 어떤 힘에 이끌리고 있었다. 시계가 오전 6시를 가리키자 가느다란 기억의 편린이 스쳐간다. 분명 집까지 별 문제 없이 도달 했을 자신이 무언가에 치여 공중으로 떠오르는 모습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 출처를 모를 불빛이 자신을 비추고 있다. 그리곤 누군가 급히 뛰어오는 발자국 소리. 원래라면 어느 때와 다름없이 평범한 하루의 일을 마치고, 평범한 하루의 회식을 마치고, 평범히 집으로 돌아와 내일이면 마치 끊임없이 돌아가는 톱니바퀴의 한 일원으로 다시 돌아갈 한명의 평범한 사람은 그날 평범함을 잃었다. 그날 밤 그는 차에 치이면서 평범함을 잃었다. 하지만 그를 친 운전자도, 치인 남성의 친구, 가족도 그를 친 운전자의 가족도 친구도 그날 모두 평범함을 조금이나마 잃어버렸다. 

평범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잃었을 때 그 비어버린 한 칸의 공백 또한 크다. 그런 평범한 한 사람의 인간이 우리 사회에는 일반인이라 부르는 존재들이다.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자신의 평범한 삶을 이어갈 존재들, 너무나도 평범하기에 너무나도 소중한 존재들. 그렇다면 우리는 서로에게 너무나도 무관심한 그들을 과연 일반인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가 자신에게 닥쳐온 사실을 깨달을 때 즈음 시계는 다시 한 바퀴를 돌아 처음 나타났던 그 모습 그대로 돌아갔다. 하얀색 방 한가운데 존재하는 그 남성이 모든 것을 이해하자 그 공간 또한 처음부터 이 모습 이였다는 듯이 그 형태를 바꾸어 갔다. 이제는 커튼도 침대도 시계도 없는 단순히 하얀 공간 한 가운데 놓인 거울 앞에는 더 이상 남성이라고 부를 수 없는 한명의 인형이 서있다. 

거울 속에 비친 그것의 형태에는, 더 이상 얼굴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챈이 있었네.. 예전에 고1땐가? 교내 문예창작때 내봤던 작품임 사실상 처음 쓴 단편인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