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 어딘가의 한적한 마을.

오후 3시가 지난 시각이지만 하늘은 장막이 깔리듯이 어두컴컴 했고 차들이 지나다니는 도로에는 삭막했으며 쌔한 바람만이 불고 있었다.

그런 정적을 깨부수듯이 시끄러운 자동차 엔진음이 고요함을 집어삼켰다. 바람을 가르며 나타난것은 고급 스포츠카였다.

고급 스포츠카는 속도제한따위 무시하고 타이어에 연기가 나듯이 기어를 올리며 도로를 질주했다.

멈춰선 곳은 와인이나 양주 같은 비싼 술을 파는 술집이었다.

 딸깍 소리를 내며 차 문이 열리자 어느 한 남자가 걸어나왔다. 목까지 오는 남자치고는 긴 머리에 날카오운 눈매 턱에는 관리가 안 된 수염이 나있고 회색 티셔츠에 청바지, 멸망이 되지 않았더라면 미국 어디에서라도 볼 수 있는 중년 남성이었다.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말끔한 차림의 웨이터가 남자를 놀란 듯이 남자를 보고 또 다른 웨이터가 놀람을 감추며 다가왔다.

"어서오세요. 미스터 엔"

남자는 살짝 고개를 숙이고 정중한 말투로 말했다.

"서비스를 받고 싶습니다."

남성 웨이터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지금 당장 점장님을 모셔오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웨이터는 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남자를 자리로 안내했고 조용히 앉아 생각에 잠겼다.

불과 3개월전 세상은 멸망했다. 뉴스로 이 소식을 들었을땐 어이가 없었지만 막상 닥치고나니 세상은 빠르게 멸망했고 사람들은 패닉에 빠졌다. 여러 사람들이 죽고 다쳤으며 경제,문화,의료 너나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스톱되었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말하는가. 이 패닉 속에서도 사람들은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었다. 생각에 잠겨있는 남자 흰수염이 매력적인 앞에 노신사가 의자에 앉았다.

"오래간만일세 미스터 엔"

"오래간만입니다 마이클"

노신사는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엔에게 악수를 청했다.

"요새 어떻게 지냈나? 은퇴했다고 들었는데"

악수를 받아들이고 엔은 점잖히 말을 이어나갔다.

"은퇴한 이후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세상이 멸망하기 전까지요"

"그렇군 얼마 전에 시작된 패닉말이군"

엔은 고개를 끄덕였고 둘은 침묵을 이어나갔다. 기나긴 침묵 끝에 마이클이 입을 열었다.

"뭐라도 마시겠는가? 아무리 세상이 멸망했다지만 자네를 위해서라면 비싼 술이라도 꺼내야지"

마이클이 웨이터를 부르는 것을 엔이 저지했다.

"괜찮습니다 그것보다 서비스를 이용하고 싶습니다"

"물론이지 최고의 서비스로 대접하겠네"

마이클이 새까만 카드 한장을 넘겨주며 자리에서 일어나고 문득 생각이 난 듯 한마디를 입밖에 냈다.

"그러고보니 복귀한건가?"

"네"

남자의 얼굴은 차갑게보이지만 날카로운 눈에는 처절한 분노가 느껴진 노신사는 한마디를 더 건내고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어서오십시오 릴리얼 코드에"


릴리얼 코드. 이곳은 겉으로 봐서는 양복 입은 부르주아들이 비지니스 얘기하러 올듯한 비싼 술집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거기에는 이면이 있다. 그 이면은-

엔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지하로 내려가니 검은 양복의 여자가 맞이해주었다.

"어서오십시오 미스터 엔 무슨 용무이십니까?"

"시음을 하고 싶습니다."

엔은 검은 카드를 내밀자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버튼을 눌렀다. 기계음이 들리며 문이 열리고 엔은 저벅저벅 걸어 들어갔다.

방안의 풍경은 무척 엔티크했다. 70년에 볼 수 있을 법한 괘종시계에 목재로 이루어진 오래된 탁자 그리고 비싼 가죽으로 만들어진 소파. 둘러보면 비싼 골동품이 장식되어 있는 방처럼 보이지만 벽에는 이 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물건들이 나열되었었다.

총. 권총이나 소총 기관단총 등등 세계 각국에 군대에서나 쓰일법한 총들이 벽면을 잔뜩 장식하고 있었다.

"시음을 원하십니까? 여기로 오시지요"

중후한 목소리의 남자가 엔을 맞이했다. 남자 앞에는 'ㄱ' 모양의 나무탁자가 있었고 그 뒤에도 총이 나열되어 있었다.

"은퇴하셨다고 들었는데 복귀하신겁니까?"

"네. 잃은 것이 있기에"

엔의 표정은 차마 말할 수 없었기에 남자는 담담히 일을 시작했다.

"평소에 독일산의 제품을 선호하시는건 알고있습니다. 하지만 미국산 제품도 휼륭합니다"

남자는 재빠른 발걸음으로 총을 가져와 조심히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m&p 9mm 2.0 입니다. 손에 쥐기 편하시도록 손 크기에 맞춰 그립을 맞춰드리겠습니다."

"나머지 하나는 베레타92로 하겠습니다"

"역시 하나는 손에 익숙하신 것을 사용하시는군요"

"목숨이 달려있기에"

엔은 짧게 말하고 다음 총을 주문했다.

주문한 총은  "m&p 9mm 2.0, 베레타92,HK416이었다.

총기 주문이 끝나고 엔은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내려가니 이번엔 줄자를 든 남성이 서 있었다.

"서비스를 이용하고 싶습니다"

엔이 카드를 내밀어보니 남자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엔을 안으로 안내했다.

