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입 안이 텁텁해서 보니 혀 밑에서 영수증이 나오고 있었다. 

 

- 

 

“영수증악마네.” 

“영수증 악마?” 

“별 볼 일 없는 악마야. 네가 떠올린 날짜의 금전거래 내역을 영수증으로 뽑아줘. 위험하지는 않지만, 음. 성가시다 해야 되나?” 

 

친구는 그렇게 말하고서 이미 바닥에 몇 개 떨어져 있는, 내가 뱉어낸 영수증을 한 장 집어 들었다. 

 

“뭐, 내버려두면 사라질 거야. 길어봐야 한 달?” 

“그런 건가.” 

“여름감기 걸렸다고 생각하라고. 그럼.” 

 

그렇게 말하며, 친구는 내 영수증 한 장을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5평짜리 자취방에서는 두드러지게 보이는 손님의 자취를 눈으로 좇다가, 그 흔적을 대충 손으로 치워내며 벌렁 드러누웠다. 

 

“영수증 악마...라.” 

 

딱히 성가실 것도 없을 것 같은데, 하고 무심코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이내 그 혼잣말을 했다는 흔적을 지워내듯 양 팔을 공중으로 휘저었다. 혼잣말은 외로움의 증상이다. 외로움은 병이고. 

 

꽤 더운 여름인데 땀도 흐르지 않는다. 상앗빛 햇살이 창 틈새로 불어오면, 풍경(風磬)따위는 없음에도 어디선가 종소리가 청량히 퍼지고 있는 듯 착각하고 만다.   

 

댕- 

 

머릿속의 향과 소리에 집중하면, 찰나 스쳐간 향만큼이나 부드럽게 현기증이 찾아온다. 그 다음은 혀 밑에서 까끌까끌한, 묶음판매품 포장에 사용하는 플라스틱 비닐 냄새가 나는 것이 밀려 나온다. 영수증이다.  

 

[ 20@7- 7 -15  

 

# @@녹차- 1200 

# @@콜라- 1100 

# 오미자 차- 9000 

# 벚꽃 양갱- 12000 

# 버스- 2400 

# 택시- 4500 ] 

 

질척하게 젖은 그것을 뱉어내서 집어 올려 보았다. 진짜 영수증과 꽤 닮았다. 단순한 흉내인지 기능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바코드도 달려 있었다. 이것도 신기한 일이긴 하지만, 지금 신경 쓸 문제는 아니었다.  

 

“왜 나온 거지?” 

 

내가 떠올린 날짜의 영수증이 나오는 걸 텐데. 난 저기 기재된 날짜를 딱히 떠올리지 않았어. 

 

잠깐 누런색 고무마루 위를 구르던 나는, 곧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리고서 나름의 답을 도출해냈다.


---


숫기 없던 고등학생 때부터 변하지 않은 첫사랑이었다. 설마 너와 내가 사귀는 날이 올 줄 몰랐고, 설마 너와 내가 어울리는 날이 올 줄도 몰랐었다. 첫 데이트 때는 가슴이 아플 정도로 요동쳤다. 


두 번 환승해서 가는 곳이었다. 햇볕이 유달리 뜨거운 날이었건만, 그렇기에 풍경에 더 눈이 가서 버스 창가 자리를 고집했었다. 창 위에 달린 에어컨을 전부 내 방향으로 돌려놓고서 열이 바짝 오른 정수리를 식혔다. 

 

여름 풍경은 아지랑이의 한 붓을 거쳐 가서 와글거렸다. 바라보다 보니 어느새 한 정거장 더 지나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난 너보다 30분 일찍 도착하기 위해 망설이지 않고 택시로 갈아탔다.  

 

그리고 계획했던 대로 30분 전에 약속장소에 도착했을 때. 그 자리에 네가 있었을 때. 너는 구름의 여과를 거치지 않은 햇살 아래에서 빛나고 있었다. 네가 입고 있던 하얀색 옷은 청량하기 보다는 찬란했었다. 

 

그날. 2년 전 7월 15일. 유난히도 더웠던 그 해 여름.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 한옥마을의 조금 뜨겁게 데워진 황토색 흙길을 따라 걷다가 발견한 찻집에서. 너는 내 손을 붙잡고 조금만 쉬자고 했었고, 나는 그 찻집의 툇마루에 앉아 양갱과 오미자차를 주문했다. 

