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당신을 버렸다."

집행자는 투구 속 눈을 질끈 감고선 치켜든 검을 더 높게 들며 말했다.

햇빛에 반짝거려야 할 검이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먹구름 탓인지 어두운 색을 띄고있었다.

남자는 넋이 나간 듯한 표정을 지으며 두 손을 꽉 움켜쥔 채로 덜덜 떨며 주기도문을 외우고 있었다.

남자의 무릎 꿇은 다리가 저려오기 시작하자,집행자는 검을 내리쳤다.

순백의 갑옷이 남자의 피로 칠해졌다.

남자의 머리통이 피를 뿜어내며 관중들 쪽으로 이리저리 굴러갔다.

그들 중 누군가가 머리통을 쥐어들고 이리저리 흔들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두가 그것에 동참했다.

"이 자는 우리에게 내려진 은총을 거부하여 이렇게 되었다."

집행자는 광장에서 처형을 지켜보던 군중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사람들은 이성을 잃은 듯이 커다란 함성을 내질렀다.

입을 벌린 채 흙투성이가 된 남자의 머리통도 그들과 함께 소리치는 듯 보였다.

집행자는 그 함성들이 마치 끔찍한 비명소리처럼 느껴졌다.


'오늘 또 죄 없는 생명 하나를 내 손으로 짓눌러 꺼트렸다.'

집행자는 방에서 일종의 회고록을 작성 중이었다.

그는 하루에 한 줄씩 노트를 채워가며 자신의 커져가는 죄책감을 받아들이려 애썼다.

그 죄악이란 실로 거대한 것이어서,집행자라는 자신의 직책을 내려놓고 싶어질만큼 힘든 감정이었다.

그러나 역병과 마물이 뒤엉킨 세상에서 주민들이 의지할 곳은 본인과 신앙뿐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런 미친 짓을 자신의 손으로 해야만 하는 이유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분명 몇 주 전이었다면 그냥 넘어갈 수 있었을 일들이었다.

점점 힘들어지는 상황 속에서 주민들이 예민해지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건 분명 무언가 잘못되었다.

온 몸이 뜨거워지다 죽는 전염병이 퍼져 마을이 풍비박산이 났고,

약간의 기침 증세를 보이던 여자아이는,'전염병이 걸렸으니 죽여야 한다'는 아이의 아빠에 의해 살해되었다.

힘든 상황을 다같이 이겨내자며 눈물을 흘리던 시장 아주머니는 그 다음날 빵 한덩이를 먹으려던 소년을 시샘해 교살했다.

또한 살해당한 소년의 어미 되는 자는 그 아주머니를 찌른 뒤 할복했다.

오늘 아침 목을 베었던 남자도 분명 그런 식이었다.

그는 본인의 아이를 죽이려 했다는 부모의 주장으로 인민 재판에 넘겨진 뒤,몰표에 가까운 득표수를 기록하고 목이 잘렸다.

집행자는 그들을 중재하려 했으나,돌아오는 건 수많은 사람들의 '죽여라'는 외침 뿐이었다.

나흘 간 이런 식으로 목이 잘린 사람들이 9명이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사람들이 정신을 놓아버리고 있었다.

집행자는 겉부분이 전부 해진 가죽 노트를 덮어둔 채 침대에 누웠다.

커다란 한숨을 쉬면서 그는 힘겹게 잠을 청했다.


집행자는 꿈을 꾸었다.

마물들이 본인의 마을과 주민들을 짓이기고 있었다.

마을은 사람들의 시체를 연료삼아 불타며 재가 되고 있었다.

불길은 더더욱 커지며 춤을 추었고,햇빛을 몇 달간 받지 못했던 마을은 그제서야 밝음을 되찾았다.

그가 아무리 검을 휘둘러도 마물의 수는 줄어들 생각을 않았고,그는 거의 지쳐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흉측한 마물들이 그의 목을 노리러 때거지로 달려들기 직전이었다.

무언가가 그의 귀를 간지럽혔다.

아니,무언가가 아니었다.

누군가였다.

'믿어라.'


집행자는 소리를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얼굴을 흠뻑 적셔놓은 식은땀이 아래로 흐르는 것을 그는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 창문을 바라보았다.

바깥쪽이 시끄러웠다.

하룻밤 사이에 또 누군가가 사람을 죽인 모양이다.

그가 꾸었던 꿈에서의 마을이 창문 밖의 모습과 겹쳐보였다.

그는 식은땀을 손으로 닦아낸 뒤 신경질적으로 창문을 닫았다.


그 날도 집행자는 자신이 낳은 아이를 불태운 여자를 처형시켰다.

그 여자의 피가 묻은 갑주를 한시라도 빨리 벗어 던지고 싶었던 그는 집으로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땅이 울린다.


그는 자신의 무거운 투구의 마찰음 때문이겠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집행자는 그제서야 무언가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했다.

그의 몇 병 남지 않은 성수를 온 갑주에 뿌린 뒤,그는 검을 뽑아들었다.

하지만 낌새를 알아차렸을 땐,이미 너무나도 늦은 이후였다.


집행자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상황이 꿈만 같다고 생각했다.

정확히 어젯밤 꾸었던 꿈에서 나온 것과 같은 마물들,같은 시체들,같은 불꽃들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군인지 적인지 모를 시체들을 밟으며 미친듯이 단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러나 단단한 피부를 가진 마물들을 베어내지 못해 끝내 부러져버린 자신의 검을 조그만 단검이 대체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단검이 부러지자,그는 마지막으로 남았던 성수를 꺼내 마물들을 향해 뿌렸다.