줄자로 꼼꼼하게 어깨 너비를 재고 허리를 두르며 옆에 있는 보조에게 수치를 말하면서 엔에게 말했다.

"어떤 스타일로 하시겠습니까?

"이탈리안"

"단추는요?"

"2개"

"안감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꼼꼼하게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전부 방으로 보내드릴까요?"

"네"

엔은 짧게 말한 뒤 가볍게 인사 하고 나왔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주점 밖으로 나왔다.

밖은 여전히 한산했으며 사람 한명도 보이지 않는다. 뒤에는 이에 어울리지 않는 고급 술집 릴리얼 코드.

밖에서 마이클이 차 앞에서 두꺼운 시가를 태우고 있었다.

"자네도 한대 태우겠나?"

"끊었습니다"

"옛날에는 자주 태웠던 걸로 기억하네만."

"아이가 있었으므로"

"그렇군"

 마이클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가족이 있었지? 은퇴한 이유도 그거였고"

"네… 하지만… 다 죽었습니다 3개월전에 일어난 재앙때문에…"

엔은 고통스러운 얼굴을 하며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마이클은 착잡한 얼굴을 하며 엔을 바라보았고 담뱃재가 땅에 떨어질 무렵 엔은 숨을 크게 들이쉬며 기분을 추스리고 말했다.

"재앙이 일어났는데도 용케 이렇게 운영하시는군요"

그렇다. 재앙이 일어나서 국제적으로 식량난에 빠졌고 달러는 휴지 조각이 되었으며 웨이터로 일할 사람을 구하는 것은 지금 시기에는 쉽지 않은 일이다. 물론 이 노신사가 손에 들고 있는 시가 조차도 지금은 구할수도 없는 물품이다.

"비축 해 놓은 식량이 꽤 있어서 말이지 그리고 보관 해 놓은 고가 물품도 꽤 있고 말이야"

"그럼 그 시가는…?"

"내가 30년 전에 보관해두던 물품일세 허허허!"

"아끼는걸 피시는군요"

"언제 죽을지도 모르니깐 말이야 ts빔 맞고 할머니가 되기 전에 미리미리 펴둬야지"

"그러고보니 일본에선 요상한 포즈를 하면서 이상한 말을 하고 다니는 집단도 있다고 하더군요"

"하이그레 마왕이라고 칭하는 놈이었나? 별 이상한 집단을 다보겠구먼"

"집단 환각이나 최면으로 보는 시선도 많습니다"

"자네도 조심하게 뭐… 자네라면 걱정 할 필요는 없겠지만"

마이클은 엔의 정체를 알고 있는 만큼 신뢰가 컸다.

통칭 미스터 엔. 지금은 은퇴해서 조용히 살고 있지만 전직 살인청부업자. 일명 살아있는 귀신이라 불렸던 존재이다.

맨몸으로 마피아 조직을 쓸어버리는건 기본이요, 나라의 높으신 분이 엔을 고용해서 적이 된 정치인을 암살시키는게 대다수였다.

"내가 너무 시간을 잡았군 살아있으면 또 이용해주시게나"

"다음에도 이용하겠습니다"

"좋은 사냥이 되시길"

릴리얼 코드. 살인청부업자 업계에선 유명한 그룹으로 주로 서포터 계열의 후방 지원을 주로 하는 서포터 그룹이다. 총의 지원이나 방탄 슈트의 제작등등 킬러가 원한다면 어떠한 요구도 다 들어주고 대응하는게 서포터 그룹의 일이다. 엔도 살인청부업자 시절에 자주 애용했던 서포터 그룹이 이 릴리얼 코드였다.

엔이 차를 타고 시동을 켜니 시끄러운 엔진음이 시끄럽게 울렁거렸다.

마이클이 생각난듯이 말을 이어붙였다.

"그러고보니 엔 자네의 타겟은 누구지?"

엔은 드물게 미소를 띠며 말했다

"제 타겟은-"


달도 뜨지 않은 밤. 높은 빌딩들이 하늘을 찌를듯이 높지만 거기에 불빛은 없다.

서포터 그룹의 호텔의 최상층에서 엔은 샤워를 끝마치고 나왔다. 고급스런 유리창 저너머에는 캄캄했다. 방에는 전등이 들어오지 않아 어두웠으며 인영이 간신히 보일 정도로 캄캄한 어둠 속이었다. 엔은 개의치 않은듯 침대쪽으로 걸어가니 침대 위에는 각종 무기들과 방탄 슈트가 곱게 개어져있었다.

빠른 환복과 무장을 하고 엔은 차에서 한 말을 떠올렸다.


'제 타겟은- 이번 재앙을 일으킨 녀석입니다'

"뭐라고? 그 정체도 알 수 없는 것을 상대한다고? 자네 혼자서?"

마이클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멍하니 엔을 바라보았다.

"정체가 알 수 없던 상관없습니다. 그 재앙이 제 가족을 죽였습니다"

미소가 어느새 커다란 분노로 바뀐 것을 마이클은 이제야 알아차렸다. 이 표정은 지금껏 보지 못했던 표정이었다.

온화하고 신사적이었던 그가 이렇게 커다란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는 것이 매우 놀라웠다.

엔은 마치 심판을 고하듯 말했다.

"상대가 어떻든 상관없습니다. 마법을 쓰던 외계 우주 종족이던 설령 상대가 신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죽일겁니다. 무조건, 반드시, 찾아내서 죽일겁니다."

마이클은 불가능해보이면서 그래도 이 사내라면 왠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어디로 가는 겐가?"

"대한민국"

 짧게 한마디를 하고 엔은 액셀을 랍았다. 고급 스포츠카는 쏜살같이 사라졌으며 마이클은 스포츠카가 지나간 자리를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