 

풍등은 녹색 바람이 불면 두 번 울렸다. 흘러 지나치는 바람보다도 가벼운 소리였다. 오미자의 새콤한 향은 여름이었다.  


---


그래, 그 날. 이 작은 자취방 안쪽을 휘젓고 간 바람이 그 날을 떠올리게 만든 것이다. 어떤 날이라고 떠올린 게 아니야. 어쩔 수도 없이 그 날을 떠올려 버린 것이다.  


결론이 나오자, 나의 시야는 서서히 그 때 풍경의 상을 띄고 있는 연기에서 벗어나 좁고 때 묻은 자취방의 천장으로 돌아왔다. 

 

내 자취방에는 색이 남아있지 않았다. 공간도, 향도 존재하지 않았다. 다섯 평의 허무 속에서, 난 잠시 눈을 감고 영수증의 잔향을 맡아 보았다. 어느새 빳빳해진 영수증에는 합성 잉크의 자극적인 향과 여름 특유의 햇살냄새가 겹쳐 나고 있었다. 

 

난 그 때, 살풍경한 이 자취방을 한 순간이라도 색으로 채워 준 영수증의 악마라는 것에게 감사하기로 했다. 

 

“잘까.” 

 

참 오랜만에 바로 잠에 들 수 있었다. 꿈에는 네가 나왔다.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환하게 미소지으며 내 손을 잡고 앞서 달려 나가는 네가 나왔다. 끝없이 하얀 모래사장의 지평선은 푸르게 젖어 들어가고 있었다. 

 

# 

 

“이건 뭐야.” 

 

친구는 내 방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 있음을 눈치 채고 질문했다. 그 친구의 시선 끝에는 검붉은 색 종이상자로 깔끔하게 포장되어 있는 양갱 한 상자가 있었다. 

 

“양갱을 왜 샀어?” 

 

끼니도 제대로 챙겨먹지 않는 내가 양갱을 산 게 어지간히 신기했던 걸까. 친구는 그 양갱상자를 들어 올려 봤다가 아직 포장조차 뜯지 않았음을 알고 나를 이상한 듯 바라보았다. 

 

“당겨서.” 

“양갱이? 갑자기?” 

“응.” 

 

내 단답에 친구는 이리저리 양갱상자를 둘러보다가, 이내 흥미를 잃은 듯 원래 있던 자리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차라도 마실래?” 

“네 집에 차가 어디 있어.” 

“같이 산 거 있어.” 

 

난 자리에서 일어나, 팔만 뻗으면 닿는 찬장에서 오미자차 파우더 상자를 뜯었다. 친구는 그 장면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광경처럼 쳐다보다가, 곧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영수증을 봤구나. 그렇지?” 

“뭐, 그렇지.” 

“하여간 쓸데없는 짓을 하는구만.” 

 

차가운 물에 파우더를 하나 뜯어 풀어 본다. 이 오미자차만큼은 제대로 마시고 싶어서, 평소처럼 파우더 봉투로 휘휘 저어 버리는 일은 차마 할 수 없었다. 작은 빨대를 꺼내 색이 완전히 풀어질 때 까지 느리게 섞어 보았다.  

 

“그게 바로 영수증 악마의 성가신 점이지.” 

“성가신 점?” 

“상념에 빠지게 만든다고. 이미 버린 영수증들을 다시 주워 다가 보는 거니까. 예전에 썼던 일기장을 다시 주워 보는 거랑 다름없어.” 

 

친구에게 오미자차 한 잔을 건네주었다. 친구는 윗도리를 펄럭이며 그 잔을 크게 한 모금 들이마셨다. 그녀는 저렇게 마시지 않았었다. 

 

“간간히 회상 정도는 괜찮지만, 너무 빠져들지는 않는 게 좋아. 영수증 악마도 재미 들리게 될 테니까.” 

“명심할게.” 

 

나도 한 모금, 맞닿는 입술이 조금 수줍게 느껴질 정도로 조심스럽게 마셔 보았다. 그 때 떠올렸던 맛이 아니다. 그 잔향, 그 여운이 남지 않는다. 기억 속 맛과 느껴지는 괴리감이 시리다. 

