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재생을 켜고 감상하면 더 맛깔납니다.


야간 자율 학습이라니, 야간이 아니라 저녁 먹을 시간에 시작해 놓고는, 자율도 아닌데다가 정작 학습보다 공책에 실없는 그림이나 끄적거리는 게 더 재미있는 시간인데 어째서 그런 이름을 달고 있는 것일까.

시윤은 학교 옥상 펜스에 팔을 걸치고 지평선에 걸친 노을에 멍하니 시선을 고정하며 생각했다. 자율학습 시작을 알리는 종 소리가 귓가에 어렴풋이 맴돌았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았다. 귀를 틀어막은 이어폰에서 거슬리는 종소리보다 몇십 배는 더 듣기에 편안한 재즈 음악의 흐름이 그의 귀로 천천히 밀려왔기 때문이다.


새털과도 같이 하늘하늘하고, 창공을 뒤덮어 물결치는 흰 구름 위로 죽어가는 태양이 그 붉은 선혈을 흩뿌려, 하늘은 빨간색으로 짙게 물들었다. 시윤은 그 이상야릇한 색깔을 너무도 좋아했다. 그는 하루 중 그 색채를 감상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을 교실 안에서 의미없이 흘려보내기에는 너무 아깝다고 생각했기에, 항상 이 시간에 옥상에 올라와 태양이 피를 흩뿌리고, 이내 새까맣게 죽어 가며 그 위로 별들이 떠오르는 광경을 감상했다. 아마도 이 학교에 자율학습을 빼 가면서까지 이 멋진 풍경을 즐길 생각을 할 만큼 간이 큰 사람은 시윤을 제외하고는 없는 듯 했다. 어제도, 그저께도, 한달 전 이 시간에도 옥상에는 그만이 있었다.


무엇이든, 죽음이 눈앞에 가까이 찾아왔을 때 그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 태양은 저물어 이제는 그 윗부분밖에 보이지 않았고, 하늘은 불타는 진홍색으로 물들었다. 챗 베이커의 재즈 음악이 시윤의 이어폰에서 흘러나왔다.


불타는 하늘을 텅 빈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시윤의 옆에 소리도 없이 한 여자가 다가왔다. 시윤은 그 여자가 옆으로 다가와 그녀의 왼손 손등으로 그의 옆구리를 의도치 않은 듯 스치기 전까지는,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기에 상당히 놀란 듯 했다.

여자는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고 흰 와이셔츠 위에 검은 넥타이를 맨 모습이었다. 아무리 봐도 시윤의 학교 교복은 아니었다. 그 학교에서는 복장 불량에 무거운 벌점을 부여했기에, 그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시윤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어깨까지 흘러내리는 검은 생머리에 크고 깊은, 무언가 생각하고 있는 듯한 까만 눈, 이상하리만치 창백한 피부에서 돋보이는 새빨갛고 얇으며 살짝 웃고 있는 입술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시윤의 귓가에 손을 뻗어 한쪽 이어폰을 빼더니, 자신의 오른쪽 귀에 꽂고 잠깐 동안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이내 옅은 미소를 띄우며 시윤에게 말했다. 


" 챗 베이커를 좋아하는 사람 중에 나쁜 사람은 없어. "


시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 어쩌면 우리, 친구가 될 수도 있겠는걸. "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펜스 위에 걸쳐진 시윤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었다.


" 그런데 노을은 언제나 볼 수 있는 거잖아. 그렇지 않아? "

그녀는 웃음이 섞인 목소리로 시윤에게 말했다.


" 초면에도 이렇게 말을 거침없이 거는 성격이구나, 너는. "

시윤이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 말했잖아, 챗 베이커를 좋아하는 사람 중에 나쁜 사람은 없다고. 이 학교에서는 너처럼 음악 취향이 훌륭한 사람을 찾기 힘들거든. 그래서 여태까지 아무한테도 먼저 말을 걸진 않았어. 친구도 너밖에 없고. "

시윤은 오늘 처음 만난 여자아이가 갑자기 자신을 친구라고 부르니 놀란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독특한 음악적 취향을 인정해 주었고, 무엇보다도 그녀는 아름다웠기에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 그래, 친구지. "


" 그러니까, 노을은 너무 흔하잖아, 예쁘긴 한데, 내일도 볼 수 있고, 10년 뒤에도 볼 수 있어. "

그녀는 생각하는 듯 말을 잠깐 멈추었다.

" 너, 한 일주일 동안만 학교 빠질 수 있어? 야자도 이렇게 마음대로 째는 걸 보니 그 정도는 어렵지 않을 거 같은데. "


" 뭐 상관없지 " 

시윤이 대답했다.


