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으로 살 수 없는게 뭘까?"


쉬는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교실에 울려퍼지고, 학생들이 분주히 발걸음을 옮기는 와중, 옆자리에 앉은 수현이가 내게 물었다.


"뜬금없이 그게 뭔 소리여?"


확통 시간 내내 쳐 자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나 헛소리를 하고 있는 수현이(친구 호소인) 에게 안쓰럽다는듯한 눈빛을 하며 대꾸하자, 수현이는 굴하지 않고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아니, 자본주의에 모토가 그거잖아. '모든 것에는 가격표를 매길 수 있다.' 요즘 매장 앞에서 웨이팅 하는것도 돈 받고 하는데, 이 세상에 돈으로 못 사는게 뭐가 있냐는거지."


수현이의 말을 적당히 흘러들으면서도, 나는 돈이 있어도 살 수 없는것들을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문득 뉴스에서 본 것을 떠올렸다. 이거라면 돈을 주고도 사지 못할것이다.


"취약계층 생활지원금."


내 대답에, 수현의 표정은 굳어져갔다.


"야, 니 집안 돈 많다고 그런 소리 해도 되는건 아니거든?"


나는 그제서야 수현이가 왜 내 말에 기분나빠했는지 생각해낼 수 있었다. 내가 말한 생활지원금을 받는 대상자 중 수현이의 가족들이 포함되어있었기 때문이다.


"왜, 내 말이 틀렸어? 아무리 돈이 많아도 생활지원금은 못 받잖아... 아니지, 돈을 많이 쓰면 나중에 돈이 떨어져서 생활지원금을 받을 수 있으려나?"


그것도 돈으로 생활지원금을 샀다고 볼 수 있나? 잘 모르겠다. 어쨌든 내가 지금 이걸 왜 고민하고 있는거지?


"아니 좀 진지하게 좀 해라 진지하게."


본인도 뭐 할때마다 진지고 자시고 개판을 쳐놓으면서 나더러 진지하게 좀 하라니. 대꾸 안 해주면 계속 귀찮게 할 것 같았기에 나는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 하면 될꺼 아냐?"


그렇게 말 하며, 나는 다시금 머릿속으로 리스트를 작성해나갔다. 내가 지금 무한대의 돈이 있다고 쳐보자, 내가 사지 못 할게 뭐가 있지?


"야, 이거 생각보다 어렵다?"


황금만능주의는 알게 모르게 사람들의 머릿속 깊은 곳에 숨어있었다. 메이웨더도 이런 소리를 한 적 있었다. '돈이 전부는 아니지만 그만한건 또 없다.'


돈으로 행복을 사는 짓은 자본주의라서 가능한 짓이다. 원한다면 사람을 줄 없이 번지점프 시킬 수 있는것이 돈이다. 돈으로 살 수 없는것, 돈으로 할 수 없는것, 뭐가 있을까?


"그치? 하긴, 요즘 사랑이라는 개념도 결국에는 돈으로 정의되더라. 결혼도 외모 이전에 돈으로 결정하고, 연인을 사귀는것도 돈 보고 하고... 생각해보면 돈으로 살 수 있는것 중에 정신적인것까지 있네."


"정신적인것...? 잠깐만, 나 뭐 생각날것 같아."


나는 그렇게 말하며 벽에 걸린 시계로 시선을 옮겼다. 쉬는시간은 이제 대략 6분 정도 남았다. 굳이 그러라는 법은 없지만, 기왕이면 쉬는시간 내에 생각해보고 싶었다.


"야, 시간을 돈으로 살 수 있냐...? 아니지, 살 수 있네! 깜빵에 갇혀있을 시간을 보석금 주고 풀려나니까. 근데 보석금은 진짜 보석을 주는건가?"


옆에서 계속 떠드는 소리가 거슬렸으나, 나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떠올리려 애썼다. 그러던 내 머릿속에, 기억 하나가 스쳐갔다.


"지금 얼마 남았지?"


