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죄인으로 태어났습니다. 내가 죄인으로 태어난 것은, 나의 탓이 아닙니다. 먼 옛날, 에덴 동산이 있었을 적,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은 탓이지요. 아담의 죄는 유전자에 박혀, 그의 후손인 나 또한 죄인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사람들은 죄인으로 태어나고, 죄인으로 살다, 지옥에 떨어집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죄인이 되고 싶어했나요? 그들의 죄가, 정말 온전히 자기들의 탓인가요? 아담의 탓이 아닌지요? 하고 나는 하느님께 물으면, 그분은 대답이 없으십니다.

 

나는 장 칼뱅의 절대예정론을 떠올립니다. 누가 천국에 가고 누가 지옥에 가는지는 전적으로 하느님의 결정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의지나 잘잘못 따위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것이지요. 창조자가 피조물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가 있지만… 나는 나의 하느님이 그런 신이 아니길 바랍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죄와 구원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어릴 적부터 교회를 다녀서 그렇습니다. 부모님께서는 독실한 기독교도이셨고, 나도 자연스레 모태신앙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초등학교를 다닐 적 어느 일요일이었습니다. 저는 주일학교(어린이 교회)에 다녔지요. 그날 설교는 천국과 지옥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 영원한 쉼을 얻고,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은 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고통받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설교의 시각 자료는 불타는 기름 연못에 빠진 사람들, 구더기에게 살을 파 먹히는 사람들, 악마들에게 창으로 찔리는 나무에 매달린 사람들을 보여주었지요. 

 

(초등학생들에게 보여주기는 조금 그로테스크합니다. 나중에 알게 된 이야기지만, 열정이 과다한 교회 선생님이 약간 무리수를 둔 것입니다. 학생들의 부모님들이 항의를 했다고 하더군요.)

 

나는 그 설교를 듣고, 내가 지옥에 떨어지지 않을까 겁을 먹고 잠을 설쳤습니다. 영원! 영원한 고통! 몸이 불타고, 눈알을 구더기가 파먹고, 사지의 신경이 날카로운 가시에 찔리고. 그런 고통이 영원하다니, 얼마나 무시무시합니까?

 

나는 지옥에 가기 두려웠습니다. 어릴 적 각인된 지옥에 대한 공포가, 언제나 저를 죄로부터 떨어뜨려 놓았습니다. 물론 설교에는 천국의 아름다움에 대한 내용도 있었지만, 그런 이야기는 까맣게 잊고 지옥불에 대한 공포만이 남았습니다.

 

(자살한 이는 지옥에 간다고 합니다. 내가 커버린 후에도, 지옥에 대한 공포는 여전해서, 자살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도 지옥이 두려워 자살하지 못했습니다.)

 

“왜 하느님은 지옥을 만드셔서, 그곳에 죄인을 빠뜨리시는 건가요?” 라는 질문을, 혹여나 이 질문 자체가 죄가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어머니께 물은 적이 있습니다.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지옥은 원래 사람을 위한 게 아니고 나쁜 악마들을 위한 거야. 그런데 사람이 죄를 지어 스스로 지옥으로 걸어가는거야. 사람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고, 하느님은 언제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지. 설령 그 자유의지가 자기 자신을 지옥에 빠뜨리더라도… 하느님은 우리 모두가 천국에 오시길 바라신단다. 우리 모두를 사랑하시니까.”

 

사람은 자유의지로 죄를 짓는다. 하느님은 자유의지를 존중하신다. 그렇기에, 전능한 신도, 지옥으로 걸어가는 사람을 쇠사슬로 묶어 천국으로 데려갈 수 없다. 어린 나는 그것이 합리적인 설명이라고 느꼈습니다. 자유의지라는 게 존재하는지, 그런 회의가 들 때까지 말이죠.