 

열린 창문으로 보이는 하늘색을 감미하던 나의 친구는 어느새 차를 다 마시고 훌쩍 떠나갔다. 나는 다시 홀로 남은 방 안에서, 아직 반 정도가 남은 차를 싱크대에 부어버리고 누웠다.  

 

불을 켜지 않은 자취방은 온전히 하늘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본디 회색인 천장도 그 색이 묻어 우중충하고 작은 하늘이 되어 있었다.  

 

너는 구름 낀 하늘을 싫어하지 않았다. 심한 곱슬머리를 숨기기 위해 아침마다 갖은 노고를 겪는 너임에도, 비가 오면 평소보다 복슬 거리는 머리털을 손질하는 것이 짜증났을 너임에도, 그 머리를 전부 정리하고서 나를 만나러 왔을 터인 너는 불평 한 번 한 적 없다. 

 

입 안쪽에서 언젠가 머금었던 네 머리칼만큼이나 까스레한 감각이 느껴졌을 때, 난 그것이 영수증임을 알 수 있었다. 

 

[ 20@8- 10- 6 

# @@티슈- 600 

# @@@ 더블버튼 코트- 176500 

# @@@ TR 어글리 스니커즈- 56000 

# @@ 떡볶이- 27000 

# 닭 꼬치- 1500 

# 어묵- 500 

# @@소주- 14000 

# @@모텔 43000 

# 버스 1050 

# 지하철 1050 ] 

 

이 날이 어떤 날이었는지 단박에 떠오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각함과 동시에, 내가 이성보다 깊이 숨은 무언가로 너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떠올려 보지 않으면 떠오르지 않는 날. 그러나 내 마음은 지나치는 일상 속에서도 모르는 사이에 너를 그리고 있는 듯 했다. 

 

다시 한 번 떠올려 본다. 1년 전 10월 6일, 젖은 하늘과 함께 봤던 것은 무엇이었나. 

 

---


어설픈 날씨였다. 마을버스에서 내려 지하철로 들어갈 때에도 그 생각뿐이었다. 비도 오지 않으면서 습기는 잔뜩 껴서 그런지 주변의 소리가 퍼져 울렸다. 경쾌한 메아리보다는 축축한 울림이었다. 난 그 소리를 지휘하듯 들고 있던 장우산을 까딱거리며 걸었다.  

 

역의 1번 출구. 넌 거리공연을 바라보고 있다가 멀리서 내가 오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허둥지둥 가방을 정리한 뒤 달려왔다. 사귄지 1년을 넘기고 있었건만, 나는 아직도 네가 너무 귀여워서 무작정 네 하얀 떡 같은 볼을 꼬집었다.   

 

날이 조금 쌀쌀해 져서 널 위한 코트를 샀었다. 그 코트에 맞춰 입으라고 조금 멍청해 보이는 운동화도 한 쌍 샀었다. 어글리 슈즈라고 했던가. 도무지 이해는 할 수 없었지만, 네가 유행이라고 했으니 믿었다. 넌 그것들을 받아 들고서 당장 내일부터 입겠다고 난리를 쳤다. 

 

흐트러지는 조명 아래를 앞서가던 너는, 나에게 짧은 비니 모자를 사 주었다. 멋 부리는 듯 한 모양새가 나와는 안 어울리는 듯 해 쭈뼛거리며 투덜댔지만, 네가 꽉 찬 눈망울로 마음에 들지 않느냐 물었을 때 차마 그렇다고 답할 수 없었다. 

 

점심은 흔한 체인점의 떡볶이였다. 재료를 직접 선택해서 가져오는 식이었는데, 라면 면발만 한 가득 챙겼더니 넌 그게 뭐냐며 새가 지저귀듯 웃었다. 자연스레 입가를 가리는 모습이 요염하게 다가와서 얼굴이 붉어졌었다.  

 

성인 남성을 껴서 먹기에는 양이 적은 곳이었다. 거리에 서 있는 포장마차 한 곳에 들어가 질리지도 않고 분식을 사 먹었다. 너는 닭 꼬치 하나만, 나는 닭 꼬치 한 개와 어묵을 사서 먹었다. 좁은 테이블에서 가끔 어깨가 부딪칠 때 마다 고장 난 라디오처럼 웃음이 튀어나왔다. 

