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승달이 저문 깊은 밤이었다. 바위투성이 땅은 발 디딜 곳을 찾기 어려웠다. 앞장서서 또각또각 나아가는 다이애나의 부츠에 주의를 집중하며, 스티브는 걸음을 재촉했다. 감옥의 창백한 조명 아래에서 강렬한 붉은빛과 금빛으로 번쩍이던 그 부츠는, 이제 별이 가득한 밤하늘 아래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다른 아마존 병사들을 제압한 후 그를 바깥으로 이끌던 그 간결하고 단호한 걸음걸이 그대로, 눈앞의 여전사는 어둠 속으로 형태를 감춘 땅에 착착 발을 디디며 길을 알려주고 있었다. 스티브는 그녀가 얼마나 밤눈이 밝은 것인지 궁금했다. 그러나 도저히 그런 것을 물어볼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들은 경비병들의 추격을 따돌리고, 조명도 없이 어둠 속으로 도주하던 중이었으니까.

 

두 사람은 거친 암석 해변을 따라 빠른 걸음으로 이동했다. 해변의 밤공기는 선선했지만 습했고, 급하게 챙겨온 군복의 홀스터가 헐거워진 탓인지, 묵직한 M1911 권총이 자꾸만 허리에 배겼다. 온 신경을 곤두세운 스티브의 군복은 어느새 땀으로 축축해졌다.

‘그녀도 땀을 흘릴까?’

스티브는 이 상황에서도 그런 질문을 하는 자신이 어이가 없었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한바탕 토론이 벌어졌다.

‘이봐, 정보장교 트레버 대위. 갈 길에나 집중해. 저 부츠 위로 그녀가 어떤 모습인지는 이미 수도 없이 보았잖아. 왜 아는 정보를 핑계를 대서 재확인하는 거야? 뺑이치는 건 그렇게 싫어하면서?’

‘그녀가 땀을 흘리는지 알아야겠어.’

‘그것 참 중요한 정보군. 자빠져서 민폐 끼치고 싶지 않으면 바닥이나 잘 봐.’

‘잠깐이면 충분하다고.‘

결국 호기심 많은 쪽이 몸의 주도권을 차지했다. 스티브는 눈을 들어 그녀의 뒷모습을 흘끗 살폈다.

 

가죽 질감의 부츠는 날씬한 종아리를 장딴지 윗쪽이 살짝 드러나게 덮고 있었다. 그 위로는 별빛에 파르라니 물든, 도자기 인형 같은 살결이 이어졌다. 둥그스름하면서도 곧게 뻗고, 단단하면서도 보드라운 여전사의 육체가 그렇게 어깨까지 완연히 드러나 있었다. 오직 하이레그의 날카로운 T백과 등골을 따라 V자로 파인 뷔스티에, 그리고 그 사이에 자리잡은 벨트와 올가미의 금속성 광택이 그녀가 완전한 나신은 아님을 새삼 상기시켜 주었다.


잠시만 궁금증을 풀 생각이었던 스티브는 잠시동안 넋을 잃고 말았다. 그는 발을 헛디디며 뒤로 휘청거렸다. 바로 다음 순간, 다이애나의 튼튼한 왼팔이 그의 양어깨를 붙들었다. 굵게 물결치는 흑발 사이로, 꼿꼿이 긴장한 쇄골과 깊은 가슴골이 스티브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괜찮아요?”

다이애나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자빠질 뻔한 그를 잡느라 그녀는 몸을 앞으로 숙인 상태였다. 스티브는 그녀의 눈을 바로 보려고 애쓰며 대답했다.

”네, 덕분에.“

스티브는 그녀가 이 어둠 속에서 그의 안색을 알아볼 수 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다이애나는 잠깐 고민하는 듯하더니 다른 이야기를 했다.

”당신은 이 길이 낯설 텐데, 지금은 너무 어둡고 위험해요. 스티브, 내가 당신을 안고 가는 건 어때요?“

스티브는 할 말을 잃었다. 그녀에게 안긴다고? 그의 어색한 침묵을 어떻게 해석한 것인지, 다이애나는 미안한 듯 말을 덧붙였다.

”좀 무례한 제안인 건 알아요. 당신도 긍지높은 전사인데… 하지만 우리 자매들 중에는 사냥의 명수들이 많아요. 아직은 아닌 것 같지만, 만약 우리의 이동 방향이 들킨다면… 지금 우리 속도로는 금방 따라잡히고 말아요. 미리 거리를 벌려둬야 해요.”

스티브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 상황에서 한사코 정중한 말투를 고집하는 그녀도, 사춘기 소년처럼 자극과 흥분에 어쩔 줄 모르는 자신도 꽤나 딱하게 느껴졌다. 스티브는 결정을 내렸다.

“당신 말이 맞아요. 이미 신세는 질 대로 진 것 같으니, 조금만 더 지도록 하죠.”

다이애나는 살짝 미소짓더니, 그의 어깨를 안고 있던 자세 그대로 몸을 낮추었다.

“내 목을 양팔로 안아요.”

스티브는 어색한 동작으로 다이애나의 목 뒤로 깍지를 끼었다. 그녀의 부드러운 머릿결이 손목을 간지럽혔다. 그가 그 느낌이 주는 설렘을 음미하던 순간, 다이애나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하면 달릴 때 머리카락이 당겨서 아플 거예요. 머리카락 아래로 해주세요.”

스티브는 귓불이 화끈거리는 것을 참으며 그렇게 했다. 다이애나는 가볍게 감사를 표하며, 남은 오른팔로 스티브의 양다리를 안아서 들어올렸다. 스티브는 자신들이 피에타 조각상처럼 멋진 포즈를 연출했다고 믿고 싶었지만, 실제로는 그가 그녀보다 키가 1인치는 더 컸기에 퍽 어색한 구도가 되고 말았다. 그래도 다이애나는 가뿐하게 그 자세를 유지했다. 힘겨웠던 것은 오히려 그녀의 보드라운 목덜미와, 간질간질한 머리카락과, 부피감 있는 젖가슴을 동시에 느끼게 된 스티브였다. 제멋대로 자기주장을 펼치기 시작한 그의 남성을 잠재우려고 스티브는 학창 시절 외워둔 문장을 아무 거나 떠올려 암송했다.

‘…이는 사내들의 영혼을 시험하는 시대라. 여름철 병사와 양지의 애국자는 이 위기를 맞이하여 국가를 위한 봉사로부터 움츠러들리라…’

그리고 그는 왜 하필 그 문장을 떠올렸는지 생각하다, 다이애나의 신호를 놓치고 말았다.

