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예은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렇게나 바닥에 쌓인 DVD 케이스 중 하나를 집어 올렸다. 케이스에는 " 펄프 픽션 " 이라는 노란색 글자가 적혀 있었다.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시윤의 눈 앞에 케이스를 흔들었다. 


" 내가 두 번째로 좋아하는 영화야. " 

시윤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빨리 앉으라는 듯 소파를 손으로 툭툭 두들겼다. 그에게 영화는 사실 안중에도 없었다. 예은은 케이스를 열어 DVD를 꺼내 플레이어에 집어넣었다. 화면에 회백색 노이즈가 몇 초간 나타나더니 이내 멈추고 영화가 시작되었다. 둘은 한 이불을 덮고 소파에 걸터앉아 영화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 어땠어?"

" 음, 솔직히 조금 실망스럽긴 했어. 영화 내내 피 튀기는 장면밖에 안 나왔잖아. 뭔가 메시지라 할 만한 건 없는 것 같은데? "

시현은 공허한 시선을 바닥에 고정시킨 채로 대답했다.


"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감상평은 사람마다 당연히 다른 거니까. 이제 다음 영화 보자. "

예은은 그렇게 말하고는 DVD를 꺼내 바닥에 내던졌다. 플라스틱이 부러지는 소리를 내며 DVD 조각이 바닥에 흩뿌려졌다.

" 좋아, 다음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이걸로 하자. "


펄프 픽션부터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멀홀랜드 드라이브, 저수지의 개들, 헤이트풀 8, 인셉션, 콘스탄틴, 파이트 클럽, 위대한 레보스키, 다크 나이트, 그리고 수많은 이름 모를 영화들까지. 둘은 수많은 영화를 보고, 그러다 지치면 빌 에반스에서부터 챗 베이커, 루이 암스트롱 같은 재즈 가수들의 음악을 틀고 잠에 드는 일을 반복했다. 시윤에게는 사실 그다지 마음에 드는 시간은 아니었다. 그녀가 틀어 주는 영화들은 하나같이 난해하고, 잔혹하며 시종일관 무엇인지 모를 광기에 찬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곁에는 항상 그녀가 있었기에, 시윤은 항상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특히 6일째의 마지막 영화를 볼 때 경험한, " 나체 관람 " 이라는 것은, 그의 뇌리에 강렬한 이미지를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시윤은 속된 말로, 진도를 더 빼려고 생각도 해 봤지만 그녀는 그것을 원하지 않는 것 같았기에 그만두었다.


" 일어났어? "

예은이 시윤을 지그시 내려다보며 청명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그녀의 머리는 잠에서 방금 깬 듯 정리가 되어 있지 않았고, 복장도 첫 날에 입었던 외출복 그대로였지만 여전히 아름다웠다.

" 응, 일어났어. "

" 오늘은 마지막 날이니까 딱 한 편만 보고 헤어질 거야. 내가 첫 번째로 좋아하는 영화를 보여줄게. "

그녀의 말을 듣고 시윤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애써 웃어 보였다. 


" 왜, 가기 싫어? 그래도 어쩔 수 없어. 내일부터는 학교에 가야 하잖아. 내일은 나도 오랜만에 학교에 가 볼 거야. 대신 오늘 볼 영화는, 네가 진짜 본 걸 후회하지 않을 만큼 재미있을걸? 그건 확실해. "

예은은 구석에 놓여진 화분을 들어 옮겼다. 화분이 있던 자리에 DVD가 종이에 싸인 채 깔려 있었다. 그녀가 DVD를 플레이어에 집어넣으니 화면에는 큰 흰색 글자로 ' 상실 ' 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영화의 제목인 듯 했다. 


영화가 시작되고 화면에는 온갖 쓰레기로 가득 찬 방과 그 가운데 웅크려 있는 남자가 나왔다. 남자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바닥에 가득 찬 쓰레기 속을 마치 헤엄치듯 기어다니다가, 어느 순간 무언가에 홀린 듯 쓰레기 더미 속을 손으로 미친 듯이 헤집었다. 쓰레기 더미 속에 섞인 철 조각들과 깨진 유리병들 때문에 남자의 손은 온통 찢어지고 갈라졌지만 남자는 헤집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이내 남자는 쓰레기들 사이에서 손바닥만한 검은색 돌덩이를 발견하고는, 그것을 두 손으로 꼭 움켜잡고 이마에 댄 채로 흐느끼며 울부짖었다. 카메라 앵글은 울부짖는 남자를 자그마치 5분 남짓이나 비추고 있었다. 남자는 이내 울음을 그치고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방 안에 불을 붙였다. 방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이고, 남자의 몸에도 불이 옮겨 붙었지만 남자는 아픈 기색 하나 없이 천천히 창가로 걸어가 몸을 던졌다. 남자의 몸뚱이는 순식간에 아래로 곤두박질쳤고, 머리가 깨져 피가 흘러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돌덩이를 품에 안은 채 놓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가 떨어진 빌딩이 통째로 폭발하고, 붉은색 불씨와 잔해들이 남자의 위로 쏟아져 내린다. 카메라는 처참한 죽음을 맞은 남자를 비추더니, 지나가던 사람이 남자의 시체에 침을 뱉고 그의 손을 억지로 벌려 돌덩이를 빼앗아 주머니에 넣고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며 영화가 끝났다.