 

저녁에는 골목에 숨어 있던 술집으로 향했다. 조촐한 찌개 안주 하나만 달랑 주문하고 참 많이도 마셨다. 우리의 밤은 술에 젖었다.  

 

너무 즐겼던 걸까, 어느새 4시간이나 마셨다는 것을 눈치 챈 순간의 네 표정을 기억하고 있다. 헤실거리며 붉어진 네 얼굴은 안개 속에 번진 네온등 같았다.  

 

술집에서 나오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낮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쏟아지고 있었다. 너는 네 핸드백을 꼭 잡으며 나에게 달라붙었고, 나는 미칠 듯이 뛰는 심장을 술 탓으로 넘기며 멋쩍음을 숨겼다.  

 

우산이 가린 시야는 나의 눈앞을 영화관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술에 취해 구불거리는 세상과, 무수히 쏟아지는 거울같은 비 사이사이로 반사되는 빛이. 흔들, 흔들. 불확실하게 일렁이는 아름다움에 빠져들어 버릴 것 같아서, 난 그 풍경에 삼켜지지 않기 위해 나를 붙잡은 네 온기에 집중했다. 

 

너도 나도 말이 없었다. 그 순간 우린 고동으로 대화했다. 나는 널 사랑한다고 전력으로 외치고 있었고, 너는 알고 있다고 답해주고 있었다. 시시각각 파문을 일으키며 형태를 바꿔가는 그 밤거리보다도 확실했다. 

 

도착한 곳은 좁은 모텔이었다. 네가 먼저 들어가 씻을 동안, 나는 너를 품느라 신경 쓰지 못하고 젖어버린 왼 쪽 어깨를 털어냈다. 그러다가 문득, 네 핸드백에서 불쑥 튀어나와 있는 손잡이를 발견했다. 

 

그것은 가방에 쏙 들어갈 정도로 작은 접이식 우산이었다. 그래, 너에게는 처음부터 우산이 있었다. 그 엉성한 수줍음은 가을이었다. 

 

---


붉은 색채로 유혹해오는 미려한 단풍보다도 우중충한 초가을의 풍경을 먼저 떠올리게 된 것은, 그 풋풋함에 감동해서였을까. 그저 영수증을 바라보던 중 희미한 비 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창 밖에서 나는 것인지 영수증에서 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느새 천장은 회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난 천장 빛깔을 띄고 있는 하늘을 조금 바라보다가, 도무지 그 때의 풍경이 보이지 않아서 창을 닫았다. 

  

눈을 감았다. 영수증을 코 가까이 가져다 대 보았다. 비 냄새. 또다시 현실에서 벗어나 현실이었던 곳으로 떠났다.  

 

# 

 

“누구 왔어?” 

 

친구는 들어오기도 전에 다짜고짜 그런 질문을 했다. 난 누가 숨을 곳도 없이 살풍경한 집 풍경을 한 번 돌아보고서, 무심하게 어깨를 한 번 흔들어 보였다. 

 

“그럼 이게 네 신발이라고?” 

 

그가 복도에서 잡아 들어 올린 것은 두껍고 투박한 운동화였다. 그는 신발을 이리저리 바라보다가 피식 웃으며 다시 있던 자리에 내려놓았다. 

 

“꾸며 나갈 일도 없는 놈이 어글리슈즈는 왜 샀대?” 

“그냥. 이뻐 보여서.” 

“너한테 이거랑 어울리는 옷은 없을 것 같은데.” 

 

꾸며 입는 것을 좋아하는 친구이다. 아마 그 평가는 틀리지 않았으리라. 그렇다고 상심하지는 않았다. 나도 저걸 신을 생각은 없으니까. 

 

“그래서. 좀 어때.” 

“뭐가.” 

“영수증 악마 말이야. 벌써 사라졌나?” 

 

그는 그렇게 말하며 제 집 마냥 방을 살펴보다가, 내가 한 구석에 모아둔 영수증 뭉치를 발견하고 멈춰섰다. 

 

“너 설마...” 

“왜.” 

“모아뒀던 거야? 네가 지금까지 뱉어낸 영수증들을?” 

