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vs 온도

 

흐르는 용암이 길을 막고 있었다. 고글을 쓴 단발 여자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였고, 스터드가 두껍게 박힌 축구화의 신발끈이 제대로 묶여져 있는지 확인했다. 신발끈이 묶였긴 했지만, 여자는 그 자리에서 쭈그려 앉았다.

그녀는 자신의 크로스백을 뒤져서 수첩을 꺼냈다. 수첩에는 스크랩한 신문기사들이 가득했다. 첫 페이지에 붙여진 기사는 바람나라의 경제 상황이 좋지 않다는 내용이었다. 그 뒤로 각종 흉악범들의 도주내용, 또 바람나라의 불황이나 자살율 급증에 대한 기사가 질서롭게 붙어 있었다. 대체로 범죄에 관한 기사는 붉은 펜으로 엑스 자가 쳐져 있었다.

여자가 편 부분은, 범죄나 경제에 관한 기사가 아니었다. 가장 최근에 스크랩된 기사는 자연재해에 대한 기사였다. 비행나라의 휴화산이 갑자기 분출했다는 내용이었는데, 분출할 일이 억 분의 일도 되지 않는 화산이 터졌다는 것에 모든 과학자가 이유를 분석하는데 애를 먹고 있었다고 한다. 기사는 그 산에 접근하는 것부터 극심한 열기 때문에 불가능한 지경이라고 덧붙였다.

수첩을 닫고, 이번에는 그것을 뒷주머니 안에다 욱여넣었다. 그 대신에 크로스백은 자신의 바로 놓았다. 자기가 신은 축구화를 바라보다가 신발끈을 완전히 풀어헤치고 다시 묶었다. 엄지발가락이 저릴 정도로 신발끈을 묶었는지라 잔여 선이 그녀가 딛고 있는 바위에 닿았다. 바로 남은 끈을 위로 올려 양말에 넣었다. 나머지 한쪽 발도 그렇게 하고 그녀는 일어섰다.

 마그마는 삼각별 형태로 흐르고 있었는데, 한 쪽이 유난히 폭이 넓었다. 지금까지 그녀는 용암의 맥을 따라 올라갔었고, 이번도 역시 그것이 내려오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암석의 구조 때문에 더욱 깊숙이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 마그마 강을 뛰어넘을 필요가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도움닫기를 해도 절반도 넘기가 불가능한 거리였다. 그녀는 눈을 조용히 감고, 한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스무 번 정도 뒷걸음질을 치고, 전속력으로 달렸다.

용암에 빠지기 직전에 그녀의 몸은 탄력을 받아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다른 육상선수들이 그러는 것처럼 다리를 가위 모양으로 뻗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탄력을 받았지만 그것이 영원히 이어지지 않았다. 그녀의 몸은 그대로 중력의 법칙을 따라 용암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다만 고개를 홱 돌려 자신이 놓았던 크로스백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엄지손가락을 제외한 네 손가락을 엄지손가락 전체로 튕기며 주먹을 피자 그 자리에서 강풍이 불었다. 그녀는 그대로 움직이기를 그만두고 갑자기 생긴 바람에 몸을 맡겼다. 공교롭게도, 또는 놀랍게도 그 강풍은 제트 기류처럼 그녀를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 주었다. 그녀가 떨어진 곳은 용암이 아니라 바위였다.

그래도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한쪽 손으로는 바위를 짚고, 나머지로 쓸려진 허리를 붙잡고 일어섰다.

용암이 흐르는 쪽에는 일곱 살 정도 되 보이는 소년이 있었다. 빨간 머리가 아무렇게나 자라고 있었고, 피골상접이라는 말이 딱 어울릴 정도로 말라 있었다. 그는 손가락을 용암에 담그고 있었고, 용암은 그 손가락을 중심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입술은 왜인지 모르게 실룩거리고 있었는데, 그 사이로 보여진 이빨은 한 번도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는 것처럼 흰 색으로 반짝거렸다.

여자는 뒷주머니에 있는 수첩을 빼어, 두 번째로 최근에 붙인 스크랩을 보았다. 온도나라의 왕자가 실종되었다는 내용이었는데, 온도나라의 국왕은 그 왕자를 찾는 사람에게 국고의 2퍼센트에 달하는 금액을 주겠다고 하며, 왕자의 사진을 같이 붙여놓았던 기사다. 이름 볼린. 아버지를 닮은 빨간 머리. 키 125cm와 몸무게 17kg. 여자는 사진과 자신 앞의 남자를 번갈아 본 뒤 수첩을 다시 뒷주머니에 넣고 기침을 했다. 아무리 핫팬츠에 브래지어 뿐인 차림이라지만 용암이 꿀렁거리는 곳에 있는데 추울 리가 없다. 그래도 여자는 더 큰 소리로 기침을 했다. 그래도 남자아이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그녀는 앞주머니에 있는 펜던트를 꺼냈다. 펜던트에는 그녀의 얼굴과 그 옆에 ‘바람나라 공주 알티넨’ 이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알티넨은 그 펜던트와 스크랩한 신문 기사를 볼린이 있는 방향으로 던졌다. 거의 떨어뜨리듯이 살짝 던졌지만 서늘한 바람을 탄 그것들은 볼린의 무릎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볼린은 그것을 주워들고, 고개를 들었다. 알티넨은 그를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볼린은 다시 고개를 숙여 신문 기사를 훑어보았다. 그는 그것을 상대방이 있는 쪽으로 던져버리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상냥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손을 내밀었다. 볼린은 용암에 담그고 있던 손가락을 뺐다. 대신 그녀가 내민 손을 잡지 않고 중지만을 치켜들었다. 이내 그 손으로 마그마 한 움큼을 쥐어 그녀에게 뿌렸다.

알티넨은 뒷 방향으로 뛰어 볼린과 충분히 거리를 벌린 후, 내민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마그마는 그녀가 일으킨 손바람에 방향을 틀어졌다. 바람나라 공주의 몸에 피해는 없었지만, 웃음기는 싹 사라졌다. 도끼눈을 뜨고는 부채질한 손의 손가락을 붙였다. 손날을 허공에다 휘둘렀다. 높은 옥타브의 바람소리가 볼린에게 달려왔다. 바람은 무협 소설에서 흔히 묘사하는 참격 형태가 되어 옆의 바위들을 둔탁하게 잘라냈다. 볼린은 그저 눈을 부릅뜨고, 방금까지 용암을 만지던 손을 주먹쥐었다.

용암은 출렁거리던 것이 풍선이 터지는 속도로 굳었다. 여기저기 눈에 보이지도 않았던 알갱이들이 나타났다. 볼린을 향해 다가오던 바람도 사라지고 그 자리에 얼음조각들이 나타났다. 그 얼음조각도 꼬마 아이를 향해 다가왔지만, 바람보다는 확실히 천천히 다가와 그에게 아무 상처도 내지 못했다. 볼린은 손으로 맨살을 비벼대는 알티넨을 아무 말도 없이 바라보았다. 볼린은 날숨을 불었고, 입에서 드라이아이스가 떨어졌다. 볼린은 숨을 들이쉬었다. 그러고 가슴을 움켜쥐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알티넨도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코와 입을 손으로 가렸다.

볼린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쥐었던 주먹을 풀었다. 떨어진 알갱이들이 다시 사라졌다. 알티넨은 재채기를 했지만 표정은 훨씬 나아 보였다.

둘은 미소를 지었다.

둘은 서로를 노려보았다.

둘은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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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 쓸 때 격아 보고 썻는데, 세계관은 좀 더 속성 관련인 거 같네

이걸로 한번 지제륨 유니버스 짜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