 

 

 

아무튼, 나는 올바른 삶을 살았습니다. 지옥이 두려워서요. 그러나, 언제나 두려움은 희미해지기 마련입니다. 지옥은 눈 앞에 없었고, 죄의 쾌락은 눈 앞에 있었으니까요. 저는 성장하며, 점점 대범해지고 겁이 없어져, 이글거리는 지옥을 가끔 잊고, 때때로 죄의 유혹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어릴 적 지은 죄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무시하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나는 가끔 따돌림당하는 아이의 머리칼을 쥐어뜯기도 했으며, 초등학교 담임 선생님을 조롱하는 농담을 친구들에게 던지기도 했습니다. 담임 선생님은 조금 뚱뚱한 여자였는데, 아이들이 선생님을 별로 안 좋아했지요. 아이들은 선생님의 뚱뚱한 신체를 가지고 악의적인 농담을 던졌지요. 다리가 소 다리같다, 팔은 남자 팔뚝이다, 뭐 그런 전형적인 농담 있지 않습니까. 그런 얘기가 나오면 아이들은 언제나 폭소를 떠뜨렸습니다. 저 또한 거기에 동참했지요. 저는 너무 즐거웠습니다. 다같이 우루루 죄를 지으면, 그건 오히려 편안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장 많이 지은 죄를 꼽아보라 하면, 역시 정욕의 죄입니다. 중학교 때 나는 우연히 생식기의 쾌감을 접한 이후로, 성(性)에 몰두하였습니다. 인터넷에는 헐벗은 여자들의 사진과 영상이 떠돌았고,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열심히 성욕을 분출했지요. 청소년기 때의 일입니다.

 

슬프게도, 나를 사랑하는 여자는 없었습니다. 나의 성욕을 위로할 구멍 하나가 없었던 것입니다.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 몰랐기에 사랑과 성욕을 구분하지 못했습니다. 아무튼 해소되지 못한 성욕은 뒤틀리고 시꺼메져 더럽게 변해버렸습니다. 성욕은 사랑과 함께 있으면 분홍빛 아름다운 풍선이겠지만, 나의 성욕은 사랑이 없었고, 그저 바람 빠진 풍선이 되어 진흙탕에 빠졌습니다. 나의 성욕은 불쾌한 고동색입니다.

 

더러운 성욕을 해소하면 숨길 수 없는 허무함이 밀려옵니다. 나는 그제야 나의 죄를 깨닫고, 다시 회개합니다. 그 회개가 무색하게, 나는 또다시 성욕에 물듭니다. 그러기를 반복하면, 무의미한 회개를 하기에도 하느님께 죄송스럽지요.

 

나는 도무지 죄로부터 도망칠 수 없었습니다. 지나가는 여자의 엉덩이를 주무르고 싶다는 생각과, 저 여자와의 잠자리는 어떨까 하는 생각이 번쩍번쩍 떠오릅니다. 나는 그런 생각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나는 경건하게 살고 싶은데, 아니 경건하지 않더라도, 그냥 사랑하는 사람과 하룻밤을 지내며 건강하게 성욕을 풀고 싶은데, 왜 그러지 못하는 겁니까.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더라면… 나는 나의 정욕의 죄로부터 자유롭지 않았을까요? 내가 더 멋진 외모와 큰 키를 가지고, 여성들을 홀릴 매력적인 말솜씨와, 적당한 용기를 가졌더라면…

 

나도 사랑받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이 나의 탓입니까. 주님, 그것이 정말 제 온전한 잘못입니까. 저를 사랑하는 사람이 없어서, 제 성욕이 갈 길을 잃어 조금 꼴리는 사람들 아무한테나 뿌려지는 것이 과연 제 잘못입니까.

 

(궤변이죠. 매력적인 남자도 정욕의 죄를 짓습니다. 하지만 궤변은 청소년의 특권입니다. 커서 생각해보면, 터무니없는 소리고, 모두 핑계처럼 느껴지지만, 그 때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나는 뉴스에 나오는 성범죄자들을 보며 생각했습니다. 범죄자들은 대부분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났더군요. 뻔합니다. 나쁜 환경과 나쁜 유전자(나쁜 유전자라는 게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습니다만.)를 가졌고, 그 결과 나쁜 행동을 한 것이겠죠. 만약, 만약에, 그들이 좋은 가정에서 태어나고, 좋은 유전자를 물려받아서, 외모도 좋고, 머리도 좋고, 성격도 유순하고, 그렇게 되었다면… 과연 범죄를 저질렀을까요?