“달릴테니 꽉 잡아요!”

 다이애나의 부츠가 땅을 힘껏 박찼다. 급격한 가속에 스티브는 저도 모르게 신음하며 그녀의 목을 더 꼭 끌어안았다. 야한 흥분감은 한순간에 사라지고, 대신 다른 종류의 흥분감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첫 도약만으로도 그들은 꽤나 오랫동안 공중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다시 그녀의 반대쪽 다리가 땅을 박차자, 귓전을 스쳐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더 매서워졌고, 체공 시간도 더 길어졌다. 그렇게 그녀는 마치 능숙하게 절벽을 오르는 산양처럼 거친 땅을 내달렸다. 이윽고 그녀는 대략 2초 주기로 땅을 디뎠고, 지면은 거의 2층 건물 높이만큼 멀어졌다가 가까워지기를 반복했으며, 스티브는 최고 제한속도로 달리는 자동차 보닛에 맨몸으로 매달린 기분이 되었다. 이것도 어쩌면 그녀가 그를 배려해서 ‘천천히’ 달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그녀가 내 곁에서 함께 싸워준다면… 스티브는 벅찬 기분이 되어 다이애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질풍같은 바람에 맞서 날카롭게 앞을 주시하는 형형한 눈과, 거센 바람 속에서 갈기처럼 휘날리는 흑발 아래로, 섬세한 목빗근을 타고 흘러내려 쇄골을 적시는 그녀의 땀방울들이 문득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스티브는 마치 중요 기밀을 다루듯이 그 영상을 뇌리에 기록했다.


****


약 5분 후, 다이애나와 스티브는 잔뜩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지며 어느 동굴 앞에 서 있었다. 가파른 절벽 밑이 파도에 깎여나가 움푹 파인 장소였다. 그 입구는 거의 5층 건물 높이는 되어보일 정도로 높았지만, 그늘진 내부는 너무 어두워서 무엇이 있는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안에 들어찬 바닷물이 파도치는 소리가 웅웅거리며 들려왔다. “여기에요.” 다이애나가 숨을 고르며 말했다. “이 동굴 입구는 바다에서만 보이니까, 이제 조명을 비춰도 안전할 거예요.” 다이애나는 허리춤에서 황금 올가미를 집어들었다. 일순간 올가미에 불길이 이는 듯했고, 그 올가미의 추억이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았던 스티브는 움찔했다. 하지만 올가미는 다이애나의 손에 얌전히 들린채 노르스름한 빛으로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녀의 굴곡진 몸에 드리운 빛과 그림자의 고혹적인 대비에, 그리고 늘 진지한 그녀가 모처럼 지은 장난기 어린 미소에, 스티브는 다시 가슴이 두근거렸다. 다이애나는 올가미를 두 손에 나누어 들고 동굴 입구로 다가섰다. “스티브, 조금만 뒤로 물러서요. 놀라운 걸 보여줄테니.” 스티브가 뒤로 몇 걸음 물러서자, 다이애나는 마치 체조 선수가 리본을 다루듯 올가미를 8자 모양으로 휘휘 젓더니, 동굴 속을 향해 힘껏 흩뿌렸다. 황금빛 벼락처럼 날아간 올가미는 동굴의 벽과 천장, 그리고 그 사이에 놓인 어떤 기둥 모양의 물체에 차례로 돌돌 감기며 화려하게 빛을 발했다. 하얀 바닷새가 날개를 접고 배의 형태를 취한 듯한, 아직 돛을 올리지 않은 슬루프가 화사한 크리스마스 장식처럼 그 모습을 드러냈다. 놀란 스티브가 컥 하고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이애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스티브의 다음 반응을 기다렸다. 그는 또다시 커컥 하는 소리를 냈다. 이상한 위화감. 고개를 돌려 그를 살피려던 다이애나의 의아한 얼굴이 이윽고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절벽 위에서 내려온 거대한 은빛 촉수가 스티브를 들어올리면서 그의 허리와 목을 힘껏 조르고 있었다. 그는 소리없이 덮쳐온 위험에 대해 경고하려고 몸부림치고 있었지만, 벌어진 입으로 헛되이 침거품과 신음을 토해낼 따름이었다. 그의 얼굴은 이미 피가 잔뜩 쏠려 빨갛게 물들었고, 녹색 눈은 서서히 초점을 잃고 있었다.

“스티브!”

다이애나는 재빨리 올가미를 거둬들이며 그에게 뛰어들 태세를 갖추었다. 그 순간 어떤 문장이 마치 불현듯 떠오른 기억처럼 그녀의 뇌리에 파고들었다.

<그만 둬, 디오네. 이놈의 장기가 터지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면.>

다이애나는 자신이 철저하게 궁지에 몰렸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어둠 속의 상대를 향해 두 손을 펼쳐서 들어보였다.

“파수꾼 스킬라.”

다이애나가 침착하게 말했다.

“당신이 이겼습니다. 저항하지 않을테니, 그 사람을 해치지 말아요.”

<현명하구나.>

스킬라가 느끼는 승리의 만족감이 다이애나의 마음에 곧장 전해졌다.

<기습에 무방비한 풋내기 치고는 말이지. 이제 널 구속할 테니 얌전히 있어라.>

절벽 위에서 은빛 촉수 다섯 개가 내려와 다이애나를 사방에서 에워쌌다. 그중 네 개는 그녀의 팔다리를 하나씩 단단히 붙들었고, 나머지 하나는 그녀의 목을 지그시 휘감았다. 허벅지와 겨드랑이, 그리고 목의 민감한 맨살에서 차갑고 미끈한 감촉이 느껴졌다. 다이애나는 그 소름돋는 느낌에 몸서리를 쳤지만, 약속대로 몸을 내맡긴 채 저항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스티브의 상태를 주의깊게 살폈다. 그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팔다리를 축 늘어뜨린 채 기절해 있었다. 그의 숨통을 조이던 촉수는 조금 느슨해졌지만, 그 끝은 이제 뾰족한 형태로 바뀌어 그의 하얗게 뒤집힌 눈을 보란 듯이 겨냥하고 있었다. 