" 좋아, 앞으로 일주일 동안 우리 집에서 살아. 그 동안 나랑 같이 매일 영화만 보는 거야. 어때? "

" 영화? 좋긴 한데... 평소에 딱히 그런 걸 즐기는 편이 아니라서. "

" 괜찮아. 영화란 건, 한 번 보기 시작하면 몇 시간이고 계속 눈을 뗄 수 없는 그런 거거든. 너도 좋아할 거야. "

대화가 끝나고 얼마 간의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이윽고 그녀는 시윤의 목에 팔을 감고 간지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 내일 아침 5시에 학교 앞에서 만나. "


그녀는 천천히 그의 목에 감긴 팔을 풀고, 옥상을 내려가는 계단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잠깐! 우리 서로 이름도 모르잖아. 난 성시윤이야! " 

시윤은 가만히 생각하다가 큰 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계단을 내려가려고 하다가, 뒤를 살짝 돌아보며 말했다.

" 난 예은, 그냥 예은이라 불러. "


예은은 계단을 천천히 내려갔다, 옥상에 그녀가 계단을 한 걸음씩 내려가는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시윤은 펜스를 등지고 바닥에 앉아, 한숨을 내쉬며 이제는 노을이 저물고 별이 반짝거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양 볼은 마치 조금 전의 하늘 빛깔처럼 새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시윤은 그날 밤을 꼬박 새어 다음 날 3시까지 깨어 있다가, 샤워를 20분 동안이나 하고, 옷장을 뒤져 한참 동안 옷을 갈아입고 벗고를 반복하다가 집을 나섰다. 새벽 공기가 폐 속에 들어오는 느낌은 언제나 상쾌했다. 그는 한 번도 달리는 것을 쉬지 않은 채, 학교 앞으로 뛰어갔다. 

예은은 학교 앞 버스 정류장 의자에 걸터앉아 있었다. 시윤은 그 옆에 조심스럽게 앉아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시계는 4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 빨리 왔네. "

그가 말문을 열었다. 헐떡이는 숨 소리가 말에 어렴풋이 섞여 있었다. 


" 세 시 반부터 기다리고 있었어. " 

예은이 나지막히 말했다. 그녀는 어제와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오늘은 셔츠 위에 검은색 코트를 걸쳤다.


" 그럼 이제 갈까? "

그녀가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크게 펴며 말했다. 둘은 학교 반대편 골목길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 영화 많이 좋아해? "

그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 학교를 안 갈 때는 하루 종일 영화만 봐. 한 3편쯤, 그러니까 7시간 정도 보다가 조금 힘들면 음악을 틀어 놓고 잠들고, 깨어나면 또 영화를 보고, 좀 새로운 게 필요하면 학교에 가서 그냥 아무것도 안 하다가 와. 한 달에 한 번쯤? 근데 운 좋게도 그렇게 학교에 간 날에 널 만난 거야. "

예은은 그렇게 말하면서 손등을 시윤의 손에 몇 번 스치기를 반복하다가, 이내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시윤의 손을 잡았다.

시윤은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가만히 바닥을 바라보며, 그녀의 손에서 느껴지는 녹아내리는 기쁨을 음미하며 그저 가만히 있기로 했다.


" 여기야. "

예은이 말했다. 이런저런 실없는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그녀의 집에 도착해 있었다. 그 집은 허름한 벽돌 단독주택이었는데, 벽에는 담쟁이 덩굴이 조금 붙어 자라고 있었고, 좁은 마당에는 색색깔의 꽃이 위화감이 들 정도로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예은이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열쇠구멍에 집어넣어 돌리고 문 손잡이를 잡아 열자 날카로운 쇳소리가 잠시 들렸다.

둘은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 중앙에는 3인용 정도 되어 보이는 소파가 있었고 소파 쪽 벽에는 나무 서랍장 위에 작은 TV가 올려져 있었다. 주변에는 영화 DVD들이 가지런히 쌓여 있었고, 화분도 몇 개 보였다. 주방이나 침실, 화장실은 보이지 않았다. 확실히 평범한 집의 구조는 아니었다.


예은이 소파에 걸터앉자, 시윤도 따라 앉았다. 그녀는 발 밑에 아무렇게나 떨어진 담요를 끌어 올려 둘의 무릎에 덮었다.

" 그래서, 무슨 영화 먼저 볼 거야? " 

그가 질문했다.


예은은 대답하지 않고, 의도를 알 수 없는 미소를 흘리며 그의 눈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의 볼이 순식간에 붉은 색으로 변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시윤의 어깨에 자신의 머리를 기댔다. 그는 당연하게도, 영화를 빨리 보자고 재촉하지는 않았다. 











광기 공모전이지만, 아직은 그냥 별 볼일 없는 소설입니다.. 왜냐하면 상편은 하편을 위한 빌드업이거든요. 주제는 목적 없는 광기예요.


다음 편에는 아마 제목에 (이) 딱지가 붙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