시윤은 이 영화는 여태까지 본 영화 중 가장 재미없고 난해한 영화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영화가 재생되는 내내 옅은 미소를 띄고 있던 예은의 표정과, 이 영화가 자신이 첫 번째로 좋아하는 거라고 했던 그녀의 말이 생각나, 영화를 좋아하는 척 연기하려고 마음먹었다.


" 이 영화, 진짜 재밌지 않아? "

" 역시 네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는 다르네, 재미있었어. "

시윤은 취향 한번 특이하다고 생각하며 대답했다.


" 어떤 거 같아? "

예은이 갑작스럽게 질문했다.

" 응? "

" 보면서 뭘 느꼈냐고. "


" 음... 그러니까, 뭔가 주인공이 한심했어. 고작 돌덩어리 때문에 자기 목숨까지 버려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

" 만약 너였다면, 안 그럴 거야? "

" 그렇다고 봐야겠지? 별 소중한 것도 아니니까. "

예은은 그의 답변을 듣고 무언가 생각한 듯 눈을 감고 끄덕였다. 


" 그럼, 이제 집으로 돌아가. 내일 운이 좋으면, 학교에서 만날 수 있을지도 몰라. "

" 그래, 내일 보자. "

" 아니, 내일 보자가 아니지. 운이 좋으면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니까. 운이 나쁘면 못 보는 거야. "

시윤은 말없이 한 번 웃어 보이며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 알았어. 운이 좋으면 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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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옥상 계단 출구에 주저앉아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분노와 배신감을 토해내는 일밖에 없었다. 

충격에 굳어 버린 그의 입에서는 아아, 하는 옅은 신음소리만이, 눈에서는 뜨겁게 흘러나왔다가 이내 땅바닥에 곤두박질치며 차갑게 식는 눈물만이 흘러 나왔다. 

옥상에 올라가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모른 채로 지낼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시윤의 머릿속을 빠르게 지나갔다. 


다음 날 학교에 나와 언제나처럼 저녁 무렵 옥상에 올라간 그의 눈에 보인 것은, 옥상 펜스에 기대 앉은 이름 모를 남자와, 그 위에 올라타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이 검은 정장을 입은 채로 의미심장하고 야릇한 미소를 흘리는 예은이었다. 그녀의 입술은 평소보다 더 빨갛게 상기된 채 촉촉히 젖어 있었다. 눈은 반쯤 감긴 채로 그 남자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고, 남자는 셔츠 윗자락이 약간 풀어헤쳐진 채 텅 빈 듯한 무표정으로 그녀 어깨 너머 하늘을 주시하고 있었다.


" 아, 넌 오늘 운이 좋았구나? 또 만났네. " 

예은이 싱긋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시윤은 뱉어내고 싶은 수많은 감정 격한 말들 대신 가쁜 숨과 초점 없이 노려보는 눈길로 대신했다.


" 오늘 아침에 만난 친구야. 이 애는 나랑 좋아하는 음악에, 영화 취향까지 비슷하더라고. 제일 좋아하는 영화감독이 쿠엔틴 타란티노래. 나도 타란티노 영화를 진짜 좋아하거든. " 

예은은 그렇게 말하며 남자의 턱을 손가락으로 한 번 훑었다.

" 이 친구도 너처럼 챗 베이커를 좋아해. 둘이 한 번 친해져 보는 건 어때? "


시윤은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에, 차디찬 바닥에 머리를 박고 울음을 터뜨렸다. 

" 내일부터 한 달 동안 이 애랑 우리 집에서 영화를 볼 거야. 너도 올래? 아니, 미안해. 이번엔 우리 둘이 있는 게 더 나을 것 같아. 태성이는 영화를 보는 눈이 엄청 뛰어나거든. 그렇지? " 

예은은 고개를 숙여 그 남자의 목덜미를 깨물어 이빨 자국을 남겼다. 그에 반응하는 듯 남자는 떨리는 양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힘껏 잡았다. 


" 아니야, 나도 영화를 진짜 좋아해... 네가 제일 좋아한다는 그 영화도 다 이해했거든. "

시윤은 몸을 일으켜 뒤엉킨 두 남녀에게로 천천히 걸어갔다. 한 걸음, 한 걸음을 뗄 때마다 뜨거운 날숨이 흘러나왔다.

그는 예은의 정수리를 두어 번 쓰다듬고 남자의 위에서 조심히 떼어냈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남자를 머리 위로 들어 난간 밖으로 던져 버렸다. 순간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지다가, 무언가가 둔탁하게 터지는 소리와 함께 멈추었다. 


예은은 어느새 조용히 일어나서 그 모든 장면을 지켜보았다. 시윤은 뭉개진 남자를 향해 침을 한 번 뱉고, 계단으로 뛰어가 순식간에 1층까지 내려가서는 학교를 벗어나 하염없이,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 채 그저 달리기만을 반복했다. 


시윤의 뒤에서 눈이 멀 것 같이 밝은 섬광과 지축을 뒤흔드는 폭발음이 들려오자 그는 마침내 달음박질을 멈추고 길에 드러누워 하늘을 보고 힘껏 소리내어 웃었다.


오늘은 구름이 낀 날씨였기에 노을은 보이지 않았다. 하늘은 붉게 물들었다. 새빨간 불씨와 먼지들이 그의 몸 위로 쌓여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