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밖으로 나와 외부 세상을 바라보았다. 세상은 변함없이 시끄럽고, 걸리적거리고, 눈부시며, 피로한 모습이었다. 한층 더 시끄러운 소음에 고개를 돌리니 그 곳에 어린아이들이 쉴 새 없이 입을 움직이고 있었다. 필자는 어린아이들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다. 이는 불쾌라는 단어나 성가시다는 단어와 같은 감정의 적자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저 흑자도 적자도 아닌 어느 중성의 지점에 위치하는, 도움을 주고자 하는 의사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더불어 해를 끼치고자 하는 의사도 존재하지 않는, 언어 그대로의 부재를 의미했다. 정확히 그 정도였다. 다행인 점은 어린아이들도 필자를 선호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한 요소임이 분명하다. 적어도 상호간의 물리적 거리와 심리적 거리가 줄어드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을 것임을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그러한 비선호를 숨기기 위한 얄팍한 연기를 하지 않는 진솔한 부류이기에, 그나마 나은 부류로서 분류할 수 있을 터이다.


필자는 이처럼, 필자를 좋아하는 대상보다, 필자를 싫어하는 대상을 조금 더 긍정적으로 분류한다. 적어도 그러한 자들은 필자가 그들에게 일말의 흥미도 없다는 사실에 불만을 토로하는 일은 없다. 필자를 향한 일관적인 무관심을 표하는 개체는 가장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정확히는, 필자가 인지조차 하지 못하는 개체들이야 말로 가장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한 개체들일 것이다. 그러한 관점을 적용한다면, 쉴 새 없이 소리를 내며 스스로의 존재를 과시하는 어린아이라는 개체가 상대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 않는다는 점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다지 듣고 싶지도 않은 것을 들어야 하는 상황은 긍정적이지 못하다. 누군가 듣고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 속에서 언어적 표현을 반복하는 행위를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도 없다.


그러한 과다한 정보들은 사고를 유발한다. 스스로가 처리하지도 못할 수준의 정보는 스스로가 탈진할 수준의 사고의 근원이 된다. 어린아이들은 그러한 순수한 사고의 근원을 마련해 주는 경우도 있다. 사고를 바라고 외출을 결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휴식을 위한 과정도 아니었기에, 사고의 흐름은 그저 흐른다. 어린 아이들이 놀고 있다. 아직 저학년의 학생인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이미 학원에 잡아 먹혀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금일이 휴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특별한 날이었을지도 모른다. 알 바는 아니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아이들은 놀고 있었다. 문득 아이들의 음성 속에서 규칙을 들었다. 그러할 것이다. 놀이에는 규칙이 존재한다. 규칙을 깨뜨린 순간부터 놀이는 놀이가 아니다. 하지만 어린아이들의 놀이의 규칙은 그렇게 엄격하지 않다. 묘사한다면, 관대한 편이다. 한두 번 정도 규칙을 어기더라도 약간의 실랑이가 있을 뿐 얼마 지나지 않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놀이를 반복한다.


문득, 도로를 거닐며 흰색 선로를 밟고 뛰어노는 아이들의 기억이 떠올랐다. 선로를 따라가며, 때로는 뛰고 때로는 걷고, 때로는 멈추며 선을 밟으며 나아가는 아이들의 기억이 떠올랐다. 선이 아닌 곳을 밟으면 죽는다는 해괴한 논리를 펼치는 아이들의 기억이 떠올랐다. 사실, 그 누구도 죽지는 않았다. 설령 실수로 선을 벗어나도 금세 새로운 목숨을 받고, 없었던 일로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질릴 때쯤, 스스로가 유치한 놀이를 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개를 가볍게 숙인 채 집으로 돌아간다. 아이들의 놀이는 그러한 식이다. 즐거움을 위해 놀이를 만들고, 놀이를 위해 규칙을 만든다. 규칙에 따라 놀고, 놀이로 인해 즐겁다. 목표는 명확하고, 명확하기에 솔직하다. 즐겁지 않은 놀이는 시도하지 않으며, 즐겁기 위하여 놀이의 규칙을 바꾼다. 이윽고 즐겁지 않다면 규칙은 순식간에 깨뜨리고 다른 규칙을 바탕으로 한 놀이를 마련한다. 


성인들의 사회도 이와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적어도 필자라는 개체가 바라본 사회의 모습은 아이들의 놀이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문서의 규격을 통일하고, 옷차림을 통일하고, 말투와 행동을 통일하고, 그것을 따르지 않는다면 죽는다는 해괴한 논리를 펼치는 곳이 완전히 같은 놀이를 즐기는 듯해 보였다. 해괴한 논리 속에서 스스로의 상상 속의 괴물에게 사로잡아 먹히는 아이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사고하였다. 그저 아이들의 놀이보다 조금 더 복잡하고, 조금 더 어렵고, 조금 더 진지한 수준이었다. 그리고 아이들은 즐겁고, 어른은 즐겁지 않다.


이상할 것은 없을 것이다. 저 아이들이 자라면 어른이 될 것이고, 모든 어른들은 또한 저 아이들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니 어린 시절부터 계속 같은 놀이를 반복하고 있더라도 조금도 이상할 것은 없을 것이다. 다만, 놀이가 익숙해질 때마다 조금씩 규칙을 추가하고, 벌칙의 수준을 높이고, 더 많은 인원을 초대하여, 조금 더 몰입하는 과정을 수 십년 간 반복하다 스스로가 놀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을 터였다. 그것이 놀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인지하지도 못하는 수준으로 몰입하며 놀이를 이어갔고, 이제는 놀이를 끝내고 고개를 푹 숙이고 돌아갈 집도 없는 모양이었다. 집에서조차 놀이를 이어가는 모양이었다. 스스로의 행위가 그저 모두와 함께하는 규칙 놀음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스스로의 놀이를 놀이라고 부르는 것조차 어려운 수준에 이른 듯했다.


이해를 보일 만하다. 같은 놀이를 수 십년 동안이나 진지하게 반복해 왔건만, 그것을 놀이로 인정해 버리는 것은 수치스러움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없을 수준으로, 고개를 푹 숙이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수치심일 것이다. 그러니 놀이가 아니었던 것으로 취급하며, 그것이 실제인 것처럼 취급하며, 계속 놀이를 이어갈 수밖에 없을 터이다. 어느새 조용해졌다. 아이들은 그 곳에 없었다. 피로감이 몰려왔고, 발목이 따가웠다. 그러나 잠들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기에, 뜨거운 커피를 갈망하며 조용히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