 

나는? 나는 범죄자와 다릅니까? 내가 만약 저 부모 아래서 태어나, 저들과 똑같은 환경과 유전자를 가졌다면, 나는 범죄를 안 저질렀을까요? 이런 생각이 자연스레 들더군요. 나는 자유의지를 의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런 말을 아는 사람에게 하기가 무서워, 어디 인터넷 댓글에 이런 내용을 올리면, 다들 내가 미친놈이라 하더군요. 조금 더 관념적으로 두루뭉술하게 말했어야 했는데, 실제 범죄를 예시로 들어 설명한 게 탈이었습니다.)

 

 

 

나는 문득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죄는 자유의지로 짓는 것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다, 이런 생각도 떠올랐습니다. ”지옥은 자유의지로 가는 것인가?” 

아니라고 하면, 그러니까 의지와는 관계없이 지옥을 가게 될 사람이 있다면, 너무 잔인합니다. 나는 다시 한번 장 칼뱅의 절대예정론을 떠올립니다.

 

나의 어린 시절은 지옥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찼고, 청소년기에는 자유의지에 대해 회의가 일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나는 죄인입니다. 

 

 

 

 

 

 

2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도무지 죄로부터 도망칠 수 없습니다. 내가 나약하다고 비난해도 좋습니다. 나의 본성이 악하다고 비난해도 좋습니다. 그렇지만, 제발 그것들이 나의 탓이라고는 하지 마십시오. 나는 죄인이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죄인으로 태어났습니다. 또 죄를 극복할 의지도 없이 태어났습니다. 

 

어쩌면 모두 변명일지도 모릅니다. 나는 정말… 정말 모르겠습니다. 사실 나는 죄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게 아닐까. 이 모든 게 나의 자유의지로 인한 선택일까.

 



나는 어느덧,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나는 어릴 적에는 아주 교만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러나 자라며, 나는 내가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깨달았죠. 누구에게도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어떤 재능과 매력도 없는 불쌍한 이. 그것이 저입니다. 그것을 깨닫고, 나의 교만은 후퇴했습니다. 나의 교만은 제 마음 속 깊은 땅굴로 숨어들어가, 나는 의식적으로는 스스로를 증오하는 태도를 취하며, 마음 속 깊은 곳 무의식에서만 은근한 교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나는 청소년기 학교를 다닐 때 모범생이었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했고, 성적도 잘 나왔지요. 제가 공부를 열심히 했던 까닭이 있습니다. 내가 만약 공부마저도 못하게 된다면, 다시 말해 무능하게 된다면, 나라는 존재는 정말, 진실로, 무가치해질 것 같아서였습니다. 나는 벼랑 끝에서 공부했고, 좋은 성적을 얻었습니다.

 

나는 좋은 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대학교에 들어가자, 유능(有能)은 짐승이 털갈이를 하듯 모양을 바꾸더군요. 더 이상 공부를 잘 하는 것이 유능이 아니었고, 더 사회적이고, 더 잘생기고, 더 농담을 잘 하는게 새로운 유능이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저의 본래의 유능, 공부를 잘하는 능력은 대학에서는 별거 아니더군요. 대학에는 천재들이 개미굴의 개미들처럼 바글바글했고, 나는 그저 범재였을 뿐입니다.

 

나는 무능해졌습니다. 나의 존재 가치를 지탱하던 유일한 기둥, 그것이 쓰러졌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걸로 호들갑을 떨거나 자살해 버리지는 않았습니다. 대신에 나는 또다른 나의 능력, 타인과는 구별되는, 나의 교만을 먹여살릴 새로운 ‘유능’을 찾으려 시도했습니다. 많은 연구 끝에 나는 새로운 유능을 발견했습니다.

 

선.

 

어떤 사람이 아무리 무능해도, 아무리 추해도, 만약 그 사람이 선하다면, 우리는 그를 좋은 사람으로 취급합니다. 아니 적어도, 그에게 돌을 던지고 그를 사형대에 올리지는 않습니다. 선은 최고의 면죄부입니다. 임마누엘 칸트 선생님이 바라시던 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과보다는 의도를 중요시합니다. 선과 악을 평가할 때는 결과가 아닌 의도로 평가한다는 것이죠. 