 

그렇게 말하고서 그는 영수증 뭉치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입시 단어장처럼 묶인 그것들은 모아놓고 보니 꽤 그림이 됐다. 

 

“내가 전에 일기장에 비유한 적은 있지만, 이건 아니지. 이건 정상이 아니야.” 

“뭐가 정상이 아니라는 건데.” 

“저 신발도 영수증 보고 산거지?” 

 

친구가 내 심정을 이해할 리 없다. 내 외로움을, 내 후회를, 이 좁은 현실이 나를 어떻게 괴롭히고 있는 지 알 턱이 없다. 영수증 안에 있는 추억들이 얼마나 형형색색으로 빛을 내는 지 알 턱이 없다. 

 

“이런 짓은 당장 그만 둬. 금방 사라질 현상이라고. 붙잡고 있을 필요 없잖아.” 

“오늘은 그냥 돌아가라.” 

“뭐?” 

“그냥 돌아가라고.” 

 

조금 딱딱하게 튀어나온 말에 친구는 당황한 듯 나를 쳐다보다가, 곧 한숨을 푹 내쉬고서 머리를 쓸어 올렸다. 

 

“너 진정되면 다시 찾아올게.” 

 

그 한마디에 많은 감정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배려를 이해해서 가슴 한 켠이 아린 반면, 지금 내 삶의 유일한 위안거리에 대고 정상이 아니라는 표현을 사용한 그를 내보낸 것에 약간의 통쾌함을 느꼈다. 

 

집은 처음부터 손님 따위 없었던 것처럼 정적을 되찾았다. 난 특히 어두운 구석자리에 쭈그려 앉았다. 내가 모아놓은 영수증을 한 장 한 장 훑으며 눈을 감아 보았다. 언제부턴가 나는 영수증을 뽑아내기 위해 회상을 하고 있었다. 

 

[20@8 –12 -24 

 

# @@@@ 카푸치노- 4500 

# @@@게이트 @@식혜- 800 

# 버스- 2400 ] 


---


지독히도 추운 날이었건만, 야속하게도 눈은 내려오지 않았다. 저녁 전 까지 일했으니 다행이라고 감사해야 했으나, 아무래도 이브에 눈이 오지 않으니 안타까웠다.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버스를 타고 약속 지점으로 갔다. 저녁풍경은 우중충했던 아침과 점심보다도 밝게 빛났다. 창밖으로 어둠이 자리한 곳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찬 공기가 폐를 찔러서 머플러를 코까지 끌어 올렸다. 내 주머니에는 널 위해 준비한 무선 이어폰이 들어 있었다. 넌 그 날 베이지색 더플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그 안에 어색하게 튀어나온 실루엣을 모르는 척 하는 것이 힘들었다. 

 

예약한 호텔 옥상의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창밖을 내려다보면 젊은 빛들이 잔뜩 수놓아져 있어서, 넌 별보다도 위에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사실이었다. 그 날 우리는 분명 하늘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게 높이 있었다. 

 

내가 준비한 무선 이어폰을 꺼내자, 너는 맨 끝까지 올렸던 더플코트의 단추를 하나씩 풀며 안에 서툴게 감춰져 있던 번쩍이는 선물 상자를 꺼냈다. 선물 상자 안에는, 나에게는 생소한 명품 브랜드의 목도리가 들어 있었다. 

 

나는 그 목도리보다도 네가 더플코트로 숨기고 있던 달라붙는 니트에 더 관심이 가고 있었다. 너는 내 시선을 알아챘는지 단추를 잠그며 짓궂게 웃었다. 곧 호텔 제과점에서 주문한 케이크가 올라왔고, 우린 서로의 선물에 대해 감상을 남기며 그 케이크를 나눠 먹었다. 

 

식사 후 가볍게 나눈 입맞춤은 케이크보다도 달았다. 곧바로 침대로 들어가기에는 이 밤거리가 너무 아름다웠다. 너와 나는 녹아가는 촛불을 조명으로 하염없이 내리깔린 하늘을 바라보았다. 

 

입김처럼 흩어지는 종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현실의 끝자락으로 미끄러졌다. 꿈과의 경계조차 불확실한 밤이었다. 초의 심지가 타들어가는 소리는 겨울이었다. 