시계는 이제 숫자 12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나는 다시금 떠오른 기억을 헤집으며 생각했다. 이게 맞는가 싶었으나, 일단 말 하다 보면 어찌저찌 논리가 떠오를것이다.


"그... 서연이였나? 아무튼 초3때 반에서 조용한 친구 있었잖아. 기억나?"


나는 옆에서 '보석금은 진짜 보석이랑 금을 주고 형량을 줄여주는것인가'에 대해 자신의 자아와 열렬한 토론을 벌이는 수현이를 향해 물었다. 그때 수현이도 같은 반이었으니 기억이 날것이다.


"서연이? 그게 누구... 인지 알어! 그, 그, 자연 아파트 살던 그 여자애, 맞지?"


안타깝게도 그건 다른 서연이었다. 내가 지금 말하고있는 서연이는 아파트가 아닌 허름한 재개발지구 단독주택에 살고 있었다.


서연이의 집은 전기 조차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도시가스도 연결이 되지 않아 그 아이의 집 문 앞에는 항상 커다란 LPG가스통이 있었으며 겨울에도 찬 물을 받아 씻어야 했다.


재개발이 확정되었을때는 그나마 들어오던 물과 전기마저 끊겼으며, 내가 초등학교 4학년으로 올라가자 그 아이는 전학을 갔다. 어디로 갔는지조차 모른다.


"아니지... 그 다 쓰러져가는 동네에 살던 그 서연이 말 하는거야? 당연히 기억 나지! 나는 우리집이 이 세상에서 제일 못 사는곳인줄 알았는데, 그 애 집 보니까 우리집이 선녀더라?"


수현이는 그나마 조금 낡은 세탁기라도 있었지만, 서연이에게는 그것 마저 없었기에 그 아이는 집 근처 작은 개울에서 빨래방망이로 열심히 옷을 두들겨야 했다.


그리고 나는 아까 수현이가 말 했듯, 집안이 나름 풍족한 편이었다. 가족들 중에서는 정치인도 있고, 한때 이름 좀 날렸던 기업인도 있다. 증조할아버지께서는 민변 창립맴버 중 한명이고, 그 위로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대대로 장원급제에 성공한 양반들이 족보를 장식했다.


어쩌면 내가 돈으로도 살 수 없는것을 떠올리기 힘든 이유가 돈을 주고 내가 원하는것들을 얻어본 기억이 많아서일지 모른다. 심지어는 내 옆에 수현이도 사실상 돈 주고 산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서연이랑 돈으로 못 사는거랑 무슨 상관인... 야, 설마 너 돈뭉치 들고 서연이 뺨 때리면서 고백했다가 차인거 아니지? 그래서 서연이를..."


저딴 소리를 하는걸 보다 보면 그때 저새끼에게 컵 떡볶이를 사주는게 아니었는데, 문뜩 후회가 든다. 역시 친구는 돈 주고 사는게 아니다.


아무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그 서연이라는 친구의 생일은 10월 1일이었다. 어릴적 기억이라 왜곡이 좀 심할지는 몰라도 서연이는 반 내에서도 특히 예쁜 축에 속했다.


나는 서연이의 호감을 얻고 싶었고, 다가오는 서연이의 생일에 좋은 선물을 주고 싶었다. 그때도 나는 돈으로 상황을 해결할 생각이었다.


내 눈에 들어온것은 서연이의 필통이었다. 다 낡다 못해 이곳저곳에 구멍이 뚫린 필통은 겨우 연필 몇자루, 반에서 굴러다니는, 잘 지워지지도 않는 고무 지우개를 담고있었다.


그래서 나는 부모님에게 친구 생일선물로 필통을 주고 싶다 말했고, 부모님은 캐릭터가 그려진 필통과 필기도구 세트를 주셨다. 사치스러울만큼 비싼건 아니었지만, 초등학생들 기준에서는 상상도 못할 고급품이었다.


서연이의 생일이 되고, 나는 학교가 끝나자마자 물었다. 집에서 생일 파티를 할 거냐면서, 케이크도 내가 준비해왔다고.


"서연이 입장에서 보면 지 생일도 아니면서 존나 유난떠는걸로 보이지 않았을까? 그래서 전학을..."