 

만약 내가 이렇게 무능하고 더러워도, 내 마음 속 깊은 곳에 선한 의도가 살아있다면, 사람들은 내게 돌을 던지지 않겠죠. 내가 슬픔에 빠져 거리에서 노숙자로 살아도, 사람들은 나를 동정하겠죠. 내가 만약 자살해버린다 해도, 사람들은 나의 자살을 안타까워하고 내가 자살한 이유를 내가 아닌 사회에서 찾겠죠. 그건 정말로 달콤해 보입니다.

 

나는 선한 삶을 살리라 다짐했습니다. 내 존재 가치를 선에서 찾기 위해서요. 내가 만약 선하지 않다면, 나는 무가치한 벌레와 다름없을 것입니다. 내가 선하다면, 나는 멋진 사람이 되고, 사람들이 나를 칭찬할 것입니다. 대학에 들어간 후 몇 개월간, 나는 선하고 성실하게 살았습니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사람들을 사귀었습니다. 가족들과, 친구들과 좋은 관계를 쌓았고요. 어머니, 아버지께도 용돈을 드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나의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나는 나의 육체를 쉴 틈 없이 굴렸고, 그러면 머릿속에서 악한 생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또한 정욕의 죄를 끊었습니다.

 

나는 또한 어릴 적 깊은 신앙을 되찾으려 노력했습니다. 나는 매일 성경을 읽었습니다. 나는 요한복음을 가장 좋아했지요. 나는 내가 선한 삶을 살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했습니다. 또 만약 죄를 지어도, 나는 하느님께 용서를 구하고 회개했습니다. 나는 반년동안은, 진실로 선한 삶을 살고 있다고 확신했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넘어졌습니다. 나는 선한 삶을 살지 않게 되었습니다. 특별한 계기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어느 날, 무척이나 지친 날, 나는 허탈함을 느꼈습니다. 그날은 무척이나 피곤한 날이었기 때문에, 문득 가학심이 들어 길고양이 하나를 죽였습니다. 맨 처음 고양이의 다리를 세게 걷어차서 고양이가 도망을 못 가게 한 다음, 몸통을 천천히 짓밟다가, 머리를 터뜨려서 죽였습니다. 고양이를 죽인 이유는, 내가 그날 지쳐서 피곤했기 때문입니다.

 

위선. 나는 위선에 지친 것이었습니다. 내가 나의 선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은 모조리 위선이었던 것입니다. 나의 의식 깊은 곳에는 교만이 자리잡고 있었고, 나의 선은 그 교만을 먹여살릴 가축이었던 것입니다. 선을 행하는 이유는, 언제나 선 그 자체에 대한 존중이어야 한다, 칸트 선생님이 이런 말을 하셨지 않나요? 아무튼, 나는 그게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나의 선은 가짜였습니다.

 

가장 역겨운 것은, 내가 선한 삶을 연기할 때, 나는 내가 진실로 선하게 된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나는 내가 선한 사람인 줄 알고, 전에는 부끄러워서 하지 못하던 일을 저질렀습니다. 나는 사랑을 했던 것입니다. 내가 악한 이임을 알았을 때에는, 내 자신이 너무나도 보잘것없음을 잘 알았기 때문에, 나는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선을 연기한 이후로 나는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같이 아르바이트를 하던 여자애였는데, 나랑 동갑이었지요. 나는 그녀와 꽤 친하게 지냈고, 그녀를 향한 마음이 은근히 있었습니다.

 

내가 선한 삶을 연기하며 놀랐던 한 가지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쉽게 속는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는 나도 포함됩니다. 내 선한 연기에 나 자신마저 속았으니.) 아르바이트를 같이 하는 사람들은 내게 속아서 내가 착하고 귀엽다고 평가했고, 내가 좋아하던 여자애도 나와 좋은 친구로 지냈지요. 모두 거짓이었지만. 나의 위선을 깨닫고 얼마 후 나는 아르바이트를 그만두었고, 모든 연락을 끊었습니다.