<언제든 놈의 눈깔을 꿰뚫어버릴 수 있으니, 허튼 생각은 버려.>

다이애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자 촉수들은 순식간에 그녀와 스티브를 절벽 꼭대기까지 끌어올렸다. 자욱한 밤안개 사이로, 은빛 광택을 발하는 수많은 촉수들과, 그 위로 허벅지가 연결된 산발한 여성의 벌거벗은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녀의 옆구리에는 여섯 개의 기묘한 돌기들이 흉측한 모습으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스킬라였다.

 

<오랜만이구나, 디오네.>

스킬라가 아직 인간의 모습이 남아 있는 팔을 들어보였다. 어둠에 묻힌 스킬라의 표정은 가늠하기 어려웠지만, 다이애나는 그녀의 인사에서 반가움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이 왕실 슬루프를 숨겨둔 자가 다시 올 거라고 짐작했지만, 그게 정말 너였을 줄이야. 오랫동안 바쁘다고 얼굴도 안 보여주더니, 내 취미가 절벽 산책인 것도 벌써 잊었나 보지?>

다이애나는 스킬라가 ‘무언의 대화’를 고집하는 것이 다행으로 느껴졌다. 해안 경비병의 순찰로 바로 밑에 밀항선을 숨겨둔 그녀의 어이없는 실책을 스티브가 엿듣게 될 일은 없으니까. 그렇지만… 왜 스킬라는 굳이 함정을 파고 여기서 홀로 기다린 걸까. 파수꾼의 의무대로라면, 배는 일단 치워두고 증거물을 모아서 폐하께 보고하는 것으로 끝났을 일인데. 그랬다면 폐하는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했을 것이고, 다이애나는 이런 과감한 모험을 시작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래도 스킬라는 다른 목적이 있는 것 같았다. 폐하의 뜻에는 부합하지 않는 개인적인 목적이. 다이애나는 거기에 희망을 걸어보기로 했다.

 

“스킬라.”

다이애나가 가만히 말했다.

“아직 폐하께 보고를 드린 것이 아니라면… 우릴 그냥 모른 척 보내주면 안 될까요?”

스킬라는 흠칫했지만, 이윽고 천연덕스럽게 답했다.

<여왕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이 땅을 떠날 수 없다. 그 원칙이 지켜지도록 하는 것이 내 역할이지. 그리고…>

그녀의 마음에서 묘한 즐거움이 느껴졌다.

<넌 어미의 허락도 없이 집을 나온 못된 딸이지. 동네 어르신에게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해.>

폐하의 어명과는 별개로, 직접 벌을 내리고 싶다는 말인가? 다이애나는 일부러 스킬라를 부추겨보기로 했다.

“폐하의 뜻을 거스른 것을 꾸짖겠다면 기꺼이 듣겠어요. 하지만 벌은 폐하께서만 내리실 수 있는 것. 당신은 그럴 권한이 없습니다.”

스킬라는 불쾌한 기색이었다.

<여왕 몰래 네 맘대로 떠나려던 주제에 말이 많구나. 좀 닥치고 있으렴.>

갑자기 다이애나의 목을 휘감고 있던 촉수가 콱 조여왔다.

“크흑!”

기도가 으깨지는 듯한 통증에 다이애나는 짧은 신음을 토했다. 스킬라를 너무 자극했던 것일까? 순간 이대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녀를 엄습해왔다. 아무리 강한 아마존 여전사라도, 경동맥이나 기도를 막는 공격에 오래 버티기는 어려운 법이었다. 그러나 다이애나는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있는 힘껏 숙이면서 압박을 버텼다. 그녀의 힘겨운 숨소리는 절벽 위의 스산한 바람 소리와 뒤섞인 채, 영원같은 몇 분 동안 분투했다. 고통에 일그러진 그녀의 눈가에서는 맑은 눈물이, 공기를 갈구하는 그녀의 입가에는 하얀 타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점점 다이애나가 어지럼증을 느낄 무렵, 촉수가 갑자기 느슨해졌다. 다이애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갈구하던 신선한 공기를 정신없이 몸 안으로 받아들였다.

<정말 잘 버티는구나.>

스킬라의 생각에서 감탄과 함께 묘한 흥분감이 전해졌다.

<내 ‘다리’가 다 저릴 지경인데 말이야.>

다이애나는 아직도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스킬라를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기이하게 빛나는 그녀의 눈이 다이애나의 눈과 마주쳤다. 다이애나는 그 눈에 담긴 감정을 읽고 싶었다. 그녀는 나를 미워하는 것일까? 나에게 복수하려는 것일까? 하지만 왜?

“스킬라…”

다이애나의 목소리에서 슬픔이 배어나왔다.

“그간 격조했고, 섭섭한 일도 많았겠지만… 그래도 난 당신을 친구로 대했습니다. 그런데도 나를… 왜 이리 가혹하게 대하는 건가요?”

 

<친구라…>

스킬라는 그 단어의 어감을 음미하는 듯했다. 그녀의 마음에 조금 따스한 온기가 도는 듯하다가 사라졌다.

<너는 과연 내게 친절을 베풀었지. 잘나신 왕녀란 정의롭고, 동정심이 많은 법이니까. 나처럼 학대받던 못난 년에게는 더더욱.>

스킬라의 촉수 끝이 다이애나의 뺨에 흐른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냈다.

<다 자기만족이야. 정작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신경도 안 쓰는 주제에 말이지.>

촉수 끝은 그녀의 입가에 흐른 타액도 슥슥 닦더니, 잠시 동안 그녀의 두 입술을 가만히 눌렀다. 마치 우아한 숙녀가 손등에 고귀한 왕녀의 키스를 받듯이. 다이애나는 놀란 눈으로 스킬라를 바라보았다.

<바보같은 디오네…>

스킬라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소용돌이가 일었다. 오랫동안 그녀의 이웃이었던 바다 괴물 카리브디스가 종국에는 그녀의 안에도 자리잡은 모양이었다.

<디오네… 너는 남자의 유혹에 넘어가 이 낙원을 떠나려 하고 있어.>

그녀는 축 늘어진 스티브를 이리저리 불만스럽게 흔들어 보였다. 다이애나가 긴장하는 모습에 스킬라는 더 화가 치밀었다.

