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삶을 속죄하느냐.”

   

나는 끝도 없이 죽고또 다른 곳에서 살아나고 있다.

   

모든 걸 놓아버리고 싶은 고통이 잦아들면 어김없이 이곳에서 눈을 뜬다허름한 나무 오두막창문 하나 없이 오로지 양초 하나만 켜진 깜깜한 실내에는 의자 두 개와 탁자 하나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맞은편 의자에 앉아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을 건다.

   

오천 번의 조우섬뜩한 목소리와 적의로 가득 찬 눈으로 그는 말했다.

   

죄 많았던 삶이다너의 존재는 다른 이들에게 해로웠다너의 고통스러운 죽음은 수많은 원망이 만들었다.”

   

나를 원망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았다고? 아닐 텐데. 나는 건너편에서 원망에 찬 빨간 눈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나는 그동안 갖가지 방법으로 죽었다비록 대학원을 거쳐 박사 과정까지 마쳤지만 평생 편의점을 운영하다 죽었던 두 번째 삶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해 좋은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교육 보직을 받은 탓에 진급이 막혀버린 세 번째 삶은 운이 좋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적어도 천수를 누리다 죽었으니까.

   

부주의한 죄다른 이의 노력을 가벼이 여긴 죄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은 죄심지어 자신의 죄를 타인의 탓으로 돌린 죄.”

   

환생을 거듭할수록 내가 죽는 방법은 더욱 악독해지고 처참해졌다스물여섯 번째 삶에서는 공사장 근처를 지나다 크레인에 매달린 철골이 머리 위로 떨어졌다쉰 한 번째에는 한낮에 길을 다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화가 났는지 모르는 누군가에게 묻지마 범죄를 당했다예순 다섯 번째에는 고속도로를 달리다 갑자기 튀어나온 역주행 차량에 정면으로 부딪혔다.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일을 당했누커뮤니티에서 이따금 발견하는 특이한 일들에 붙이는 소감을 유언으로 남기다보니 거듭된 죽음에도 무덤덤해지게 됐다어떻게 죽음에 무감각해질 수가 있냐고삶도 죽음도 한 번뿐이니까 소중한 것이다. 5천 번 죽다 살아날 수 있는 데드 아티스트가 되면 그렇게 소중한 삶도 껌 종이보다 하찮게 느껴진다나도 안 그럴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죄는잘못을 알고도 끝까지 뉘우치지 않는 것이다.”


아핰지랄하고 있네.”

   

어둠 속에서 나를 보는 빨간 눈동자가 꿈틀불편한 심기를 내보였다꼴에 욕 한 번 들었다고 기분이 나빠지는 하나 보구나오천 번을 죽였다 살려놓고는.

   

환생 횟수가 백 번째를 넘어갔다. 환생 배경이 점점 해외로 향하기 시작했다시베리아 한복판침엽수가 우거진 숲 깊숙이 덩그러니 있는 어느 오두막만삭에 탐험을 가는 얼빠진 이탈리아 인 덕분에 안데스 산맥의 만년설 속에서 태어난 적도 있다이베리아 반도 어느 등대에서 8개월 만에 제왕절개로 세상의 빛을 보기도 했다소설에 보면 말이 안 통하는 곳에서 환생해도 말은 통하게 능력 같은 거라도 주던데우리의 전능하신 개새끼는 그런 것도 없어서 환생 때마다 새로운 언어를 배워야 했다.


특히 스무 번 연속으로 인도네시아에서 태어났을 땐 정말정말 그만하고 싶었다어떻게 마을 하나 건널 때마다 쓰는 말이 달라질 수가 있냐.

   

말을 가려서 해야 할 것이다너를 안식케 할 사람은 오직 나밖에 없음을 기억하라.”


아니씨발지랄하지 말라고도대체 나한테 왜 그러는데?”

   

레벨 업 구간이 빡세긴 하지만 괜찮았다달라진 환경에 적응하는 거라고 해봐야 솔직히 2000년대 초반 메이플스토리 3차 전직보다 쉬우니까하지만 내 앞에서 씨익씨익 거리며 화난 기색을 감출 생각도 없는 신처럼 행세하는 나부랭이는 머릿속에 인정머리가 한 톨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젠 나는 과거로 가면서까지 죽었다나의 죽음이 그에게 있어서 받들어 마땅할 정도로 무거운 사명이라면참 수고가 많을 정도다.

   

갑자기 먹을 걸 내놓으라며 낫을 들고 쳐들어 온 옆 마을 사람에게 사망하필 백인으로 태어나지 못한 데다 인종 차별이 심한 동네에서 태어난 죄까지 더해져 옆집 배불뚝이 백인 아재에게 맞아 죽음자연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부모님의 철학에 걸맞게 알프스 산맥 중턱에 위치한 집으로 귀가하다 발을 헛디뎌 사망정말 운이 좋게도 스무 살까지 살아있던 적도 많았다하지만 방심은 금물꼭 생일이나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약속한 다음 날이면 집에 신문이 배달된다신문 1면에는 어김없이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오스트리아 황태자를 총으로 쏘다!>나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 같은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다한 300번 쯤 죽다 보면 다 예상이 된다.

   

마지막 경고이자 제안이다속죄하라너의 죄를 뉘우쳐라너의 무례에 대해 용서를 구하라그렇지 않으면…….”

   

300번째에서 지금까지그러니까 사천 칠백 번신은 그야말로 자기 꼴리는 대로 나를 죽였다.