 

나는 조금 슬펐습니다. 나는 나의 선이 진실된 것이기를 바랐지만, 그게 아니었군요. 나는 타고난 죄인이었던 것입니다. 나는 양심이 선천적으로 결여되어, 아무런 죄책감 없이 누군가를 강간하고, 또 누군가를 죽이는 상상을 하곤 합니다. 내가 그 상상을 실천하지 않는 이유는, 그저 내가 겁이 많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내게 더 큰 담대함이 있었더라면 나는 지금 감옥에 있겠죠.

 

나는 더 이상 위선을 지속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내가 순수하게 좋아하던, 같이 아르바이트를 하던 여자애와 잠자리를 가지는 상상을 하고 난 이후부터, 나는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나는 내가 악하고 역겨운 사람임을 드디어 깨달았습니다. 나는 어떻게 자살해야 지옥에 떨어지지 않고 죽을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나는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어서 저를 죽여주십시오. 제가 더 큰 죄를 짓기 전에, 제가 하느님을 완전히 배반해버리기 전에, 나를 죽여 천국에 데려가십시오.’ 나는 자살하고 싶었지만, 지옥이 두려워 자살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그저 내가 암에 걸려 천천히 죽어가는 상상을 계속 했습니다.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대학교 강의실에서. 그런 비슷한 상상들을 하며, 나의 20대를 보냈습니다.

 

나는 선한 이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도무지 죄로부터 도망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청년 시절에 선을 실천했지만, 결국 그건 위선이었고, 나는 절망한 나머지 죽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죽을 수 없었고, 겨우 살아갔습니다. 이것이 나의 청년 시절, 20대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요, 나는 여전히 죄인입니다.

 

 

 

 

 

 

3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어느새 30살이 되었습니다. 나는 한 자그마한 회사의 회사원입니다. 나는 그동안 사회에 조금이나마 물들 수 있어서, 나름대로 평범한 몸짓을 하며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술잔을 기울이며 시덥잖은 농담을 던질 수 있게 되었고, 나름의 뻔뻔함을 가지게 되어 악동같은 익살을 가끔 장난스레 부리기도 했습니다. 평범한 세상 죄인이 된 것이죠.

 

그리고 위선을 부리는 것에도 익숙해져서, 나는 다시 사람들, 직장 동료들과 교회 사람들에게 좋은 평판을 얻었습니다. (나는 아직 그때도 교회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사람들과 아주 친하게 수다를 떠는 관계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과묵하지만, 신뢰할 수 있는 착한 사람’ 정도의 평판은 얻을 수 있었지요.

 

그러나 내가 사람들하고 떨어지게 되어, 혼자 집으로 가는 길에는, 나의 무가치(無價値)를 잊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무능하고 악한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내게는 악취미가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동물 학대였습니다. 집에서 개 한 마리를 키웠는데 나는 그 개를 언제나 괴롭혔습니다. 걷어차고, 후려치고… 그래도 내가 낯빛을 바꾸어 미안한 듯 그 개를 쓰다듬으면, 다시 꼬리를 흔들며 내게 오더군요. 나는 그 개가 참 부러웠습니다. 동물에게는 천국도, 지옥도 없다지요. 이 개가 고통받는 것은 길어봤자 15년 정도고, 그 이후에는 그저 소멸하겠지요. 나는 지옥이 두려워 죽지 못하고 있는데, 이 개는 지옥에 갈 걱정도 없이, 편하게 밥만 처먹습니다. 그 꼴을 볼 때마다 때려주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나는 어느 일요일에 교회에서, 한 집사님의 부탁을 듣게 되었습니다. 자기 딸 과외를 부탁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내 나이가 30인데 과외는 무슨…’ 하고 넘기려고 했는데, 그 집사님이 간곡히 부탁하셔서 어찌어찌 과외를 하게 되었습니다. 주말마다 집사님 댁으로 과외를 하러 갔지요. 과외 학생은 이제 막 고등학교에 입학한 1학년, 그러니까 17세 된 여학생이었습니다. 영어를 가르쳤는데, 뭐 고1 영어라는 게 뭐가 어렵습니까. 학생은 활달한 성격이더군요. 제 말에 대꾸도 잘 해주고요. 나는 그래서 그녀를 편하게 가르쳤고, 학생도 잘 따라 주었습니다. 나는 곧 학생과 친해졌습니다.