<남자들의 세계를 구하겠다고? 그게 아마존들의 사명이라고? 디오네, 나는 그곳이 어떤 곳인지 잘 알아. 네 어미가 넋 놓고 사는 나를 정신 차리게 해서 여기 데려오기 전까지, 거기서 온갖 핍박이란 핍박은 다 받아 보았으니까! 거기 가서 네가 뭘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너는 거기 가서 나처럼 핍박당하고, 네 어미처럼 강간당하고, 네 이모처럼 죽고 말 거야! 아니면, 네가 그녀들보다 잘났다고 생각하는 거야?>

 

다이애나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는 스킬라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 히폴리테 여왕은 헤라클레스라는 남자를 손님의 예로 대접하고 그에게 친절과 호의를 베풀었지만, 결국 그의 일행에게 납치되어 무구를 빼앗긴 채 무참히 강간당했다. 수많은 아마존 자매들의 희생 끝에, 그녀는 겨우 목숨을 건져 돌아왔다. 이모 펜테실레이아 여왕은 더 불운했다. 그녀는 트로이아 전쟁에 참전하여 무명을 떨치고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결국 그 명성도 헛되이 아킬레우스라는 남자의 창에 찔려 허무하게 살해당했다. 그녀를 따르던 열두 명의 용사들도 비슷한 운명을 맞이했다. 안티오페 이모도, 멜라니페 이모도 남자들의 세계에서 입은 몸과 마음의 상처를 간직한 채 이곳 테미스키라에 정착했다. 그들 중 누구도 남자들의 세계를 행복하게 추억할 수 없었다. 다이애나라고 그녀들과 다를까?

 

다이애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우리 가문 사람들보다 더 특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녀는 조금 생각하더니, 다시 고개를 저었다.

“당신에게도 이렇게 깨끗이 당할 정도인데, 당신을 제압했던 폐하나 그분보다도 강했다는 선왕 폐하의 힘과 능력에 비하면 아직도 부족한 점이 많을 거예요. 하지만, 나는 폐하께서 ‘완성’하신 정체된 낙원에서 천 년을 더 사느니,”

그녀는 스킬라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일 죽더라도 옳다고 믿는 일, 가슴 설레는 일을 한번 해보고 싶어요.”

 

<디오네… 얘야…>

스킬라는 잠시 할말을 잃은 것 같았다. 그러나 이내 그녀의 마음 속 소용돌이가 다시 폭주하기 시작했다.

<미쳤구나… 미쳤구나! 어미도 버리고, 친구도 버리고, 남자를 쫓아서 가겠다고? 그 짐승들을 위해 죽겠다고?>

다이애나는 기가 막힌 표정으로 스킬라를 바라보았다. 스킬라의 그늘진 눈에 광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남자는 필요없는 존재야. 해충이라고! 그런 놈들을 위해, 고결하고 아름다운 너 자신을 희생하겠다고…!>

다이애나가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자, 스킬라는 그녀의 목에 휘감은 촉수를 다시 콱 조였다.

“커헉… 스킬라… 친구… 소원…”

다이애나가 기어코 말을 계속하려 들자, 스킬라는 목을 휘감은 촉수 끝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다이애나는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스킬라는 이제 활활 타오르는 눈으로 헐떡이는 다이애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친구니까, 내 소원을 들어주렴.>

다이애나는 스킬라의 또다른 촉수 다섯 개가 한꺼번에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질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렇게 멋지게 개죽음당하는 것이 소원이라면, 여기서 먼저 시험해 보는 거야. 남자들이 너를 어떻게 대할지. 그게 과연 가치있는 일인지. 내가 생생하게…>

끝이 둥글게 뭉쳐진 촉수 하나가 곧장 날아와 다이애나의 복부를 가격했다. 그녀의 틀어막힌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새어나왔다.

<…실감나게…>

측면에서 날아든 촉수가 다이애나의 왼쪽 넓적다리를 후려갈겼다. 다이애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비명을 삼켰다. 흰 살결에 선명한 줄이 그어졌다.

<…체험시켜 줄 테니까!>

또다른 촉수가 이번엔 다이애나의 두 다리 사이로 날아들어, 그녀의 가장 여리고 여성적인 살결이 위치한 부위를 강타했다. 이번만큼은 그녀도 터져나오는 비명을 참지 못했다. 그녀의 긴 눈꺼풀 사이에서 눈물이 줄줄 새어나왔다. 다이애나는 지금이라도 그녀를 구속하는 촉수들을 찢어버리고 이 미친 짓을 중단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면 스티브는… 스킬라, 이 가엾은 여자는…

 

스킬라는 다이애나에게 더 가까이 다가섰다.

<아무리 강한 너라도, 모든 적을 이길 수는 없어. 아무리 조심해도, 언젠가는 오늘처럼 실수하고, 약점을 드러내겠지.>

스킬라는 점점 더 흥분했다. 그녀의 촉수마다 하얀 점액이 배어나와, 다이애나의 피부를 축축하게 적시기 시작했다.

<그럼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던 남자들이 너에게 이런 고통을 줄 거야. 너는 지금처럼 신음하고, 헐떡이고, 비명을 지르겠지.>

스킬라의 가장 가느다랗고 섬세한 촉수가 밑에서 천천히 다가왔다.

<봐, 상처입을수록 더욱 아름다워지는 네 모습을! 놈들은 흥분할거야.>

그 촉수는 다이애나의 봉긋하게 솟아오른 뷔스티에 윗부분을 천천히 더듬었다.

<이 빛나는 토락스(thorax)…>

촉수는 다이애나의 헐떡이는 가슴골 사이에 잠시 머무르다, 뷔스티에 가운데를 장식하는 추상적인 독수리 문양을 따라 아래로, 아래로 내려왔다. 촉수는 그녀의 붉은 갑옷과 빛나는 벨트를 지나, 밤하늘같이 푸른 가죽 위로 미끄러져 내렸다. 그 촉수가 어디를 향하는지 짐작한 다이애나의 숨결이 더욱 거칠어졌다. 마침내 그녀의 은밀한 골짜기 위에 도달한 촉수는, 그 골짜기를 타이트하게 덮은 가죽이 그리는 날카로운 V를 마치 천천히 덧그리듯 움직였다.

<이 꼭 맞는 디아조마(diazoma)…>

촉수에서는 더 많은 점액이 배어나와 다이애나의 아랫도리를 적셨고, 그녀의 얼굴은 민감한 부위를 오가는 자극에 발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무수한 별들…>

촉수는 가죽 위에 일렬로 새겨진 하얀 오각별들을 스윽 더듬더니, 그중 정중앙에 위치한 별을 콕 찔렀다. 그곳은 다이애나의 몸에서 가장 민감한 부분이었다. 마치 호수의 표면에 잔물결이 일듯, 은은한 오르가슴이 다이애나의 하복부 전체로 퍼져나갔다. 그녀는 감았던 눈을 가늘게 뜨며 몸을 떨었다.

