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눈을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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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결.


 나는 눈을 뜬다. 창밖에서 내리는 햇살은 천장에 비치고 형광등은 나의 등을 받치고 있다. 일어나서 바깥을 보니 별이 촘촘하다. 이 별, 저 별, 국자별, 꽁지별, 늑대별, 개밥바라기. 나는 그것들을 오밀조밀 손에 모아 실뜨기하듯이 펼쳐보고서 그 모양새에 웃고는 한다.


 그리고 나는 다시 잠에 든다.


 V. L. T. Z. A. B. P.


 480가지의 행로에서 실혈처럼 빠져나온 함수초 잎사귀들이 480의 제곱의 제곱, 110592000가지의 수를 알고리즘처럼 제시한다. 하지만 나는 그 수를 한 번 더 제곱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정신을 그려낼 수는 없으리라고 믿으리오.


 P. B. A.


 나의 뇌혈관에 벼락이 치달으며 소리를 낸다. 별이 되어 죽어라. 스스로 별이 되어 죽으라. 그런데 별이 무엇인교?


 별(세상엔 참 별별 사람이 다 있어요. 왜 그래, 저쪽 아낙네는 어젯밤 옆집 방앗간네 아들짝하고 정분이 나서 도랑에 몸을 던졌다지 뭐에요? 잘됐네 잘됐어. 육탈하여 백골도 안 남겠데. 잘됐네 잘됐어)이란 말하자면, 하늘(사람들은 하늘에 닿으려고들 노력한다. 하지만 기실 그들이 간과한 것은, 하늘은 무구하다는 사실이다)에 점점이 놓인 빛(보인다. 보인다. 바다가 보인다. 파랗고 검고 깊으며 노랗고 주홍빛으로 번뜩이는 저 바다가 보인다. 아가야, 나를 잡지 말아라. 나는 갈 테다. 고이고이 빚어둔 구상나무 나막신을 신고 저어 바다의 깊은 곳(마리아나 해구보다 더 깊은, 말하자면 우리가 딛고 선 이 광물의 구의 근원이라고는 못하겠지마는 적어도 인본이라 부를 수는 있는 것)에 들어가이 하여 바다에 잠길 테다)이다.


 그게 아닐 텐데.


 그는 눈을 떴다. 눈구멍은 멀거니 희뿌연 게 사람이 사는 게 아닌 것 같고 그게 무엇이든지 인간을 인간으로 종속시키는 어떠한 알고리듬-사 분의 삼 박으로 시작했던 박자가 어느새 휘모리장단이 되어 장구는 탕탕, 북은 쿵쿵, 덩덕덕쿵덕쿵덩기덕쿵더러러러덕덩쿵덩덕-을 잃은 제 싶다.


 그는 나이 스물하나의 청년 작가로서 키이보드보단 타자기를 좋아하였고 맑스보단 니쩨를 좋아하는, 말하자면 그의 실존이 그 자체로 실존하여 이 세상을 증거한다는 믿음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그는 말하자면, 이제는 실존하지 않는다.


 그것엔 많은 이유가 있다.


 첫째로는 이상을 잃었음이며, 둘째는 이상함이며, 셋째는 삶이 이상이기 때문이다.


 아아,


 이상(무엇보다 많거나 무엇보다 적거나 가장 큰 것이며 작은 것이기도 하고 하늘 위에 있거나 아래에 있거나(바벨의 기만을 재현하려는 시도는 모두 무위로 돌아가지만은 않았다고 말함이 분명 바람직하지 않다는 사실을 나는 암에도(신과 대화하려 했던 오만한 인간에게 내던져진 질문은 분명 삶 그 자체이며 비로소 우리는 죽음으로 답을 알게 될까?)가히 인간적인 치기를 발휘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다른 것은 몰라도 저 창천에 있는 것만은 아니라고 밖에, 그렇게 믿는 게 전부인 그것은).


 이상(오늘 아침에 대판 싸운 옆집 아주머니가 차에 치여 팔다리가 찢긴 채 죽었다. 그리고 해부학을 즐기던 이웃 청년은 오늘 뒷골목을 걷다가 멍하니 개복당하고 마침 열두 시가 넘어가 내일의 별을 보며 죽었다. 데면데면하던 동생은 사채업자한테 눈알이 뽑혀 죽었다. 친하던 형은 한 장의 유서도 없이 스스로 두개골을 조각냈다. 어머니는 저번 주에 암으로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훨씬 전에 수장당했다. 내 아내는 도랑에 몸을 던졌다. 아이는 축축한 어둠 속에서 메마른 빛을 기다리다가 깊푸른 어둠 속에 잠겼다).


 이상(진흙 덩어리 같은 삶을 살았다. 객의 발에 치이다 못해 비가 내릴 때면 스스로 으스러지고 마는 삶(이란 사실, 그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말이다. 누구든지 죽어. 너도, 나도, 내 아이도, 네 아이도, 우리가 낳지 않은 미래의 어떠한 우리도)이 스스럽다고 생각하던 차에 라일락 꽃잎이 춘풍에 흩날렸다. 나는 그것을 손에 잡고 조심스럽게 들여다보았다. 분홍(그 색채는 말하자면 절대적인 것이었다. RGB(붉은, 푸른, 푸른, 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주길 바라오)가 무엇인지도 뜯어낼 수 있으나, 그것은 말하자면 산 사람의 배를 헤집어서 내장을 꺼내고 정신 정육면체의 형태로 다시 맞추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색이었다).


 이상!


 그는 손톱을 물어뜯고, 머리를 쥐어뜯고, 귀를 잡아뜯고, 눈을 짓뜯으며 마구 외치기를, 목숨값을 받아내겠다고 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마지막 숨으로 두 명분의 제사를 지낼 수 있다는 사실은 모른 채로, 성대를 마구 헤집으며 혈루를 떨어트리고 최후에는 목마저 잃어 방바닥의 장판을 질척한 피로 물들이다가, 그제야 깨달은 것이 있었으니, 죽어 시랍이 된다면 제 딴에야 사죄할 수 있을 줄 알고, 새빨갛게 멀어버린 눈을 이리저리 부라리며 서고에서 책을 한 권 꺼내 펼치어, 첫 문장을 읽고서 무언가를 다짐한 듯, 머언 걸음으로 방을 떠나서 거실을 떠나서 현관을 떠나서 정처없이 양수투성이 나체만을 안고 걷다가 그제야 본인이 어디에 도착했는지 깨닫고, 바람에 말라붙은 핏자국으로 붉은 소금을 만들다가, 꽃방의 앞에 서서는 창에 진열된 감자꽃을 보고서, 이번에는 걸음을 옮겨 방앗간 앞에 도달하여, 방아 찧는 이 아무도 없고 고소한 참깨 냄새 아릿한 고추 냄새 이제 잔향도 남지 않아 오로지 멀건 먼지 내음만 남은 걸 느끼자, 그제야 목놓아, 기실 소리를 낼 목조차 없어 숨으로 까윽- 까윽- 끼윽- 하면서 울다가, 어느 도랑 앞에 닿아서야 무릎 꿇고 고해하였다.


 나는 죄인이오.


 내가 죄인이오.


 경찰 아재들, 나 좀 잡아가소.


 나 잡아가서 곤봉으로 머리를 패고


 수갑으로 목을 조르고


 폐에는 헛물만 가득 채워


 다시는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만드소.


 그리하면 나는 행복할 따름이니


 미안하오, 부인.


 미안하다, 아들아.


 L.


 그리고 그는 도랑에 빠져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