 

학생은 고등학교 첫 중간고사를 치렀는데, 시험을 잘 봤다고 자랑하더군요. 그리고 내게 선물을 하나 줬는데, 약간 비싼 펜 한 자루였습니다. 나는 감동을 받은 척 약간의 호들갑을 떨었고, 학생은 깔깔 웃었습니다. 나는 기분이 좋았지만, 이 대화가 모두 겉치레에 불과함을 알았습니다. 내가 선물을 받고 감동받은 척 연기했듯이, 학생은 고마움을 연기했던 것이었겠죠. 이 대화는 잘 짜인 희극에 불과한 것이지요. 나는 사람의 진심이란 걸 믿지 않습니다. 아니, 믿을 수 없습니다.

 

이 불신이 정확한 것인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짐작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나의 생각을 참고하는 방법뿐입니다. 나는 내가 위선을 행하기에 남들도 위선을 행한다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생각은 사람을 피폐하게 하기 때문에, 나는 최대한 이런 생각 자체를 안 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날 과외를 하며, 나는 연기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착하고 장난스러운 선생님 연기에. 나는 조는 학생의 볼을 손으로 가볍게 꼬집었습니다. 나는 학생이 푸하하 웃어넘길 줄 알았는데, 오히려 학생은 얼굴을 붉히더군요. 나는 내가 끔찍한 실수를 저질렀음을 깨달았습니다. 실수를 저지른 배우는 겨우 태연하게 다시 연기를 하려 했지만, 글쎄 자꾸 말을 더듬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나의 연기에는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좋은 선생님’ 연기에 내가 몰두해도, 학생은 내게 자꾸 사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전에는 별 생각 없이 적당하고 재치있는 답변을 던져주었는데, 지금은 위선적인 대답을 하기 위해 골머리를 썩혀야 합니다. 학생은 그 대답에 성이 차지 않아, 또다시 새로운 질문을 던졌습니다.

 

“선생님은 집에서 뭐해요?” 그녀가 물었습니다.

나는 속으로, ‘동물 학대, 변태 야동 시청’ 같은 생각을 하지만,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냥 누워 있어. 진짜 아무것도 안해.”

(만약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주변에 있다면, 그 사람을 조심하십시오. 괴랄한 취미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뭐야 재미없어…”

 

큰일입니다. 학생이 대답에 크게 불만족했습니다. 더 강력한 질문을 가지고 나를 쪼아댈 것이 분명합니다. 나는 재빠르게 선수를 칩니다. 

“잡담 그만하고 공부하자.”

“네…”

 

학생과의 수다는 이런 식입니다. 나는 선생님 연기가 이제는 버거워 너무나도 피곤합니다. 그러나 연기를 하지 않으면, 그녀가 나를 벌레 보듯이 내쫓고 소문을 여기저기 내겠지요. 그건 최악입니다. 나는 학생과 대화할 때 조금이나마 내가 평범한 사람같이 느껴집니다. 학생이 나를 허물없이 대하기 때문일까요? 나는 선생님 연기가 힘들지만, 연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악한 본성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나의 비참한 성욕은, 결국 이 학생을 향하고 말았습니다. 나는 그것에 큰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나는 20살 이후, 그러니까 대학교 1학년 때 나의 위선에 큰 상처를 입은 이후로(두 번째 수기 내용), 이토록 큰 수치심과 죄책감을 느낀 적이 없었습니다. 나의 양심은 무디어진 지 오래였고 나는 악행을 서슴없이 저질렀으니까요. 나는 나의 20대 때, 술을 퍼 마시고, 매춘 업소에 들락거리고, 심지어 가벼운 마약(대마초)까지 할 정도였으니까요. 나는 가끔 교회에서 이것들이 죄임을 상기하고 회개하였지만, 나의 죄성이 고통스럽거나 슬프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 학생과의 성관계를 번쩍 머릿속에 떠올릴 때면, 나는 타들어가는 죄책감에 휩싸였습니다.