<그래… 너는 마치 아탈란테가 살아돌아온 것처럼 강하고 아름답지만, 놈들은 그런 너를 영웅의 모습 그대로 사랑해 줄 생각이 없어. 꼭 너를 이렇게 짓밟으려고 하겠지.>

스킬라의 촉수는 다시 다이애나의 하이레그를 아래쪽으로 더듬기 시작했다. 촉수는 그녀의 조금씩 떨려오는 둔덕을 가로질러, 그녀의 두 다리 사이를 지나, 하이레그의 T백을 아래에서 위 방향으로 훑듯이 움직였다. 그 선정적인 느낌에 다이애나는 뜨거운 숨결을 토했다.

<…그래… 놈들은 너를… 이렇게…>

그리고 그 촉수는 T백과 허리끈이 맞닿는 부분을 휘감더니, 위로 홱 잡아당겼다.

<…괴롭히고… 모욕할 거야!>

팽팽하게 당겨진 하이레그의 탄성이 이미 한껏 달아오른 다이애나의 여성을 꾹 압박하며 자극했고, 그녀는 허리를 뒤틀며 신음을 참았다.

 

이제 스킬라는 그녀의 가장 민감한 촉수를 꼿꼿이 세우고, 그녀의 마지막 망상을 현실로 옮길 참이었다.

<그래, 언제나 놈들은 이걸 꿈꾸지.>

다이애나는 흥분과 고통, 질식감과 수치심으로 무너질 듯한 정신을 다잡으며 스킬라를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다. 이미 스킬라는 선을 넘었고, 더 이상 계속하면 그녀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스킬라는 그 눈빛에 더더욱 흥분했다. 아니, 그녀의 흥분은 이미 스스로를 재생산하는 단계에 접어든지 오래였다. 그녀는 촉수 하나로 자신의 왼쪽 유두를 어루만지고, 마지막 남은 촉수를 자신의 허리 밑으로 밀어넣고 있었던 것이다. 다이애나는 주먹에 불끈 힘을 주었다. 스티브 방향으로, 또는 스킬라의 본체 방향으로 가능한 빠르게 도약할 방법을 생각하면서. 좀처럼 안전한 방법이 보이지 않았지만, 이걸 더 참을 수는… 그때 세 발의 총성이 연달아 울렸다. 스킬라는 마치 개가 울부짖는 것 같은 괴이한 비명을 질렀다.

 

어느새 의식이 돌아온 스티브는 눈앞 저만치에서 보이는 초현실적인 광경에 잠시 넋을 잃고 있었다. 내가 몽정이라도 할 참이었던 건가? 그러다 그는 문득 자신의 몸을 휘감고서 그 날카로운 끝으로 자신의 머리를 겨누고 있는 촉수를 발견했다. 정신이 번쩍 든 그는 자신이 기절한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다이애나는 아마도 그가 인질로 잡혔기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 스티브. 이 민폐 덩어리!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든 빠져나올 길을 찾아야 했다. 다행히도, 촉수 괴물은 다이애나를 괴롭히는 데 열중하느라 스티브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의 몸을 휘감고 있던 촉수는 느슨해졌고, 그의 머리를 겨누던 촉수 끝은 방향이 점점 틀어지고 있었다. 스티브는 촉수 밑에 눌린 오른팔을 조금씩 뒤로 움직여 허리춤에 꽂혀 있는 묵직한 M1911 권총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그 팔을 접어 가슴팍에 휘감긴 촉수에 총구를 겨누었다. 자신의 미약한 무장이 이 곤란한 상황에 충분한 균열을 일으키기를 기도하며, 스티브는 연신 방아쇠를 당겼다. 그리고 그의 바람대로 되었다.

 

영거리에서 발사된 총탄들이 스킬라의 촉수에 파고들었다. 0.45구경의 권총탄들은 그 질긴 살덩이를 파괴하기에는 역부족이었지만,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있던 괴물에게 충격과 고통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스킬라는 마치 개가 울부짖는 것 같은 괴이한 비명을 질렀고, 그녀의 촉수는 힘이 풀리며 스티브를 놓쳤다. 그는 10미터 정도를 추락했지만, 수풀이 있는 곳에 떨어져 크게 다치지 않았다. 즐거움을 방해당한 스킬라는 격노했다. 그녀는 촉수를 날카롭게 겨냥해 방해꾼을 찌르려고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다이애나가 나섰다. 그녀는 팔다리에 휘감긴 촉수들을 더욱 단단히 붙들고서 있는 힘껏 끌어당겼다. 그러자 스킬라의 육중한 몸체를 지지대 삼아, 다이애나의 몸과 거기에 엉겨붙은 촉수들이 한꺼번에 스킬라의 본체를 향해 발사된 형국이 되었다. 둔중한 충격음과 함께 그녀들은 몸을 부딪혔고, 서로 뒤엉킨 채 바닥에 쓰러졌다. 스티브를 향해 날아들던 촉수는 과녁을 크게 빗나갔고, 바닥에서는 난투가 벌어졌다. 다이애나는 왼손으로 목과 오른팔에 감긴 촉수를 힘껏 뜯어내면서, 오른손으로 허리춤의 황금 올가미를 쥐려고 했다. 몸의 말단이 무서운 힘에 찢겨지는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스킬라는 다이애나의 양팔을 봉쇄하기 위해 촉수들을 이리저리 바꿔 휘감으며 용을 썼다. 그럼에도 소용이 없자, 스킬라는 아직 자신에게 두 다리가 묶여 있는 다이애나를 공중에 들어올린 후 몇 차례 바닥에 내리찍었다. 다이애나는 자세를 이리저리 비틀며 머리와 몸통에 큰 충격이 가해지는 것을 피했다. 대신 그녀의 손과 팔다리는 거친 돌바닥에 긁혀 온통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다이애나!”