"닥쳐라."


서연이는 고개를 끄덕였고, 나와 다른 친구 몇명은 서연이를 따라 교외 재개발지역으로 갔다. 옆에서 귀신나오겠다는 소리가 들려와도 서연이는 아무렇지 않은 척, 집 문을 열고 들어오라 말했다.


곰팡이가 슬어있는 벽, 구석에 술병이 가지런히 놓여있는 거실에 다 낡아빠진 식탁 위로 생일 케이크가 올라갔다. 어느새 다른 아이들은 사정이 있다며 집 문 앞에서 돌아갔고, 남은건 나와 서연이, 그리고 자신의 집보다 더 거지같은 집이 있었다며 신기해하는 수현이 뿐이었다.


서연이는 이전까지 생일을 챙겨본적이 없었다 말했고, 생일 케이크도 처음 먹어본다고 했다. 수현이는 자신도 먹자마자 뱉을것같은 맛의 미역국이라도 끓여준다며 차라리 너 처럼 생일 안 챙기면 좋겠다는 푸념을 늘어놓았다.


타오르는 생일 초를 불고, 생일 케이크를 먹으면서 나는 준비해놓은 선물을 꺼냈다. 참고로 수현이는 내가 챙겨오지 말라고 미리 말해두었다. 어차피 들고 올것이 집에 쌓여있는 피자 박스 밖에 없었을것이 뻔 했기에 차라리 안 들고 오는게 나았기 때문이다.


"아, 그때 우리집 피자 박스 알바 접고 다른거 했는데?"


"무슨 알바?"


"곰 인형 눈알 붙히기. 그때 주머니에 다섯개 정도 넣어놨어, 선물로 주려고."


"차라리 피자박스를 들고 오지 그랬냐."


자꾸 이야기가 옆으로 새는것 같지만, 아무튼 나는 서연이에게 필통을 건넸다. 아마 이런 필통은 구경도 못 해봤으리라,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서연이는 내가 준 선물을 받더니, 한마디 말을 남기며 미소지었다. 딱히 다른 말은 아니었다. '고마워' 였다.


매번 나, 또는 누군가의 필통을 볼 때 마다 서연이의 그 미소가 떠올랐고, 진심으로 감사함이 담겨있던 그 '고마워'가 떠올랐다. 그 미소와 말은 돈으로 주고 산것이 아니었다.


"돈 주고 산게 아니라고? 결론은 필통: 돈 주고 산게 맞고, 케이크: 돈 주고 산거잖아. 설마 너희 부모님이 필통 공장이랑 베이커리 운영하는거야? 그래서 돈 주고 산게 아닌건가?"


그때, 벽 한쪽에 달린 스피커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쉬는시간의 끝을 알렸다. 나는 그 짧은 종소리 동안, 서연이의 미소를 떠올렸다. 그리고 말 했다.


"왜냐면, 만약 내가 집에 굴러다니는 연필 한 자루를 줬어도 서연이는 내게 미소지으며 고맙다고 했을테니까."


서연이가 그때 웃었던것은, 나와 수현이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한것은, 단순히 선물 때문은 아닐것이다. 아마 내가 그 아이의 미소를 보고싶어 돈을 주고 웃으라 시켰다면, 서연이는 결코 웃지 않았을것이다.


"아..."


나는 서연이의 미소를, 고맙다는 그 한 마디를, 돈으로 살 수 없었다. 내가 그 어떤 비싼 선물을, 케이크를, 심지어 집 한채를 가져왔어도 서연이는 선물이 아닌 그것을 들고 자신의 생일을 축하해준 날 위해 미소지었을것이기 때문이다. 돈으로도 결코 살 수 없는것은, 아마 그때 내게 고마움을 느꼈던 서연이의 마음일것이다.


아이들의 떠드는 목소리가 잦아들고, 앞 문이 열렸다. 추억 이야기는 이쯤 해두고, 다시금 수업에 집중할 차례였다.


나는 책의 페이지를 넘겼다. 3단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