 

---


어렴풋이 들려오던 느린 캐롤 소리는 곧 매미울음소리에 찢어졌다. 습기인지 땀인지, 젖어버린 티셔츠를 벗어 던졌다.  

 

방 안을 훑어보았다. 전에는 운 좋게 들어오는 바람뿐이었던 공간이, 이제는 영수증과 너의 흔적으로 모양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아니. 지금 이 방에 남아 있는 것들은 네 흔적이 아니다. 흔적의 흔적. 난 네 잔해조차 되지 못하는 것들로 방을 메우고 있었다. 

 

스치는 시간은 현재이건만, 머무르고 있는 시간은 과거였다. 그 이질감이 나의 세상을 잠식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괴리감마저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새로 뽑힌 영수증을 영수증 뭉치 위로 얹었다. 스탬핑 작업을 하고서 천천히 그 내역을 다시 읽어 보았다. 너의 잔흔을 따라가 보았다. 

 

# 

 

기억은 점차 뚜렷해져 갔다. 너와 함께 보냈던 일들을 회상하다 보면 그 다음의 기억도 떠올랐고, 마침내 나의 회상은 가상 체험에 가깝게 느껴질 정도로 선명해 졌다. 5평짜리 자취방은 너로 가득 차 있었다. 너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난 그것을 너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이것을 한순간의 도피라고 한다면, 그 순간을 영원히 이어 붙여 도망치리라. 그 정도로 난 단칸방 안에 서린 괴리감에 홀려 있었다. 

 

“1월 17일...” 

 

1월 17일. 너와 나는 동물원에 갔었다. 코끼리열차를 타고 솜사탕을 먹었다. 넌 원숭이를 참 좋아했다. 원숭이를 향해 재롱을 부리는 모습은 펜스를 기준으로 입장이 역전된 것 같아 보여서 퍽 우스웠다. 

 

영수증에는 모든 기록이 남아 있다. 그 당시에는 무심코 지나갔던 것들, 그 당시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던 것들이 나의 감상까지 벗어나서 사무적으로 적혀있다. 그것이 일기장보다도 더욱 애달프고 감정적으로 다가왔다. 

 

친구는 더 이상 나의 자취방으로 찾아오지 않았다. 더위조차 내 방을 피해갔다. 이제 이 방은 너와 나의 성지였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더 이상 날짜가 떠오르지 않을 때 까지. 

 

“어?” 

 

당황했다. 크게 당황해서 무심코 몸을 떨었다. 몸을 일으켜 정리되지 않고 쌓인 영수증들을 헤집어 보았다. 빈 날짜가 있는 지 확인해 보았다.  

 

“안 돼. 안 돼...”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보이지 않았다. 가끔씩 비어있는 날짜를 찾아도, 너와 만나지 않았던 색 없는 날이었다. 어느새 너와 사귀었던 날의 기억을 전부 뽑아내 버렸나. 

 

“거짓말.” 

 

망연히 뱉었던 그 말 저편에, 나의 뇌리에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날이 번쩍였다. 무심코 그 날을 떠올려버린 나는 다급하게 입을 막았다. 이것만큼은 안 된다. 이 날만큼은 떠올려서는 안 돼. 제발. 제발 그만둬. 

 

하지만. 영수증의 악마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나의 혀 밑을 긁어내며, 내가 입을 가리든 말든, 취소 없이 영수증을 뽑아 주었다. 

 

제발 그 날이 아니기를 바라며 떨리는 손으로 그 영수증을 들어 보았다. 

 

[ 20@9 –4 –21 

 

# @@ 아메리카노 –1800 

# @@@@@ 9ml –4500 

# 라이터 -500 

# @@@@@@ 하프 갤런 아이스크림 -26500 

# @@소주 – 7000 

# 버스 –2400 ] 

 

그 날 이었다. 3개월 전, 4월 21일. 벚꽃이 흐드러지던 그 날. 

 

너와 나의 관계는 종말을 맞이했다.

 

 ---


유난히도 하늘이 푸르른 날이었다.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할지 대강 예상하고 있었다. 