타는 듯한 소리를 내며 괴물들이 고통스러워 하자,그 틈을 타 그는 성수들을 보관해 둔 교회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마을 가장 안쪽에 있는 교회는 다행히도 피해가 그리 커보이진 않았다.

그는 교회 뒷쪽에서 후광이 내리쬐는 듯한 느낌을 받을 정도로 다행스러움을 느꼈다.

달리며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전투 중 접질린 발목이 욱신거렸다.

허나 그런 것을 느끼지도 못할만큼 온 몸이 지끈거렸기에,그는 접질린 발목을 눈치조차 채지 못했다.


교회의 대문은 열려있었고,집행자는 교회 안쪽을 향해 미친듯이 달렸다.

성수를 대량으로 보관해둔 여길 기점으로 한다면,어쩌면 마물들을 몰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성수를 몇 병 꺼내 갑주에 전부 뿌리던 순간,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그였다.

누군가였다.

'무엇을 하는 것이냐.'

"누구십니까?"

'너희들이 숭배하던 자다.'

집행자는 그 말을 들은 순간,자신의 신앙이 거짓되지 않았음을 깨닫고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저희에게 이런 시련을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너희들의 행보를 며칠간 지켜보았다.'

집행자는 그 말을 듣고선 자신이 베었던 사람들을 생각하며 두려움에 휩싸였다.

"정녕 그것이 이유인 것입니까."

신은 침묵했다.

"저희는 그간 서로를 보듬어주고 위해주면서 마을을 가꾸었습니다만,어느샌가 모두가 바뀌었습니다."

신은 또다시 침묵했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서로를 증오하기 시작했습니다."

집행자는 투구를 벗고,흘리던 눈물을 닦아내었다.

"지금도 바깥은 불타고있고,사람들은 거의 다 죽었습니다.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입니까?"

그는 무릎을 꿇고 두 눈을 찡그리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믿음은 세상의 열쇠이다.'

집행자는 갑자기 사방이 막혀있는 창고에서 따뜻한 빛이 본인을 향해 내리쬐는 것을 느꼈다.

'믿어라.내게 몸을 맏긴 뒤 번뇌를 빛에 씻어라.'

집행자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볼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느꼈다.




역병이 사라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성직자는 옆 마을이 마물들의 습격으로 인해 완전히 파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선 그 폐허쪽으로 막 출발하려던 참이었다.

교회의 청소부가 그를 막아세운 뒤 말했다.

"자네,그래도 혹시 모르니 성수를 좀 챙겨가게."

"하하,괜찮습니다.저에겐 세상에서 가장 빠른 제 말이 있으니까요."

"뭐,자네만 괜찮다면야."

청소부는 호탕하게 웃으며 그를 보냈다.


성직자는 말을 타고 가던 도중,설마 이 잿덩어리들이 내가 도착하려던 마을인가 싶어 다급하게 고삐를 당겼다.

마을은 더 이상 마을이라 부르기가 민망할 정도로 온통 새까만 재투성이었던 것이다.

성직자는 말을 멈춰세워 검정으로 가득찬 폐허를 걷기 시작했다.

그는 바닥에 바짝 구워진 내장으로부터 눈을 피했지만,눈길이 간 다른 곳에는 때로 불타 죽어있는 아이들의 시체가 있었다.

그 어디로 눈을 돌려봐도 끔찍한 것들 투성이었다.

그러던 도중,그는 저 멀리에 자리잡은 흰색 건물만이 그나마 멀쩡하다는 것을 보고선 그 쪽으로 가기위해 말에 올라탔다.

'혹시 모르니 성수를 챙겨가게.'

그는 어렴풋이 청소부 아저씨의 말을 들을걸,하고선 말을 움직였다.


성직자는 불에 타 사라진 마을과는 달리 멀쩡한 이 곳에 이질감을 느꼈다.

또한 그는 들어서자마자 안쪽을 보고선 이곳이 교회로써 이용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보니,창고 쪽으로 이어진 듯한 문이 있었다.

문은 흰색 대리석으로 이뤼져 있어 신비로운 분위기를 뿜어내었다.

성직자는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안쪽은 전부 깨져버린 성수병,의식에 사용되는 듯한 성배 여럿이 있었다.

그리고 갑옷을 입은 채로 무릎을 꿇은 시체 한 구가 보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시체가 튀어나오자,성직자는 약간 놀란 마음을 추스려야만 했다.

성직자는 깨진 성수병 조각을 조심스럽게 밟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성직자는 심상치 않음을 다시금 감지하고선 이 방 안의 상태를 기록했다.

그는 시체는 어쩌다 여기로 들어왔을까,성수병은 어째서 전부 깨져있는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가만히 방 안을 관찰하던 도중,그는 무언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교회 정문에서부터 온갖 벽에 세겨져있던 십자가가 이곳에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다시금 까맣게 타 얼굴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시체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시체가 입고있는 갑옷엔 역오망성이 새겨져 있었다.


악마의 개입이 있었다.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방을 뛰쳐나가려 했지만,이미 때는 늦었다.


'믿어라.'


그의 몸이 뜨거워졌다.













광기의 전이를 주제로 해서 한번 써봤음

몸에 악마 달아놓은 성직자가 마을로 가서 광기 퍼뜨리는 2편도 쓰고 싶은데

글 쓰는 거 너무 힘들다 ㄹㅇ...

누가 좀 "써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