스티브가 부르짖으며 달려왔다. 그는 싸움에 정신이 팔린 스킬라의 지근거리까지 접근한 후, 그녀의 머리를 겨누어 권총을 발사했다. 그러나 스티브가 달려오는 모습을 본 다이애나는 그가 권총을 앞으로 내미는 순간 바닥을 박차며 몸을 날렸고, 아슬아슬하게 팔찌로 스킬라의 후두부에 날아드는 탄환을 쳐냈다. 이번에는 총성에 놀란 스킬라가 반사적으로 촉수를 채찍처럼 날렸다. 이미 피하기에는 늦었음을 깨닫고, 스티브는 몸을 수그리며 팔다리로 충격을 막는 자세를 취했다. 촤악! 채찍이 잔혹하게 할퀴는 소리가 들렸지만, 스티브는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황급히 얼굴을 가렸던 팔을 내리며 눈을 들었다. 다이애나가 어느새 그의 눈앞에 엉거주춤 서 있었다. 아직도 허벅지와 왼팔에 촉수를 주렁주렁 달고 있던 그녀는 스티브의 모습을 보고 안심한 눈빛이 되었다. 그리고는 나지막한 신음을 토하며 오른쪽 무릎을 풀썩 꿇었다. 스티브가 황급히 달려와 그녀를 부축했다. 별빛에 푸르게 물든 그녀의 등에서 검은 피가 줄줄 쏟아져 나와, 별이 수놓인 검푸른 하이레그를 적시고 허벅지로 방울방울 흘러내리고 있었다.

 

스티브도, 스킬라도,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깨닫고는 아연하여 그 자리에 굳어버리고 말았다. 다이애나의 몸에 아직까지 감겨 있던 촉수들이 일순간에 스르륵 풀려버렸다. 다이애나는 고개를 떨군 채 한동안 심호흡을 하다가, 오른손으로 허리춤의 황금 올가미를 굳게 잡았다. 그녀의 뜻을 깨달은 스티브가 권총을 거두고 그녀의 두 팔을 잡았다. 그에게 의지해 다시 일어선 다이애나는 돌아서서 스킬라를 마주했다.

<디오네… 왜 나를…>

스킬라의 마음 속 카리브디스는 어느새 힘을 잃고 잠잠해졌다. 그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물의 표면이 울렁거리고 일렁일 뿐이었다. 다이애나는 황금 올가미를 앞으로 던졌다. 휙 날아간 올가미는 스킬라의 몸통과 팔을 휘감았고, 그렇게 싸움은 끝났다.


****


다이애나는 올가미에 묶인 스킬라를 절벽 꼭대기 근처에 자라는 참나무 고목 밑으로 데려갔다. 오랜 세월동안 높은 곳에서 바람을 맞으며 용케도 벼락을 맞지 않고 무수한 가지를 친, 제우스 신의 가호를 받는 듯한 나무였다. 그녀는 스킬라의 촉수 열두 개 중 심하게 손상된 다섯 개를 내버려두고, 아직 온전한 일곱 개를 그 참나무 밑동에 칭칭 감았다. 스티브는 스킬라의 관자놀이에 권총을 겨눈 채 작업이 마무리되기를 묵묵히 기다렸다. 스킬라는 다이애나에게 몸을 내맡긴 채 저항하지 않았다. 마침내 다이애나는 감긴 촉수들에 단단한 매듭을 지었다. 이제 누군가가 매듭을 풀어주거나 나무를 베기 전까지, 스킬라는 이곳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렇게 만반의 조치를 취한 후, 다이애나는 다시 올가미를 손에 쥔 채 스킬라와 얼굴을 마주했다. 다이애나가 말했다.

“스킬라, 나는 당신이 테미스키라에서 삼천 년 동안 파수꾼으로 살아오면서, 폐하의 충실한 신하이자 우리 자매들의 믿음직한 벗이 되었다고 여겼어요. 아니, 당신도 마침내 우리 아마존의 일원이 되었고, 마땅히 그렇게 대우받고 있다고 생각했지요.”

스킬라의 마음에서 불만 섞인 슬픔이 느껴졌지만, 그녀는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오늘에서야 깨달았죠. 나는 당신의 깊은 고통을 전혀 헤아리지 못했고, 제대로 위로하지도 못했다는 것을. 삼천 년 동안, 조금 전에 당신이 낙원이라고 불러준 이곳에서조차, 당신은 언제나 혼자였던 거겠죠.”

스킬라가 인간의 팔로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그 팔이 바르르 떨렸다.

“끔찍한 겉모습이 아름다운 자매들을 지키는 힘이 될 수 있다면, 그 겉모습이야말로 더욱 가치있고 아름다운 것이라 할 수 있다… 폐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셨고, 저도 그렇게 여겼어요.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당신이 결코 벗어날 수 없었던 고통을 외면하게 만들었죠.”

<디오네…>

“오늘 난 당신이 얼마나 학대의 기억에 사로잡혀 있고, 채워질 수 없는 욕망에 집착하는지 똑똑히 보았어요. 당신은 여전히 위험한 존재고, 결국 우리 자매들에게 해가 될지도 몰라요. ‘사냥의 권한’을 위임받은 왕녀로서, 나는 이 자리에서 당신을 ‘해수’로 규정하고 ‘구제’할 수도 있어요.”

스킬라의 마음에 다시 이상한 소용돌이가 일었다. 그녀는 갈망하고 있었다.

<…해수… 구제… 그래… 처음부터 그렇게 할 것이지…네 손으로...>
다이애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스킬라, 나를 그렇게 원했나요? 내 사랑을 못 얻을 바에는, 차라리 날 범해서 욕망을 채우고, 스티브를 해쳐서 내 증오를 얻으려고? 마지막 순간만큼은 홀로 내 증오를 오롯이 받으며... 이 감옥 같은 낙원에서 탈출하려던 거였나요?'
그녀는 결심을 굳혔다.

“그 전에 세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스킬라, 폐하를 위해 죽을 수 있나요?”

<…아니.>

“그럼, 나를 위해 죽을 수 있나요?”

<응.>

“그렇다면, 당신은 나를 위해 살 수도 있나요?”

<…...아마도...?>

“나도 기꺼이 당신을 기억하며, 당신을 위해 살아갈 거예요. 그러니 날 위해, 앞으로도 자매들을 지켜주세요.”

다이애나는 스킬라의 몸에서 올가미를 풀었다. 그리고 그 올가미를 하늘 높이 힘껏 던졌다. 참나무 꼭대기보다 훨씬 더 높이, 곧은 수직선을 그리며 날아간 올가미는 이윽고 지그재그 모양으로 퍼지며 눈부신 황금빛으로 밤하늘을 밝혔다. 어떻게 대화가 이어지는지 알 수 없어서 고개를 갸웃거리던 스티브는 눈앞의 장관에 마치 거대한 크리스마스 트리를 보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탄성을 질렀다. 스킬라는 그 광경이 마침내 늙은 나무에 떨어진 신의 번개 같다고 생각했다.