 

우리는 카페에 들어갔다. 나는 아메리카노를, 너는 프라푸치노를 주문했다. 한참동안 우리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둘 다 오늘 왜 만났는지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서로에게 서투른 고슴도치가 되었다. 어차피 만나지 못하게 될 거 서로 참았던 말들을 감정적으로 뱉어냈고, 남아있던 인연을 불태우듯 열을 올렸다. 

 

너는 눈물을 흘렸고, 나는 닦아주지 않았다. 그 눈물이 흘리는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지만, 난 직접 듣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그래서 너는 내게 헤어지자고 말했다. 

 

네 가시가 철저히 무장하고 있던 내 마음을 관통했다. 튄 피는 벚꽃이 되어 흩날렸다. 아름다운 것이 서글프게 무너지는 것은 봄이었다. 

 

그저 허무해서 멍하게 동네로 돌아갔다. 쓰린 폐를 진정시키기에 한숨은 부족했기에 담배를 사 보았다. 영화 속 실연한 사람들이 아이스크림을 퍼먹는 장면이 떠올라 아이스크림도 사 보았다. 소주를 아주 많이 샀다. 한 번에 다 마실 것을 상정하고 샀던 것은 아니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다. 3일차부터 친구들과 다시 연락을 시작했고, 4일차부터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셨다. 신기하게도 슬픈 느낌이 들지 않았다.  

 

3개월. 3개월간 그렇게, 다니던 아르바이트도 그만두고서 슬픈 기분조차 없이 공허하게 살았다. 그리고 지금, 추억은 현실과 이어지고 말았다.  

 

추억의 색이 침식된다. 현실의 색이 돌아온다. 둘은 난잡하게 뒤섞이며 나의 머리를 뒤 흔들었다.  

 

아아, 그래. 나는 영수증을 통해 추억을 관찰하고 있었다. 경험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현실과 이어진 후 다시 떠올린 추억은 내 기억만큼 색채가 가득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았다. 

 

나는 숨은 찻집의 정취를 깨고 양갱과 오미자차의 사진을 찍어 올리는 너의 세속적인 모습에 실망했었을 지도 모른다. 

 

나는 그저 SNS에서 입소문을 탔다는 이유만으로, 원래 예약했던 음식점을 취소하고 비싸고 맛도 없던 떡볶이 집을 데려간 너에게 토라졌을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며칠 전부터 새 머플러를 사서 쓰고 다녔는데도 선물로 브랜드 머플러를 선택한 네 무관심함이 마음에 걸렸었을 지도 모른다. 

 

우리는 서로에게 완벽해 주지 못한,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연인이었다. 어디에나 있을 연애를 했으며, 어디에나 있을 끝을 맞이했다.  긴 꿈에서 깨어났다. 나는 추억이었기에 아름다웠던 너의 잔해를, 눈물을 흘리며 한 장씩 주워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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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기는 거미줄처럼 내 몸에 달라붙어왔다. 난 그것을 털어내듯 몸을 몇 번인가 쓸어 본 후, 내 발 밑에 쌓인 영수증들을 다시 내려 보았다. 

 

“진짜 할 거야?” 

 

친구는 그렇게 말하며 내 눈치를 보았다. 나는 영수증 위에 성냥을 던지는 것으로 답했다. 불이 서서히 번져 나갔다. 

 

“극단적이기는. 이렇게 까지 할 필요 있었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친구는 내 선택이 아주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불을 바라보는 눈이 번쩍거린다. 

 

“그냥 자기만족이지.” 

 

너와 헤어진 후 3개월간, 난 온전히 내 감정으로 살아오지 못했던 듯하다. 무통(無痛)이 아니라 무감(無感)이었다. 너를 한낱 추억으로 넘기려 했기에 그랬던 걸까. 더 이상 너와의 추억을 과거로 치부하고 피하거나, 그저 아름답게만 바라보는 것을 하지 않으려 한다. 언젠가 있었던 현재의 연속으로 받아들여 볼 생각이다. 나는 지금 온전히 현재의 나로서 외롭고, 서글프고, 개운했다. 

 

“영수증악마는 떠난 거지?”  

“그런 것 같네. 지난주부터 한 장도 나오지 않았으니까.” 

 

너의 상실을 이해한 날 이후로, 내 입에서 다시 영수증이 튀어나오는 일은 없었다. 이미 사 버려서 처치가 곤란해진 잡동사니들을 볼 때 이상하게 혀 밑이 간지럽게 느껴질 뿐이었다. 

