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에게 버림받은 소리마 가장 변방의 마을에도 눈은 내린다. 차가운 결정들이 달궈진 쇳덩이 위에서 익어가는 소리를 자장가 삼고, 차갑고 딱딱하게 얼어붙은 대지를 침구 삼아 나그네는 잠든다. 그는 꿈을 꾼다. 아주 먼 옛날의 이야기를. 마치 어제처럼 생생하지만 삐뚤뺴뚤한 추억을 회상한다.

 

10여 년도 더 된 이야기다전임자의 죽음으로 승진하게 된 젊고 의욕 넘치는 평기사와징집령을 받아 감옥에서 끌려 나온 마녀의 이야기시체를 태우는 매캐한 안개와그칠 줄 모르는 곡소리가 만연했던대전쟁의 가장 척박한 땅에서 피어난 애틋한 꽃망울어쩌면 진부하다고도 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피어보기도 전에 스러져버린 꽃을 회상하며그는 떠오르는 아침 햇살과 함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낸다싸늘하게 식어버린 난로의 주검을 받침대 삼아힘겹게 노쇠한 몸을 일으켜본다로디움까지는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칼날의 파편을 뽑아냈음에도그의 몸에 잔재한 마검의 의식은 질리지도 않고 말을 걸어온다대부분 이해할 수 없는 문자열의 반복이었으나이상하게도 그것이 자신을 원망하고 있음은 뚜렷하게 알 수 있었다어쩌면이미 마검의 의식은 사라지고 없고스스로의 환영에 시달리며 검의 탓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한나절을 더 걸어무론티 산맥의 중턱에 다다랐다눈 앞에 펼쳐진 설산의 절경기사단에 있을 적전쟁이 끝나고 휴가를 받으면 언젠가는 꼭 그 모습을 눈에 담고자 했던 풋내기 시절의 다짐이 떠오른다.

 

발걸음을 재촉해, 정상을 넘고, 다시 중턱이다. 어느새 해는 지평선 너머로 뉘엿뉘엿 지고 있었지만, 여관에서 묵기는커녕 싸구려 홉주 한잔 걸칠 노잣돈도 없었기에, 낡은 여관에서 새어 나오는 한 줌 빛과 온기에 의지해, 울퉁불퉁한 통나무 벽에 조용히 몸을 기대어 눕는다. 다음번 눈을 떴을 때도 숨이 붙어있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