<디오네(Dione)… 신(dios)의 딸… 여신…>

다이애나는 서서히 하강하는 올가미의 광채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자매들이 곧 여기로 오겠군요. 무리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제때 치료를 받을 수 있을 거예요.”

올가미는 올라갔던 길을 그대로 되짚어 낙하했다. 다이애나는 그것을 간결한 동작으로 척 받아서 허리춤에 갈무리했다.

“스티브, 가요.”

두 사람은 절벽 가장자리로 달려갔다. 다이애나가 팔을 내밀자, 스티브는 군말 없이 그녀의 품에 예의 자세로 안겼다. 그녀가 살짝 미소지으며 밑으로 뛰어내리려던 순간, 어느 익숙한 옛 시구가 그녀의 마음 속에서 애원하듯 울렸다.

<사지를 풀어놓는 에로스가 다시 나를 흔들고

달콤 씁쓸한 그 앞에 나는 무력하기만 하다.

아티스여, 당신은 나를 미워하는 마음에

사로잡혀, 안드로메다에게 달아나는구나.

어린 소녀여, 어린 소녀여, 너는 내게서 멀어져 가느냐?>

다이애나는 가슴이 아린 느낌이 들었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이윽고 두 사람의 모습이 절벽 밑으로 사라졌다.

 

스킬라는 고통스러웠다. 걷어차인 개가 낑낑대는 듯한 신음이 쉬지 않고 흘러나왔다. 이건 내 목소리가 아냐... 그녀는 양손으로 두 귀를 막았다. 그런다고 제 몸에서 울리는 짐승의 소리가 들리지 않을 리 없었다. 절대 위로받을 수 없는 고통도 있는 것이다. 괴물아, 죽어라... 제발 이대로 죽어라... 그러나 그때, 그녀의 마음을 가득 메운 고통이 부드럽게, 가만히 속삭였다.

<나는 당신에게 돌아올 겁니다. 반드시 다시 만날 거예요. 안녕히.>

스킬라는 그때 깨달았다. 그녀의 안에 자리한 카리브디스는 결코 사라질 리가 없었다. 그녀는 오래도록 그 따스한 고통에 매달릴 것이었기 때문에.


****


다이애나와 스티브는 고요 속에 출항했다. 동굴을 나선 하얀 배는 돛을 올리고 별들이 떠오르는 수평선을 향했다. 동력은 없었지만, 빠르고 편리한 배였다. 공기를 넣어 부풀린 드높은 돛은 바람을 가르며 추진력을 만들어냈고, 직관적인 조향 장치로 그 방향을 바꿀 수 있었다. 그리고 배의 날렵한 선체는 매끄럽게 물살을 가르며 바람으로부터 얻은 속도를 효과적으로 유지했다. 스티브는 다이애나와 함께 뱃고물 쪽에 걸터앉아 그녀가 능숙하게 배를 다루며 그 조종법에 대해 조곤조곤 설명해 주는 것을 취한 듯이 바라보며 듣고 있었다. 사실 그는 조종간보다는 그녀의 비스듬히 앉은 모습을 관찰하고, 그녀의 말보다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갑자기 일어서며 조종간을 그에게 맡겼을 때, 스티브는 무척 당황했다.

“다이애나, 아무리 조종이 쉬워도 이렇게 갑자기 나한테…”

“이 나침반을 참고해서 현재의 진로를 유지해 주기만 하면 돼요. 당신은 하늘을 나는 장치도 다루잖아요. 금방 요령을 익힐 거예요.”

“당신은 뭘 하려구요?”

다이애나는 올가미를 들어보였다.

“이걸로 돛의 모양을 바람에 맞게 조정해 볼게요. 가능한 빨리 여기 해역을 벗어나야 안심할 수 있어요.”

스티브가 하는 수 없다는 듯 조종간을 잡자, 다이애나는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주고는 돛대 쪽으로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스티브는 배의 방향이 틀어질 때마다 조종간을 조금씩 움직여 보았고, 배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관찰하면서 꽤 자신감을 회복했다. 다이애나는 그에게 미소를 보내며, 돛에 올가미를 가로세로로 휘감고 주의깊게 그 모양을 일그러뜨렸다. 배의 속도가 확연히 빨라지는 것에 감탄하며, 스티브는 긴 흑발을 휘날리며 일에 열중하고 있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전의 두근거리는 설렘 대신, 가슴이 꽉 죄어오는 느낌을 받았다.


“다이애나… 괜찮아요? 치료부터 해야 하는 건 아닌가요?”

“네?”

“아까 몸으로 막은 그 공격이… 상처가 꽤 깊은데…”

“아… 걱정 말아요, 스티브. 우리 아마존들에게 이 정도는 그냥 긁힌 생채기니까요. 앞으로 한 시간만 지나면 말끔히 나을 거예요.”

다시 그녀의 상처를 관찰한 스티브는 방금 전보다 그 깊이나 출혈 정도가 훨씬 덜한 것을 깨닫고 다시금 감탄했다. 하지만, 그 감탄을 표현하기 이전에, 그에겐 꼭 해야할 말이 있었다.

“다이애나, 미안해요. 나 때문에 당신이 얼마나 큰 희생을 치르고 있는 것인지… 정말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다이애나는 스티브를 돌아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 말아요, 스티브. 내가 옳다고 믿고,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니까. 그리고, 미안하고 고마운 건 나예요.”

“다이애나…”

“난 오늘… 그리 전사답지 못했어요. 그 때문에 하마터면 당신이 목숨을 잃을 뻔했죠. 내 어머니가 과거에 스킬라를 많이 약화시켜두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당신이 제때 용감하게 나서주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우리가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도 하고 싶지 않네요.”

스티브는 무언가 복받쳐오르는 느낌을 꾹 참았다. 다이애나가 말을 이었다.

“당신과 함께할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스티브.”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뱃전에 부딪히는 물결, 귓가에 울리는 바람, 돛의 낮은 웅웅거림, 그리고 무의식중에 배의 흔들림과 박자를 맞추며 동기화된 두 사람의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침묵을 깬 것은 스티브의 자못 쾌활한 목소리였다.

“네, ‘전사’라는 단어는 당신에게는 안 어울릴지도 모르겠네요.”