 

나는 순수함으로 그 학생을 대했던 것입니다. 말로는 “선생님 연기한다” 반복해도, 나는 그 학생과 서로 신뢰하는 좋은 친구가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그녀를 넘어뜨려 범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었습니다. 순수함이 찢겨 밟히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나는 적당한 핑계를 대고 과외를 그만두었지요. 자연스레 사이도 멀어져, 나는 그녀를 떠올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나는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그때부터 나의 양심의 심장이 미약하게 뛰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다시 내 마음 속에서 선을 되찾으려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번번히 죄를 지었고, 그때마다 내가 죄인 된 운명임을, 나의 의지로는 도저히 죄로부터 도망칠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죄’라는 골리앗은, 나를 결코 놔주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죄에 대한 최후의 반항을 시도합니다. 그것은 죄책감입니다. 나의 죄책감이, 내게 좁쌀 한 톨만큼의 선이라도 존재한다고, 나를 변호합니다. 내가 죄를 지어도, 그 죄를 부끄러워하며 죄책감을 느끼면, 나는 적어도 완벽한 악인은 아니라는 소리입니다.

 

가질 수 없는 선. 나는 그 선을 어떻게든 가져보려고, 죄책감을 연기합니다. 이미 무디어진 양심은 어떤 고통도 내게 주지 않는데, 나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려 안간힘을 씁니다! 나는 스스로가 악인임을 부정하려, 죄를 지은 후 우거지상을 짓습니다! 나는 스스로가 악인임을 부정하려, 내 신체에 아픔을 줍니다! 나는 마침내 아주 죽어버릴 계획을 세우지만, 곧 그만둡니다. 지옥이 두려워서.

 

이것이 내가 30살이 되었을 때 이야기입니다. 나는 개판으로 살다가, 어떤 계기로 죄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죄는 나를 놓아주지 않아서, 나는 마침내 죄책감이라도 가지려고 노력하게 되었습니다.

 

네, 압니다.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4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수기를 써 왔습니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장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마침내, 내가 죽을 수 있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지금 나는 31살입니다. 나는 암에 걸렸습니다. 췌장암입니다. 이미 전이가 되어 손을 못 쓸 정도라고 의사가 말했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안도했습니다. 무슨 짓을 해도 죽겠구나. 그럼 치료를 안 해도 되겠구나, 하고 말이죠. 이건 분명 자살이 아닐 것입니다.

 

『인간실격』의 첫 문장을 나도 말할 수 있게 된 거죠.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과거형을 나타내는 쌍시옷(ㅆ)이 내게 안도감을 줍니다.

 

이제 부끄럼이 없는 곳에서 살 것입니다. 나는 마침내, 모든 죄를 나의 하느님께 회개드렸습니다. 나는 주님께 면목이 없습니다. 이만큼 죄를 짓고, 또다시 염치없이 회개하러 오다니. 그래도 회개해야지요.

 

또한 나는 내가 슬프게 한 사람들에게 모두 사과하려 했는데, 놀랍게도 그런 사람은 적었습니다. 나는 죄를 생각했을 뿐 그 죄를 저지른 적이 드물었던 것입니다. 물론 죄를 생각하는 것도 죄이지만요. 나는 내가 괴롭히던 개 한 마리. 그 녀석에게, 나는 용서를 구합니다. 발로 차대서 미안해. 녀석은 나의 학대에도 바르게 자라 내게 꼬리를 흔듭니다.

 

나는 안도합니다. 나는 드디어 삶을 놓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주께서 자비를 베푸셨기에. 나는 이제 모든 복잡한 죄의 문제에서 벗어나, 쉴 수 있겠죠. 모든 세상을 살아가는 죄인들에게, 안녕. 당신들의 죄를 주께서 용서해 주시길…

 

나는 죄인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닙니다.

 

 

 

 

 

에필로그


31세 남자가 병원에서 숨졌다. 췌장암 말기 환자였다. 남자는 웃는 낯으로 죽었기에, 의사는 진통제가 잘 들었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