 

“원래 그렇게 오래 머무르지는 않는 악마인데. 네가 어지간히 재미가 좋았나 보지?” 

“그랬나 보지.” 

 

타들어가는 영수증을 보며 대충 대답했으나, 난 그 영수증의 악마라는 것에게 정말 감사하고 있었다. 그 악마라는 것이 지금 나를 보고 있을지 궁금해 하던 차에, 갑자기 혀 밑으로 까칠한 감각이 느껴졌다. 

 

“으에에에...?” 

“뭐야. 아직도 매달려 있어?” 

 

갑자기 튀어나온 영수증은, 어딘가에서 연상했다고 생각하기도 기이한 날짜였다. 

 

[ 20@5 –8 –11 

 

# @@식혜 –1600 

현금영수증 ] 

 

“@5년이면 우리 고2 때 아니냐?” 

 

친구의 말에 문득 떠오른다. 그래. 그 날을 잊고 있었던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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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과 후의 교실은 텅 비어 있었다. 여름이라 그런지 노을이 늦은 날이었다. 6시 반, 내가 그 시간까지 학교에 남아있던 것에는 특별히 이유도 없었다. 그저 교실에서 보는 노을은 어떨지 궁금했을 뿐이었다. 

 

나는 그 때 나를 괴롭히고 있던 상념이 외로움이라는 것을 모를 정도로 어렸다. 길어지는 그림자가 보도를 덮을 때 즈음에는 돌아가려고 하고 있었다. 너는 그 때 나에게 다가왔다. 

 

“여기서 뭐해?” 

 

너와 그렇게 많은 대화를 나눈 편은 아니었다. 사이가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친구라고 말 하고 다니기에는 어색한 관계였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유쾌하지는 않은 반응으로 너를 반겼다. 

 

“선생님 심부름 때문에 남아있었어.” 

 

거짓말을 해 버린 것은, 감상적인 면모를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 거짓말이 통했는지는 모르지만, 넌 붉게 젖은 웃음을 보이며 내 옆에 섰다. 

 

“노을 예쁘네.” 

 

난 갑자기 내 옆에서 노을을 바라보는 너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여기서 자리를 피한다면 괜히 너를 의식하는 것으로 보일까봐 뒤로 빠질 수도 없었다. 민감한 어색함 속에서, 우리는 잠시 노을을 바라보았다. 

 

“안 돌아가?” 

“너는?” 

“집이 가까워서. 기왕 온 김에 조금만 더 보고 가려고...” 

 

네 말 끝은 그림자처럼 늘어졌었다. 난 어느새 너를 의식하고 있었다. 홍조가 오른 얼굴을 가리려고 노을에서 고개를 떼지 않았다. 결국 먼저 자리를 비킨 것은 너였다. 

 

책상 서랍에서 책을 한 권 빼든 너는, 그대로 발걸음을 옮겨 교실 문 앞까지 다가갔다. 그러다가 문득 발걸음을 멈추며 문을 붙잡고 나를 돌아보았다. 

 

“같이 돌아갈래?” 

 

교복 위로 조금 펑퍼짐한 바람막이를 입고 있던 너는, 역광을 잔뜩 받아 거뭇한 실루엣을 띄고서 바스락거리며 말했다. 

 

나의 첫사랑은 그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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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떠올리지도 않은 날의 영수증이 튀어 나온 거야? 이거 심각한데...” 

 

친구의 말에 나는 번쩍 정신을 차렸다. 첫사랑의 시작점. 내가 너를 처음으로 사랑하기 시작했던 때였다.  

 

“근데 이거 다른 거랑은 다르네? 현금 영수증이야. 뭔가 꼬인 건가?” 

 

나는 이 추억을 잊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그 장면에서도 잊어버린 현실이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찌됐든, 난 그것을 아름답게 바라 볼 것이다. 돌아오지 않을 시간이기에 미화되었음을 인정하고 간직하며 감상할 것이다. 

 

“... 아니, 제대로 떠났어.” 

 

난 그 영수증을 품 안에 집어넣었다. 영수증의 악마는 그렇게, 나의 추억에 대한 환급까지 끝마치고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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