다이애나는 당황한 눈빛으로 스티브를 바라보았다. 스티브는 슬며시 시선을 피하며 말을 이었다.

“당신에겐 ‘전사(warrior)’보다는… ‘경이(wonder)’가 어울리니까.”

적도 바로 남쪽에서의 ‘늦겨울’ 밤공기는 약간 선선한 정도였지만, 스티브는 연신 손을 비볐다. 그는 암흑이 깔린 먼바다에 지대한 관심을 두고 바라보았다. 다이애나는 그런 스티브를 잠깐동안 멍하게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귓불이 뜨끈해지는 것을 느끼며 생각했다.

‘스티브는 밤눈이 어느 정도나 밝은 걸까?’

별자리와 바람과 해류에 의지해, 하얀 배는 별과 해가 떠오르는 곳으로, 남자들의 세상으로, 어센션 섬으로 향했다.


****


스킬라는 위축된 표정으로 눈앞의 키 큰 여성을 올려다보았다. 그 키다리 여성은 추상적인 독수리 문양의 금빛 흉갑, 철판과 가죽으로 된 치마, 그리고 무릎까지 오는 부츠로 완전 무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머리에는 투구 대신 날개 장식이 달린 왕관을, 어깨에는 육중한 대검을 메고 있었다. 그녀의 외모는 다이애나와 닮았지만, 그녀가 풍기는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스킬라를 내려다보는 그녀의 회색 눈동자는 머나먼 스칸디아의 얼어붙은 겨울 호수 같았다. 십수 명의 호위병들이 들고 있는 등불들이 그 눈동자에 반사되어, 거기서 싸늘한 불길이 타오르는 듯한 위압감을 주었다.

<여왕…>

<디오네의 짓인가?>

<그래…>

<왜 짐에게 미리 말하지 않았지?>

스킬라는 한기를 느꼈다. 본래 아름다운 님프였지만, 마녀 키르케의 흉계로 괴물이 되고 만 그녀는 지금보다도 훨씬 더 무시무시한 모습이었던 시절도 있었다. 그때는 아주 길다란 목과 강력한 턱, 세 줄로 돋아난 상어의 이빨을 지닌 여섯 개의 흉측한 머리들이 그녀의 옆구리에 돋아나 있었다. 저 트로이아의 정복자 오디세우스조차도 스킬라에게 저항할 엄두를 못 냈고, 그녀가 지키는 해협을 지나가기 위해 여섯 명의 부하들을 희생양으로 바쳤다. 바로 그 여섯 개의 머리가 모두 히폴리테의 대검에 잘려나갔다. 그녀를 아마존의 일원으로 만들기 위해. 그러나 오늘 스킬라는 아마존의 일원답지 않은 행동을 했다. 여왕은 또다시 검으로 그녀를 ‘교정’할까?

<…네 딸과 오랜만에 단둘이 만나 보고 싶었거든. 같은 동네 사는 친한 꼬마한테 그런 것도 못 하는 건가?>

<공사 구분을 못한 책임을 져야 할 거다.>

오직 명예와 의무로 이루어진 인간 같으니. 스킬라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삼켰다. 어쨌든 여왕은 그녀의 은인이고, 다이애나의 어머니였다.

<디오네는 어디 있나?>

스킬라의 시선을 따라, 히폴리테는 동쪽 수평선 근방을 바라보았다. 조금 밝아진 새벽 하늘 밑에서, 아마존 특유의 뛰어난 시력은 멀어져 가는 작은 돛단배의 모습을 분간할 수 있었다.

<디오네는 정말 멋졌어.>

스킬라는 히폴리테의 눈치를 보며, 자신이 본 다이애나의 모습을 전했다.

<금독수리로 장식된 붉은 토락스, 별이 수놓인 푸른 디아조마… 어디서 그렇게 잘 어울리는 갑옷을 구했는지.>

<디오네가… 테아의 갑옷을 입고 떠났나?>

<누구 갑옷이라고?>

히폴리테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은 스킬라가 이곳에 오기 전의 기억이었다. 오른쪽 가슴에 느껴지던 둔중한 통증. 희미해지는 시야로 보였던, 가장 아끼던 자매의 눈물 맺힌 푸른 눈. 그녀의 따스한 품. 아직도 귓가에 쟁쟁한 그녀의 외침. 부하들의 손에 이끌려 황망히 멀어지던 그녀의 뒷모습. 트로이아의 사절단이 숙연하게 바치던, 그녀와 그녀의 애마가 합장된 유골함. 오른쪽 가슴 부위가 무참히 파괴된 그녀의 피투성이 흉갑. 가장 유능한 아마존 장인들에게 수리를 맡긴 후, 왕실 무기고에 고이 보관한 채 누구도 사용하지 않았던 그녀의 갑옷. 그 진열장 어딘가에 새겨져 있는 이름. 나의 아우. 나의 전우. 나의 적수. 나의 테아. 펜테실레이아(Penthesileia). 그리고 그녀와 마치 쌍둥이처럼 닮은 나의 자랑스러운 딸, 디오네... 이것도 신들의 뜻이라면, 그녀에게 줄 작별 선물이 죄책감이어서는 안 된다. 한참 후에야 히폴리테는 스킬라를 돌아보았다. 스킬라는 여왕의 누그러진 눈빛에 오히려 당혹감을 느꼈다.

<이번에는… 네가 나 대신 다쳤구나.>

<…?>

여왕은 호위병들에게 명령했다.

“파수꾼 스킬라를 즉시 성소로 데려가 치료하라. 나머지 인원은 왕궁으로 귀환한다.”

군례를 올린 호위병들이 어명을 수행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여왕… 공사 구분은…?>

<사냥터지기 디오네의 임무는 오늘부터 왕실기록원의 비밀 해외주재원이다. 출국 직전 지인과의 쌍방 폭행 사건에 연루된 듯 하지만, 임무가 중하니 면책 특권을 적용하겠다.>

맥이 풀린 스킬라는 멍하니 히폴리테를 바라보았다. 여왕에게 이런 면이 있었나?


히폴리테는 다시 고개를 돌려 멀어져 가는 하얀 배를 바라보았다. 조금만 서두른다면, 그들이 ‘장벽’을 통과하기 전에 심부름꾼을 시켜 작별 선물 정도는 건넬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너는 나의 가장 소중한 사랑이었지. 하지만 오늘, 너는 나의 가장 깊은 슬픔(penthos)이구나.”

얼음 호수에는 격렬한 해빙이 일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