   

트럭에서 한 번이세계로 전송된 이후 드워프와 오크 이것저것에게 온갖 방법으로 몸이 잘렸다내가 있던 이세계에는 커다란 눈알이 꿀렁거리는 커다란 탑이 어김없이 있었다모두 죽 달이 시뻘겋게 변하더니 별안간 땅에서 솟아난 나무줄기에 온 몸의 피가 흡수돼 죽기도 했다분홍 뚱땡이도엉덩이에 주사기를 달고 다니는 녹색 괴물도 나를 죽였다기분이 이상했다전부 다 어디서 봤던 건데.

   

이거 모조리 표절이야 새끼야환생하기 전 내 마지막 말을 들은 신은 분명히 웃음을 참고 있었다내 눈으로 입술이 씰룩거리던 걸 똑똑히 봤다염병할 새끼.

   

다시 덧없이 죽게 될 것이다오랜 친구여.”

   

!

   

있는 힘껏 책상을 내리쳤다저 정신 나간 놈의 말을 듣자니 화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었다.

   

또 몇 번을 죽는 건 괜찮다데드 아티스트로 전직한 마당에 이젠 어떤 방법으로 죽을지 기대되기까지 하다하지만 저 위선자의 뻔뻔함은 도저히 두고 볼 수가 없다나는 일말의 미안함에 참고 참아왔던 말들을 쏟아낼 작정으로 내 앞의 빨간 눈에 얼굴을 들이댔다.

   

솔직히 나만 잘못했냐?”


... 우매한 것이 무슨 말버릇이냐나는 고귀한 몸이자 세계의 창조주…….”


병신 새끼야말 똑바로 안 할래여기까지 와서 자캐딸이냐그만 좀 해라.”

   

저 놈의 눈자위가 이제 아주 피가 터질 것처럼 충혈 돼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화가 나긴 하나보네. 평범한 사람을 소설 속으로 끌어와서 오천 번 실적의 데드 아티스트로 만들어 놓고는 잘도 화를 내네? 화를 내야 할 사람은 오히려 내가 아닌가?

   

그래너 말 한 번 잘했다그래서 네 잘못이 하나도 없다고?”


내 잘못이 아주 없는 건 아닌데 이건 너무 심했지미친 새끼야그래실수 좀 했다노트북에 커피 쏟아서 쓰던 글 날렸다고 해도 그렇지사람을 오천 번을 넘게 죽이는 게이게 말이냐학살물 좀 쓰더니 아주 싸이코패스로 전직했나 보다?! 어떻게 애새끼가 인류애가 이렇게 없냐?”


이 새끼가 아직도……네가 날려먹은 글이 몇 자짜리인줄 아냐오만 자야오만 자너야말로 싸이코패스냐미안하다 한 마디면 다 끝날 걸그 한 마디를 안 해서 일을 왜 이렇게 키우냐고자존심이 밥 맥여 주냐?”


아니이 미친놈이그러니까 네가 애초에…….”


몰라 몰라너 한 번 더 죽어씨발놈아아니천 번 더 죽어라개새끼야!”

   

저 병신의 손짓 한 번에 나는 끝도 없는 구멍 속으로 하염없이 떨어졌다아마 이 구멍의 끝으로 떨어지고 몸이 부서질 것 같은 고통이 지나가면 어딘가에서 다시 태어나서 또 죽겠지그 전에 10분이 넘도록 떨어져야 하니 옛날 생각이라도 하며 시간을 때운다오천 번을 넘게 떨어지다 보니 이젠 요령이 생겼다. 친구 자알- 둔 덕분에 이런 짓거리도 요령이 생긴다. 어이가 없네, 시발.

   

그간 참 많이도 굴렀다무엇 때문에 나는 소설 속에서 저 녀석의 분풀이에 무력하게 당해야만 했나정말 반박할 수도 없이 100% 내 잘못만 있을까기억을 더듬어 가늠할 수도 없을 정도로 오래된 기억으로 간다. 저 녀석이 정녕 바라는 속죄의 단서를 찾으러.

   

그 녀석과 카페에서 글을 쓰다 카페인이 달려 커피를 한 잔 더 시켰다하릴없이 몇 시간을 죽치고 있었으니 사람의 도리로서 디저트까지 시켜 두 손 무겁게 자리로 돌아갔다하필 그 카페는 정강이 높이정도에 콘센트가 있었고그 녀석은 자기만의 세계에 홀딱 빠져 내가 가까이 온 줄도 모르고 있다부주의한 발끝에 재앙의 씨앗이 피어난다.

   

충전기 전선에 걸린 발은 갈 곳을 잃는다휘청이는 몸은 바닥으로 향하고 두 손에 들린 커피와 치즈케이크는 중심을 잃고 그 녀석의 노트북으로 간다하필 커피는 뜨겁다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노트북과 정수리에서 스팀을 뿜는 그 녀석의 얼굴어느 생에서 맞닥뜨렸던 오크 장군의 그것처럼 흉악해져 나를 노려본다화면은 영영 빛을 잃었다그 녀석을 보는 나의 눈도 그랬다다시 돌아봐도 끔찍한 일이다.

   

끔찍한 일이지만정말 그것밖에 정답이 없었을까.

   

곧 시간이다저 덜떨어진 새끼와 한바탕 해버렸으니아마 천 번은 더 죽어야 다시 저 녀석을 볼 수 있을 것이다숨을 흡 참고 크게 소리 지를 준비를 한다지금밖에 없다지금이라면 저 녀석도 분명 들을 수 있을 것이다확실하고 분명하게 전할 수 있도록 오랫동안 참았던 말을 머릿속으로 다시 되뇌고.

   

소리쳤다세상이 떠나갈 정도로.

   

너 원드라이브 쓰잖아여태까지 저장 안 하고 뭐 했냐병신아!!! 컨트롤 누르기가 그렇게 어렵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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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를 각색한 소설입니다.
소재거리를 준 지인에게 감사하지 않습니다.

ㅅㅂ 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