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발맞추어 걸어나갈 만한 곳 어딘가에 하나라도 있는가? 문 밖에서 걸음을 재촉하는 저 사내에게는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나에게 묻는다면 그 대답은 없음이라.


새벽녘에 눈이 떠진다. 원래라면 일어나지도 않았을 시간에, 비통에 잠긴 안구를 씻어내기 위해 일어선다. 집 안에는 화장실이나 욕실이랄 것이 없다. 괴성을 내지르는 고철 문을 지나 오른쪽으로 몇 번쯤 틀어야지만 비로소 옥색 무언가가 눈에 뵌다. 비록 심장의 파랑을 내뱉을 곳을 찾았건만 세찬 마파람 때문인지 아니면 눈에서 흘러나오는 이것 때문인지 살갗이 쓰라려 허망히 휘돌아 간다. 집에는 누가 있는가? 사람이라 부를 만한 것은 이제 없다. 웬 흉측한 무언가가 마룻바닥에 걸터앉아 있을 뿐. 지칭할 대명사든, 명사든 이제는 잊은 지 오래요, 더 보거나 들을 것 없이 앉아 있는 물체가 하나 집에 들어차 있다.


배는 언제나 고프다. 가스는 아직 잠기지는 않았다. 신기한 일일이다.냉장고 따위랄 것은 없다. 먹을 만한 것을 찾아보니, 아직 두부가 조금 남아 있다.


시간은 깨나 빠르다. 이곳에 들어온 지 며칠이 흘렀나? 아니, 단위를 연으로 바꿔야 겨우 셀 수 있겠군. 터럭은 잿빛으로 변해 간다. 타락은 굳어 있다. 이전에 하던 일들은 전부 다 어디로 내팽개치고 이리로 왔나? 아무도 모르는 곳, 그 어딘가에는 있으리라, 아니면 누군가가 이미 가져가고 없겠지. 후회는 들지 않는다.


그래도 거실 한중간에 서 있는 책더미가 있는 게 어디야, 개중에는 사진첩도 있다. 비록 대부분이 빛바랜 필름들이지만 어떤 사진이었는지는 대략적으로 유추할 수 있으리. 그러나 열지는 못하리라. 그 외에는 무엇이 있더라? 대부분의 책은 지난번의 침수 이후로 뇌가 녹아버린 듯이 읽을 수 있을 만한 글자 하나까지도 싸그리 뒤섞여 버렸다. 필름이 빛바랜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나? 하여튼간, 책더미에 남은 것들 모두 이제는 볼 필요 따위 전무한 것들뿐이다.


왜 이리로 들어왔는지에 대한 경위는 상세하지는 않으나 단편적으로, 드문드문 기억나는 것들은 있다. 그래도 생각치 않는 것이 더 좋지 않으려나, 아니지. 그래도 누군가에게는 이야기해야 할 말이었으니. 언젠가 업무에 혼선을 빚었던 적이 있었다. 누군가에게 책임을 물을 만한 일은 아니었으나, 사람이라는 족속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자신의 안위만을 위하여 타인은 가차없이 깎아내리는 것을 도리어 원하기도 하는 동물이라나. 희생양 하나가 필요했던 회사, 도움도 피해도 되지 않았던 누군가. 나는 그렇게 수십 해를 몸담고 있었던 회사에서 잘려 나갔다.


배 나온 늙은이를 환영할 곳 몇이나 될까? 아니나 다를까, 헤매는 방향은 어딘지도 모르겠고, 걸음하는 곳마다 대문이 걸어잠겨지는 광경을 수천 번이고 수만 번이고 보아왔다. 무언가를 하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앞으로도 옆으로도 가지를 못하고 뒷걸음질만을 주구장창 하기에 바빴다. 물론 모두의 심정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라 하지만, 또한 세상에 화를 내지 못할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냐 하지마는, 그럼에도 여전히 한소끔 끓어오르는 분노는 어찌해야 하는지 알 방도 따위 없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컨츄리 곡을 익히게 해준 기타 정도일까?


언젠가는 시도할 만한 일이다. 누군가는 시도할 만한 일이다. 어떻게든 나타났을 일이다. 그렇지 않을까? 벽지가 원래 어떤 색인지도 기억나지를 않는 퀴퀴한 방의 한구석에 이름 없는 병이 하나 놓여 있다. 냄새를 맡아 보니 무엇인지 대략 짐작은 간다. 우선 이건 챙겨야지.


다음으로 무엇이 있을까, 하고 찾다 보니 나타난 것은 부엌 구석진 곳에 꽃혀 있던 과도다. 세게도 박아 놨군. 장장 한 시간을 씨름해서 겨우 칼을 뽑아들었다. 위험하니 신문지에 싸 두는 것이 한결 나을 것이다.


태양의 백색을 눈에 담은 것이 몇 년만이더라? 공기가 달라 토사물을 볼 지경이다. 숨은 어느 정도 참아야겠다. 채도가 달라 바닥에 머리를 찧어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얼마 정도는 길바닥에 걸터앉아 있는 한이 있더라도 숨을 골라야겠다. 눈을 잠깐만 감아 보자. 즐거웠던 기억은, 소망했던 추억은 뇌내에서 비산하여 스러져 간다. 두부가 아파 온다.


사람을 만나는 것도 오래간만이다. 어쩌면 나는 저 안에서 그리 오래 있지는 않은 것만도 같다. 그렇다면 지금 할 일은 무엇인가? 병의 뚜껑을 열고, 황산을 다리에 들이붓는다. 사람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쓰러진다. 정자세로 눕혀 준 뒤 왼쪽 옆구리에 과도를 가져다 댄다. 45도보다는 조금 높게, 15cm만. 그러고서 몇 분만 기다린다.


집으로 돌아왔다. 정겹다고는 못 하겠군. 쓰레기 냄새가 진동한다. 그러고 보니 후두부는 남겨 놨었지, 오늘은 썩어가는 것이라도 삼켜야 하는 처지인가, 비통함에 눈가는 아려 온다.