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 이거 뭐 어째 하는기요? 아가씨!"


 노인의 부름에 아직 대학생으로 보이는 점원이 달려간다. 아직 점원을 배치해두는 매장이 훨씬 많아 그 노인은 도움을 받았지만, 세상은 무인화를 부르짖고 있다. 무인화의 물결에서 서핑을 즐길 수 없는 사람은 꼭 노인까지 가지 않아도 되었다. 당장 어머니가 40대셨던 시절 몇 차례 나간 외출을 추억하자면, 나름 사무직이었던 어머니도 잘 다루지 못하고 내게 넘길 수밖에 없었다.


 무인화의 잠식은 평등했다. 너무나도 평등해서, 불평등한 땅에서는 불평등한 것이 되고 만다. 마치 때묻지 않은 순수함이 가장 때묻기 쉬운 것처럼. 아이러니하게도 이 물결은 유럽 같이 노인만 늘어 가는 땅에서 탄생했다.


 결국 이럴 때가 되면 우리나라도, 생명은 없고 죽음만이 가득한 땅이라는 비유는 정말 절묘한 것이라고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죽어가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람을 이해해 보겠다고 저지르는 짓은 하나도 영점이 안 맞는달까. 그럼에도 영점조절이 전혀 안 된 지구는 오늘도 돌아가고 있다.


 내가 아직 고향에서 자라고 있었을 때였다. 집 근처에 키오스크를 도입하는 가게가 늘고 있었다. 점원에게 얘기하지 않아도 주문할 수 있는 세상은, 아직 점원이 무서웠던 어린 날의 내게는 무척이나 기뻤다. 엄마나 아빠에게 용돈을 받아와서 치킨버거를 사올 수는 없지만 대신에 카드를 가져가 먹고 싶은 걸 사오기는 더 편했다. (그 시절에 무인 계산대도 생겼던 기억도 있는데, 크고 난 뒤에 간만에 무인계산대를 쓰게 됐을 때 비로소, 나는 그저 점원놀이를 해보는 게 재미있었을 뿐이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나는 롯데리아에서만큼은 똑똑한 아이가 됐다. 고향 동네는 외관만큼은 도시 꼴을 갖춰 놓고도 정작 사는 사람은 태반이 할머니 아니면 할아버지였다. 정말로, 행인의 얼굴을 보면 절대로 내 또래는커녕, 어머니뻘 아버지뻘 중년의 얼굴조차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런 곳에 들어서는 키오스크를 쓸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유일해 보였다.


"아야(좀 더 크고 나선 학생이었다), 이게 우째 쓰는기고?"


 카운터에 사람이 없는 날에 불고기버거를 사러 가면, 키오스크 기계 주변에서 서성이다 이런 질문을 듣기 일쑤였다. 그래도 롯데리아는 현명히도, 카운터를 비우지는 않았다. 고령화를 감안해서 카운터에 점원을 배치하는 게 훨씬 낫다고 판단한 듯하다.


 그 노인 분들이 보기에는, 어려워 보이는 기계를 초등학생이 거침없이 꾹꾹 눌러대면서도 전혀 실수하지 않는 것이 제법 똘똘해 보였던 것 같다. 나는 보답 삼아 모르는 노인의 앞에 앉아 감자튀김을 집어먹기도 했다.


 메타버스나 MZ 세대 같은 용어를 들으면, 나만큼은 이 시절을 제일 먼저 떠올리게 된다. 늙은이들이 '요즘 것들'을 이해하지도 못한 채, 요즘 흐름이라니까 들여와서 밀어붙이지 않았을까. 그런 점에서 키오스크가 서울을 잠식하는 걸 넘어 인구는 많아도 노인이 상당한 곳마저 잠식하는 건, 늙은이가 늙은이를 옥죄는 광경이겠다.


 노인을 무작정 위해야 한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결국 배울 생각이 없는 사람들은 가르쳐 줘도 알아듣지 못하니까. 다만 내게는, 나이가 들어서야 중학교나 고등학교 수업을 듣는 만학도 노인들도 전자기기는 잘 다루지 못한다는 걸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아줬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 있겠다.


 그런데도 누구도 이 상황을 바꾸려고 나서지 못한다고 비난하기에는, 나 역시 소극적으로 글만 쓰는 인간이 아닌가. 명수필가의 글도 사회를 꼬집으면 꼬집었지 바꿔놓은 일은 아주 없다는 점에서 윤동주의 부끄러움은 인간이 글을 쓰지 못할 때까지 수정 없이 되풀이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